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조회수 :
210,565
추천수 :
7,136
글자수 :
964,671

작성
20.08.20 19:15
조회
688
추천
31
글자
12쪽

Re 81. 비골라 2

DUMMY




01.

'뱀이다. 이 남자는 뱀이야.'


비골라가 정신을 잃은 동안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되새긴 기억의 끝은 남자의 눈이었다. 황금색으로, 세상에 비할 데 없는 고귀함과 더할 길 없는 불길함으로 빛나던 눈. 이제 남자의 눈은 비골라가 언제 어디서 잠을 자든 그의 눈꺼풀 안에 잔상처럼 남아 따라다닐 터였다.


'이제 깊은 잠은 다 잤군.'


비골라가 혀를 찼다. 핏줄이 모두 터져서 입안이 퉁퉁 부었다. 석고상과 같았던 두 남자가 문신처럼 새겨준 통증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꺼풀 위에 눈곱처럼 달라붙은 통증을 견디며 비골라가 눈을 떴다. 마드의 얼굴이 보였다. 세이마르 민병 대장이 그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며 꼬옥 안았다.


"정신이 드세요, 아저씨? 정신이 드시는 거죠? 저예요. 마드가 왔어요."


소리를 질러가며 감동적인 해후를 장식해야 좋을 때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적의 소굴 한복판이었다. 마드는 조용히 하지만 더할 나위 없는 감격으로 품 안의 비골라를 애타게 불렀다. 비골라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아아...... 자네가 당연히 올 줄 알았지. 오랜만이야, 대장님. 잘 지냈지?"


"아무렴요. 잘 지냈죠. 치즈를 녹여 올린 소고기에 따뜻한 우유까지 곁들여서 행복한 시간 보내고 있었죠. 그런데 혼자서는 아무래도 재미가 없더라고요. 파티에 아저씨도 초대하려고 직접 왔어요. 짜잔...... 이렇게요."


마드의 눈에서 수정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하하...... 자네는 항상 매력적이지만 오랜만에 보니 더욱 그렇군. 나 좀 일으켜 주겠나?"


마드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비골라를 일으켜 앉혔다. 세월이 피해 간 듯했던 그의 날렵한 콧대는 폐가의 처마처럼 주저앉았고 이지적으로만 보였던 입술은 퉁퉁 부어 있었다. 부어오른 눈두덩 때문에 오른쪽 눈만 겨우 떴는데 그 안으로 보이는 눈동자에 백태가 껴서 꽤 심각해 보였다.


하지만 살았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비골라는 지치고 감격스러운 얼굴로 마드의 얼굴을 보고 유치장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유마가 보이자 그가 섬찟 놀랐다. 비골라를 안은 마드는 그가 몸을 떠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요, 아저씨. 저희를 도와주신 분입니다. 유마 올리오님이고...... 외딴 성의 주인이세요."


유마가 비골라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그와 눈을 맞추었다.


"반갑소. 유마 올리오요. 당신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왔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갑군. 자기소개는 이따 자세히 하기로 하고 이제 당신을 밖으로 데리고 갈까 하는데, 일어설 수 있겠소?"


비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도와준다면 고맙겠소, 올리오님. 군데군데 부서진 것 같긴 하지만 일어설 수 있소. 아니 일어나고 말거요. 여긴 이제 질리거든."


마드와 유마가 그를 양쪽에서 부축했다. 그리고 유치방 밖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02.

마드와 유마, 그리고 그 사이의 비골라가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디뎌가며 계단을 올라왔을 때 그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 놀랍고 한편으론 예상했던 것이었다. 특히 마드는 미리 본 것 같은 기시감조차 느꼈다.


사리안이 계단 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열 명은 족히 될 인원의 병사들이 누웠거나 엎어져 있었다.


'그날 밤 시장에서 사리안을 처음 만났을 때 알았지. 내가 지치고 쓰러질 때마다 이 어깨 넓은 남자가 구해줄 것이라고.'


마드는 운명의 상대를 믿지 않았다. 우연히 만나는 인연 따위 신뢰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사리안을 보면 신이 내려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사들은 제대로 응전도 하지 못한 채 당한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칼조차 뽑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마드는 밑에서 신비로운 (그리고 무서운) 노인을 만나고 비골라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안고 있는 동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이 많은 병사들이 쓰러지는 동안 별다른 소리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자는 손에 길쭉한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었어도 마드는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유마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칼집이었다.


'설마 저걸로 다 때려눕힌 거라고? 내가 준 나이프는 어쩌고? 게다가 칼은 얻다 내버리고 칼집만 들고 있는 거지?'


사자는 그의 발치에 기대어 쓰러진 병사를 조심히 눕혀주던 참이었다. 그가 신중한 (마드가 보기엔 조금 귀엽기도 한) 표정으로 병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아, 성공했구려. 역시 마드, 당신이 해낼 줄 알았소."


사리안이 웃었다. 마드도 웃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노쇠한 수색 대장을 부축하고 있는 것만 아니었다면 마드는 사리안의 품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 귀신같은 반사 신경으로 달려드는 마드의 팔을 가볍게 잡아 악수라도 할지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달려들었을 것이다. 저 넓은 대사막과 같은 사내에게.


마드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자가 비골라에게 다가와 말했다.


"괜찮으시오? 심하게 당했군. 고생이 많았소."


"아아...... 왠지 당신도 같이 와 줄 거라고 생각했어. 고맙소."


사자는 비골라의 옆에 선 유마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유마도 씩 웃었다. 그들 사이에 그 정도의 인사 치레면 충분하다는 듯. 사자가 유마의 등 뒤로 지하 유치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밑에서 뭔가 이상한 걸 보지 않았소? 누군가를 만났다거나."


"아아, 어떻게 알았어? 그게 말이야, 사리안......"


사령소로 불화살이 날아든 것은 그때였다.



03.

그것은 빨갛고 뜨겁고 뾰족한 어떤 것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불화살을 생각할 때 불붙은 화살이 밤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것을 상상한다. 그건 대체로 맞는 이미지였지만 한 가지 틀린 것이 있다. 불은 화살촉에 붙이는 것이 아니다. 뾰족한 쇠촉을 떼어내고 뭉특한 베를 뭉쳐서 단 후 역청을 바르고 불을 붙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화살을 직접 맞아본다면 그는 뾰족한 무언가가 몸을 파고든다고 느낄 것이다. 날카로운 쇠에 쑤셔지거나 불에 지져지거나 뜨거운 것은 마찬가지니까.


사령소의 깨진 창을 통해 불화살이 날아들자 사자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칼집을 휘둘렀다. 그가 휘두른다면 날카로움에 있어 칼집도 칼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처음 날아든 두 발의 불화살 촉이 똑 떼어진 채 그들 발치에 떨어졌다.


하지만 잇달아 쏟아져 들어오는 불화살을 모두 쳐낼 수는 없었다. 불덩이들이 연이어 창을 넘어 들어왔다. 사령소 내벽 곳곳에 불이 붙었다. 눈먼 화살들이 사자에게 쓰러진 계엄군 병사들에게 내리 꽂혔다. 가느다란 숨이나마 약하게 내쉬던 병사들이 헉하고 움찔거렸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됐다.


"제기랄,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유마가 외쳤다. 바깥의 상황을 보기 위해 창가로 달려들려는 그를 사자가 재빨리 붙잡았다.


"관두시오.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간 금방 벌집이 되고 말 테니. 그보단 나갈 길을 찾아야 하오. 아무래도 사방이 포위된 것 같지만 방법이 있을 거요."


사자가 비골라를 붙든 채 경악하고 있는 마드에게 다가갔다. 쇠약해진 수색 대장의 이마에선 열이 펄펄 났다.


"그를 내게 주시오. 그리고 마드, 당신이 길을 찾아야 할 것 같소. 사령소에 대해 당신이 가장 잘 알 테니."


사자가 마드로부터 비골라를 넘겨받은 후 재차 강조했다.


"어서! 바깥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든 샛길이든 뭐라도 찾으시오. 저들은 아마 사령소와 함께 우릴 통째로 태워버릴 심산인 것 같으니. 서두르시오!"


이제 어둠은 온데간데없고 태양처럼 뜨거운 빛에 눈이 멀 것 같은 불타는 사령소 1층 로비에서 마드는 엄청난 정신력으로 집중했다.


비밀 통로. 샛길. 뭐든 좋으니 살아갈 구멍을 찾을 것.


사자의 당부를 속으로 되새긴 마드가 복도를 달려나가려는 찰나,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비골라였다. 노구의 상처 입은 그의 손이 마드의 팔을 붙잡은 채 부들거렸다.


"아저씨?"


"지하 유치장에......"


"네? 뭐라구요?"


마드는 한시가 급했다. 그래서 그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알 수 없었다.


"젠장, 아직 멀었소? 이미 연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어!"


유마가 달려와 다급하게 외쳤다. 사자는 그의 품에 안긴 남자에게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음을 눈치챘다.


"잠깐, 잠깐만. 아이작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소."


그들은 사령소 내부에 몰아치기 시작한 화염 폭풍에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거의 초월적인 정신력으로 입을 다물고 비골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 지하 유치장에 수도가 있더군......"


"수도요? 지하 유치장에 물이 나오는 것이 있다구요? 어디에요?"


"글쎄......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물소리를 들었네. 분명 그, 그 사내가 물을 받아왔어. 지하에서 말일세......"


"수도라면 어딘가 수원으로 연결되는 관이 있다는 얘기일 텐데." 유마가 말했다.


사자는 더 이상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비골라를 번쩍 안아들고 지하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차피 다른 길은 없소. 자, 갑시다!"


그들이 다시 지하 유치장으로 달렸다. 등 뒤로 용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듯 불길이 치솟았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은 아까와 같은 서늘함을 유지한 채 파란빛을 품고 그들을 기다렸다.



04.

마스칼은 사령소가 불길에 휩싸여 불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진 그도 이 사령소의 일원이었다. 이미 더 불 붙일 데가 없어 보이는데도 마스칼은 연신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궁수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후 준비된 화살에 불을 붙인 후 쏘았다.


사막의 밤하늘에 불길이 일렁거렸다.


"내 병사들을 희생시킨 보람이 있어야 할 거다, 마스칼."


오사르가 말했다. 계엄군 사령관의 표정은 몹시 언짢았다. 불에 타는 사령소가 마치 제국군의 병영이라도 되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그의 꾹 다문 입가로 한 줌의 후회가 흘렀다.


"이렇게라도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마스칼이 사령관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놈들이 어떻게 지하 묘지를 빠져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갈 곳은 사령소 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반드시 끝장을 보겠습니다."


"네가 그렇게 자신했던 계획이다. 지하 묘지를 뚫고 나올 줄은 나로서도 정말 의외였다만."


마스칼이 고개를 돌려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마드 세라자드에게 그 사내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 검사 말입니다. 병사들의 희생은 정말 안타깝습니다만 그들을 미끼로 던져주지 않았다면 그 예민한 남자를 절대 속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놈의 목은 세라자드 만큼이나 가치가 있습니다."


"......"


오사르 알렉사이가 사내를 떠올렸다. 수복전의 끝을 완전히 망쳐버린 사내. 저 멀리 형체만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멀리서도 사내의 무용은 압도적이었다. 마스칼은 그 자가 공화국에서 온 검사라고 했다.


'어째서 공화국의 검사가 사막에 있는 것일까?'


오사르는 알 수 없었다. 그 공화국 검사가 사막으로 넘어온 이유도, 그가 민병대를 돕고 있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공화국 검사는 그가 그리는 사막의 미래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자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사막의 소드마스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1 111. 침입자 3 +5 20.10.17 546 24 12쪽
110 110. 침입자 2 +4 20.10.16 563 26 12쪽
109 109. 침입자 1 +6 20.10.15 584 24 13쪽
108 108. 그라운드 제로 4 +8 20.10.11 585 26 12쪽
107 107. 그라운드 제로 3 +7 20.10.10 570 29 12쪽
106 106. 그라운드 제로 2 +4 20.10.09 566 24 13쪽
105 105. 그라운드 제로 1 +8 20.10.08 596 27 12쪽
104 104. 테러 04 +8 20.10.04 561 26 12쪽
103 103. 테러 3 +6 20.10.03 570 22 12쪽
102 102. 테러 2 +8 20.10.02 562 29 12쪽
101 101. 테러 1 +9 20.10.01 574 28 13쪽
100 100. 개막 +14 20.09.13 604 31 12쪽
99 99. 시알라 +5 20.09.12 577 26 13쪽
98 98. 언더그라운드의 도시에서 02 +3 20.09.11 584 31 13쪽
97 97. 언더그라운드의 도시에서 01 +7 20.09.10 625 31 13쪽
96 96. 암살의 역사 2 +6 20.09.09 625 28 12쪽
95 95. 암살의 역사 1 +8 20.09.08 621 33 13쪽
94 94. 검은 탑의 왕자 3 +10 20.09.06 624 33 13쪽
93 93. 검은 탑의 왕자 2 +6 20.09.05 623 30 12쪽
92 92. 검은 탑의 왕자 1 +4 20.09.04 654 30 12쪽
91 91. 마할란트라 3 +8 20.09.03 652 32 12쪽
90 90. 마할란트라 2 +14 20.09.02 656 33 12쪽
89 89. 마할란트라 1 +6 20.08.30 690 32 12쪽
88 88. 지저인 3 +8 20.08.29 656 36 13쪽
87 Re 87. 지저인 2 +10 20.08.28 663 35 12쪽
86 Re 86. 지저인 1 +6 20.08.27 680 37 12쪽
85 Re 85. 언더그라운드 2 +7 20.08.26 702 37 13쪽
84 Re 84. 언더그라운드 1 +9 20.08.23 727 40 12쪽
83 Re 83. 그날 밤 +4 20.08.22 687 33 12쪽
82 Re 82. 다시 지하로 +10 20.08.21 705 3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