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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왈튼 대륙 유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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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6.27 23:23
최근연재일 :
2024.01.28 10:09
연재수 :
1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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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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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112. 불청객의 고민

시작합니다.




DUMMY

*


3월 27일.


왈튼 대륙이 기점으로 사용하는 연혁으로 하자면 1511년이 되는 해의 3월 27일이었다. 서대륙, 미셸과 카르아에서 사용하는 서력으로 치자면 2011년이 되는 해였고. 다시, 쿼렌에서 사용하는 ‘통일 건국력’을 사용하자면, 307년이 되는 해의 3월달이었다.


월과 날은 대륙의 모든 인종이 동일하게 사용했다. 아주 오래전에 합의를 한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대수림 내에 사는 엘프 왕국의 월일도 똑같았다. 그건 왈튼의 외곽지에 살고 있는 변방 민족과 문화, 문명들 역시 같았고.


그런 날의, 새벽이었다.


자정이 지나 27일이다. 아직 사람들의 날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일자는 바뀌었다.


술주정뱅이들도 잠에 들만한 시간이었다.


도시 바깥의 경계병들은, 긴 시간 잠을 이기느라 지쳐서 슬슬 곯아떨어질 때였고.


밤을 새려는 이의 의식이나 의지가 가장 흐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새벽 4시 언저리.


수백 시의 남부로 어딘가에 있는 ‘퀘런즈 백’ 여관 역시 아주 조용했다. 주인장들도 각기 잠에 든 때였고. 걸어 잠근 목제 문이나 창문들은 바람결에 조금씩 덜컹거리곤 한다.


외풍이 스며들어와 1층 식당 홀 따위를 조금 스쳐 지나갔다.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서남부이기도 했고. 기후가 그리 습하지 않아서, 나름대로 선선한 감마저 있는 퀘런의 봄 날씨다.


나들이라도 가면 좋을 듯한 새벽녘의 공기다. 실제로 나들이를 가는 사람은 없겠지만.


대신, 불청객은 있었다.


수상함을 몸으로 표현하는 듯한 복색의 남자였다. 천옷으로 몸을 싸맸고, 또 검은 두건이나 복면 따위로 얼굴을 가렸으나 몸의 선으로 보면 짐작 가능하다.


사내는 천천히 움직인다. 퀘런즈 백의 1층, 식당 창문 하나가 미리 열려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잠금대가 풀려 있었고, 소리 없이 열렸다.

1층에 생긴 틈으로, 사내는 제 몸을 밀어넣어 조용히 식당에 내려앉았다.


3분의 2는 식당으로 쓰고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안 쪽의 주방과 주인장 내외가 생활용으로 쓰는 공간이었다. 그 안쪽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사내는 아주 천천히 내려앉았고 또 걷는다.


삐이익, 하고 새된 나무 토막의 소리가 슬쩍 들린다. 그러나 일상적인 소음에 가려질 정도였다. 큰 소음도 아니다. 사내는 소리가 잘 나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가죽으로 만들었고, 그 밑창에 천을 덧대어 마감했다. 일상 생활에서 그렇게 신고 다니다간 금세 아무것이나 밟고 떨어질만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아주 적합했다.


중간 정도 체격의 사내다. 검은 천으로 가려낸 얼굴. 눈만 보이고 있었고, 시커먼 색의 눈동자였다. 작은 틈으로는 인종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스으으읍.’


사내는 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뱉는다. 무언가 중요한 호흡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호흡’은 움직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주변 사물의 움직임에도 자연적인 템포라는 게 있었다. 거기에 사내의 호흡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다면, 은신술이라는 게 그럴싸한 형태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에 더해, 남자는 품에 넣어둔 아티팩트를 발동시켰다.


마력으로 발동되는 것이었고, 다회용의 장치이나 배터리에 든 마력이 다하면 쓸모 없어진다. 사용 횟수를 생각하면 제법 비싼 물건이었나. 그래서 아무 때나 쓰지는 않는다. 이처럼 아주 중요한 일, 절대로 들켜서는 안되는 상황. 혹은 어려운 난관을 돌파할 때나 쓰지.


천 옷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내는 상의의 천 몇 겹을 파고들었고, 그 속 주머니에 있는 아티팩트를 발동시켰다. 손을 꽉 쥐면 보이지도 않을만큼 휴대성이 좋은 물건이다. 거기에 성능 역시 확실하다.

써먹기 곤란한 점은 비싸다는 것 뿐이다. 그도 제 돈으로 사야 했다면 아마 쓰지 않았으리라. 의뢰비를 감하고 나면 그다지 남는 것도 없으니까. ‘길드’에서 비용을 대주었으니까 쓰는 중이다.


그리고 그 ‘길드’는 다시, 의뢰자로부터 받은 비용을 사용한 것 뿐이었다.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똑같은 십자 형태의 물건이었다. 은으로 만들었고, 가운데에는 푸른빛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검푸른 색의 손톱 반만한 보석이었고, 그것이 우웅거리는 진동을 살짝 일으켰다.


장신구를 제 가슴팍 부근에서, 옷 속에서 꽉 쥐고 있는 사내에게만 느껴질 정도의 진동이었다.


미약한 떨림과 함께 보이지 않는 마력의 움직임이 사내에게 적용되었다. 투명한 색이었으나, 그 흐름을 글로 서술하자면. 뭉툭한 끝을 가진 관이 그 옷 속의 악세서리에서 튀어나왔다. 옷을 뚫고 지나서, 허공을 굽이쳐 사내의 발로 향한다.


사내가 신고 있는 천, 가죽 신발에 닿자 관은 그것을 뒤덮었다. 신발을 감싸는 투명한 막이 생겨나는 것과 같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투명한 에너지의 잔여물들이 사내의 온 몸으로 조금씩 흩어졌다. 가장 많은 분량이 신발에, 나머지가 전신에.


사내는 진동이 끝나자 스킬이 충분히 적용되었음을 깨달았다. 사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여러 번 써 본 전력이 있는 도구였다.

시험 삼아서, 먼저 왼 발을 한 번 들어올려 나무 바닥을 더듬는다.


쿠욱, 하고 바닥을 찌르는 발이었으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리를 차단시켜줌과 동시에, 물리력을 행사해 마치 허공을 걷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준다. 갑작스럽게 무언가에 떠밀려 넘어지더라도, 그 효과는 전신에 미칠 것이다.

신발 부위에만 집중되는 것보다는 훨씬 빨리 끝나는 효력이겠지만. 전신에 미치는 쪽은.


사내, 그라디에는 도구의 효력을 만족스러워했다. 천천히 움직인다. 한 발, 두 발. 이내 아무런 소음도 기척도 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자, 조금 더 대담하게 움직여 퀘런즈 백의 내부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은 창문으로 들어온 그가, 앞으로 몇 발자국 걸은 뒤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쭈욱 들어가면 있는 곳이다. 가장 안쪽에 있었고, 그라디에는 금방 다다라서 위로 올랐다. 계단을 오를 때 흔히 날 수 있는 삐걱거리는 소리는 조금도 나지 않는다.


슬쩍 손을 짚어 그 난간을 잡아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난간을 잡은 손은 금세 떼었다. 차음과 물리적 반발력이 형성된 부위는 일단은 ‘발’이었다. 나머지 신체 부위들은 그에 대한 덤에 불과하다.


허공을 걷는 느낌으로 그라디에는 서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목표는 일단 3층에 있다.


*


문 앞에 선 남자는 고민했다.


그는 암살 길드의 일원으로, 가장 솜씨가 좋은 사내였다.


수백 시에서 의뢰를 받는 암살자 중에서 가장 고가의 의뢰비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퀘런의 남부 도시, ‘수드 부족’의 한 지류로 꼽히는 수백.

세 개의 정보 길드가 제각기 으르렁대며 살아가는 곳이었다. 어떤 도시에나 ‘암흑가’라는 건 있게 마련이었다. 정보 길드는 그런 암흑가의 인간들과 양지의 고객들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곳이었고.


사회적으로 본다면 썩 좋은 일을 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음지에서 일을 하는 작자들이 돈을 벌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었으니.


정보 길드들과의 신뢰가 어느 정도 쌓이면, 수백에 존재하는 몇 개의 암살자 길드들과 접촉을 할 수 있었다.


페리에, 슌, 가쿠, 마이타리, 챗피. 각기 개성적인 이름을 가진 길드들이었고, 대개는 그 창립자의 이름에서 따오는 편이었다. 본명보다는, 암살자로서 불린 별명에서 말이다.


그라디에는 ‘가쿠’에 속한 암살자였다.


길드에 따라서 성격이 갈리지만, 가쿠는 실행자와 계획자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대개의 의뢰들을 길드 전체적으로 검토하고, 계획을 세운 뒤 계획자 중 누군가가 직접 움직인다.


다섯 개의 길드들 중 가장 규모는 작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력적인 면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한다.


남의 핏값을 돈으로 바꾸어 벌어먹고 사는 입장에서 자랑은 딱히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라디에는 자신의 일의, 과정에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목표는 알 바가 아니다. 그는 기술을 연마하는 인간으로서 최고를 노리고 있었다.


몇 종의 아티팩트를 다루고, 기력술을 익혔다. ‘아티피서’이자 ‘기력술사’라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아티팩트들은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어서, 몇 번을 써먹고 나면 버리게 되어있지만. 개중에서 보물과 같은 소수의 물건들이 있었다. 그라디에는 그런 보물들을 사용하는 본격적인 아티피서다.


마법사보다도 스킬의 발동이 빨랐고, 현장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에게는 정해진 형식이라는 게 있지 않으니까, 만변하는 현장에 모두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아티피서들은 그럴 수는 없었고, 마법사와 비교를 하자면 몇 종류의 마법들만을 골라 익혀놓은 것과 같았다.

마법사에 비해서 나을 게 없었지만, 대신 그 몇 종류의 스킬에 대한 적합도가 아주 높았다.


발동까지 지연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아티팩트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한 이들은 도구 본연의 성능 이상의 힘을 내기도 했다.

최고의 아티팩트들은 결국 ‘마력 내장형’이 아니라 외부의 마력으로 발동되는 종류들이었으므로. 아티피서들도 다른 두 종의 능력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력을 다루는 입장이었다.


‘흑마력’과 ‘자연력’으로 나뉘는 마력 중, 자연계에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자연력’을 머금어 체내에 저장한다.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저장고 따위를 자신의 내부에 만들어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막대한 양을 쌓아가는 것이다.

오랜 세월 살아남은 몬스터들도 비슷한 짓을 하지만, 자연력과 흑마력은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에너지였다. ‘흑마력’은 보다 ‘마기’라는 이름에 가까웠다. 애초에 지어진 본연의 성질을 뒤틀며, 조금 더 흉악하고 난폭한 쪽으로 생물체의 본성을 바꾸어가는 쪽이었으니.


오래 산 몬스터들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더 폭급하고 거칠다.


자연력을 다루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신체와, 감각 기관이 강화된다. 정신적으로도 부동심에 가까워지는 면이 있었다.

물론 ‘영향을 받는다’는 정도이고, 본질적인 삶의 선택은 능력자 자신이 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높은 경지의 능력자들 중에서도 싸이코같은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라디에 역시, 그런 부류일 지 모른다. 사실은.


자신의 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다른 사람을 해치고 돈을 벌고 있었으니까.


과정에 있어서는 최고가 되기를 바라는 그라디에였다. 목표에 있어서는- 글쎄······ 그는 최고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여태까지의 커리어를 보자면 그는 수백 시 최고의 암살자가 맞았지만 말이다.


의뢰를 받는 면에 있어서 조금 가리는 경향도 있기는 했다.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다. 완벽한 성공률을 위해서 그런 건 아니었는데. 지나고 돌이켜 보니, 그런 평판이 쌓여 있었다.


그라디에는 스스로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저, 돈만 주면 아무나 죽여주는 쓰레기에 가깝다. 의식이 있는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가 하는 일은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변명을 할 셈은 아닌 것이다.


끼익, 거리는 소리도 조금 내지 않고서.


퀘런즈 백, 여관의 3층. 낡은 복도 한 가운데.


그라디에는 왼쪽을 향할까, 오른쪽을 향할까 가만히 서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올라오며 지형과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파악을 해두었다. 오른쪽으로 달음박질 치면, 곧바로 창문이 하나 있어 뛰쳐나갈 수 있었다. 맞은 편에 퀘런즈 백 여관보다는 낮은 2층 건물이 하나 있어, 그 쪽의 지붕에 닿게 된다. 거리의 폭은 한 번에 뛸 수 있는 정도였고, 그대로 몇 번의 점프를 더하며 질주를 하면 순식간에 사라질 자신이 있었다.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았을 때의 도주로다. 임무는 결국 ‘누군가를 죽여라’는 하나의 것이었지만, 그것마저 세세한 과정으로 나눌 수 있었다. 바깥에서 1층 식당으로 들어올 때. 1층에서 3층으로 올라올 때.

그리고, 지금.


3층에서 마지막 고민을 할 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걸어 올라오는 데 그가 딱히 망설일 건 없었으니까. 망설이는 건 지금이었지.

1, 2분 만에 그는 방 앞에 서서 고뇌를 한다.


암살자에게 고뇌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라디에였다.


가쿠의 가르침은 어떠했는가.


‘선조’라고 불러야 할만한 옛날의 어르신이었다. 가쿠라는 별명의 주인은.


한 수백 여 년 전에 이 도시에 있었던 어느 암살자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서 뒷거리의 쓰레기들을 그러모았다. ‘쓰레기’란 쓰레기같은 인간에 대한 비유이고.


그것들을 모아 기술을 가르치고, 규율을 주입시켰다. 암살자로서 살아가게 했고, 길드를 꾸려 지금에 이른다.


여태까지 그라디에를 이끈 건 그런 길드의 가르침이었다. 그 스스로도 생각하고 공부를 하기는 하지만. 토대가 되는 지식들이 길드로부터 나왔다.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


청년의 검은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차분하다. 호흡이. 밤 공기는 제법 선선하다. 약간은 찬 감도 있지만, 천 옷을 몇 겹으로 껴입은 터라 추위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에 긴장감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낄 여력은 없다.


그는 방과 방 사이에 서 있었다. 문과 문 사이, 말이다. 가만히 노려보는 나무 벽이다. 두 방 사이의 나무판이 그의 앞에 있으리라, 바로 보이는 벽을 뚫는다고 하면.


두 방을 가로지르는 내벽.


고민스럽지만, 소리를 내진 못한다.


눈빛은 떨리지 않았다. 깊이 침잠된 동공과 홍채. 사내의 생각도 그렇다. 밤의 어둠, 고요함. 도시에서 나는 아주 미약한 소음들이 그의 귓전을 울린다. 바람이 분다거나, 누군가가 잠꼬대를 한다거나. 혹은 술주정뱅이가 새벽녘 거리를 걸으면서 무언가 쓰레기를 걷어 찼을 지도 모르고.


새가 날아와 도시의 지붕에 앉아 우는 소리가 있을 수도 있고.

그런 세세한 소리들은, 아주 고요한 마음으로 집중하고 있으면 마치 왈츠처럼 들리기도 한다. 새벽녘의 세계다.

시끄러운 곳에 귀와 눈이 익숙해져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음악이었다.


마모된 나무 벽의 어느 한 부분을 바라본다.


방 속의 호흡을 느낀다.


우습게도, 한 쪽은 아예 들리지가 않았다. 이렇게 허술한 나무벽이 절대, 모든 소음을 차단할 수 없을텐데 말이다.

그라디에의 귀는 아주 좋다. 눈 역시도. 그는 기력술사였고, 나름대로 어딘가에 간다면 기사의 작위를 받을 수 있을만한 실력은 된다. 정면 승부를 한다고 해도 그 정도 솜씨는 있다.


그런데도 갖가지 기술과 노하우를 활용해서 이렇듯 암살 일을 하는 것이다. 그 말은, 타이밍을 잘 잡으면 몇 수 위의 상대 역시 격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암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목표 대상의 방심을 유도하거나 노리는 일이었다.


암살자는 곧 기다리는 자와 같다.

피암살자의 호흡을 완벽하게 읽고, 그들의 생활 패턴을 알아가야 한다. 생물인 이상 숨을 쉬고, 들이쉬는 구간이 있다. 움직일 때가 있으면 쉴 때가 있고, 깨어 있을 때가 있으면 잘 때가 있는 법이었다.


암살자는 아주 미약한 호흡과 정신으로, 조금의 쉼도 없이 목표 대상을 관찰해야만 했다. 그가 언제 잠드는가. 그가 언제 무방비 상태가 되는가.


그리고 암살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빈틈을 노출한다면, 그 때가 곧바로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이 되는 셈이다.


노려지는 사람은 본디 잘 수 없다. 저격수에게 겨눠지면서, 전쟁터의 병사가 조금이라도 쉴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상황을 뒤집어 보면, 저격수 역시 함부로 쉴 수 없다. 상대가 잠드는 곳을 노려서 사격을 제대로 해내야 하니까.


건강은 예전에 갖다 버린 몸이었고, 남들이 쉬지 않을 때 조금 쉬며 쉴 때에 움직이는 게 암살자의 생업이다.


피로감은 암살자의 가장 오랜 벗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일 역시 영 쉽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작업의 준비 기간과, 과정 자체. 그리고 모든 걸 이루어낸 다음에도 피로감은 잘 떠나지 않는다.


그라디에, 라는 사내는 그 앞에서 서성이며 아주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곧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다음 해가 밝아올 정도로 말이다.


단순히 그라디에의 상념 속의 느낌이었고, 실제로는 몇 분 여가 채 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기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고.


선택은 그의 삶을 바꿀 것이다.

나는 이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혹은,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라디에는 깊이 또 몇 번을 생각해본다.


그를 지켜보는 다른 이가 있었다면 아주 답답해 미쳐 할 정도로 진득하게.


그러다가,


결국 어쩔 수 없는 시간이 그의 등을 떠밀어 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3층 방의 열쇠는 미리 구해두었다.


어차피 ‘목표물’이 3층 방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퀘런즈 백 여관은 딱히 비밀스런 장소도 아니었고, 언제든 들를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시간에 몰래 침입하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었고.


약간의 시간과 또 준비 기간이 주어진다면 ‘가쿠’에게 여분의 열쇠를 복제해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주 철저한 감시 속에 운영되는 곳의 열쇠가 아니라고 한다면. 고작 여관 객실의 기본적인 나무 열쇠가 아닌가.


소리 없이 다가가, 호흡을 잘게 내뱉었다. 몇 번 반복한다. 품에서 열쇠를 꺼내들었다. 어느 방 문 앞이었다. 내부에서는 소리가 난다.


잠시 듣고 있었는데, 잠을 자고 있는 이의 호흡음이었다.


그라디에는 나무 열쇠를 천천히 방문의 구멍에 집어넣는다.


그가 발동시켰던 품 속의 악세서리를, 다른 한 손으로 꾹 쥔다.


투명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아티팩트의 마력이 그리로 옮겨갔다. 그가 돌리려고 하는 방 문의 손잡이 근처로 말이다. 대신 발에 있던 것, 몸에 붙어 있던 여력이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도구를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그라디에 자신이 뛰어난 아티피서이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도구의 응용이라는 건 일단, 도구의 본래 기능에 대해서 완벽하게 터득한 다음에야 할 수 있는 류의 일이었다.


원래는 끼릭, 혹은 덜그럭- 하고 소리가 났어야 했다.


그라디에는 무음無音으로 방문을 열었다.


아주 천천히, 그는 에너지를 옮긴다.


한 번 돌려 따낸 열쇠를 원래로 돌리고, 뺐다. 경첩에서 소리가 나는 게 문제다. 나무로 된 복제 열쇠는 다시 천 옷의 어느 주머니에 대강 넣었다.

투명한 기운은 아티팩트로 돌아오지 않았고, 그라디에의 발치로 옮겨가지도 않았다. 대신 천천히 움직여서, 나무문의 오른쪽으로 간다. 목제 문의 면을 따라 스멀스멀 움직여, 아래 위 두 쪽으로 붙어 있는 경첩에 가 달라붙었다.


문이 바닥에 긁히는가, 그는 먼저 무게감을 확인했다. 경첩이 낡아서 주저 앉는다거나, 잘못 지어진 문은 열 때마다 구조적인 소음을 냈다.

그라디에의 감각에는 느껴지는, 아티팩트의 마력이 경첩을 감쌌음을 확인했다. 아주 미세하게 문을 밀어보았다. 손톱의 부스러기 정도 되는 거리의 움직임이었다.


부드럽다. 특별히 걸리는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약간은 힘을 주어, 문이 끌리지 않게 한다. 낡은 목제 문이기에 어느 정도는 비틀리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잘 짜여져 만들어진 문이라고 여겨졌다.


그라디에가 문을 밀어 연다.


어둔 복도보다도, 조금 더 어두운 실내가 나타난다. 그의 눈은 어둠에 충분히 적응해 있었다. 암살자로서 익히는 여러 가지 기술 중에는, 밤 눈을 밝히는 종류도 있었다.

기력술이 신체의 각 기관들을 강화시킨다면, 일부 기능만을 유달리 강화시키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겠는가.

반복 훈련과 실전으로 익혀낸 여러가지 기술과 노하우들이 그의 몸에 배어 있었다.


그라디에는 어둠을 꿰뚫어 보면서, 이미 알고 있는 방의 구조대로 시선을 움직인다. 문을 충분히 열고서, 다시 천천히 투명한 에너지를 자신의 발치로 옮긴다.


아티팩트의 내부에 담겨져 있던 마력은 결국 한계가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로만 사용한다면 조금 더 길게 쓸 수 있겠지만. 그라디에 자신이 마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계속 응용법을 택하기에 수명이 줄어든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의 임무에서 다할 정도의 마력량은 아니었다.


그가 걸음을 옮겼고, 아까 복도에서 걸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발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라디에의 몸은 약간 떠 있는 것과 같았다. 아마 바닥의 흔들림을 느끼는 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잠에 든 호흡이 방문이 열리자 더욱 선명하게 들려온다.


암살자의 방문이었다.


아마 그 호흡이 생애의 마지막 호흡일 확률이 높았다.


밀어넣은 여닫이 문의 틈 사이로, 그라디에가 몸을 집어 넣어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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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합니다~.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보던 때가 생각나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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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117. 전말 24.01.27 11 0 21쪽
117 116. 발길을 돌리고 24.01.27 10 0 12쪽
116 115. 선회 24.01.27 11 0 18쪽
115 114. 평범하지 않은 날 24.01.27 8 0 12쪽
114 113. 평범한 아침 24.01.27 7 0 16쪽
» 112. 불청객의 고민 24.01.27 9 0 21쪽
112 111. 출항을 하듯 24.01.26 13 0 14쪽
111 110. 엿듣는 사람들 24.01.26 8 0 11쪽
110 109. 케일리 24.01.26 11 0 17쪽
109 108. 루소라는 사내 24.01.26 9 0 12쪽
108 107. 뒷사정 24.01.26 8 0 13쪽
107 106. 체베시, 소 24.01.26 8 0 19쪽
106 105. 미행 24.01.26 8 0 13쪽
105 104. 눈치 24.01.26 7 0 14쪽
104 103. 블루지, 영감, 데이라 24.01.26 7 0 15쪽
103 102. 연원 24.01.25 9 0 15쪽
102 101. 떼, 사냥 24.01.25 9 0 15쪽
101 100. 단검들 24.01.25 9 0 14쪽
100 099. 감정적 트랩 24.01.25 9 0 17쪽
99 098. 두 명째 24.01.25 7 0 12쪽
98 097. 거리에서 24.01.24 10 0 15쪽
97 096. 형제단 24.01.24 9 0 12쪽
96 095. 입성 24.01.23 12 0 16쪽
95 094. 대강의 마무리 24.01.23 14 0 16쪽
94 093. 마빈 24.01.23 11 0 15쪽
93 092. 첫 타격 24.01.23 9 0 14쪽
92 091. 강도단 24.01.23 11 0 11쪽
91 090. Dream Or/And Revelation 24.01.23 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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