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연재수 :
962 회
조회수 :
4,121,537
추천수 :
126,877
글자수 :
10,687,409

작성
23.12.15 09:05
조회
2,124
추천
104
글자
23쪽

노총각 탈출이구나!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과거로 돌아온 후로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다.

처음 쓸 때는 문장 안에 혹은 문장 사이에 불쑥 떠오르는 이전 삶의 기억을 적어놓았다.

당시에는 나름 절실했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유치하고 그렇게 허술할 수 없다.

바빠서 쓸 틈이 없더라도 그 날 있었던 가장 인상적인 사건 하나와 기분을 담은 글귀 하나 정도는 꼭 남겨두었다.

가끔 일기를 들춰보면 하루하루 숨 가쁜 나날들이었다.

한편으로는 좀 더 분발했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들고.


“생활이 뭐랄까... 단조로우시군요?”


여러 나라 방송국에서 류지호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거나 하고 있다.

막상 촬영팀이 류지호를 쫒아 다녀 보면 그들이 생각했던 ‘투자의 귀재‘니 ’미스터 할리우드‘니 하는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곤 한다.

그들이 상상한 슈퍼리치는 오전 8~9시 정도에 기상해서 최고급 식단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계열사 사장을 자택으로 불러 브리핑 받으면서 중요 사무 결재를 하고, 저녁은 취미활동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저녁에는 지인들과 함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산해진미로 식사하고, 부촌에 사는 유명 인사들이 주최하는 홈파티에 초대되거나 자신의 호화 주택에서 새벽까지 파티를 즐기고 취침하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휴가 때마다 전용기를 타고 전 세계를 돌며 관광과 쇼핑을 하거나 개인 소유 휴양지에서 사생활 침해를 받지 않고 즐긴다거나.

만나고 다니는 사람들이 온통 유명인들 이라거나.

대체로 서구권 방송국에서는 그런 요지의 구성안을 가지고 온다.

반면에 한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 국가 다큐먼터리팀들은 하루 15시간 이상 일에만 파묻혀 쉴 틈도 없이 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영양제와 피로회복제를 먹어가면서 잠도 적게 자면서 온갖 고민에 일만 죽어라 하는 삶일 것이라 예상하고 구성안을 써온다.

다 틀렸다.

모두가 TV프로그램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류지호의 하루는 한국의 건물임대업자처럼 여유롭지도 않고, 대기업 CEO처럼 하루하루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바쁘게 살지도 않는다.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한 업무량을 처리하는 정도다.

물론 현재가 그렇단 거다.

결혼 전의 류지호는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스스로 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에 집착하는 상태를 일중독이라 한다.

일중독자는 강박적으로 일하면서 삶의 다른 부분은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에 몰두하며 쾌감을 느끼기도 하는 이들은 일하지 않는 동안에도 일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과거로 돌아온 류지호가 그랬다.

미국의 심리학자 웨인 오우츠가 1971년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일중독(workahol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끊임없이 일하려는 내적 충동과 지나치게 일에 집착하는 습성으로 건강, 대인관계, 행복감, 사회인으로서의 정상적 기능에 장애와 마찰을 유발하는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이후로 전문가들이 열의를 가지고 자기 일에 열중하는 직무몰입과 일중독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둘은 일에 몰두하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점은 닮았다.

그러나 강박 여부, 일하지 않는 때의 심리 상태 등에 차이가 있다.

전문가들은 일중독을 치료의 대상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 장인인 제임스 파커가 워커홀릭 진단을 받았다.

때문에 G&P에서 권한을 늘려준다고 했을 때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이다.

딸을 시집보낸 제임스 파커는 그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일만하던 업무기계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결혼하길 잘 했어. 이제 좀 사는 것 같아.”


류지호가 만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레오나가 곧바로 반박했다.


“아휴~ 아직 멀었거든!”

“업무를 얼마나 많이 줄였는데.”

“전에는 지속적인 일중독자였다면, 지금은 폭식적인 일중독자 같단 말이야.”


결혼 전의 류지호가 낮과 밤, 평일과 휴일을 구분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일하는 유형이었다면, 현재는 평소에는 한가하게 보내다가 뭔가 닥치면 탄력을 받아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난 동의할 수 없어.”

“며칠 노는 것 같더니, 다시 일을 만들어서 하고 있잖아.”

“대신 천천히 신중하고 계획적으로 업무를 보고 있다고. 즐기는 일중독자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에휴! 일중독에 즐기는 것 따위가 무슨 소용이람.....”


류지호가 마치 큰 결심을 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장 유럽으로 떠날까?”

“....?”

“지난번에 이탈리아, 스페인의 유명한 곳들을 둘러보지 못해 아쉬워했잖아. 한 달 정도 넉넉하게 일정을 잡아서 유럽에서 지내고 오자.”

“정말? 혹시....”


레오나가 못 믿겠다는 듯 눈을 흘겼다.

해외 출장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어차피 친구 녀석들하고 신혼여행을 갈 생각이었으니까. 이참에 유럽에서 한 달 정도 놀다 오지 뭐.”

“7월에 캘리포니아 변호사 자격시험에 봐야 하는데.....”

“욕심도 많아. 내년 2월에 도전해도 되잖아.”


뉴욕주 변호사 자격 취득만으로 대견한 거다.

굳이 어렵기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주 시험을 봐야 할 이유는 없었다.

류지호가 심각한 표정의 레오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허니....”


레오나가 품에 안겨왔다.

류지호가 황금물결처럼 찰랑이는 레오나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며 물었다.


“본격적으로 변호사 생활 시작하게 되면 의무적으로 무료 법률상담을 해야 하지 않아?”

“1년에 최소 50시간 제공하는 것이 ABA(미국변호사협회)의 규정이야.”

“올해는 무료 법률상담을 하면서 로펌 입사를 준비하는 것이 어떨까?”

“아프리카로 가져갈 의약품과 닭을 구매하는 일도 꽤나 만만치 않긴 해.”


부부는 7월에 개최되는 남아공 평화공원 개장행사 초대를 받은 상황이다.

아프리카 대륙을 방문하는 김에 몇 개 국가를 돌아볼 생각이다.

연예계 인사로는 맥클로닌 윌리엄스 부부와 샬롯 테론이 함께 하기로 했다.

특히 샬롯 테론은 고향인 남아공에 막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스터 할리우드 및 맥클로닌 윌리엄스와 함께 행사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아직 A-List 배우는 아니다.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행사에서 미스터 할리우드, 맥클로닌 윌리엄스와 함께 하는 모습만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다.

그녀는 촬영스케줄까지 조정하는 열의를 보이며 평화공원 개장식에 참석하기로 약속했다.

류지호는 보답차원에서 두 사람을 위한 특별 전용기와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애초에 캘리포니아주 시험까지 치르는 건 무리였네.”

“진짜 <Frank Castle> 개봉 전까지 쉬려고?”

“친구들 결혼식 때문에 한국도 다녀와야 하고, 맨유 시즌 마지막 홈경기도 관람하기로 했고, 영국의 해리포터 투어프로그램도 확인해봐야 할 것 같고... 유럽에 별장을 지을까도 생각 중이고.”

“....별장?”

“레오나... 우린 부자야. 그것도 슈퍼리치 부부지.”

“누가 아니래?”

“별장을 어떤 나라에 지을 것인지 아니면 구입해 리모델링을 할지, 그리고 자녀들은 어느 사립학교에 보낼지에 대해 의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대화란 거야.”

“스펙을 쌓는 것에 열중하지 않아도 된다, 뭐 그런 말?”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할 일이 있고, 다른 누군가가 할 일이 또 있는 거라고 생각해. 이미 허니는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것으로 능력은 충분히 증명했어. 보여주기 위한 스펙은 더는 필요 없다는 말이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야.”

“알아. 만에 하나라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하지 말라는 뜻이었어.”


한국은 변호사 자체가 비교적 귀한(?) 편이다.

반면에 미국은 첩첩산중이나 인디언 보호구역 같은 시골 빼고 어지간한 도시에 변호사가 넘쳐난다.

로펌 소속이 아닌 개인 변호사는 한국의 공인중개사 혹은 법무사 정도 수준과 비슷하다.

그렇게 높은 지위도 아니다.

심지어 사무실 임대료를 겨우 낼 정도의 변호사가 비일비재하다.

뉴욕주, 캘리포니아주 등 메이저 주들에는 과장 좀 보태 발에 치이는 직업이 변호사다.

대형 로펌에 입사하는 1%의 경우가 아니면 큰돈은 못 만진다.

어디 가서 사기꾼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미국 TV시리즈를 보다보면 변호사들이 궁상맞게 그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과장 아니다.

변호사도 많고 경쟁도 워낙 치열하다보니,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을 보이는 업계가 법률서비스업계다.

레오나는 재벌집 자녀이자 억만장자를 남편으로 두고 있더라도 그녀 스스로 자존심과 긍지가 있는 상류사회 엘리트다.

명문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뉴욕주 변호사 라이선스를 가지고 대형 로펌에 입사도 못한 채 남편 그늘에서 안주해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수치스러운 것도 없다.

스스로 그런 삶을 용납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엄마는 내 나이에 이미 세 개의 변호사 라이선스를 얻었어.”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해?”

“캐나다 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했대.”

“엄마만큼 하는 것이 목표야?”

“아니. 그 이상.”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던 류지호가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윽.


레오나가 자신의 발등을 지그시 밟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변호사 시험이 엄청 쉬웠나 보네... 하하.”


류지호를 지그시 째려봐준 레오나가 좀 더 깊숙이 류지호 품으로 파고들었다.


“....”


사실 류지호는 내년 이후 미국 법조서비스업계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금융위기가 찾아온다면 그 여파가 법조계에도 미칠 수밖에 없다.

지난 1987년 블랙먼데이 시기 장모 캐서린의 로펌이 한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류지호다.

이번에 찾아올 금융위기의 파괴력은 그때 이상이다.

대형 로펌, 정부 등에서 일하던 숙련된 변호사도 해고당하는 마당에, 갓 졸업한 변호사를 고용할 로펌이 있을 리가 없다.

미국은 200여 곳이 넘는 로스쿨에서 매년 수만 명의 예비 변호사를 내놓고 있다.

수요를 까마득히 초과한 지 오래다.

일반적으로 로펌은 경기가 침체될 때 잘나간다.

기업들이 파산하거나 인수·합병(M&A)이 활발해지면 그 과정에서 법률자문 등으로 커다란 수익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 예를 한국의 중견 로펌들에서 찾을 수 있다.

IMF 직후인 1999년을 고비로 한국의 로펌들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류지호와 인연이 깊은 신효정의 다온로펌이 대표적이다.

불황의 늪에 깊숙이 빠지게 되면 로펌의 매출도 급감하게 된다.

불황을 대비하기 위해 기업들이 법무비용을 줄이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긴축경영을 하면서 계약서 체결과 정부 인허가, 대리점·자회사 설립 등과 관련된 통상적 자문비용도 줄어든다.

법률자문을 받는 기업들이 수수료 인하를 요구하거나 수임료·고문료 지급을 미루는 경우도 많아지게 된다.

류지호는 <Frank Castle>과 최종편 <Hell's kitchen>의 각본을 썼다.

영화 속에서 교통 위반 벌칙금 고지서를 건당 100불 이하에 변호해 준다는 현수막이 종종 등장한다.

금융위기 이후 벌어질 미국 사회의 일면을 풍자하는 장면이다.

개인 변호사들의 몰락까지 가져올 정도로 심각하다는 경고가 담겨있다.

한편 로펌들은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는 초기 이익을 보기도 한다.

대대적 기업 사정의 반사이익을 보게 된다.

정권의 타깃이 된 기업들의 법률 자문이 크게 늘기 때문이다.

물론 애송이 변호사에겐 해당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LA가 법률서비스 수요가 넘쳐나긴 하지만....’


레오나 입장에서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이 절실할 수도 있다.

남편이 번 돈으로 사치나 부리고, 거액의 이혼 위자료를 탐하는 골빈 금발의 여성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기에.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의 힘으로 빛나고 싶어 한다.

레오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아내가 아니라 법률가로서 내게 조언이 필요할 때 조언하는 것도 전문성을 발휘하는 거야.”

"......"

"꼭 법률적인 업무여할 필요도 없고.“

“재단 일을 하는 것이 마치 얼굴마담 노릇하는 것 같단 말이야.”

“멜린다 여사는 게이츠재단의 대소사를 주도적으로 의사결정하고 있는데?”


류지호와 레오나 부부도 Jiho & Leona foundation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부부가 공동 의장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류지호는 거의 관여를 하지 않고 있다.

결국 레오나가 주도적으로 재단을 운영해야 한다.


“뉴욕에 사는 내 친구 중에... 새 옷을 사면 보모가 볼까 봐서 가격표를 바로 떼어버리는 친구가 있어. 맨해튼의 고급 제과점에서 사 온 빵에 붙은 가격표까지 바로 떼어버린대. 비싼 가구를 들이면서도 인테리어 회사 직원이나 가정부가 보지 못하도록 가격표를 꼭 떼어달라고 부탁한다고 하더라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미국 부자들이 무조건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뽐내는 것에 열중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졸부들도 무척 많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도 검소한 부자를 좋아한다.

스스로 자신을 부자로 정의하는 데 주저하는 부자도 많다.

한때 류지호도 그랬다.

마치 보통사람인 것처럼 대중들이 ‘부의 낙인’을 찍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었다.

때문에 윌리엄 파커에게 자주 혼났다.

이제는 과거처럼 행동하지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슈퍼리치임이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부(富)에 대해서 초월하기도 했고.


“그녀는 라틴계 이민자인 보모와 자신 간의 경제적 불평등에 불편함을 느끼나 봐.”

“신흥부자들이 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긴 해. 자신을 열심히 일하고 신중하게 소비하는 ‘보통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과시적이고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며 뻔뻔한 전형적인 부자와 거리를 두려고 하지.”


벨에어에 사는 젊은 부자들 일부도 그런 모습을 보이곤 한다.


“가격표를 가린다고 특권이 가려질까? 보모가 고급 빵의 가격을 모른다고 해서 계급 간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할까? 가격표를 가리는 행위는 부유층이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더는 것에 도움이 될 뿐이겠지. 내가 볼 때는 불평등이라는 주제를 터놓고 말하기 어려운 것, 그러므로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그런 태도가 더 기여하는 것 같아.”

“수잔 부부의 연봉은 50만 달러에 가깝고, 몇 백만 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거든. 근데 수잔은 6달러짜리 빵을 사 먹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불경스럽다고 표현하곤 하더라고.”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어찌 보면 위선이다.

미국에서는 부자들이 맹목적으로 욕을 얻어먹진 않는다.

게다가 부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합리적으로 소비하는지, 기부는 하는지 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겉으로 평가될 수 있는 어떤 기준들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기준들로 부유층에 대해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다.

류지호는 그런 풍토가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덮어버린다고 의심하고 있다.

류지호의 영화 속에서 그런 태도가 은연중에 드러나곤 한다.


“그녀는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누구보다 잘 아니까.”

“미국 엘리트들의 탐욕과 한심한 수준의 윤리의식에 대해?”

“응.”

“언젠가 세상에 다 드러날까 봐 무서운 것일까?”

“높은 곳에 서 있을 때 느끼는 공포가 추락 때문이 아니란 거 알아?”

“그럼 뭔데?”

“사실은 자기 스스로가 뛰어 내릴지 모른다는 그 기분이 공포의 실체래.”

“달링은 고소공포증 있어?”

“없을 걸?”


앞으로 형편없이 추락한다고 해도 이전 삶과 비교해 보면 가장 최고정점의 행복한 시점이다.

류지호는 추락에 대한 공포는커녕 걱정조차 없다.


“.......!”


류지호는 더는 복잡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레오나를 꼬옥 껴안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즐겼다.

일명 ‘레만사태‘로 방점을 찍게 될 미국발 금융위기는 미국의 부자와 엘리트들의 탐욕과 윤리의식 부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된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막대한 부의 일부를 사회로 돌릴 것으로 믿었던 부자와 엘리트들의 민낯이 만천하에 까발려지게 된다.

물론 금융권 중심으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그를 통해 미국 대중들의 부자에 대한 동경과 존경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억만장자들의 기부서약이니 부자세 같은 것들이 연이어 쏟아진다.

언제나 그렇듯 그때뿐이다.


-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분명 좋은 말이다.

두 번의 인생을 살고 있는 류지호가 뼈에 사무치게 느끼는 부분이다.

한편으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하는 개소리란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돈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시간도 없기에.

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시간도 함께 가지고 있고.


❉ ❉ ❉


(주)새만금개발유한회사.

가온그룹 컨소시엄(98%), 전라북도(1%), 국토부(1%)가 설립한 새만금개발 전담법인이다.

서울시 면적의 2/3, 여의도의 140배에 달하는 용지 중에서 절반이 조금 넘는 면적에 관광레저휴양구역, 국제협력 및 신도시구역, 미래첨단산업구역을 개발할 예정이다.

정부가 만든 새만금개발청도 따로 존재한다.

나머지 절반의 간척지에 농업생명농지, 산업연구단지, 신공항 및 항만, 고군산도 관광단지 등을 개발할 예정이다.

이 시기까지 2조 원 상당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2030년까지 총사업비 31조 원이 소요될 예정이다.

단군이래 최대 개발사업이라는 새만금개발사업은 가온그룹이 사운을 걸고 달려들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다.

따라서 사업의 총책임자로 류지호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전략기획실장 출신 문지열이 임명되었다.

한때 오너의 복심이라 불리던 황재정이 문지열을 보좌하고 있다.

무주리조트에서 지내던 황재정은 군산에 숙소를 마련해 군산산업단지에 마련되어 있는 (주)새만금개발유한회사 사옥으로 출근하고 있다.

업무 특성상 서울 출장이 잦았는데, 직장이 바뀐 이후로도 종종 무주리조트를 찾았다.

비수기의 무주 리조트는 썰렁했다.

황재정은 전에 일하던 사무실로 들어갔다.


벌컥.


황재정의 갑작스런 출현에 깜짝 놀란 윤정혜가 물었다.


"전화 한 통도 없이 갑자기 웬 일이에요?"

"내가 못 올 때를 왔나? 그게 뭔 말이야?"

"소식도 없이 나타났으니 그렇잖아요. 점심은 요? 커피 마실래요?"


황재정은 빠르게 재잘대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하다가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리고 대답했다.


"정혜씨는?"


식사를 했느냐는 물음이었다.


"보고 있잖아요? 빵 한 조각에 사과 하나."

"그게 점심이야?"

"헤헤.... 살찔까 봐서."


아닌 게 아니라, 윤정혜는 약간 통통한 체형이다.


"지금이 보기 딱 좋아."


황재정의 칭찬에 그녀가 반색을 했다.


"정말요?"

"정말이야. 내가 빈말 하는 거 봤어?“

“호호. 그래도 웨딩드레스 입으려면 식단 조절해야 해요.”

“다이어트 같은 거 하지 마. 몸 축나.”

“네. 호호.”


윤정혜는 뭐가 그리 좋은지 말끝마다 깔깔거렸다.

당연히 좋을 수밖에.

자신의 상관이었던 남자와 눈이 맞아버렸다.

마침내 황재정과 혼례를 치를 예정이다.

지방에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했더니, 8살 연하의 부하직원과 사내연애를 해온 황재정.

짚신도 짝이 있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한다.

참고로 실제 짚신에는 짝이 없다.

짚신은 만든 이가 대충 자기 발에 대보고 만드는 것이라서, 길이도 일정하지 않고, 좌우 구분도 없다.

그래서 옛날 장터에서 좌우 구분이 없이 여러 켤레를 뒤섞어 놓고 팔았다.

사는 사람이 대충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짝을 맞추어 신으면 되는 것이다.

애초에 본인이 직접 좌우 구분을 해서 만들어 신는다면 제 짝이 있겠지만, 적어도 장터에서 파는 짚신에는 짝이 없다.

제 마음대로 짝을 맞춰서 신으면 짝이 되는 것이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은 운명론적 인연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짝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원래 정해진 짝이 없으니 본인이 짝을 만들어 짝이라고 생각하면 짝이 되는 것이다.

황재정이 그랬던 것처럼.


“마케팅팀장은 점심 먹으러 갔나?"

"연락 할까요?"

"내버려 둬."

"그래도 그게 아니죠. 빨리 식사하고 들어오라 할게요."

"알아서 해."


황재정은 예비신부의 수다에 항복을 선언하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


몇 해 전이었다.

류지호가 초심을 돌아보라고 이곳 무주로 좌천을 보냈다.

좋은 임직원들과 함께 열심히 일했다.

초심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리더로서 갖춰야 할 덕목 중 한 가지는 알게 된 것 같았다.

바로 솔선수범이다.

무주리조트 임직원들은 누군가의 지시나 명령보다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에 익숙했다.

팀워크도 좋았다.

스키 시즌이나 락페스티벌 같은 대형이벤트 기간 동안 수백 명의 아르바이트생들을 이끌어야 하기에 한 명 한 명이 노련한 지휘관이다.

인원 보강이 많이 이루어졌지만, 그럼에도 외환위기 때처럼 한 사람이 두 서너 사람 몫을 척척해내는 사내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당연히 황재정도 그런 것이 익숙했다.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흑자를 내 본적이 없던 무주 리조트다.

헌데 2001년부터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비록 소폭이지만 매해 영업이익률이 상승하고 있다.

천연의 자연조건 덕에 어렵지 않게 반석 위에 오를 것으로 기대됐던 무주리조트다.

그런데 수도권과 멀다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늘 판관비가 매출마진보다 많아서 영업 적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부채가 많았던 탓에 막대한 이자비용이 지출되며 당기손익은 늘 마이너스였다.

대주주들의 잇단 부침 등 외풍까지 이어지면서 턴어라운드가 이뤄지지 않았다.

가온이 인수한 후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또 운영원가를 줄이겠다고 마구잡이로 직원을 해고한다거나 월급을 삭감한다거나 그런 것 일체 없었다.

도리어 투자를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5년에 걸쳐 리조트 전반을 리모델링했다.

황재정이 마케팅부서로 오면서 비시즌에 각종 수익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노사가 한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쳤다.

초심을 잃지 않고 한국 최고의 스키리조트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를 향해 정진하고 있다.

인수 이후, 281%에 달했던 부채비율과 800억 원 가량의 차입금의 상당 부분을 털어냈다.

한해 이자비용이 5억 원 안팎까지 떨어졌다.

매년 700억 원대 매출액과 60억 원 상당의 영업이익을 기록하고 있다.

새만금간척지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관광레저단지가 조성된다면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저 퇴근해도 된대요.”

“가자.”


황재정이 윤정혜를 차에 태운 후 전주로 향했다.

일주일 후에 두 사람이 혼례를 치를 예정인 전주의 전동 성당을 확인하기 위해서.


작가의말

한 주 마무리 잘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 작성자
    Lv.67 푸른놀
    작성일
    23.12.15 09:16
    No. 1

    무주에 좌천되어 있던 시절이 재정씨에겐 복이었네요 ㅎㅎ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88 도뮤
    작성일
    23.12.15 10:01
    No. 2

    오늘도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霧梟
    작성일
    23.12.15 10:30
    No. 3

    일종독자 - 중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4 트뤼포
    작성일
    23.12.17 12:51
    No. 4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3.12.15 12:15
    No. 5

    잘 보고 있어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88 lo******
    작성일
    23.12.15 12:28
    No. 6

    이건 새롭네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하얀유니콘
    작성일
    23.12.17 13:25
    No. 7

    남이공을 왜 도뫄 주나요.
    남이공 자원도 많고 상류층인 부자들
    돈도 많습니다.
    일론 머스크도 남아공 출신입니다
    군대 가기 싫어서 어머니의 국적인
    캐나다로 갈아타고 그 다음 미국으로 갈아탄겁니다.
    남이공 부자들은 자기집 주변에 전기철조망 치고
    기관총든 경비로 자신을 보호 합니다.
    자기나라 상류층도 안 보호하는 하층민을
    왜 한국인이 도와야 하나요.
    남아공 출신 미국 부자 많습니다

    찬성: 3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25 협객이 된 기분이야. (1) +4 23.12.27 1,821 89 23쪽
724 하고 싶고 해야 한다면, 그냥 하면 된다. (2) +5 23.12.26 1,991 94 26쪽
723 하고 싶고 해야 한다면, 그냥 하면 된다. (1) +5 23.12.26 1,873 90 24쪽
722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3) +7 23.12.25 2,006 97 26쪽
721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2) +8 23.12.23 2,062 99 25쪽
720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1) +3 23.12.22 1,984 93 23쪽
719 도둑질 하지 말라! +5 23.12.22 1,866 91 26쪽
718 God bless you....! (3) +6 23.12.21 1,945 107 24쪽
717 God bless you....! (2) +3 23.12.21 1,843 93 25쪽
716 God bless you....! (1) +3 23.12.20 2,060 97 28쪽
715 역경은 반드시 교훈을 남긴다. +3 23.12.20 1,975 92 27쪽
714 형제는 저작권 부자였다. +7 23.12.19 2,069 96 27쪽
713 출장이 아니라 여행이거든! (2) +3 23.12.19 1,877 91 25쪽
712 출장이 아니라 여행이거든! (1) +4 23.12.18 2,057 102 24쪽
711 맨유가 아니라, 내 친구가 더 대단해...! +3 23.12.18 1,957 101 26쪽
710 노총각 탈출이구나! (2) +8 23.12.16 2,095 107 22쪽
» 노총각 탈출이구나! (1) +7 23.12.15 2,125 104 23쪽
708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4) +3 23.12.15 1,928 87 26쪽
707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3) +7 23.12.14 2,039 103 24쪽
706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2) +4 23.12.14 1,890 91 21쪽
705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1) +6 23.12.13 2,031 110 22쪽
704 Change The Future! (3) +4 23.12.13 1,886 96 26쪽
703 Change The Future! (2) +8 23.12.12 1,998 100 22쪽
702 Change The Future! (1) +4 23.12.12 1,883 101 23쪽
701 평범한 하루들.... (5) +12 23.12.11 2,031 112 25쪽
700 평범한 하루들.... (4) +5 23.12.11 1,927 99 25쪽
699 평범한 하루들.... (3) +6 23.12.09 2,097 101 24쪽
698 평범한 하루들.... (2) +5 23.12.08 2,090 105 24쪽
697 평범한 하루들.... (1) +4 23.12.08 1,980 99 23쪽
696 Frank Castle. (7) +5 23.12.07 1,970 106 2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