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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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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64,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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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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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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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글자
12쪽

100. 개막

DUMMY




01.

유마는 온몸이 들썩여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곧 그녀의 눈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속삭이는 입술과 달처럼 창백하지만 해처럼 고귀하고 순결한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유마는 마치 심부름 후에 사고 싶은 과자 하나를 사도 좋다고 허락받은 아이처럼 신이 났다.


천하의 유마 올리오가? 외딴 성의 주인이자 일천이 넘는 (이건 마드 세라자드에게도 밝히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동부 사막의 무법자 집단 '호사리오'의 대장인 그가?


아무렴. 그녀 앞에서는 외딴 성의 주인이고 호사리오의 대장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와 한 번 더 대화를 나누고 그녀와 마주 보고 웃으며 내일 그리고 또 내일 계속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이제 카페 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보았다. 왕가에서 내려준 옷을 입으니 새하얀 비둘기와 같은 꼴이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나쁠 건 없었다. 사실 많이 멀끔해 보였다. 싸움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옷이었지만 (특히 꽉 끼는 바지는 조금만 달음질쳐도 찢어질 판이었지만) 그가 여기에 싸우러 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녀 앞에 설 때는 숨고 싶은 자신과 수없이 싸우고 다독여야 할 테지만 말이다.


"흠흠. 아아."


목을 한번 가다듬고 유마가 카페 문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와본 곳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차가웠다. 황동으로 만든 손잡이는 몸을 따스하게 데우는 위대한 천정의 빛이 내리쬐는데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얼어붙는 듯했다.


유마는 당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참았다. 시알라에 대한 걱정이 용암 거품 터지듯 마구 솟아올랐지만 견뎠다. 이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 수는 없었다. 그건 절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절대.


살며시 걸음을 옮겨 카페 외벽에 작게 난 유리창에 다가갔다. 실내가 어둑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인기척이 있었다. 한 명? 아니 어쩌면 두 명.


유마가 다시 문으로 가 손잡이를 틀어잡았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다. 돌아가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팔뚝에 쥐나 나도록 힘을 주었다. 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문의 경첩이 삐걱거렸다. 유마의 귀에는 마치 문이 고함을 치는 듯 크게 들렸다. 죽는 날짜를 받아둔 노인의 관절을 억지로 비트는 듯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지만 카페 안엔 아무도 없었다. 유마의 얼굴에 실내에 고인 공기가 기분 나쁘게 닿았다. 그리고 마치 백 년은 열지 않은 창고의 문을 연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고여 있던 썩은 냄새가 한 번에 밀려 들어왔다. 유마는 눈까지 따갑다고 느꼈다.


유마의 눈에 테이블 위에 놓인 한 개의 찻잔이 들어왔다. 반쯤 마신 커피가 시체 썩은 물처럼 고여 있었다. 그가 잔을 만져보니 아주 미세한 온기가 느껴졌다.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거다!'


유마가 재빨리 카페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찰나, 그의 부츠가 철벅 소리를 내며 바닥 위에 고인 무언가를 밟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딱딱하게 굳어갈 물질이었다. 그 붉은 것은 세상의 모든 불길함과 지랄 같음을 모두 가지는 것이었다.


죽은 이가 흘려낸 붉은 피.


유마가 품에 숨겨 놓았던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왕실 가드들의 나이프였다. 그들의 날붙이가 모두 그렇듯, 날이 까맣고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물건이었다. 나이프를 단단히 움켜쥔 채 바닥에 흘러나온 피를 쫓았다. 피는 그대로 한줄기 강이 되어 카운터 뒤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나이프를 역수로 바꿔 쥐면서 유마는 끊임없이 기도했다.


'오, 아니길. 제발 아니길. 오오. 제발 그녀만은 아니길.'


그리고 카운터 뒤로 돌아갔다.



02.

죽은 것은 사내였다. 유마는 처음 보는 사내였다.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가 유마는 사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오. 실례되는 생각을 해버렸군. 이미 내 말을 들을 수도 없는 곳으로 떠났겠지만."


유마가 나이프를 품에 다시 넣고 사내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남자의 사인은 자상에 의한 출혈 과다. 온몸을 난도질당한 상태였다. 잘린 면이 날카로웠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날붙이에 당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날카로운 짐승에게 산 채로 찢긴 것 같았다.


무법자들에게 등을 맡긴 채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시체들을 보아온 유마였다. 까만 판초에게 당한 날에도 형제들의 시체 가운데서 죽기를 희망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도 남자의 몸에 난 상처들은 경악스러웠다. 치명상은 목에 가로로 길게 난 자상이었다.


하지만 그 상흔은 가장 나중에 난 것이었다. 말하자면 온몸을 두루 고문하고 난 뒤 마지막으로 깔딱거리는 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잔인한 놈이다. 유마는 살인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요에 의해 살인을 하는 자가 아니다. 재미로, 어쩌면 욕망에 못 이겨 살인을 하는 자였다.


"빌어먹을 자식이......"


엄청난 고통이 죽음과 함께 밀어닥친 듯 사내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죽었다. 유마가 사내의 눈을 감겨주었다.


"당신에게 뭐라도 물어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제 편히 쉬시오. 고통이 없는 좋은 곳으로 가길 바라오, 지저인이여."


유마가 사내의 명복을 빌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무슨 소리가 들렸다. 시신의 등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유마가 시신을 '만진 순간부터' 뭔가 찰칵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태엽 소리와 같았다. 그리고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 서서히 다가오는 소리기도 했다.


유마가 다시 사내의 시신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조심히 붙들었다. 그리고 살며시 옆으로 밀어 넘어트렸다.


그 순간 카페가 폭발했다.



03.

사자와 마드, 비골라가 마할란트라 곳곳에 흩어진 채로 동시에 돌아보았다. 엄청난 굉음이 마할란트라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언더그라운드의 지면이 둔중하게 울렸다. 이윽고 도시 한쪽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04.

폭발은 유마의 바로 눈앞에서 일어났다. 시신의 뒤에 있던 무언가가 엄청난 열기와 빛을 내뿜으며 터졌다. 유마는 폭발음을 채 듣기도 전에 튕겨나갔다. 아울리 카페 주인의 몸을 산산조각 내고 뿜어져 나온 열 폭풍이 유마를 거세게 날려버렸다. 그의 몸이 작은 창이 달린 카페 벽으로 날아갔다.


유마의 몸이 창과 벽을 한꺼번에 뚫고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는 벽을 뚫고 나서도 길 위에서 몇 차례 나뒹굴었다. 지저인 왕자가 내려준 옷이 까맣게 그을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는 어디가 부서지고 어디가 찢겼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깜깜했고 고막이 터져버린 귀에는 귀신이 토해내는 비명 소리 같은 것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차츰 고통과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특히 얼굴 한쪽이 타는 듯 화끈거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유마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때렸다. 불꽃이 얼굴 한쪽에 달라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무법자들의 대장은 마구 뒹굴며 얼굴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이 날은 그가 온전히 두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마지막 날이었다.



05.

"안돼! 아아, 안돼!"


시알라는 유마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외딴 성의 주인이라고 소개한 남자. 그러나 시알라가 보기에 딱 무법자들의 대장일 것 같던 남자.


시알라는 카페에 오는 순간 어쩌면 그가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녀도 몰랐던 마음 깊숙한 곳엔 그와의 만남을 조금씩 기대하는 그녀가 있었다.


매일 그녀가 있는 곳을 마치 우연인 척 들리던 그의 마음을 그녀가 왜 몰랐겠는가. 시알라가 입을 열 때마다 그녀의 입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왜 모르겠는가. 이윽고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노래를 듣는 듯 황홀해하다가 문득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아닌 척 딴청을 피우는, 그러나 사내의 볼에 새빨갛게 피어난 꽃을 왜 몰랐겠는가.


"아아, 제발!"


시알라가 애타게 외쳤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했다. 송곳니가 그녀의 뒤에서 길고 거친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더니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속삭였다. 벌린 입에서 나온 더럽고 탁한 공기에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조용히 하고 잘 봐요. 이제 끝내주게 재밌는 광경이 펼쳐질 거니까. 비록 왕자를 걷어올리지는 못했지만 저 남자도 바깥세상의 이방인들 중 하나라죠? 그럼 나쁘지 않은 낚시가 되겠어요. 그러니 자, 눈 깜빡할 생각 말고 똑바로 쳐다봐. 저 자는 너 때문에 죽는 거니까."


그리고 카페가 폭발했다.


빛과 소리가 한꺼번에 터졌다. 엄청난 소음이 그녀의 귀를 먹먹하게 했고 태양보다 밝은 빛이 그녀의 눈을 멀게 했다. 그녀는 아마 그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를 질렀을 텐데 그는 듣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 스스로도 듣지 못했으며,


그리고 곧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06.

유마는 똑똑히 들었다.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중에도 똑똑히 들었다.


기다려요, 내가 이제 곧.


그리고 그는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07.

사자와 마드는 왕궁에서 합류해 소리가 난 곳으로 함께 달렸다. 폭발이 일어난 곳은 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불씨 섞인 연기가 위대한 천정까지 닿을 듯 높게 솟아올랐다. 마드와 함께 연기를 눈으로 확인하며 달리던 사자가 갑자기 멈춰 섰다.


"잠깐."


마드가 휙 돌아보니 사자는 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엔 다닥다닥 붙은 지저인들의 건물 지붕뿐이었다.


"혹시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갈 수 있소?" 사자가 물었다.


"뭐라고? 어딜 뛰어 올라가?" 마드가 황당한 듯 되물었다. 폭발이 일어난 곳에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할 판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남자.


"아무래도 그건 좀 무리겠지? 그럼 잠깐만 실례하겠소, 마드."


'아니, 당신이 지금껏 나한테 실례한 거야 수없이 많았지만......!'


마드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때 사자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마드는 그렇게 처음으로 사리안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갑자기 뭘 하는 거야!"


"나를 꽉 잡으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사자가 그녀를 안고 건물 벽을 타고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세이마르 침공 때 경비 대장 비드 하란이 도시의 후문에서 봤던 바로 그 광경이었다.


'사람이 날기도 하더라고.'


사자가 마드를 안은 채로 여유롭게 지저인들의 건물 벽 사이 사이를 디디며 뛰어올랐다. 날쌘 고양이가 담을 타고 넘듯 재빠르게 지저인들의 지붕 위에 올라섰다.


그곳에 송곳니가 길게 자란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시알라도.


송곳니가 놀란 눈으로 사자를 바라보았다. 사자는 마드를 거의 던지다시피 (결국 실례를 저지를 거면서!) 지붕에 내려놓은 뒤 엄청난 속도로 송곳니에게 달려들었다. 사자는 무기를 들지 않았고 맨주먹이었으나 그의 돌격은 매서웠다.


쾅!


달려든 사자가 머뭇거림 없이 주먹을 내리쳤고 어느 불쌍한 지저인의 집 지붕 한쪽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송곳니는 자못 우아한 몸짓으로 시알라를 안고 뒤로 뛰어 안착했다.


"너로구나."


사자와 송곳니가 동시에 말했다.


마드는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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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95. 암살의 역사 1 +8 20.09.08 620 3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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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Re 82. 다시 지하로 +10 20.08.21 703 3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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