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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너무 현실적인 아포칼립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완결

감괴
작품등록일 :
2023.02.17 10:53
최근연재일 :
2023.04.26 13:51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8,401
추천수 :
105
글자수 :
241,033

작성
23.03.0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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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추천
3
글자
12쪽

위치(witch)(5)

DUMMY

숨이 급격하게 가빠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정확히 얼마 동안 도망친 건지 잘 모르겠다.

긴장과 공포 때문인지 시간 관념이 여느 때보다 흐릿해진 걸까.


하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속에서도 머릿속의 어떤 차가운 부분에선 끊임없이 상황의 타개책을 제멋대로 궁리하고 있었다.

가끔은 이런 이성적인 면이 무서울 정도다.


처음의 한 발을 쐈을 때 알아낸 사실은 오 미터 정도의 거리에서는 녀석에게 탄환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

황조롱이는 자동차도 부술 위력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녀석의 피부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걸까.

그야말로 괴물이다.


하긴, 실제로 녀석이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니 불확실한 추측은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샷건은 관통력은 약하지만 저지력면에서는 비교 불가능한 최고의 무기다.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지만 그 묵직한 쇠구슬은 분명 녀석의 몸에 박혔었다.

어쩌면 이미 내부를 상당히 망가뜨려 놓은 것은 아닐까.


잠시 고개를 돌려 뒤쫓아오는 녀석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 희망적인 가설은 곧바로 폐기해버렸다.

어느 정도 피해를 입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녀석은 적어도 나 하나쯤은 충분히 찢어 발길 정도로 활기차 보였다.


까악- 깍-


생각에 잠겨있자 다시금 귀찮은 녀석들이 들러 붙기 시작했다.

까마귀들은 계속해서 주위를 날아다니며 내가 달리는 와중에 빈틈이 생긴다 싶으면 어김없이 덮쳐오고 있었다.


게다가 낮에 한 번 샷건의 맛을 본 후에 학습을 한 것인지 이제 한 곳에 뭉치지 않고 네 다섯 마리 씩 공격 조를 만들어서 더욱 까다롭다.

원래도 까마귀는 조류 중 지능이 가장 높은 축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더럽게 영악하다.


아까운 탄환을 녀석들에게 낭비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짧은 나이프를 휘둘러보지만 좁은 시야와 재빠른 녀석들의 움직임 때문에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괴물 같은 녀석이 이전보다 빠르게 움직이긴 해도 인간이 뛰는만큼 빠르지는 않다는 것.

녀석은 관절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불안정하게 비틀거리면서 쫓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녀석의 시야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놈이 정확하게 내 위치를 파악하고 움직인다는 점이다.

어떤 메커니즘인지는 알 수 없지만 머리 위의 까마귀들이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이제 확실해졌다.


이런 식의 추격전에서 한쪽만 일방적으로 위치가 드러나는 것은 너무 불리하다.

이쪽은 엄연히 지구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다.

저 괴물처럼 영원히 지치지 않고서 추격전을 벌일 수는 없다.


계속해서 신경을 건드는 까마귀들과 등 뒤에서 녀석이 계속해서 쫓아온다는 압박감.

그리고 그런 긴장감 속에서 끊임없이 녀석의 위치를 머릿속에 그려야 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내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달리던 도중 문득 바닥에 붉은 빛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석양이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이 정도라면 처음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에 눈 앞에 보이는 좁은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일반적인 주택가의 골목이 아닌 상점가 사이에 난 좁은 통로였다.

겨우 팔을 벌릴만한 공간이니 까마귀들이 마음대로 활개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좌우가 막혀 있으니 녀석의 움직임 또한 단조로워 지겠지.


그대로 골목의 끝까지 달려간 후에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폐에 가능한 많은 공기를 집어넣는다.

마지막에 전력질주했으니 일 분 정도는 거리가 벌어졌을까.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서 최대한 오차 범위를 넓게 잡아도 삼십 초 정도는 벌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머리를 덮고 있는 통 안의 공기가 축축함을 넘어서 끈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끈적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으니 기분이 상당히 더러웠다.

마치 어항 속 물고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지만 아직 까마귀들이 있으니 벗을 수는 없다.


예상한 시간이 경과하자 골목의 반대편에서 녀석이 등장했다.


꽤 오랜 시간 추격전을 벌였음에도 녀석은 전혀 지치지 않은 것인지 처음과 같은 속도로 여지없이 거리를 좁혀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처럼 도망가지 않고 총을 움켜쥐고 서서 가만히 놈을 응시했다.


여기서 해치워야 한다.

내가 이 좁은 골목으로 들어온 것과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니까.

차분하게 녀석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녀석이 골목의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총구를 들어 올리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


촤라락-


녀석의 발치에 있던 다량의 로프 다발들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를 내며 강하게 잡아 당겨졌다.

앞으로 달리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발목이 걸리자 녀석은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운이 좋게도 넘어지는 과정에서 발버둥 친 덕분에 녀석의 하체 역시 일정 부분 로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멋진 함정이다.

역시 내 동료는 최고의 엔지니어라고 불릴만하다.

돌아가면 잔뜩 칭찬해주마.


"빨리 해 고트! 오래 못 버티니까!"


곧이어 골목의 한 쪽에 숨어있던 황조롱이가 소리쳤다.

도르래 같은 것에 매달려서 온 몸의 체중을 다 싣고 있지만 명백히 버거워 보이는 모습이다.


그래, 황조롱이가 애써 만들어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재빨리 움직여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녀석에게 다가갔다.

바둥거리는 녀석의 머리통을 정확히 조준한 뒤 망설임 없이 샷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팡-!


"끼야아아-!"


죽지 않는다.

곧바로 탄환이 없는 샷건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이번에는 허리 춤의 더블 배럴을 꺼내 들었다.


탕- 탕-


처음과 같은 곳에 두 발을 먹였다.

버석- 하는 괴상한 소리가 나더니 마침내 녀석이 움직임을 멈췄다.

주변을 날아다니던 까마귀들도 어느샌가 조용해진 탓에 골목에는 기묘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죽은 걸까.

바닥의 샷건을 다시 집어 들고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녀석이 돌연 팔을 앞으로 크게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찌직거리며 상의의 앞 부분이 손톱에 흉측하게 찢겨나간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려 찢겨진 상의를 내려다봤다.


"고트!"


황조롱이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식은땀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면 찢기는 것은 내 뱃가죽이었을 것이다.

이 무슨 멍청한 행동일까.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방심해버렸다.

이건 황조롱이가 목숨을 걸고 만들어준 기회인데.


"끼야아아-!"


녀석이 다시 격렬하게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무작정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하체에 묶인 밧줄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녀석은 그 로프들을 잡아 채더니 당기거나 끊어보려 애를 쓰기 시작했다.

만약 산악용 로프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끊겨버렸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로프에 매달려 있는 황조롱이의 몸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모습에 지금 얼마나 강한 힘이 로프에 가해져 있는지 예상할 수 있다.


샷건과 권총은 이미 두 발씩 쏘아버렸다.

총 네 번의 기회가 허무하게 끝난 것이다.

그렇다고 버둥거리는 녀석에게 발길질을 해 대거나 나이프를 휘두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일견 끝장나버린 것 같은 상황이지만 나는 여전히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녀석이 지독한 괴물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니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거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았다.

네가 괴물이라면 이쪽 역시 최고의 플레이어다.

너 같은 녀석들을 수도 없이 사냥해왔다는 말이다.


뒷걸음질로 녀석과의 거리를 벌리면서 골목의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소리쳤다.


"성아씨!"


그러자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옆의 담벼락 위로 임성아가 불쑥 나타났다.

임성아의 양 손에는 커다란 하얀 통이 들려 있었는데, 베란다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던 바로 그 통이다.


얼핏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통을 들고 담벼락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에 조금 불안해진다.

하지만 임성아는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낑낑거리면서도 정확하게 녀석의 머리 위에서 통을 기울인다.


콸콸콸-


그래, 현실은 게임과 달리 즉각적인 보상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한 가지 똑같은 점은 노력은 결국 배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평소에 죽을 힘을 다해 근력 트레이닝을 했던 것은 결국 헛되지 않았다.


지나치게 많은 힘을 쓰고 있는지 임성아의 얼굴이 시뻘게지고 흉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임성아는 결국 통에 들어있던 마지막 한방울까지 전부 비워냈다.


바닥에 묶인 녀석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로프를 붙잡고 허둥대고 있었다.

놈을 잔뜩 적시고 있는 투명하고 미끄러운 액체에서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멋지게 작전을 완수한 후 임성아는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아마 지금쯤 황조롱이와 함께 꽁무니 빠지게 골목을 벗어나고 있겠지.


착- 착-


주머니에서 꺼낸 지포라이터에 차분히 불을 붙였다.


"너는 상대를 잘못 골랐어."


바닥에서 밍기적대고 있는 녀석에게 라이터를 던진 후 곧장 몸을 돌려 전력으로 질주했다.


"끼에에엑-! 끼야아-!"


곧 화르륵하고 불이 붙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비명 소리.

그리고 단백질이 타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냄새가 골목 가득 퍼졌다.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듯한 뜨거운 열기를 등 쪽에서 느끼며 정신없이 뛰었다.


잠시 후 좁은 골목을 완전히 벗어난 뒤 몸을 돌리고 녀석을 바라봤다.

녀석이 온 몸에 불이 붙어 비명을 지르면서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종내에는 결국 털썩- 하는 맥없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은 꺼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녀석을 태우고 있었다.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 볼 여유가 생겼다.

이제 더 이상 까마귀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드디어 갑갑했던 보호구를 벗었다.

전체가 땀에 푹 절어 있던 얼굴에 찬 바람이 한 줄기 스쳐지나가자 순식간에 상쾌한 기분이 든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인지 주변은 이미 꽤 어둑해져 있었고, 거기에 석양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붉은 빛을 거리에 뿌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불타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저 편에서 두 사람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잠시 후 한 자리에 모인 우리 세 사람은 타오르는 녀석 앞에서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임성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고, 황은채는 벅찬 만족감과 함께 가벼운 미소를 내비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때론 어떤 언어를 말하는 것보다 단지 눈빛을 나누는 것으로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법이다.

순간 알 수 없는 낯간지럽고 뭉클한 감정이 올라와서 짐짓 무심하게 아지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죠."


그 맥없는 말투에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한 번 마주 보더니 이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붙었다.

석양이 골목을 비추는 가운데 그렇게 우리는 아지트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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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거미(5) 23.04.10 99 2 12쪽
37 거미(4) 23.04.05 112 1 12쪽
36 거미(3) 23.03.30 111 1 13쪽
35 거미(2) 23.03.30 154 1 12쪽
34 거미 23.03.29 134 1 11쪽
33 참사랑교회(10) 23.03.27 134 1 20쪽
32 참사랑교회(9) 23.03.23 128 1 11쪽
31 참사랑교회(8) 23.03.22 130 1 13쪽
30 참사랑교회(7) 23.03.21 136 2 12쪽
29 참사랑교회(6) 23.03.20 134 2 12쪽
28 참사랑교회(5) 23.03.18 139 2 12쪽
27 참사랑교회(4) 23.03.15 141 2 11쪽
26 참사랑교회(3) 23.03.14 152 1 11쪽
25 참사랑교회(2) 23.03.12 157 3 12쪽
24 참사랑교회 23.03.09 178 2 13쪽
» 위치(witch)(5) 23.03.08 165 3 12쪽
22 위치(witch)(4) 23.03.08 161 2 11쪽
21 위치(witch)(3) 23.03.07 184 2 13쪽
20 위치(witch)(2) 23.03.03 189 3 13쪽
19 위치(witch) 23.03.02 196 2 16쪽
18 아포칼립스에 무법자가 되었다(6) 23.03.01 201 2 12쪽
17 아포칼립스에 무법자가 되었다(5) 23.02.28 199 2 13쪽
16 아포칼립스에 무법자가 되었다(4) 23.02.26 202 3 14쪽
15 아포칼립스에 무법자가 되었다(3) 23.02.24 209 3 11쪽
14 아포칼립스에 무법자가 되었다(2) 23.02.23 205 3 14쪽
13 아포칼립스에 무법자가 되었다. 23.02.22 219 4 12쪽
12 아포칼립스에 편의점에 갇히게 되었다(4) 23.02.21 210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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