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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이아르 님의 서재입니다.

심연의 바다를 항해하는 어느 마왕님의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투덜이아르
작품등록일 :
2024.03.29 11:37
최근연재일 :
2024.05.06 14:44
연재수 :
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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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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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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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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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성마전 - 탐욕의 서 35

DUMMY


하프 엘프인 시그리드는 엘프들의 어머니인 세계수가 간신히 보이는 먼 외곽의 숲속에서 살고 있었다.


얼마전 늙은 그의 인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제 그녀에게 남은 가족은 엘프 어머니뿐이다.


“오늘은 뭔가 괜찮은 약재를 찾아야 할 텐데···”


하지만 하나 남은 가족인, 엘프 어머니조차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육체적인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 때문에 말이다.


어머니는 배우자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가족도 아니라는 건가···’


시그리드가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어머니의 병세는 날로 심각해졌다.


마치 생을 포기한듯한 어머니에게 잠시 짜증이 났지만, 그것도 잠시다. 어찌되었든 당장 급한 건 어머니의 병환을 늦춰줄 약재였다.


‘세계수의 근처에는 상급 약재들이 많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하프엘프인 그녀는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그녀와 교류하려는 엘프도 없었다.


엘프들의 입장에서 인간과 혼혈인 하프엘프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하프엘프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과 원숭이의 혼혈과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원숭이와 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엘프가 인간과 관계를 가지는 것도 괴기스럽고 흉악한 일이었다. 그 결과물인 시그리드는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죄악의 결과물일 뿐이다.


“살아있는 것 만도 기적일까?”


그녀의 어머니는 세계수의 최고 관리자인 하이엘프 중 하나였다. 세계수를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시그리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만 남았을 뿐이다.


그녀도 어머니도 그리고 아버지도, 세계수의 근처에 머무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엘프들은 그녀의 가족을 추방했고, 그렇게 세계수의 영향에서 멀어진 어머니는 계속해서 쇠약해지고 있었다.


원래라면 1만년 이상의 수명을 가지고 있어야 했을 그녀는 천년을 갓 넘을,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간신히 성인으로 인정받고 아직 성장기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을 나이에 이미 늙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더 최악은 아버지다. 인간이었던 아버지의 수명은 너무도 짧아서, 고작 100살도 살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도 급작스러웠고 아버지를 사랑했던 어머니는 더욱더 빠르게 죽어갔다. 덕분에 이제 갓 200살이 넘은 시그리드는 다른 엘프였다면 아직 뛰어놀기 바쁜 어린아이였을 시기부터 남은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자리잡은 숲은 세계수의 외곽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완전히 세계수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곳은 아니었다. 더 정확히는 엘프와 인간 국가 사이의 중립지역이었다. 인간도 엘프도 오지 않는 곳이기에 사냥감은 많았다.


시그리드는 그곳에서 사냥꾼으로 성장했다. 주 사냥감은 사슴과 늑대다. 그것들을 잡아 고기를 먹고 가죽과 이빨은 인간들의 장사꾼에게 가져다 팔았다.


인간은 엘프와 달리 그녀를 천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다.


시그리드의 인간 아버지는 전쟁영웅이었고 용병출신으로 기사의 지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엘프 어머니가 엘프들에게 경원시 당하고 시그리드가 흉물이라 천대받는 것과 달리 그녀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인근 인간의 영주들에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명예를 아는 기사라 불렸다.


“너무 빨리 죽는 것만 아니라면 인간들과도 계속 어울려 살았을 텐데···”


아버지의 영향으로 시그리드도 어릴 때부터 인간과 어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인간은 너무도 빨리 죽었다. 엘프가 인간을 동급의 이성체로 취급하지 않는 것도 수명이 가장 큰 이유였다.


엘프들의 눈에는 인간이 하루살이처럼 보였을 거다. 그런데 그 하루살이가 자신들과 비슷한 외형을 하고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한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혐오를 넘어서 공포에 가깝다.


“내가 봐도 차별받을 만했지···”


시그리드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산길을 걸었다.


신세타령은 이정도로 하고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 든 약초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오늘은 그동안 눈여겨 봐 둔 절벽을 오를 생각이다.


수직으로 높게 솟아오른 절벽은 하프엘프인 그녀조차도 쉽게 오를 수 없는 곳이지만, 이제 근처에서 찾아보지 않은 곳은 그곳이 유일했다.


세계수의 근처로는 갈 수 없고 인간들의 숲에는 갈 이유가 없다. 인간에게 효과 있는 약초와 엘프에게 효과 있는 약초는 달랐고 세계수에서 멀어질수록 엘프에게 효과 있는 약초는 찾기 어려웠다.


“그러니 오늘은 반드시···”


이곳에서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약초를 찾아야 했다.


시그리드가 허리춤에 달아 뒀던 가죽장갑을 끼고 장비를 확인했다. 그리고 힘차게 등반을 시작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화르르륵.


멀리서 거대한 불길이 보였다. 그리고 회색 연기와 함께 숲이 불타올랐다.


시그리드가 머물고 있는 숲은 아니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시그리드가 살고 있는 곳과 반대쪽에 있는 숲이다. 하지만 상황은 명확했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화재는 아니었다. 엘프들이 보호하고 관리하는 숲에서 그런 화재는 발생할 수 없었다.


“켈 크라운 제국 쪽인가?”


시그리드는 찾으려던 약초를 포기하고 다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알기로 최근 인간들은 급격히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다른 아인종들은 모조리 전멸하거나 인간들의 노예가 되었고 이제는 공공연히 엘프들을 노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인간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고 공경을 표하던 자들이 지금은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전쟁을 벌인 건가?”


인간의 영역은 이미 엘프들의 영역을 포위하고 있었다. 엘프들은 세계수가 있는 숲을 벗어날 수 없었고 인간들처럼 급격히 인구수를 늘릴 수도 없었다.


엘프들의 세계는 일 만년 전에도, 십 만년 전에도 지금과 같았고 인간의 세계는 100년전과 10년전이 달랐다. 거기다 엘프의 영역에는 인간들이 원하는 물건이 많았다. 마법적인 물건과 희귀한 연금술 재료가 가득했다. 아니 인간은 엘프 그 자체를 탐하기도 했다.


인간의 기준에서 모든 엘프는 미형이다. 그런데 장생종이라 쉽게 죽지도 않는다. 거기에 더해서 아이까지 낳을 수 있다.


노예로 부리기에는 이보다 적합한 존재가 없었다.


그동안은 인간의 세력이 약해서 감히 넘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모든 조건이 인간들의 탐욕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조용했던 게 더 의문일 정도로 말이다.


전쟁은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고 나름 준비도 해 뒀다. 그래서 시그리드가 경계하는 것도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엘프들이 문제다. 아니 여전히 엘프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어머니가 문제였다.


“엄마!”


시그리드가 집으로 돌아왔다. 다급한 마음에 거칠게 문을 걷어 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역시 이미 늦었다. 그녀가 예상하던 상황은 이미 벌어져 있었다.


“오늘은 일찍 돌아왔구나?”


담담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푸른색 전령조가 쥐어져 있었다. 엘프들이 긴급 상황에 사용하는 전령조였다.


“엄마! 이건 아니야!”


다른 건 볼 것도 없었다. 전령조와 어머니의 눈빛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기는 충분했다. 어머니는 인간들과의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 몸으로 전쟁에 참여할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이야!”


시그리드가 절규하듯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내 의무다.”


“의무는 무슨 의무! 그것들은 우리를 버렸어!”


“하지만 나는 형제자매를 버린 적이 없지.”


“그런 건 일방적인 희생이라고!”


“하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


희생은 당연하지 않다. 먼저 버린 자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희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그럴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삶을 포기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녀의 의견 따위는 무시한 채 행동을 결정지었다.


슬픔과 분노, 체념이 뒤섞인 시그리드가 그동안 가슴에 담고 있던 속내를 토해냈다. 거칠게 소리질렀다.


“엄마에게 나는 뭐야? 나는 중요치 않다는 거야? 나는 평생 엄마를 위해 살았는데? 내 희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야?”


평소와 다른 딸의 격정적인 모습에 어머니가 잠시 놀란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담담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니 오히려 그 눈빛에는 다행이라는 안도감까지 떠올랐다.


“엘프와 인간의 혼혈은 여러모로 둘 모두와 다르다고 하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는 이미 장성했고,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났다는 이야기다. 내 귀중한 아이야.”


시그리드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잠시 울화가 치솟아 잊고 있었지만, 엘프는 독립적인 존재다. 자식을 키우는 것도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뿐, 그 후로는 둘 모두 독립적 존재로 되돌아간다. 서로가 서로의 생을 살아갈 뿐 간섭하는 일은 없다.


“어··· 엄마.”


지금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성체로 인정했다는 것도 그런 의미다. 그녀는 버려질까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어머니는 그녀가 성체가 되었다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다. 이제 떠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이 엘프와 인간, 아니 엘프와 하프엘프의 인식차이다. 애초에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다.


“어··· 엄마··· 나 아직···”


시그리드가 떨리는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그 손길을 거부했다.


“너는 준비가 끝났다. 그리고 이제 나도 준비를 해야 하지.”


어머니는 조용히 자신의 무구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시그리드는 말릴 시도조차 못한 채 복잡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만 봤다.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엘프와 인간들의 1차 대전쟁은 엘프들의 승리로 끝났다.


세계수의 힘을 뒷배경으로 삼은 엘프는 인간들과의 전투를 손쉽게 이겨냈다. 하지만 인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인간들의 기준에서는 50~100년 주기) 엘프들을 공격해 왔다.


결국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밀려드는 인간들에게 엘프들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빠르게 성장하고 빠르게 배우는 인간과 느리게 성장하고 느리게 배우는 엘프라는 종족적 한계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숲을 포기해야 합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다고요.”


“최소한 어머니 나무께서 새로운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 든 버텨야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요? 어떻게 버티냐고요?”


“지금 그 방법을 찾으려고 여기 모인 것 아닙니까? 다들 한탄만 하지 말고 방법을 생각하세요!”


세계수의 뿌리 아래에 위치한 하이엘프들의 회의장에서도 연일 긴급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만 반복될 뿐 새로운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나올 수가 없었다.


회의는 새벽별이 뜰때까지 지속되다가 끝났다. 하지만 제기되었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회의일정이 잡혔을 뿐이다.


끼이잌.


하이엘프 그라시아가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자신 혼자 사는 집에 말이다.


“하아··· 오늘도 왔구나.”


익숙한 기운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가니 역시 그녀의 예상처럼 그녀의 딸이 와 있었다.


장성한 딸이 어미를 찾아오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가끔씩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딸은 아니다. 거의 매일 그녀의 집을 찾아온다. 이건 분명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네가 가진 인간의 피가 이런 행동을 원하는 거니?”


하프 엘프는 엘프와 인간의 혼종을 말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존재는 아니다. 하프 엘프는 엘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흉물이다.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였다.


“어··· 엄마. 오늘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하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내 딸아?”


“아하하. 그게 요즘도 계속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약을 좀 구해 왔어.”


주섬주섬 배낭에서 꺼내 놓은 약은 하이엘프로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딸 아이가 어디서 이런 걸 얻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시간과 노력 (어쩌면 목숨을 건)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내 딸아. 너는 어미가 죽어 가는 것이 싫은가보구나.”


세계수로 돌아온 후 육체의 노화는 다시 느려졌다. 하지만 정신적인 붕괴는 아니다.


배우자를 잃은 이상 그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딸의 입장에서 어미가 죽어가는 것이 즐거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녀가 죽어가는 것은 정당한 슬픔 때문이다. 그 슬픔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녀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당연하잖아!”


당연한가? 하이엘프 그라시아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도대체 뭐가 당연한지를 모르겠다.


엘프의 사고 방식은 아니다. 인간이었던 남편과도 다른 것 같다.


그리시아는 딸과의 대화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장성한 딸이 이렇게까지 자신의 인생을 파탄 내며 어미를 쫓아다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사랑보다는 집착에 가까워 보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라시아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성적인 그녀는 오늘도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내 딸과의 생각 차이를 좁혀 볼 생각이었다.


“나는 네 아버지를 만나 행복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망설임 없이 같은 행동을 할 거다. 같은 결론을 낼 거다.


“그래서 뭐? 한 때 행복했다고 함께 죽어가야 한다는 거야? 이상하잖아?”


이상한가? 그라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게 어째서 이상한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그녀의 딸은 그녀를 모욕하려는 목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닐 거다. 하지만 그런 가정이라면 더더욱 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 남자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남자와 행복했던 기억은 여전히 그녀를 기쁘게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 남자가 죽었다는 슬픔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다.


두개의 기억은 별 개고 하나로 다른 하나를 덮을 수는 없다.


엘프는 느리게 배우지만 망각을 모르니 잊을 수도 없고, 잊을 수 있다 해도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나쁜 기억을 버릴 수는 없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듯, 행복은 불행이 있기에 더욱 빛난다.


불행은 반길 수 없는 불청객이지만, 행복을 만들기 위한 필요악이기도 하다.


거기다 불행을 부정한다면 어디까지 부정해야 할까? 정확히 어디까지가 행복일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수 없고 제시할 수 있다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삭제한다면? 그런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때의 자신은 이전의 자신과 같은 존재일까?


그리시아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배우자가 죽은 엘프는 서서히 죽어간다.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정신적인 죽음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한 것이다. 행복했던 것만큼 상실의 슬픔도 강할 수밖에 없다.


“너도···”


딸 아이도 아버지와의 행복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남편은 아이에게 각별한 신경을 썼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하고 세상 어디에 떨어져도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게 길러냈다.


어미인 그녀가 질투할 정도로 거의 모든 애정을 하나뿐인 딸에게 쏟아냈었다.


“너는 아버지에 대한···”


“몰라! 그렇게 빨리 죽은 사람을 어떻게 기억해!”


하지만 딸은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 이전의 기억에 지금의 현실을 덧칠해 입힌 거다. 그냥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으니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다가 결론이다. 정상적인 엘프라면 갓난아이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딸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바라보며 미래로 걸어갈 뿐이다.


엘프는 느리게 배우지만 망각을 모른다. 인간은 빠르게 배우지만 종종 자신들의 기억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하프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하프는 과거를 왜곡한다. 과거 따위는 현실로 덧칠해 버릴 뿐이다.


“그렇구나.”


그라시아는 딸의 다름을 존중한다. 그렇기에 이제서야 깨닫는 사실이 있었다.


다행이었다. 오랜 대화중에 드디어 만족할 만한 결론이 나왔다.


여전히 딸의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원하는 결과로 이끌 수는 있다.


“시그리드. 사랑스러운 내 딸아.”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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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성마전 - 탐욕의 서 39 24.05.03 23 1 9쪽
39 성마전 - 탐욕의 서 38 24.05.02 24 1 5쪽
38 성마전 - 탐욕의 서 37 24.05.01 31 1 9쪽
37 성마전 - 탐욕의 서 36 24.04.30 25 1 12쪽
» 성마전 - 탐욕의 서 35 24.04.29 24 1 17쪽
35 성마전 - 탐욕의 서 34 24.04.28 29 1 18쪽
34 성마전 - 탐욕의 서 33 24.04.27 26 1 11쪽
33 성마전 - 탐욕의 서 32 24.04.26 29 1 13쪽
32 성마전 - 탐욕의 서 31 24.04.25 28 1 12쪽
31 성마전 - 탐욕의 서 30 24.04.24 33 1 9쪽
30 성마전 - 탐욕의 서 29 24.04.23 36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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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성마전 - 탐욕의 서 27 24.04.21 43 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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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성마전 - 탐욕의 서 16 24.04.10 58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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