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조선 팔도에서 모여드는 의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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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의 높은 망루.
그곳에서 바라본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게 붉다. 동문, 서문, 남문, 할 것 없이 모든 게 붉은 선혈로 젖어있었다.
그만큼 살벌한 풍경이 지금이었다.
“끈질기군. 노부나가가 이렇게 나올 줄이야.”
내 말에 정여립이 대답했다.
“노부나가도 편치 않을 겁니다. 어쩌면 그가 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을 테지요.”
“그럴까? 본토에서 연락을 받았을까?”
“아직 아닐 겁니다. 저희도 소식이 없지 않습니까?”
“궁금하군. 지금쯤이면 교토에서 소식이 올 줄 알았는데.”
“성공할 겁니다. 주군의 사촌께서 분명 성공할 겁니다.”
“그래야지. 개선 스님은 물론 사카이 상인연합에서(외교적으로) 돕고 있으니깐.”
“교토를 점령한 후에는 사네이토 친왕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가 나서 북동부 영주를 설득한다면 더 쉽게 정국이 안정될 겁니다.”
“아시나, 난부, 안도 같은 영주들 말이지.”
“그렇습니다. 지금쯤 눈치만 보고 있을 자들이니 잘하면 아군을(사네히토 친왕) 돕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사네히토 친왕이 나선다면 그럴지도··· 그리고 사네히토 친왕은 어디에 있지?”
“한성을 떠난 지가 꽤 되었으니 아마도 통제영이나 진주성에 도착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가장 안전한 곳까지 내려왔다면 다행이군. 그는 상징적으로 중요해.”
“당연히 그렇지요. 요여문의 2천 조총병과 대동계 형제들이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시지요.”
“그래.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형님, 동래성의 포위가 풀리면 사네히토 친왕과 만나보셔야 합니다. 일본을 어떻게 할지? 대화를 나눠봐야지요.”
“저번에 했던 이야기 말인가?”
“네. 제가 나름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형님의 치우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 모두가 사이좋게 살아갈 방법을 말입니다.”
“무슨 말인 줄 알겠네. 하지만 지금은 동래성의 포위부터 풀어야지.”
그 말과 동시에 북소리가 울린다. 둥둥둥! 크게 울리는 것이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주목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한차례 혈전을 끝내고 물러선다.
지독히도 공성을 계속했지만, 성문이 뚫리지 않자 잠시 쉬고자 울리는 북소리였다.
그리고 한 무리의 왜병이 나서고 그중 커다란 뿔 투구를 쓴 왜장이 홀로 나왔다.
마시타 나가모리.
노부나가의 선봉장 중 하나. 칼 솜씨가 뛰어난 그가 앞으로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주군께서(노부나가) 여흥을 원하신다. 너희 중 나와 겨룰 자가 있느냐?! 있다면 나서라! 혹여 겁을 집어먹었다면 안 나와도 좋고.”
탕!
그 말과 함께 어디선가 조총 탄환이 날아왔다. 하지만 그가 서 있는 발끝 앞에 떨어지고 모래 먼지가 피어올랐다.
다른 말로 개소리는 그만하란 엄포.
충분히 쏘아 죽일 수 있었지만, 살려줬으니 물러가라는 협박이 지금이었다.
하지만 마시타 나가모리는 한 발 더 앞으로 걸어가 가슴을 탕탕 두들겼다.
“하하하! 조선 놈들은 겁에 질려 총포나 쏘겠지. 하지만 너희 중 규슈 병사가 많은 걸 안다.
너희도 겁쟁이가 되고 싶으냐?! 아니면 나와 함께 칼을 나눌 테냐?!”
그 말에 우우우우! 하는 야유가 쏟아졌다. 이는 규슈 병사가 내뱉는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에 힘이 없는 건 분명했다. 그들도 칼을 나누고 당당히 수급을 쳐내고 싶은 호승심이 넘치는 자가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부하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한다.
나는 수리검을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 중 칼 솜씨가 뛰어난 만력쇄를 내보냈다.
만력쇄는 닌자 출신으로 쇠사슬이 연결된 추를 잘 다뤘고 요인 암살은 물론 세작으로도 출중한 능력을 보인 부하였다.
만력쇄는 수리검의 명령으로 성문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투를 지켜보았다.
붕붕 내던져지는 만력쇄의 육중한 추. 1.5미터 길이의 만력쇄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마시타 나가모리의 검날을 붙잡았다. 그리고 잡아당기자 끌려 온다.
놈은 붙잡힌 검날에 당황하며 허리춤의 짧은 검을 다시 뽑았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만력쇄가 수리검을 내던졌다.
툭, 투둑!
연속으로 날아간 수리검이 가슴팍에 박히자 피분수를 뿜어낸다.
마시타 나가모리는 주저앉았다. 가슴팍을 꽉 붙잡고 이맛살을 잔득 굳혔다.
그리고 내뱉는 말이란,
“이건 사무라이의 싸움이 아니요. 비겁합니다. 이런 자를 상대로···.”
마시타 나가모리는 더는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욱! 하고 피를 토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중독된 상태였다. 만력쇄가 내던지 수리검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와아아아아! 이겼다.
[저건 반칙이다! 독을 썼어?! 저딴 건 무사들의 대결이 아니야.]
웅성웅성.
소리치는 적병과 환호하는 아군.
그리고 저 멀리 구겨지는 표정의 노부나가가 있었다. 놈도 화가 나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고, 그 고함에 또 다른 자가 나서고 있음을 보았다.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후대에 검성이라고도 불리는 자. 검의 달인.)
노부나가는 야규 무네노리를 내보냈다.
노부나가의 수행원이자 무술 사범이기도 한 그가 앞으로 나서자 분위기부터 달랐다.
하지만 만력쇄도 만만치가 않다. 한 놈 잡았는데, 또 다른 놈을 못 잡을까?
수리검을 날리고, 만력쇄를 던지며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주었다.
하지만 밀린다.
야규 무네노리의 검 끝에 만력쇄는 튕겨 나가고 던져진 수리검은 맞추지를 못한다.
발끝이 가볍다. 후려쳐지는 검날에 만력쇄가 이겨낼 게 아니었다.
웅성웅성. 전장의 분위기가 뒤바뀐다.
아군이 밀리는 경우가 없었는데 노부나가가 사람을 제대로 보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수리검은 나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고 보이는 분위기도 비슷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히 부하를 죽일 순 없지. 돌아오게 하라. 한 놈 잡았으니 충분해.”
그 말에 북을 쳤다.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서라고 신호를 보냈다.
만력쇄는 이맛살을 좁혔지만, 그가 상대할 사무라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돌아가려고 하자 야규 무네노리가 따라붙는다. 절대 돌아가지 못하게 움직인다.
무겁던 발걸음은 빨라지고 검 끝은 날카로웠다.
이는 노부나가가 원하는 것.
검술 사범이자 무예가인 야규 무네노리는 만력쇄를 놓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북소리는 커지고 또 다른 자가 나서게 되었다. 굳게 닫혔던 성문이 열리고 창을 붙잡은 자가 앞으로 나섰다.
처음 보는 자.
저런 자가 아군에 있었던가?
조선의 갑주를 걸쳤고 허리춤에는 짧은 환도를 찼으며 손에는 창을 붙잡았다.
“누구지?”
내 말에 신립이 대답했다.
“정기룡입니다. 훈련원 봉사로 한성에서 데려왔지요. 무예 실력은 제가 보증할 테니 지켜보시지요.”
그 말에 끄덕였다. 정기룡이면 모르는 인물은 아니었다. 곽재우만큼이나 무예가 뛰어난 장군. 그가 신립과 함께 있는 걸 알았다면 그도 밖으로 내보내 별동군을 이끌게 했을 텐데. 아까운 장면이었다.
“도순찰사의 추천이니 믿어 보지요.”
그 말처럼 정기룡은 잘 싸운다. 야규 무네노리를 상대로 엄청난 기량을 보였다.
야규 무네노리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또한, 야규가 쫓던 만력쇄가 그 자리에 멈춰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도망칠 땐 언제고 이제는 여유를 가진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물론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그건 도의에 어긋난 것을 알고 있기에 팔짱을 낀 채 멈춰 있었다.
지금 싸움은 자존심 대결.
조선 장군과 일본군 무술 사범의 대결.
창끝이 움직인다. 불꽃이 이리저리 튀고 맹렬한 움직임으로 검끝이 흔들린다.
탕, 타다다다당!
탕, 타다다다당!
연속기.
정기룡의 화려한 창술. 그것에 맞서 야규 무네노리의 검술도 뛰어났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야규 무네노리의 움직임이 굳어간다.
어째선지?
무겁다.
초반 보여줬던 화려한 보법도 사라지고 우뚝 선 거목처럼 발이 굳는다.
그리고 원인을 찾겠다는 듯 만력쇄를 노려보았다.
만력쇄는 누런 이빨을 내보였다. 검은 천으로 감싼 얼굴에서 웃음이 보였다.
그리고
만력쇄는 손을 들어 무언가를 보인다. 그곳에는 작은 바늘 같은 게 있었다.
“다 피한 줄 알았겠지.(일본어로 대화)”
그 말을 들은 야규 무네노리는 화를 냈고, 만력쇄를 죽이고자 한 발짝 움직였다.
하지만 만력쇄는 뒷걸음을 놓는다. 이 싸움과 무관하다는 듯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움직인 정기룡의 창끝에는 자비가 없었다.
서걱! 베어졌다.
야규 무네노리의 어깨춤을 긁고 지나쳤다. 야규 무네노리는 그걸 보자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만력쇄에서 정기룡에게.
대결 중 시선을 돌린 대가는 분명했다.
서걱, 서걱, 베어져 간다.
팽팽한 승부에서 이제는 혈인으로 변해간다.
정기룡은 창을 내려놓고 환도를 뽑았다. 긴 사거리의 장점을 버리고 정정당당하게 환도를 내리쳤다.
서걱, 서걱, 피가 뿌려지고
다시금 서걱, 서걱, 온몸이 만신창이로 변한 야규 무네노리는 포효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더는 정기룡의 환도를 피하지 못하고 수급을 내주고 말았다.
툭, 떨어지는 머리.
정기룡은 야규 무네노리의 수급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조선 연합군이 함성을 지른다.
-와아아아아!!!!!!! 이번에도 이겼다!
-와아아아아!!!!!!! 정기룡 장군이 야규 무네노리를 잡았어.
엄청난 함성이 요동쳤다. 사기를 꺾겠다던 노부나가의 계획은 사라졌고, 그 반대로 엄청난 사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야규 무네노리의 수급을 든 정기룡이 만력쇄에게 물었다.
“아까 일본말로 뭐라고 한 것이요? 분명 뭔가 보여주며 말했던 것 같은데.”
그 말에 만력쇄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별거 있겠습니까? 저희가 잘하는 걸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지체 높은 무사들은 할 수 없는 그런 것이지요.”
“혹여 부정하게 끼어든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정기룡 장군께서 당당하게 얻어낸 승부이니 기뻐하셔도 좋습니다.”
만력쇄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힘겹게 걷기 시작했다. 지금껏 자세히 보지 못해 몰랐지만, 그의 옷에 혈흔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워낙에 시커먼 복장이기에 몰랐을 뿐.
만력쇄의 상처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만큼 야규 무네노리는 어려운 상대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또다시 공성이 시작되었다.
9만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노부나가의 혈전.
그걸 막기 위해 6만 병졸로 간신히 막아낸다.
다른 말로 군병의 숫자가 조금씩 변해간다.
노부나가의 9만에서 6만으로.
조선 연합군은 6만에서 4만으로.
또 며칠이 흘러
노부나가, 6만에서 5만으로.
조선 연합군, 4만에서 3만으로.
동래성은 온통 시뻘건 핏물뿐이다. 죽어가는 병졸과 장수들이 넘쳐났다.
혈전과 난전.
지켜야 하는 자와 뚫어내야 하는 자 사이에 처절한 혈전이 지금이었다.
나는 피바다 사이에서 검을 휘둘렀다. 3만 병졸을 가지고 미친 듯 싸웠다.
노부나가는 나만 죽이면 끝나는 전쟁이라고 하였고, 지금쯤이며 조선왕도 사로잡혔을 거라고 소문을 만들어내었다.
다른 말로 조선 왕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느냐가 주요 관점이었다.
도망쳤을까?
그가 의주까지 물러나며 아군이 계속 싸울 수 있는 명분을 내주고 있을까?
그래야 할 텐데.
그 사이에 희망이 전해왔다.
아니, 희망이 아니라 가혹한 명령이던가?
선조가 그의 아들을 내던졌다.
다테 마사무네의 3만 병력을 막기 위해 광해를 출진시켰다.
그것도 1만밖에 안 되는 병력을 내보내 막으라고 명령했단다.
“후우-.”
어디서 싸우려고 할 텐가? 그 작은 병력을 가지고.
치열한 혈전 중에도 광해의 소식이 들리고
또, 그걸 들은 노부나가는 미친듯 소리치기도 하였다.
“하하하하! 조선의 세자가 죽으려고 출진했다지. 분명, 다테 마사무네가 그의 수급을 끊어오겠지. 이번에는 세자의 수급으로 술잔을 만들어보자.”
웃었다. 노부나가는 웃으면서 아군을 흔들었다.
모두가 지친 전쟁 중에도 놈의 모략은 계속해서 들어왔다.
하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광해를 돕기 위해 류성룡과 이산해가 함께하고 있었고 류성룡의 추천으로 함께한 장수의 이름이 낯설지가 않았다.
권율.
광해를 보좌하는 장수의 이름은 명장 권율.
그것에 더해 조선팔도의 의병들이 광해에게 합류하고 있음을 들었다.
김덕령, 홍계남, 고경명,
금강산에서 내려온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 서산대사가 묘향산에서 내려와 의병들과 합류했다.
2만에 가까운 군병, 의병, 승병이 충주에서 집결했음을 들었다.
나는 서산대사가 내려왔다는 말에 옛 생각이 떠올랐다.
이율곡, 서산대사, 그리고 전우치로 이어졌던 기억에 피식 웃음을 흘리기도 하였다.
잘하면 되겠는데.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야.
권율, 류성룡, 이산해에 와 더불어 이름난 의병들이 함께했다고 하니 충주에서 이겨낼 수도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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