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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조회수 :
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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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6
글자수 :
964,671

작성
20.09.09 19:15
조회
623
추천
28
글자
12쪽

96. 암살의 역사 2

DUMMY




01.

이야기를 모두 마쳤다.


왕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것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그를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경악과 어처구니없음으로 물들었다.


'이 무슨 개족보냐고 생각하겠지.'


알란은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떠벌리는 것을 일처럼 삼는 주정뱅이들도 가정사에 대해선 입을 다물기 마련이다. 하물며 왕가의 사정에야. 자식을 버리고 떠난 아비나 지아비 몰래 불순한 만남을 갖는 마누라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무려 형의 암살을 매년 도모하는 동생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하기 싫었다. 왕실의 일은 왕실의 것이고, 지하의 일은 지하의 것이니까. 하지만 알...... 나의 동생. 녀석의 그 흉흉한 마나는 무엇이란 말이냐. 그 시뻘건 색은 또 뭐고?'


알란은 3년 만에 본 동생의 마나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악마의 혓바닥에나 어울릴 것 같은 핏빛의 마나. 그리고 깨달았다. 이제 동생의 목표는 단순히 형의 목이 아님을. 어쩌면 왕실을, 그리고 도시 전체를 삼키려고 들지도 모른다.


왕자의 굳은 표정을 살피던 마드가 입을 뗐다.


"매해 둘째 왕자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이제 곧 또 한 번 사건이 벌어질 것이란 이야기인가요?"


"녀석이 일부러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매해 성 축일 즈음해서 일이 벌어지곤 했다. 마할란트라의 성 축일은 이제 1주일이 남았지. 나는 녀석이 이번에야말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채우려 들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 둘째 왕자가 왕궁을 들린 것이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시오?" 사자가 물었다.


"그야...... 사전 답사 아니겠느냐. 특히 너희들. 내가 왕궁으로 불러들인 이방인들이 많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방해물이 될지를 가늠했을 테지."


알란이 사자와 원탁을 번갈아 보고 말을 이었다.


"하하. 하지만 많이 놀랐을 것이다. 녀석은 별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난 다 안다. 그래도 동생이니,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쯤은 훤히 알 수 있어."


"엄청난 방해물이 들어왔다고 생각하겠군." 유마가 중얼거렸다.


"그게 우리한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마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02.

그때 문제의 인물 알라딘과 시진은 탑에 다다르는 중이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시체들이었다. 탑을 지키는 네 명의 가드가 눈과 코와 입에서 피를 뿜은 채로 사이좋게 널브러져 있었다. 왕자를 쫓아왔던 가드들이 일제히 칼을 빼들고 왕자의 앞으로 뛰쳐나왔다. 일사불란하게 대형이 갖춰졌다. 시진도 허리 춤에 꽂아 두었던 칼을 빼들었다.


정작 알라딘 본인은 태연했다. 눈을 가늘게 떠 시체들을 대략 살펴보고는 손을 들어 주위의 가드들에게 길을 열라고 지시했다.


"다들 물러서라. 내가 보겠다."


시진이 곁에서 따라붙었다. 알라딘이 시진에게서 칼을 받아 들고 칼끝으로 시체 중 한 구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폈다. 그리고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검을 여러 차례 휘둘러 털어내고는 다시 시진에게 건네주었다.


"그자가 온 것이다." 왕자가 혀를 차며 탑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탑이 한층 흉흉한 빛을 발하며 우뚝 서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했군. 미리 언질을 해두지 않았던 탓이다."


"...... 그렇다고는 하나 이건 좀 너무하군요. 저하의 사람이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닐 텐데요."


시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얼굴에 난 구멍마다 일제히 피를 쏟아낸 시체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그런 자가 아니냐. 들어가자. 손님이 기다린다."


왕자가 탑 앞에 서자 검은 탑의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그에게 복속하는 지저인 여인들이 나와 그를 맞았다. 그를 따라온 가드들은 탑 밖에 대기했고 (혹시 모르기 때문에) 따로 뽑힌 여섯 명의 가드만 탑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지저인 여인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왕자의 옷과 검을 받았다. 왕자가 보니 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창백했다. 두려움이 그녀들을 짓눌렀다. 절대 봐선 안 되는 것을 본 것처럼. 별안간 떨어진 불행의 별을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옷을 받아드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들의 손이 물에서 갓 건진 익사체처럼 하얗고 파랬다.


왕자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탑의 정중앙에 나선 모양으로 난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6층에 그가 있었다.



03.

"이거 오랜만입니다, 왕자님! 얼마 만이죠? 10년 만인가? 아니다, 5년 만인가요?"


나선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왕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남자가 호들갑을 떨며 반겼다. 하지만 왕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말투와 달리 차갑게 식은 눈이었다.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군요. 마할란트라도 정말 오랜만이구요. 저 빌어먹을 천정...... 아니, '위대한 천정'의 빛도 너무 반가워서 밖에 나가 선탠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남자가 입매를 억지로 잡아당기듯 볼까지 씰룩이며 웃었다. 긴 송곳니가 드러났다. 표범의 엄니와 같았다.


"그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알라딘이 물었다.


"아무렴요, 아무렴요. 왕자께서 잘 지내시는 것만큼이나 우리도 평안합니다. 태양이 쨍쨍하게 뜨고 달은 서늘하게 뜨니 바깥세상은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자, 이리 오세요. 우리 포옹이나 합시다."


남자가 팔을 크게 벌린 채 다가와 왕자를 끌어안았다. 왕가의 피를 대하는 모습이 마치 골목에서 옛 친구를 만난 듯했다. 그것도 자기보다 좀 열등했던 친구를 대할 때처럼.


시진은 왕자의 등 뒤에 비스듬히 선 채로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표정은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바다처럼 평온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송곳니의 행동 하나하나를 훑었다. 그의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왕자가 남자를 따라 어색하게 그의 등 뒤에 둘러놓았던 손을 내리고 한발 물러났다. 송곳니가 그런 그를 보며 계속 싱글거렸다.


"그나저나 탑 앞에 거한 인사를 남겨놓았더군요. 그들이 당신 앞을 막기라도 했습니까?" 왕자가 물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아, 보셨습니까? 하하하하. 하긴 보실 수밖에 없었겠죠. 밑의 여인들에게 치워두라고 일러두긴 했지만. 크크. 아무래도 여인들이 치우긴 좀 그랬을 겁니다."


"한 명의 병력도 아쉬운 상황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원조이지 방해가 아닙니다."


왕자의 말에 송곳니가 미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섬뜩한 빛이 눈 속에서 일렁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런 것치고는 탑이 완전히 무방비하더군요. 그 친구들 말고는 달리 가드들도 하나 없고요.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셨습니까?"


"왕궁에 다녀왔습니다."


"왕궁에요? 문안 인사라도 올리고 온 겁니까?"


엄니가 다시 와락 웃었다. 시진의 볼이 씰룩였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먼지라도 세는 듯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바깥에서 이방인들이 왔소. 당신들이 이야기한 그자들이요. 얼굴을 한번 봐야겠다 싶더군."


"경솔하십니다. 참으로 경솔하세요. 하하하하. 어쩜 그렇게 무방비하고 무신경합니까? 순진하신 분."


송곳니는 이제 눈물까지 닦아내며 웃고 조소했다. 알라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옆에 선 시진은 그의 체온이 올라가고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거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송곳니도 알 것이다. 프라이드 높은 왕자에게는 힘든 시간이리라.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왕자님을 좋아합니다. 세상 위에 우뚝 서실 분들은 그래야 합니다. 꾀를 내느라 골치를 썩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지요."


송곳니가 왕자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그럼 인사는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자, 준비하신 것을 보여주십시오."



04.

알라딘과 송곳니가 함께 탑의 상층부로 올라갔다.


숨겨야 할 은밀한 것이 있다면 사람들은 지하실을 찾겠지만 탑이라면 올라가야 했다. 탑은 위대한 천정에서부터 내려온 거대한 종유석과 밑에서부터 자란 석순이 만난 것이니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두꺼워졌다. 올라갈수록 공간이 넓어졌고 또한 밝아졌다. 탑이 내려온 시작점은 마치 위대한 천정처럼 스스로 빛을 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저희는 왕자님이야말로 마할란트라의 적자이며 또한 지존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송곳니는 20여 층의 계단을 오르면서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때껏 숨소리 한번 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폐하께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신 뒤 교활한 알란 왕자가 냉큼 자리를 차지했을 때부터 저희는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그는 첫째이기는 하나, 글쎄요...... 이 지하 세계를 통치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지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고마운 일이군요. 사실 그쪽 분들이 먼저 연락을 취했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이미 마할란트라와는 연을 끊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왕자가 말했다.


그 말에 송곳니가 다시 음습한 웃음을 흘렸다.


"그자들이 여기로 기어들지 않았다면 저희라고 다시 오고 싶었겠습니까. 크크. 물론 저야 이곳의 축축하고 답답한 공기가 좀 그립기도 했죠. 저 천정의 섬뜩한 빛조차 말입니다. 게다가 알란 왕자가 그자들과 접촉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거야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알라딘 왕자께서 똥줄이 타실 테니 말입니다. 크크크크."


시진은 묵묵히 계단을 따라 오르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누가 이것을 왕자와 손님의 대화로 생각할까. 식민지 총독과 망국의 왕족 간 대화로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들이 우릴 돕는다니 반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바깥세상에서 위세를 떨치는 이들이 아닌가. 분명 큰 도움이 될 게야.'


시진은 이들이 밖에서 어떻게 불리는지도 잘 알았다.


미식가들이라. 허, 이름 한번 잘 지었군.


게다가 송곳니는 그들 중에서도 지금 알라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다. 송곳니는 그냥 풀어놓아도 되는 이리 같은 자. 그들 중에서도 잔혹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였다. 왕가의 전복을 꾀하고 존속 살인을 준비하고 있는 알라딘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시진이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이윽고 그들이 목표로 한 층에 다다랐다. 왕자가 한발 앞서 나가 송곳니에게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자, 여깁니다. 많은 준비를 했지요. 이번엔 많이 다를 겁니다."


왕자가 문을 열자 언더그라운드에서 보기 드문 빛이 문밖으로 밀려나왔다. 위대한 천정의 빛이었다. 빛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밖으로 먼저 나오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강렬하게 쏟아지는 빛에 송곳니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웃었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유쾌하고 잔혹하게.


"하하하하. 대단해요, 대단해. 드디어 왕좌가 바뀌겠군요. 알란은 감히 예상하지도 못할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바깥에서 온 이방인 놈들이 그에게 붙는대도 절대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송곳니가 박수까지 쳐가며 소리쳤다. 길게 자란 송곳니가 섬뜩하게 빛났다.


"선왕께서도 기뻐하실 일입니다. 훌륭하십니다, 왕자님."


알라딘도 마침내 미소 지었다. 둘 모두 우월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교활하고 비열한 미소였다. 시진도 그 방에 들어찬 것들을 한 번 더 눈으로 보며 미소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왕자만 끌어내린다면 다 좋은 것 아니겠나. 아무렴, 그렇고말고.'


시진이 미소 띤 얼굴로 생각했다. 주인을 꼭 닮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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