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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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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5.03.23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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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글자
21쪽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3)

DUMMY

납치범 일당은 마차를 버린 후 날이 완전히 저물 때까지 말을 달렸다. 루도와 안젤리카는 각각 나젠크루거와 토드의 말에 같이 타게 되었는데, 문제는 타게 된 아이들이 승마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나왔다. 루도는 아예 말을 처음 타본 것이었고, 안젤리카는 승마를 배우긴 했으나 운동신경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추격자의 존재를 알아챈 납치범들은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고, 질주(galloping)상태의 말을 타는 것은 어린 아이에겐 상당한 부담이었다. 심하게 흔들리는 말 위에서 아이들은 메스꺼움을 호소했지만 그런 것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납치범들은 아이들의 의견을 묵살한 채 더욱 힘차게 달려나갔고, 결국 안젤리카는 말에 탄지 30분도 되지 않아 구토를 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녀는 토사물을 쏟아내기 직전 황급히 몸을 숙이며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토사물은 옷에 묻지 않은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오히려 그녀를 태우고 있던 나젠크루거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납치범들은 속도를 약간 늦추었지만, 이미 안에 든 것이 모조리 목구멍까지 들어찬 아이들에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루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하늘만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스쳐가는 사물들만 봐도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쏟아낸 안젤리카와 달리 그는 잠재적 구토예상자였으므로, 그를 태우고 있는 토드의 얼굴도 루도만큼이나 엉망이었다.

말들이 지쳐서 거친 날숨을 뱉어낼 즈음에야 일행은 멈추었다. 이미 어둠이 사위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도로 곁에 떨어진 공터로 이동했다. 듬성듬성 잡초가 자라있었지만, 다른 곳에 비해 시야가 트이고 행동을 방해하는 나무도 없어 노숙하기에 알맞은 지형이었다.


“후우, 말 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란 말이야.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것 같군.”


슬라크는 진저리를 치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른 자들도 각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젠크루거는 자신의 말을 나무에 묶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만큼 달려왔으니 추격자들이 도착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만약 숨겨둔 마차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목표를 놓친 것이라 판단해 이미 돌아갔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지. 더 가고 싶어도 말들이 힘들어해서 안 되겠군. 끼니도 때워야 할 테니까. 잘박, 불 피울 땔감 좀 모아다 주게.”


잘박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숲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왜소한 체구에 비쩍 마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자잘한 명령도 군소리 없이 따르는 인물이었다. 그는 입속으로 ‘땔감’이라는 단어를 웅얼거리며 기계적인 동작으로 나뭇가지를 줍기 시작했다.


“우우.....나 아직도 속이 울렁거려.”


루도는 흙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진 채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조금이라도 땅바닥을 향하면 곧장 구토가 올라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밤바람이 차가웠지만 지금 같은 상태라면 오히려 고마웠다. 오싹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어느 정도 메스꺼움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눈동자만 굴려 옆을 바라보니 안젤리카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시달렸기 때문인지 그녀의 눈동자가 몰라보게 퀭해져 있었다. 파리한 눈으로 쓰러지듯 나무에 기대어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같이 고생한 루도의 눈에도 안쓰러워보였다.


“말 같은 거 다시는 타고 싶지 않아....”


“안제, 몸은 좀 괜찮아? 먹은 게 없어도 나올 건 다 나오는구나. 신기하다.”


“아까 말린 살구 먹었잖아~.”


안젤리카가 루도의 짓궂은 농담에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루도는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배고픔과 추위가 우선순위로 올라섰다. 다시 어디선가 밤바람이 불어와 일행이 있는 공터를 훑고 지나갔다.

오싹한 한기에 루도는 어깨를 감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젤리카는 아직도 메스꺼움과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달리 추위를 피할 방도가 없다면, 서로 붙어 있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으므로 루도는 비척비척 일어나 안젤리카 곁으로 다가갔다. 곁에 바싹 붙어서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에 이름 모를 날벌레가 붙어 있었다. 루도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붙은 벌레를 집어냈다. 멍하니 있던 안젤리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어맛! ...응? 왜 그래? 나 얼굴에 뭐 묻었어?”


이렇게나 멍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루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정신 좀 차려라. 아직도 속이 안 좋아?”


“힝...나 죽을 것만 같아. 속이 완전히 뒤집혔어.”


루도가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주자 안젤리카는 피곤한 미소로 감사를 표했다. 그녀 역시 추위를 느꼈는지 루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강제된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서로밖에 없었기 때문인지 이제 둘은 10년 지기마냥 친해져 있었다. 둘은 몸을 바싹 붙인 채 잡담을 떨고 있는 납치범들을 응시했다. 몸을 기대고 있자 서로가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둘 다 옷을 가볍게 입고 있을 때 잡혀온 거라 숲 속의 밤은 오싹하게 추웠다.

잘박이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모아오자 토드가 그 위에 불을 피웠다. 이내 납치범들이 모닥불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루도와 안젤리카는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발갛게 빛나는 모닥불만 쳐다보고 있었다.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려왔지만 납치범들과 한 자리에 있는 것만큼은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눈을 말똥거리는 아이들이 보기 딱했던지 나젠크루거가 장작을 일부 골라내 아이들 앞에 모닥불을 피워주었다.


“경계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날씨에 멀뚱히 앉아있다간 동상 걸린다.”


그는 작은 모닥불과 함께 모포를 한 장 가져와 아이들에게 덮어주었다. 1인용이었지만 어른이 쓸 수 있도록 제작된 거라 아이 두 명이 덮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모포로 몸을 감싸자 추위가 한결 가시는 기분이었다. 안젤리카는 모포 자락을 그러쥐며 몸을 웅크렸다. 불이 이내 다른 나뭇가지에 옮겨 붙으며 타닥타닥 타오르기 시작했다. 루도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넘실거렸다.


“한결 낫다. 그치?”


“응....따뜻해....”


루도는 커져가는 불꽃이 신기해서 나뭇가지를 잡히는 대로 던져 넣었다. 큼지막한 나뭇가지는 루도가 모두 주워가 버렸기 때문에 안젤리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땅에 흩어져 있는 낙엽을 모아 모닥불에 던졌다. 하지만 낙엽들은 공기저항 때문에 절반도 못 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안젤리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곧 나젠크루거가 귀리빵과 말린 육포를 가져왔다. 이미 한쪽에서는 납치범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육포 굽는 냄새가 그윽하게 풍겨왔다.


“배가 많이 고플 거다. 넉넉하게 가져왔으니 느긋하게 먹어라. 육포는 대충 불에 그슬린 후에 먹으면 된다. 고기 굽는 법은 알겠지?”


루도는 음식을 받아들며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고기 굽는 법을 몰라서 인상을 쓴 것은 아니었다.


“스튜나 수프 같은 것은 안 먹나요?”


나젠크루거는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어린아이의 투정이라고 받아들이고는 웃었다.


“재료는 있지만, 요리할 시간이 부족하지. 허기를 채우고 조금 더 쉬다가 출발할 거다. 일단은 그걸로 참도록 해.”


“이 밤에 움직인다고요? 아저씨는 잠도 없어요?”


루도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재차 캐묻지는 않았다. 그도 그들이 서두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추격자들이 어느 위치에 와있는지 파악이 안 되는 이상, 안전거리라고 할 만한 곳까지 최대한 움직여놓는 것이 좋았다. 시야가 어두워 낮에처럼 전력으로 달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밤을 새워 가면 격차를 상당히 벌릴 수 있을 터였다.

루도는 모닥불로 돌아가는 나젠크루거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아저씨! 이런 쌀쌀한 날씨에는 따뜻한 국물을 먹어야 한다구요! 수프 같은 거!”


나젠크루거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잠시 몸을 멈칫거린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현 상황에서 아이들을 신경 써주는 것은 나젠크루거 뿐이었다. 루도는 저녁으로 받은 귀리빵을 반으로 쪼개 큰 쪽을 안젤리카에게 건넸다. 빵을 건네받는 그녀의 눈동자에 그늘이 져 있었다. 루도는 빵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왜 그래? 빵 싫어해?”


“그게 아니라....저 사람들 밤을 새워 말을 탈 거라고 했잖아. 또 말 위에서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럼 또 멀미 날 텐데.....”


“흠, 뭐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지금 가타부타 할 처지는 아니니까. 일단 밥이나 배불리 먹어둬. 언제 또 굶을지 모르는데.”


안젤리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한 입 물었다. 그녀는 입이 작은 데다 오래오래 꼭꼭 씹어 먹는 습관이 있는지 빵 한 조각을 먹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그녀가 빵조각을 삼켰을 때 루도는 이미 말린 육포를 모닥불에 그을리고 있었다. 루도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안제, 배 안 고프니? 난 뱃가죽이 달라붙을 것 같은데.”


“배야 물론 고프지만....루도가 너무 빨리 먹는 거 아니야? 그러다 체해~.”


“흐음~? 난 네가 너무 느리게 먹는 거라 생각했는데...우리 집은 이거보다 훨씬 빨리 먹어. 조금만 머뭇거리다간 자기 몫마저 사라져버리거든.”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루도는 안젤리카가 자기 몫의 빵을 다 먹을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리고는 구운 육포를 주욱 잘라 안젤리카에게 건넸다. 올리브기름을 발라 말린 건지 고소한 냄새가 입 안에 퍼졌다. 안젤리카는 육포를 끊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육포 귀퉁이를 입에 물고 양손으로 잡아당겼으나, 고무줄마냥 쉬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빨 자국만 남은 육포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우응~. 너무 질겨.”


“응? 질겨? 잘 익혔는데...더 익히면 탈 거야.”


옆을 보니 루도는 그 커다란 것을 한입에 물고는 질겅질겅 잘도 씹고 있었다. 어찌나 맛나게 씹는지 지켜보던 안젤리카가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루도는 이것저것 잘 먹는구나. 이빨 힘도 나보다 훨씬 센 것 같아.”


“그엉가? 근애 이언 거 아우거오 아이야.”


육포를 입 안 가득 머금고 말하느라 발음이 엉망진창이었다. 루도가 입 안에 든 것을 갈무리해 열심히 씹는 동안 안젤리카도 열심히 오물거려 결국 육포 한 조각을 찢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는 고기조각을 입에 넣고는 꼭꼭 씹기 시작했다. 루도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인데도 안젤리카의 모습은 어딘가 조신하고 기품이 있었다. 음식을 씹는 데도 예법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심히 고기를 씹던 안젤리카는 문득 루도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또 뭐 달라붙었어??”


“아니, 밥을 참 열심히 먹는다 싶어서.”


“푸훗, 그게 뭐야?”


안젤리카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양 볼에 귀여운 보조개가 만들어졌다. 루도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안젤리카는 평소의 모습도 예뻤지만, 미소 지을 때 가장 광채가 났다. 즐거운 듯한 눈웃음에 귀여운 보조개, 그리고 습관처럼 살짝 입을 가리는 그녀의 행동 등 모든 것이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곁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쁘게 해주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곳에 있어선 안 됐다. 그녀만큼은 이녜스처럼 헛되이 죽게 만들 수 없었다. 아직 납치목적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상 위험은 여전히 잠재되어 있었다. 루도는 육포를 마저 구우며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데려가는 곳이 어디든지, 루도와 안젤리카가 지내던 집보다 안락할 수는 없었다. 돌아가야 한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젠크루거의 말대로라면 추격대의 도착을 마냥 기다리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단지 끌고 다닐 뿐이지만 언제 납치범들이 마음이 변해 루도와 안젤리카를 죽이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생각해? 고기 다 타겠어.”


안젤리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육포가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루도는 황급히 손을 뺐다.


“어어, 미안. 넋 놓고 있다가 그만. 안제 주려고 한 건데 다 탔네.”


“아냐. 나 많이 먹었어. 루도가 더 먹어. 아 참, 고기가 타버렸지.”


안젤리카는 혀를 날름 내밀며 자신의 머리를 톡 건드렸다. 루도는 피식 웃으며 타버린 고기를 입 안에 던졌다.


“안제, 레인스터는 어떤 곳이야? 사람들이 얘기하는 건 종종 들었는데. 내가 사는 곳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잖아?”


“으응. 나도 레인스터를 다 돌아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 우리 집은 상업 지구에서 좀 떨어져 있거든. 아버님께서 그 부근에는 질 나쁜 깡패들이 우글거린다고 절대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하셨어.”


“흐응, 깡패라는 건 어딜 가든 있는 거구나. 거 참.”


안젤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조용히 물결쳤다.


“그래도 우리 아버님이 기사셔서 그다지 위험한 일은 없었어. 웅, 레인스터는 상인들이 매일 왔다갔다하거든. 그래서 거리가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려. 그나마 우리 집은 외딴곳에 있어서 한산한 편이지만.”


루도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외딴곳이라면 내가 사는 곳도 만만치 않지. 시내까지 가려면 두 시간은 걸어야 하니까.”


안젤리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그럼 학교는 어떻게 가?”


“응? 학교가 뭐냐?”


둘은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젤리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학교 말이야. 루도가 사는 곳에는 학교 없어?”


“그러니까 그게 뭔지 알아야 있는지 없는지 대답을 해주지.”


루도는 ‘학교’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안젤리카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학교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기 또래 아이들이 모여 공부를 하는 장소이며, 각 분야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있다는 것, 부유한 평민의 자제들은 모두 학교에 다닌다는 것 등이었다. 물론 귀족의 자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루도는 턱을 괸 채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설명을 들을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은 로샤단과 람카디스 뿐이었다. 이윽고 안젤리카의 열띤 설명이 끝나자 루도는 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뭔지는 이해했는데, 그거 델키아에는 없어.”


“그...그래? 흔히 있는 게 아니구나. 그럼 학교 안 다니면 루도는 집에서 뭐 하고 지내?”


“뭐 하긴.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 짓고 있지. 남는 시간에는 람한테 공부도 배우고, 검술도 배우고 그냥 그렇게 지내지. 학교가 없기도 하지만 난 굳이 학교에 갈 필요가 없어. 람이 다 가르쳐주거든.”


“람? 람이 누군데?”


“나 먹여주고 재워주고 살려주는 사람. 스승? 집주인? 매일같이 얼굴 보는 사람? 표현할 게 많네. 하여튼 그런 사람이 있어.”


안젤리카는 신기한 듯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렇구나아. 우리 부모님은 항상 바쁘셔서 저녁 이전엔 얼굴 보기도 힘든데. 학교 안 다녔으면 나는 항상 집에 혼자 있었을 거야.”


“형제는 없어?”


“오빠가 한 명 있는데, 검술 배운다고 수도에서 지내고 있거든. 아버님 같은 기사가 될 거라고 큰소리치면서 갔는데, 오빠 생활비랑 수업료 마련한다고 부모님 등골이 휠 지경이야.”


“그래? 검술배우는 게 돈 많이 드는 거였구나. 나야 람에게 공짜로 배우니까...”


안젤리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무릎을 모아 팔로 감쌌다. 모포를 같이 덮고 있었기 때문인지 곰지락거리는 움직임이 루도에게도 전해졌다.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지만, 모포 안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기에 오히려 상쾌했다. 안젤리카는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수도에 있는 왕립 아카데미로 진학하고 싶지만.... 우리 집 형편에 더 이상은 무리겠지. 지금 다니는 학교도 졸업하고 나면 바로 신부수업을 받으라고 하실 테니까.”


“흐음. 안제는 학자가 되고 싶은 거구나.”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뭇가지를 하나 불 속으로 던졌다. 손가락 크기도 안 될 정도로 작은 나뭇가지였지만, 왠지 모닥불의 불길이 더욱 세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건너편에선 납치범들이 식사를 끝마치고 잡담을 하며 쉬고 있었다.

루도는 뒤에 있는 밤나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학자라...그러고 보니 가크스도 원래는 그쪽 길로 나가려고 했었다지. 람도 은근히 내가 학자가 되길 바라는 것 같던데. 글공부도 할 만하긴 하지. 역사 쪽은 꽤 재밌기도 하고.”


안젤리카가 곧장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같은 취향을 가진 동지를 만났을 때의 친근감 비슷한 것을 루도에게서 느낀 모양이었다.


“헤엣, 루도는 역사 좋아하는구나? 난 있잖아, 기회가 된다면 커서 수리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루도도 나중에 나랑 같이 역사 선생님 하지 않을래?”


루도는 단지 역사가 재미있다고 말한 것뿐이었는데 안젤리카는 그가 학문의 길을 걷는다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루도는 실소를 터뜨리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쓰다듬었다.


“난 람같은 훌륭한 레인저가 될 거야. 대신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네 제자로 보낼게. 어때?”


“피이...그게 뭐야. 그 레인저라는 거 군인이랑 비슷한 거지? 그럼 검술 선생으로 취직해도 될 텐데. 루도, 검술 선생은 어때? 응?”


안젤리카는 루도의 팔을 꼭 붙들며 다그쳤다. 선생 같은 게 되려면 10년은 넘게 있어야 할 것이고, 또 되고 싶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닐 텐데도, 안젤리카는 그렇게 대답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듯이 루도를 독촉했다. 그녀의 간절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루도도 선뜻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시선을 돌리며 어색하게 말했다.


“으음....그러면 나중에. 나아아중에 내가 레인저를 그만 두게 되면, 그때 네가 있는 곳으로 찾아갈게. 됐지?”


“우웅...뭔가 꺼림칙한 대답인데....하여튼 약속!”


둘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찾아간다고만 했지 선생이 된다고는 안 했는데도, 안젤리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루도의 대답을 해석한 모양이었다. 루도는 배시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정말로 때 묻지 않은 천진한 소녀였다. 너무 환한 미소라 그들이 처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도는 땔감 하나를 모닥불에 던지며 말했다.


“일단 여기서 탈출부터 해야겠지만 말이야.”


루도는 일부러 안젤리카를 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다간 금세 시무룩해진 얼굴을 한 그녀와 눈을 마주치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슬퍼하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루도는 먼 미래보다 지금 처한 현실에 집중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채 망상에 빠지는 것보다는 괴롭더라도 문제를 직시해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가 찾아낸 해답은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루도는 풀이 죽은 채 모닥불만 바라보는 안젤리카를 보며 웃었다.


“안제는 우리가 도망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뒤쫓아 온다던 사람들도 결국 오지 않았잖아?”


루도는 움츠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도, 안젤리카의 어깨는 루도의 품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추격대가 오면 좋겠지.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우린 우리대로. 우린 반드시 저 사람들에게서 탈출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약속할게.”


“...정말?”


루도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리카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고마워. 덕분에 기분이 많이 나아졌어. 며칠 동안 힘들고 괴로운 일투성이였는데. 그래도 루도와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어어? 내 말 못 믿는 거야? 그럼 내 말대로 되면 나중에....음....뭘로 할까? 라즈베리 파이 어때? 여기서 탈출하게 되면 나한테 라즈베리 파이 열 판 만들어주기! 안제가 사는 레인스터까지 찾아갈 테니까 입 씻으면 안 돼!”


소년의 덧없는 허세라고 생각하면서도, 안젤리카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응. 내가 꼭 만들어줄게. 라즈베리 파이.”


“좋아. 이거야말로 약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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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完) +4 15.03.25 1,380 45 17쪽
34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23) +4 15.03.25 1,409 47 13쪽
33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22) +5 15.03.24 1,531 48 19쪽
32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21) +6 15.03.24 1,412 47 11쪽
31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20) +2 15.03.24 1,201 47 13쪽
30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9) +2 15.03.24 1,434 42 10쪽
29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8) +2 15.03.24 1,552 42 17쪽
28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7) +2 15.03.24 1,438 45 9쪽
27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6) +2 15.03.24 1,463 43 9쪽
26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5) +5 15.03.23 1,356 44 28쪽
25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4) +2 15.03.23 1,491 45 17쪽
»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3) +3 15.03.23 1,485 44 21쪽
23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2) +4 15.03.23 1,580 45 14쪽
22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1) +1 15.03.23 1,642 43 13쪽
21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0) +2 15.03.23 1,358 40 13쪽
20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9) +4 15.03.22 1,569 50 14쪽
19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8) +3 15.03.22 1,307 50 13쪽
18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7) +2 15.03.22 1,544 45 16쪽
17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6) +2 15.03.22 1,778 47 13쪽
16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5) +4 15.03.22 1,736 45 20쪽
15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4) +2 15.03.22 1,694 50 14쪽
14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3) +2 15.03.22 2,166 69 14쪽
13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2) +3 15.03.22 1,705 44 13쪽
12 람의 계승자 - 생존자니까 살아남는다(1) +4 15.03.22 2,134 52 17쪽
11 람의 계승자 - 꼬마 레인저(10) +4 15.03.21 1,822 57 9쪽
10 람의 계승자 - 꼬마 레인저(9) +3 15.03.21 1,836 54 12쪽
9 람의 계승자 - 꼬마 레인저(8) +2 15.03.21 1,996 52 11쪽
8 람의 계승자 - 꼬마 레인저(7) +3 15.03.21 1,928 62 11쪽
7 람의 계승자 - 꼬마 레인저(6) +2 15.03.21 2,093 57 11쪽
6 람의 계승자 - 꼬마 레인저(5) +5 15.03.21 2,181 58 20쪽
5 람의 계승자 - 꼬마 레인저(4) +2 15.03.21 2,405 58 10쪽
4 람의 계승자 - 꼬마 레인저(3) +4 15.03.21 2,766 72 12쪽
3 람의 계승자 - 꼬마 레인저(2) +3 15.03.21 3,288 92 14쪽
2 람의 계승자 - 꼬마 레인저(1) +3 15.03.21 4,438 88 15쪽
1 람의 계승자 - prologue +23 15.03.21 7,846 119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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