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조회수 :
210,578
추천수 :
7,136
글자수 :
964,671

작성
20.08.19 19:15
조회
686
추천
32
글자
12쪽

Re 80. 비골라 1

DUMMY



01.

마드 세라자드가 마침내 그녀의 수색 대장을 품에 안았을 때, 비골라 아이작은 머릿속으로 백 번이나 반복했던 기억을 백한 번째로 다시 반복하던 중이었다.


그의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은 일정 구간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마치 몽유병에 걸린 소처럼 제 자리를 뱅글뱅글 돌며.


그가 아버지로부터 최초로 역사 책을 선물 받았던 순간이 반복 재생의 가장 오래된 부분이었고 뱀의 눈을 한 남자가 그에게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을 때가 가장 최근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단연 많이 반복된 부분은 계엄군 사령관과의 대화를 마친 순간이었다.


오사르 알렉사이, 세이마르를 침공한 계엄군의 사령관이자 오래전 비골라의 강의를 들은 적 있다는 남자가 손을 들며 말했다.


"아마 길지 않을 겁니다, 교수님. 교수님께서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고분고분 말을 잘 듣게 되기까지 말이죠. 이 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십시오. 그리고 다시 내 앞으로 오는 겁니다. 그때는 꼭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비골라는 돌처럼 무심한 표정의 사내들과 사령소 지하로 함께 내려갔다. 비골라의 양쪽 겨드랑이로 사내들의 두꺼운 팔이 파고들었다. 입고 있는 정복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내들의 몸은 마치 돌덩어리와 같았다. 그는 어깨가 빠질 것 같았지만 하소연할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 그는 앞으로 하소연할 일이 더 많이 생길 것이다.


몸이 덜덜 떨렸다. 별것 아니라고, 민병대에 참가했을 때 이미 각오한 일이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발끝부터 손끝까지 떨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를 질끈 깨물었지만 건조한 마찰음을 내며 이가 딱딱 부딪혔다. 왼쪽 겨드랑이에 팔을 파고든 사내가 아주 잠깐 그의 눈치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별것 아니오. 그냥 두 번 정도 기절하고 세 번 정도 차라리 죽여달라 외치고 나면 다 끝날 것이오."


이런 말이라도 해주면 차라리 좀 나을 텐데.


끝이 없는 듯한 계단을 내려와 사령소의 지하 유치장에 도착했다. 유치장 안에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수색 본부에 불쑥 찾아왔던 이방인이 한때 이곳에 있었다. 이제는 그가 이곳 신세를 질 것이다. 그때 이방인은 몇 번의 반복적인 질의응답을 하면서 좀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비골라는 지루할 틈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유치장 안에 감도는 차가운 공기에 소름이 돋았다.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사내들은 유치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골라의 오른쪽 팔을 붙들었던 사내가 비골라를 놔주더니 들고 온 물통을 가지고 나가 물을 받기 시작했다. 비골라는 사령소 지하에도 수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동료가 물을 열심히 받는 동안 (물통이 어지간히 커서 채우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른 사내는 들고 온 사슬을 풀었다. 그는 천정에 매달린 갈고리에 사슬을 연결했다. 사내들에게 각자 하는 일이 생기고 비골라는 잠시 자유로워졌다. 그는 온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다리도 후들거려서 자기도 모르게 의자 위에 걸 터 앉았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엄청난 충격이 콧등 위를 덮쳤다. 뜨겁고 섬뜩한 통증이 코를 짓누르며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억......"


사슬을 연결하던 사내는 비골라가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비골라의 코가 단박에 부러졌다. 뜨끈한 피가 코로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골라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정말 그런 표정을 짓고 싶지 않았지만)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보다 효과적인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안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 모습에 비골라가 냉큼 일어섰다. 환갑도 넘은 초로의 수색 대장이 엉덩이에 불이 붙은 듯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를 하고 섰다. 수치심이 등줄기를 타고 솟아 올랐다. 눈물까지 찔끔 날 정도였다.


사내는 물끄러미 비골라를 바라보더니 다시 사슬을 갈고리에 연결했다. 비골라는 이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참아야 한다는 것도, 이곳에서 탈출하리라는 다짐도. 그는 그저 더 맞지 않기 위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물을 다 받은 사내가 유치장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통에 담긴 물이 찰랑거렸다.



02.

비골라 아이작은 역사학자였다.


자랑스러운 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던 역사학도는 점차 대륙 전역에 대한 역사로 관심을 확장하더니 사막 너머까지 이름을 날리고 명예를 얻고 나서는 다시 사막으로 눈을 돌렸다. 기나긴 안식년을 시작하기 전 비골라 아이작은 제국 유일 대학에서 사막의 소수 민족사를 연구했고 강의했다.


그의 강의는 전공을 막론하고 가장 인기가 많았다. 그의 교수답지 않은 입담과 나이가 들면서 뚜렷해지기 시작한 은회색의 멋들어진 머리칼 때문이었다. 비골라의 강의실은 남녀를 막론하고 (물론 여학생이 좀 더 많았다) 타과 학생들까지 문전 성시를 이루었다.


한편 그는 사학 연구에 있어 언제나 피와 투쟁의 길을 걷는 투사였으니, 제국에 대한 반역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는 그의 이론은 항상 논쟁의 대상이었다.


"여러분들만큼이나 나도 제국에 충성하는 시민입니다만 사막의 역사에 비추어봤을 때 제국은 좀 기생충 같은 구석이 있어요."


햇병아리 사관 생도였던 오사르 알렉사이가 그의 강의를 듣다가 발끈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골라는 또 말하길,


"사막의 신화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동물이 뭔지 아시나요? 바로 뱀입니다. 황실의 상징 역시 태양 아래 날개 달린 뱀이죠. 황실을 수호하는 수많은 기사단의 상징도 역시 뱀이고요. 사막의 많은 소수 민족들은 사막의 주민들이 뱀에게서 태어났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차가운 피를 가진 파충류의 자손이라는 거죠. 나는 성도의 귀족들이나 상인들을 보면 그게 영 틀린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농담 반, 진담 반 학생들을 재밌게 해줄 생각으로 던진 농담이었는데. 비골라는 이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내의 눈을 보았을 때 신화의 진실을 엿본 것 같았다.


남자는 뱀이었다.



03.

"이봐, 정신이 드나?" 남자가 비골라에게 물었다.


두말하면 잔소리. 비골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정신은 여러 번 번쩍번쩍 들었던 참이었다. 사내 앞에서 건방지게 의자에 엉덩이를 디밀었을 때 번쩍! 물통을 가져온 사내가 물통을 내려놓고 고개를 까딱, 신호를 주었을 때 번쩍! 비골라의 발목에 묶인 사슬을 엄청난 속도로 잡아당겨 뒤로 벌러덩 넘어갈 때 또 한 번 번쩍!


그 뒤로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수차례 거꾸로 얼굴을 담갔다 빼면서 번쩍, 번쩍!


놈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뭐라도 물어봐 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수색 대장이고 교수 나부랭이고 간에 어떤 이야기라도 지어서 말해주었을 텐데. 사막의 역사에 대해. 그들이 파괴한 제단에 대해. 당신들의 고문 행위가 사실은 전후 대륙의 열강들에서는 금지된 행위라는 것까지.


하지만 그들은 질문을 던지는 대신 거꾸로 들린 비골라를 연신 담갔다 빼는 데에만 집중했다. 어디서 떠왔는지 모를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뇌까지 적셔놓는 기분이었다. 눈알을 빼서 소금물에 이리저리 헹구는 것 같았다. 비골라는 연신 번쩍거리며 생사를 넘나들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세 번째로 외쳤을 때 정신이 완전히 끊어졌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사내가 얼굴 앞에 다가와 있었다.


비골라는 눈을 떴지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펄떡거렸다. 물속에서 견디지 못한 그의 폐가 수중 호흡을 시도한 바람에 가슴속이 참을 수없이 쓰라렸다. 그의 뇌는 그러거나 말거나 쉴 새 없이 숨을 빨아들였다.


"오, 정신이 들었군. 이봐, 내 말 잘 듣게나. 조금 있으면 당신을 찾는 이들이 올 거고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올 것이거든. 그때까지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하네. 기껏 내가 이어붙여 줬는데 죽어서는 더욱 안되고."


비골라는 아주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머리끝까지 몰려있던 피가 손과 발로 천천히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그는 이제부터 새로운 공포와 맞서 싸워야 했는데 그건 눈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은 남자 때문이었다.


푸석푸석한 은발의 머리가 가슴께까지 내려온 남자였다. 달보다 더 창백한 피부는 투명하리만치 하얘서 마치 뒤가 비쳐 보인다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는 그보다 훨씬 나이 든 노인일 수도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보다도 어린 청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는 남자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숨이 몹시 단 모양이지. 이봐, 그래도 이제는 나한테 집중을 해주어야겠는데. 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 그러니까 자네 이름이...... 비골라 아이즈. 아니, 아이작. 맞지?"


비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름을 안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이 남자라면 뭐든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이 유치장 안에 분명히 있을 사내들을 찾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남자가 씩 웃었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말이야. 녀석들 걱정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네. 자, 저기를 보라구."


남자가 길고 하얀 손가락을 들어 유치장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겨우 손가락을 드는 동작이었을 뿐인데 그 자태에는 어마어마한 위엄이 있었다. 비골라의 목이 저절로 돌아가 남자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천둥소리를 처음 들은 짐승처럼 휘둥그레졌다.


사내들이 얌전히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 있었다. 무릎까지 딱 붙여서 나란히 선 모습은 마치 목각 인형 같았다. 그들은 선생님께 혼이 난 학생들처럼 얌전히 벽에 등을 붙이고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네가 저들을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그저 입만 좀 다물면 되겠다 싶었는데, 크크."


비골라는 겁에 질린 눈으로 그들의 모습을 훑어보다가 다시 한번 얼어 붙었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도 백번 동감할 테지만 말이지. 저 친구들...... 정말 밥맛 없는 표정 아니었나? 흐흐. 그래서 돌려놓았네."


비골라가 태어나서 가장 두려워했던 사내들은 분명 그를 향해 똑바로 서 있었다. 하지만 고개가 완전히 뒤로 돌아가 있었다. 비틀린 살갗으로 목뼈가 튀어나올 듯 요동쳤다. 목이 돌아간 목각 인형. 목이 돌아갈 때의 고통으로 그들의 손가락은 쭉 뻗은 채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가 몹시 유쾌한 듯 웃었다. 크고 쾌활했다. 그리고 견딜 수 없이 흉흉한 웃음이었다.


"하하하. 차라리 저게 더 인간답구만, 저 친구들은. 그러게 왜 나를 보고도 복종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왜 내게 감히 도전할 마음을 먹었을까.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말이야. 내게 거역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라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도 최근에 겨우 한 명 만났단 말이지. 하지만 이들은 거역이나 도전이라기보단...... 그래, 그저 명령대로 움직이는 인형 같더군."


남자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비골라는 여전히 사내들을 바라보느라 알지 못했지만 남자의 눈에서 황금색 빛이 스물거리며 흘러나왔다.


"아무튼 몹시 불쾌했네." 남자가 다시 한번 웃었다.


비골라는 목이 비틀려 죽은 두 사내로부터 도저히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훨씬 더 비참하고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남자는 뱀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사막의 소드마스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1 111. 침입자 3 +5 20.10.17 547 24 12쪽
110 110. 침입자 2 +4 20.10.16 563 26 12쪽
109 109. 침입자 1 +6 20.10.15 584 24 13쪽
108 108. 그라운드 제로 4 +8 20.10.11 585 26 12쪽
107 107. 그라운드 제로 3 +7 20.10.10 570 29 12쪽
106 106. 그라운드 제로 2 +4 20.10.09 566 24 13쪽
105 105. 그라운드 제로 1 +8 20.10.08 596 27 12쪽
104 104. 테러 04 +8 20.10.04 561 26 12쪽
103 103. 테러 3 +6 20.10.03 571 22 12쪽
102 102. 테러 2 +8 20.10.02 562 29 12쪽
101 101. 테러 1 +9 20.10.01 574 28 13쪽
100 100. 개막 +14 20.09.13 604 31 12쪽
99 99. 시알라 +5 20.09.12 577 26 13쪽
98 98. 언더그라운드의 도시에서 02 +3 20.09.11 584 31 13쪽
97 97. 언더그라운드의 도시에서 01 +7 20.09.10 625 31 13쪽
96 96. 암살의 역사 2 +6 20.09.09 625 28 12쪽
95 95. 암살의 역사 1 +8 20.09.08 621 33 13쪽
94 94. 검은 탑의 왕자 3 +10 20.09.06 624 33 13쪽
93 93. 검은 탑의 왕자 2 +6 20.09.05 623 30 12쪽
92 92. 검은 탑의 왕자 1 +4 20.09.04 654 30 12쪽
91 91. 마할란트라 3 +8 20.09.03 652 32 12쪽
90 90. 마할란트라 2 +14 20.09.02 656 33 12쪽
89 89. 마할란트라 1 +6 20.08.30 690 32 12쪽
88 88. 지저인 3 +8 20.08.29 656 36 13쪽
87 Re 87. 지저인 2 +10 20.08.28 663 35 12쪽
86 Re 86. 지저인 1 +6 20.08.27 680 37 12쪽
85 Re 85. 언더그라운드 2 +7 20.08.26 702 37 13쪽
84 Re 84. 언더그라운드 1 +9 20.08.23 727 40 12쪽
83 Re 83. 그날 밤 +4 20.08.22 687 33 12쪽
82 Re 82. 다시 지하로 +10 20.08.21 705 3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