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조회수 :
210,515
추천수 :
7,136
글자수 :
964,671

작성
20.09.08 19:15
조회
620
추천
33
글자
13쪽

95. 암살의 역사 1

DUMMY



01.

최초의 도전은 3년 전에 시작됐다.


선왕이 사라지고 2년도 안 돼서 시작된 셈이니 몹시 빠른 편이었다. 누군가는 성급하다고 이야기할 것이고 누군가는 비열하고 끔찍한 일이라 말하리라. 알란은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했다.


선왕의 행방불명 후 2년,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알라딘은 처음으로 자신의 형을 죽이려고 했다.


시작은 아주 단순했다. 사자도 이야기했듯 뭐가 좋은지 알 수 없고 최선의 결과도 모호하다면 방법은 단순할수록 좋은 법이다. 최소한 계획을 세우느라 골머리 썩일 일은 없을 테니.


위대한 천정마저 눈을 감은 자정, 왕궁의 2층에 괴한이 침입했다. 2층에 발을 디딘 괴한은 지금은 사라진 왕, 알마르 하사딘의 옆 옆방으로 머뭇거림 없이 들어갔다. 그곳은 알란의 방이었다.


괴한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그 방 책장과 책장 사이에 숨은 듯 놓인 퀸 사이즈의 침대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것이 왕자가 아니라 왕실의 무녀였다는 사실이다. 알란은 무녀와 사랑을 나눈 뒤 복도 바깥 욕실에서 몸을 씻던 중이었다. 섹스 후에 그는 항상 몸을 정갈히 했다. 섹스에 있어서만큼 그는 성숙한 여인과 같이 행동했다. 하기 전에도 씻고 하고 난 뒤에도 씻고.


알란이 부드러운 비누 향을 풍기며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검은 두건을 콧등까지 덮어쓴 괴한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새빨간 핏자국이 그녀의 나신을 덮었던 하얀 이불 곳곳에 꽃처럼 피었다. 괴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알란은 괴한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말할 것도 없이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확신이 마치 안도감처럼 찾아왔다. 알란은 손을 쓰지 않았다. 손을 들어 훗날 사자와 그의 동료들이 경험한 힘을 뿜어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괴한이 어떻게 행동할지 유심히 지켜볼 뿐이었다.


괴한 역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을 알아차렸다. 알란의 눈이 그렇게 말했다. 그 눈은 감히 왕자의 침실에 침입한 암살자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어리석은 동생이 크고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항상 따뜻하게 (그리고 지겹게) 바라보던 눈이었다.


괴한이 곧장 방을 빠져나갔다. 알란은 쫓지 않았다.


무녀의 죽음은 알란이 신뢰하는 극히 소수의 가신들에 의해 은폐되었다. 그날의 암살 미수와 무녀의 시신은 왕궁 뒤뜰에 묻혔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 지금껏 볼 수 없던 꽃들이 뒤뜰에 무성하게 피어났지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알라딘은 그날 왕궁을 나왔다.



02.

두 번째는 약이었다.


칼 다음은 약. 정해진 수순이었다. 암살계의 공식이나 마찬가지. 독은 비용도 저렴하고 효과도 만점인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고전의 매력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기 때문에 고전인 법. 괴한이 왕궁에 침입하고 꼭 1년 뒤의 일이었다. 이때 알라딘은 탑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곁에는 잿빛 머리를 한 노인이 있었다.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그를 나이 지긋한 노인으로 여겼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가득 새겨진 얼굴과는 달리 노인의 눈은 스무 살 청년보다 맑고 힘이 있었다. 겉보기보다 훨씬 탄탄한 몸은 노인이라기엔 너무나 가볍게 움직였고 허리를 굽히거나 다리를 절룩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노인의 이름은 시진이었다. 성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할란트라는 매 분기 도시의 생산물을 왕실에 진상했다. 하사딘 왕가도 바깥 세계의 여느 왕실과 마찬가지로 생산 능력이 아예 없었던 탓이다. 그들의 의무는 통치였으므로 한낱 씨앗을 파종하는 일과는 친하지 않았다. 이 세상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 씨를 뿌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농산품과 공산품, 온갖 재화와 약, 무역품(!) 들이 올라왔고 이를 점검하고 통계를 내는 관리가 왕자에게 직접 보고했다. 왕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처음 올라온 품목을 집어냈다.


약이었다. 잃었던 정기를 되찾고 호흡기, 순환기 질환에 효용이 있다고 쓰였다.


"이게 무어냐?"


"페어도트 가문의 진상품입니다. 왕실 내 상비약 재고가 부족하여 특별히 명을 내린 바 있는데 그 결과물인 모양입니다."


"괜찮겠느냐? 처음 보는 약이다."


"페어도트 가(家)는 오래전부터 제약을 가업으로 삼은 이들입니다. 몇 년 전부턴 동쪽과도 거래를 텄다고 들었습니다. 이 역시 무역품이 아닐까 사료되온데 우선 왕궁의 시녀들에게 기미(氣味) 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리하라."


그 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먼저 약을 복용했던 시녀 셋 중 둘이 죽었다. 겨우 살아난 한 명 역시 끔찍한 열과 환각에 시달리다가 완전히 미쳐버렸고 결국 일주일 뒤 죽었다.


왕가의 가드들이 페어도트 가의 저택을 덮쳤을 때 이미 페어도트의 수장과 그의 아들딸은 모두 죽은 채였다. 시녀들의 모습과 똑같았다. 이 일을 두고 가신들이 모두 한 입으로 용의자를 지목했다.


알란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물증이 없었고 그는 여전히 혈육에게 죄를 물릴 수 없었다. 페어도트 가(家)만이 아귀와 같은 권력 다툼에 희생당했을 뿐이었다.



03.

"2년 사이에 두 번이나 경험했다는 거로군. 매년 한 번씩 정례 행사처럼. 우리 무법자들도 1년마다 한 번씩 모여서 정례 회의를 하오. 이번엔 어떤 있는 놈들의 호주머니를 털고 마을을 통째로 들쑤셔 놨는지 밤이 새도록 늘어놓는 거야. 그리고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지면 그때부턴 부어라 마셔라......"


왕자의 이야기에 홀린 듯 유마도 자기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가 아차 싶었는지 말을 뚝 끊었다. 그가 황급히 시알라를 보았다. 그리고 마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드가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너, 그럴 줄 알았다. 유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곁에 있던 비골라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왕자가 정례적으로 암살을 당하고 있단 이야기 중에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자가 나직이 한숨을 쉬고 (외딴 성의 주인을 좀 도와줄 마음으로) 왕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매년 일들이 생겼다면 작년에도 같은 일을 당한 것이오?"


"그렇다. 작년에는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지. 녀석은 매년 새로운 방법들을 시도하고 있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들을 시도할지 기대마저 된다. 물론 그때까지 내가 당하지 않고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왕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다셨다. 술도 없이 꺼내놓기에는 너무 쓴 이야기였으므로.



04.

작년, 마할란트라의 왕궁에선 지금까지 암살 시도 중에 가장 스케일이 큰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날의 사건으로 인해 형제의 싸움은 결국 도시 전체에 훤히 알려지고 말았다.


위대한 천정이 언제나처럼 태양빛을 언더그라운드 내부로 뿌려주던 아침이었다. 성스러운 축일의 첫날 아침이었다. '정례 행사'가 시작된 후로 매번 식당에서 간단하게 해치웠던 아침 식사를 모처럼 대연회장에서 왕실의 사람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요리사 브랜튼은 선왕 때부터 왕가를 섬겨왔던 일등 요리사였다. 브랜튼이 구운 소를 레몬 소스로 곁들인 요리를 손수 들고 대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음식을 실은 이동식 수레가 덜거덕거리며 연회장의 원탁까지 다가왔다. 시녀 둘이 일등 요리사의 곁에서 보좌했다.


"수고했소, 브랜튼. 오늘은 또 어떤 요리로 우릴 기쁘게 해줄지 기대가 되오."


브랜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란은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모인 가신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리고 요리사 주제에 건방지다는 눈빛으로) 브랜튼을 바라보았다. 브랜튼이 요리를 덮은 은으로 만든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바비큐가 있었다. 그리고 섬뜩한 모양으로 요리칼이 꽂혀 있었다. 브랜튼이 외쳤다.


"하사딘 왕가 만세! 부친 살인자를 처단하라!"


왕실의 일등 요리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입가에 침까지 흘렀다. 요리사의 곁에 서 있던 시녀 둘이 우산처럼 펑퍼짐하게 퍼진 치마를 들쳐 올렸다. 하얗고 매끄러운 허벅지가 드러났다. 숨겨놓았던 나이프를 동시에 빼들었다.


"하사딘 왕가 만세! 부친 살인자를 처단하라!" 그녀들도 똑같이 외쳤다.


왕자의 뒤에서 어서 그들의 식사 시간이 돌아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가드 둘이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먼저 나이프를 치켜들었던 시녀가 미처 내리치지도 못하고 목이 베여 죽었다. 다른 한 명은 깔끔하게 목을 베이지 못하고 가드의 검에 얼굴을 베였다. 복숭아처럼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시녀의 볼을 차가운 칼날이 길게 갈랐다. 살갗이 벌어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시녀는 고통으로 바닥에 드러누워 몸을 뒤틀었다.


정면에서 달려든 브랜튼은 왕자가 직접 제압했다. 왕자가 급히 손을 쳐들자 초록색 힘이 그를 위에서부터 짓눌렀다. 수십 년을 요리 간을 보느라 후덕하게 살찐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는 마나에 짓눌린 채로 계속 고함을 질렀다.


"하사딘 왕가 만세! 부친 살인자를 처단하라!"


왕실의 일등 요리사와 그의 사이드킥 두 명이 별다른 힘도 쓰지 못하고 제압 당했을 때 왕실 가드 아마드로가 나섰다. 그는 왕실 가드 중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자로 신입 가드들의 교육을 맡은 자였다. 서열 3위의 가드라면 당연히 조찬 자리를 경비할 위치가 아니었지만 아마드로는 그날따라 그 자리에 있었고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드로가 칼을 빼들고 좌우의 가드 둘을, 분명 그가 가르치고 훈련시켰을 가드 둘을 머뭇거림 없이 베었다. 아마드로는 이미 심복 두 명을 이곳에 잠입시켜 놓았다. 그들도 검을 빼들고 튀어나왔다. 가드들 사이에 난전이 벌어졌다. 알란을 지키기 위해 가드들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농담을 주고받았던 동료와 칼을 맞대야 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알란도 직접 참전했다. 아마드로가 검을 들고 달려들자 알란이 검을 든 손을 높이 들었다.


마나! 아마드로는 자신에게 덮쳐들 힘을 예감하며 재빠르게 몸을 굴렸다. 그러나 그건 왕자의 속임수였다. 왕자는 마나 대신 치켜든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아마드로가 몸을 일으켜 세우다 그대로 왕자의 검을 받았다. 왕자가 내리친 검은 그가 제압한 브랜튼의 요리용 칼이었다.


돼지의 뼈를 부수고 살을 발점하던 고기용 칼이 아마드로를 어깨부터 깊이 베었다. 왕자는 검을 내리치자마자 다시 그의 힘을 사용했다. 아마드로는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처박힌 채 죽었다. 그에게 동조했던 가드들도 모두 죽었다. 알란을 지켰던 가드 중에서도 사망자가 나왔다.


연회장이 온통 피로 가득했다.


대연회장에서 벌어진 난장판의 끝은 정원사가 마무리했다. 몸이 성한 가신들과 가드들의 호위를 받으며 연회장을 빠져나오는 알란에게 정원사 부르가 쇠스랑을 가슴 높이에 든 채 달려들었다.


왕자의 앞에 선 가드가 쇠스랑을 온몸으로 받았다. 배로 들어간 갈퀴가 등 밖으로 튀어나왔다. 왕자가 다시 손을 들었지만 마나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반사 신경에 든 것이었고 손바닥이 꿰뚫렸다. 부르는 뒷심이 부족했다. 그는 즉시 다른 가드에게 뒤에서 목을 베였다.


이날 아침, 알란을 위해 일하고 있던 가신과 가드, 시녀와 요리사, 그리고 정원사까지 총 8명의 왕실 사람들이 동시에 알란을 향해 칼을 들었다.


"지옥과 같았다.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왕궁을 폐쇄하고 남은 잔당을 색출하기 위해 가드들이 수색에 나섰다. 2층 손님방에서 한 명이 목을 맸다. 의전을 담당한 가신이었다. 이날 아침 요리사와 시녀, 가드, 심지어 정원사까지 '특별한' 친구들로만 배치된 것은 모두 그의 솜씨였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8명 째였지."


왕자가 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듣는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경악했다.


이 무슨 개차반 같은 집안인가.


모두가 조용히 혀를 찼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사막의 소드마스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1 111. 침입자 3 +5 20.10.17 545 24 12쪽
110 110. 침입자 2 +4 20.10.16 563 26 12쪽
109 109. 침입자 1 +6 20.10.15 584 24 13쪽
108 108. 그라운드 제로 4 +8 20.10.11 585 26 12쪽
107 107. 그라운드 제로 3 +7 20.10.10 569 29 12쪽
106 106. 그라운드 제로 2 +4 20.10.09 566 24 13쪽
105 105. 그라운드 제로 1 +8 20.10.08 596 27 12쪽
104 104. 테러 04 +8 20.10.04 561 26 12쪽
103 103. 테러 3 +6 20.10.03 570 22 12쪽
102 102. 테러 2 +8 20.10.02 561 29 12쪽
101 101. 테러 1 +9 20.10.01 574 28 13쪽
100 100. 개막 +14 20.09.13 602 31 12쪽
99 99. 시알라 +5 20.09.12 577 26 13쪽
98 98. 언더그라운드의 도시에서 02 +3 20.09.11 583 31 13쪽
97 97. 언더그라운드의 도시에서 01 +7 20.09.10 623 31 13쪽
96 96. 암살의 역사 2 +6 20.09.09 623 28 12쪽
» 95. 암살의 역사 1 +8 20.09.08 621 33 13쪽
94 94. 검은 탑의 왕자 3 +10 20.09.06 623 33 13쪽
93 93. 검은 탑의 왕자 2 +6 20.09.05 623 30 12쪽
92 92. 검은 탑의 왕자 1 +4 20.09.04 654 30 12쪽
91 91. 마할란트라 3 +8 20.09.03 650 32 12쪽
90 90. 마할란트라 2 +14 20.09.02 655 33 12쪽
89 89. 마할란트라 1 +6 20.08.30 690 32 12쪽
88 88. 지저인 3 +8 20.08.29 654 36 13쪽
87 Re 87. 지저인 2 +10 20.08.28 662 35 12쪽
86 Re 86. 지저인 1 +6 20.08.27 679 37 12쪽
85 Re 85. 언더그라운드 2 +7 20.08.26 702 37 13쪽
84 Re 84. 언더그라운드 1 +9 20.08.23 727 40 12쪽
83 Re 83. 그날 밤 +4 20.08.22 687 33 12쪽
82 Re 82. 다시 지하로 +10 20.08.21 703 3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