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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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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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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8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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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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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259. '그 망할 새끼' That shit

DUMMY

*


“그 망할 새끼.”


게오르그는 피를 토하듯이 말을 뱉었다.


길게 갈색 머리를 풀고 있었고. 원래는 어딘지 느끼해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그 ‘인상’을 만들던 건 그의 외견만이 아니라 태도나 표정 또한 영향이 있었던 듯. 지금은 그런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다.


정확히 따지고 들자면 금발인데, 갈색 빛깔이 많이 도는 머리칼이다. 그는 언제나 옷을 잘 입고 다닌다. 초상술사라면, 워메이지라면 무릇 그러해야 한다는 지론도 가지고 있는 양반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워메이지 전단, 전술사단의 거주 저택에 있는 그였다.


2층에 있는 응접용 작은 홀의 소파에 앉아 있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무릎에 팔꿈치를 대어 손을 모으고. 턱을 손으로 괴고 있다.

그의 앞에는 낮은 응접용 테이블이 있었고. 화려한 도자기로 장식된 테이블이었다. 테이블 너머에 있는 사내, ‘루드 윈터젝’의 표정은 게오르그 후딘과 심정을 공유한다는 듯 그리 좋지 못한 꼴이었다.


루드는 조심스럽게 들고 온 서류를 내려 놓으면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게오르그 선임술사님께서 가지셨을 심려에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게오르그는 루드를 빤히 처다보았다. 루드의 눈동자. 맑다. 홍채가. 티없이. 그러나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일까. 게오르그는 루드와 같은 자들을 간혹 본 적이 있다. 루드는 미친 놈이었다. 미친 소리를 쉴 새 없이 해댈 수 있는. 표정이야 그럴싸하게 짓는다지만, 그 속에 진정으로 타인을 위한 배려나 심려가 없다는 걸, 게오르그는 알 수 있었다.


전장에서 뒹굴며 살아가는 워메이지인 그다. 그런 게오르그도 많이 보지 못하는 진짜배기 미치광이. 그게 루드 윈터젝이라는 사내였다.

최소한의 상식이나, 감각은 있었기에 크게 상관은 하지 않지만. 이따금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다보면 소름이 끼칠 때가 있었다. 이런 자가 세우는 계획대로 현장에 돌입해서 그대로 움직인다니. 제 성향이나 속내와는 달리 일처리 하나만큼은 제대로 하는 인간이었지만. 이성과 달리 기분은 가끔 이상할 때가 있다.


이번에도 그러하다. 루드는 지난 일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었지만. 맥기라거나. 자신의 계획으로 인해 죽은 자들에게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물론 냉혈한들, 혹은 심장이 굳어버린 작자들을 많이 보기는 했는데. 그런 이들도 일말의 미약한 ‘기색’은 남아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고. 그러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말투, 톤, 감정이 가라앉게 되는 게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인데. 루드 윈터젝은 그런 반사적인 반응이 조금도 없다.


게오르그는 속에 치미는 역한 감정을 억누르고 말을 했다.


“···공감해준다니 다행일세.”


스륵, 하고 그 말에 루드는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들을 조금 밀어넣었다. 게오르그는 일단 일은 해야 했기에, 그의 손짓에 따라 서류들을 붙들었다.

펄럭거리면서 묶음으로 온 내용을 읽어본다. 아마 명령, 계획에 관한 이야기일 테였다. 이 자가 자신한테 전할만한 건 그런 것뿐이었으니까.


안에 있는 것들은, 대강 짐작하고 있던 부류의 문장들이었다. 그에게 할 일이 또 주어지는 모양이다. 외부 장기 임무를 한 번 맡았던 이는 그래도 조금 쉴 시간이 주어지는데. 최근 대저택 내에 오래 있었나보다. 근방의 임무들만을 맡기도 했었고.


대공이 무언가 일을 ‘시작’했다는 건 게오르그와 같은 중역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공이 세우고 있는 대계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지만. 실제로 일을 하고 있는 실무진들이 있고. 또 그 실무진들을 다루는 중진들이 있었으니까.


대공의 머릿속에 든 게 무엇인지 완벽하게 알 수는 없어도. 적어도 추측 정도는 가능했다. 여태껏 대공은 산슈카 속에 숨고, 자신의 이름을 감춘 채 커다란 계획을 꾸며왔다. 그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정력적으로 일해 왔고. 수십 여 년의 긴 시간동안 거대한 조직을 만들고, 심지어 그것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운영해왔다.


경이로운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대공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산슈카가 정치적, 전략적으로 보았을 때 그저 변방의 소국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실력자들이 있었다. 여러 정치적 이해 관계와, 알력다툼. 세력도라는 것도 있었고. 그것들을 정확히 전부 파악하고 건드리지 않으면서, 외곽지에서 일을 벌여온 게 알사드 대공이었다.


모두의 견제를 피하면서 일을 치른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고난, 탁월한 감각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수준의 위업이라고 게오르그는 솔직하게 생각을 했다. 그런 대공의 대계 속에 들어가서, 부품으로 일을 해보았기에 더욱 분명하게 느끼는 점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고 지난 세월 동안 협력을 해왔다. 그동안 많은 녹봉을 받았고, 그럭저럭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대공령이나 근방에서는 쓸 일이 없지만은.


그래도 차라리 산슈카의 외곽지나, 혹은 근처 다른 나라에 간다면 먹힐만한 위세도 있었고. 대공은 ‘자신의 일’이 모두 잘 끝난다면, 지금까지 잘 헌신해온 이들에게 커다란 지위나 명예 따위를 주겠노라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 말씨들에서, 대공가의 고참들이나 위에 선 자들은 알사드 대공이 아마, 나라를 뒤엎고자 하는 게 아닐까 추측을 하기도 한다. 그럴만한 수준의 노동량이었으니 말이다.


본진, 대공의 저택에 거하는 이들의 수만 수 천 여 명인데다가. 바깥에 나가있는 작자들도 다시 그만한 숫자이다. 거기에 흩어진 채로 움직이는, 가외적 인물들까지 한다면 만 단위가 될 지 모른다. 어마어마한 재정이 아닐 수 없었다. 고작 만 단위의 인물들만으로 이 부근의 몇 개 나라를 뒤엎는다는 게 또 대단한 일이었고.


거대한 공사를 진행하는 것과 같은 대공의 일은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알사드 대공가가 역사적으로 축적해 온 수많은 재물이 그에 쓰였음은 당연하고. 또 알사드 대공이 갖고 있는 ‘대문관’으로서의 지위가 쓰였음도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알사드 대공의 아래에 있는 행정관들은 일을 아주 잘한다. 왕실의 관료들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알사드 가가 주도하고 있는 온갖 뒤 구린 일들을 몰래 처리하고, 덮어줄만치 잘한다는 게 문제였다.


“이번에 가져온 일은 사냥감 A··· ‘제냐 킴’에 관한 건 아닙니다. 대공령 근처에서 알짱거리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건 분명 고까운 일이지만.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선임 초상술사로서··· 이번에 벨베르 공화국에 좀 다녀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벨베르에.”


벨베르는 산슈카의 남부에 있는 공화국의 이름이다. 산슈카와는 조금 다른 정치 체제와 문화,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마저도 수 백 여 년, 그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산슈카의 역사와 맥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 예전의 때와 달리 지금의 공화국은 아예 다른 곳이 되었다.

‘체제’의 힘이 견고하게 서 있는 곳이었다. 왕정보다도 진보한 정치 체제라고 할 수도 있었고. 각 국민들이 갖고 있는 자유도나 권력 역시 산슈카보다 더 높다고 평가된다. 일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제도적으로 없다고 할 수 있는 왕정에 비해서, 벨베르의 국민들은 보다 자유로우며 많은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런 분산적인 정치 체제가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기는 하다만. 마치 행정관들이 조직 하나를 견고하게 세우고 유지하는 것마냥. 그것을 거대한 나라의 규모로 키웠다고 생각을 한다면. 제법 괜찮은 제도일 지도 모른다.


게오르그로서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벨베르 또한 그들의 임무 대상 지역이 종종 되는 곳이었으므로. 업무 상 알아야 하는 지식들이 상당히 있었다.


벨베르와 동부에 있는 이슈칼은 모두 아마, 비상 사태일 테였다. 대공에 의해서. 남부와 동부 쪽에 지난 수십 여 년 간 몰래 설치해두었던 초상학 폭탄을 터뜨린 걸로 게오르그도 알고 있었다. 특히 벨베르의 경우에는 군사 기지로 사용하고 있던 도시 몇 개가 사라진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리라.


지금 당장 벨베르가 들고 일어나고,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용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벨베르에 가야 한다라···.


“무얼 하면 되는가.”


게오르그는 대충 서류에 적힌 내용들을 읽기는 했지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결국 루드가 이해하고 있는 바가 가장 정확할 것이다. 눈 앞에 지식을 담고 있는 행정관이 있다면 그의 지식을 묻는 편이 가장 깔끔한 일처리 방식이다.


“별 것 아닙니다. 왕실에서 벨베르 측으로 특사들이 파견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리 앞질러 회담이 일어날 도시에 가셔서, 회견을 방해하시면 됩니다. 벨베르 쪽에 미리 잠입해 있는 암부 인원들과 공조하시면 되고··· 서류 마지막 장이 가서 만나실 인원들에 대한 자료들입니다.”

“흠.”


게오르그 후딘은 날카로운 눈으로 서류를 더듬어 내용을 훑었다.

사락 거리면서 거친 종이를 넘긴다. 종이도 당연히, 싼 물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써먹고 있었다. 초상학. 그게 참 좋기도 하다. 돈과 기술만 있다면 막대한 자원을 계속해서 뽑아낼 수 있으니까.


수도를 비롯해서, 몇 군데 대도시의 행정들은 초상력적인 아이템들을 풍족하게 사용하며 모두 일처리를 한다. 대공 저에서 일하는 행정관들도, 그런 혜택 때문에 자신의 일자리를 정한 이유 또한 있으리라. 누구든 첨단의 기술이 있는 곳에서 제 꿈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게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물론 늘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대공가에서 일하는 자들은 도덕적 관념에 있어서는 모두 적어도, 한 군데는 나사가 빠진 인물들이었다.

대공이 휘하의 그들을 부리면서. 대계의 전모를 알려주지 않는 것도 나름의 세심한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모두에게 노출시키면 그것만으로 위험하다는 것 역시 이유였으나. 세르게이 알사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 자신 정도로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일이나 다름없는 스스로의 계획을 알게 된다면. 아마 온갖 심계나, 욕심을 자극하는 회유법으로 끌어들인 수하들조차 반발을 일으킬 지 모르니까.

적당한 악인을, 적당한 보수로 부려먹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었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큼의 악업들을 그 등에 지워주면서 말이다. 세르게이 알사드는 확실히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이 대공가에서 직책이 높아지고, 많은 것을 맡는다는 건 과연 자랑스러운 일일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였다. 그건 그가, 그만큼의 ‘악업’을 등에 짊어질 수 있는 인격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사이코패스 성향이 높은 자일수록 대공가에서 높이 올라가기 편하다. 물론 실제적인 능력도 있어야겠지만.


게오르그 후딘도, 자신의 눈 앞에서 최악의 살인을 취미로 해댈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인간이기는 했다. 전쟁의 곁에 끊임없이 있으면서도 조금의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을만큼의 무심함은 있었다. 스스로 대의가 없는 공격자의 입장임에도 말이다.


“먼 길이로군.”


그다지 먼 길은 아니었다. 게오르그 후딘에게는 더욱.


‘회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되는 장소는 벨베르 북부에 있는 어느 한적한 도시였다. 이전의 장거리, 장기 외부 임무에서는 벨베르의 최남단에까지 가본 적이 있던 게오르그다. 이번의 건은 장기의 것도 아니었고, 단순하게 치고 빠지는 일이었으니 더 쉽다고 할 수 있으리.

그냥 의례적으로 내뱉는, 습관적 감탄사에 불과했다. 엄살을 피우는 일은 말이다. 일을 더욱 잘해봤자, 더 험한 곳으로 보내기밖에 더하겠는가.


오래 살아남을수록 잔머리만 늘고, 처세만 노련해지게 되어 있었다. 루드는 빙긋, 웃었다.


게오르그는 그런 루드의 표정을 보면서 속으로는.


역시 정상은 아닌 새끼라고 생각을 했다.


사람을 죽이고, 어딘가를 뒤엎는 일을 논의하면서 보일만한 기색은 아니다.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일말의 반사적 반응은 있지 않겠는가. 이미 말했듯. 사람이 일부러 지독하게 굴고, 표정이 어두워지고. 괜스레 위압적인 겉모습을 만들어 표현하고. 목소리의 톤이 낮아지고. 뭐 그런 것들이 ‘이미 존재하는’ 마음이나 신경으로 인한 반사적인 표현들이었다.


루드 윈터젝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조금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순수하게 믿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무리 배운 적이 없는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자신과 같은 인간을 죽이는 일이 나쁘다는 건 알게 되어 있다. 그건 그야말로 본능에 새겨진 윤리 의식이니까.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했을 때 오는 그건, 불에 닿았을 때 뜨거움을 느끼는 일과 같은 바였다. 불길은 물리적으로 사람을 태우지만. 악업은 사람의 영혼을 태우게 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확실하게 손에 감각으로 와닿지 않을 뿐이지. 그건 무엇보다도 정확하고 엄정하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게오르그 후딘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악업을 계속해서 자행해온 인간이었기에 누구보다 그런 기준에 관하여 빠삭해질 수 있었다. 루드는 이상한 새끼다. 그래서.


고로 뒤에 별로 두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겠는가. 헤실거리면서 다가오는 하급 행정관을 처낼만한 변명거리가 그에게는 별로 없었다. 대공가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에는. 선임 초상술사건 뭐건, 명령에 대한 거부권은 없다.


에둘러서 다른 임무를 맡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도망은 갈 수 있겠으나.


지금 사냥감 A, ‘제냐 킴’이라는 인물의 이방인 용병 암살에 실패한 암살조 인원들은 모조리 닥치고 숨을 죽이는 중인 시기였다.

대공의 심기를 거슬렀을 게 뻔하다. 사냥감 A, 알파 개체로서 명명된 놈이 아니던가. 그런 녀석들은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상대의 역량이 예상과 다르다거나, 상황 전개가 계획과 달라지는 건 현실에서 얼마든지 있는 일이기는 하다만.


이번에는 조금 더 경우가 좋지 않았다. 대공가의 앞마당. 알사드슈트, 대공령에서 바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이토록 과감하게 대공가에 접근하는 망아지 새끼는 게오르그로서도 또 처음이기는 했다.


야밤의 암살조가 다가가서 전투를 벌인 일 외에도. 따로 루드 행정관이 독살을 시도했다는 바도 들은 것 같았는데···. 아직까지 바깥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면 그마저 실패한 것 같았다.


최근 대계를 실행함에 있어서 예민하기 그지 없을 대공의 심기를 크게 거슬렀다. 특히 게오르그와, 검은 늑대단의 부부단장 히베는 말이다. 암살조의 여러 인원들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간부급인 두 사람에게 책임 소재가 씌워지는 건 피하기 어렵다.


암살조에 속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부하 놈들은. 당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닫고 처박혀 있었고. 그건 사실 게오르그나 히베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수작을 부리면서 임무를 거부했다가는, 정말로 소문대로 대공이 그를 처단할 지도 모른다.


일단 게오르그는, 대공가의 여러 관리나 부하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 진실이란 걸 알고 있는 사내였다. 세르게이 알사드 대공은 치밀하고, 정이 없고, 싸이코패스였으며, 제 부하라 할 지라도 방해가 된다면 치워버릴 인물이었다.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어서 증명하기는 어려운 부분이지만.


그리고 결국 대공의 입맛에 따라 대공가 휘하 모든 식솔과 병력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니. 그가 손짓 한 번 하면 결국 사지死地로 몰려나는 건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공의 기휘忌諱를 범한 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는 건 사실인데.

아무래도 대공 역시 미래의 계획과 일의 처리를 신경쓰는 자였으므로. 게오르그 후딘 정도의 노련한 워메이지를 잡졸 버리듯 할 수는 없었다. 이용가치가 남아있다고 한다면, 생명 역시 남아있다고 여기는 것이 맞다.


여기서 더욱 실수를 반복해서 정말 버려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게오르그가 사는 법은 그런 식이다.


“후우······ 웰리든Welleadon이라······.”


게오르그 후딘은 자신이 향해야 할, 목적지인 벨베르의 북부 시市 이름을 보며 중얼거렸다. 루드는 좋은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는 건지 앞에서 방긋거리고 있었고. 그 미소가 더없이 불길하게만 여겨졌다.


그리고,


그런 게오르그 후딘을 바라보는 두 개의 낯이 더 있었다.


며칠이 지난 뒤에 면상을 제대로 확인한 제냐, 와 최태현은.


루드의 뒤를 따라 들어와, 아무도 모르게 전술사단의 저택 응접실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기척을 감추고, MP를 극단적으로 제어하며. 숨조차 조심스레 쉬며.


그들이 나눈 대화와 자료들 따위를 본 바, 일단 대공 가家가 바로 그들이 찾고 있던 악인의 본거지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제냐는 볼을 긁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들의 향, 모습, 소리까지 감추고 있는 것이 릿샤의 스킬이었으니까. MP조차도.


제냐는 투명화의 술식 안에 숨어서, 루드가 앉은 소파의 뒤에 서 있었다. 최태현과 나란히. 옆에 있는 태현의 얼굴을 제냐가 바라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제법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는 나무 저택 안이었다. 기척을 극도로 제어하면서, 동시에 MP를 흘리지 않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걸을 때 그들이 가진 ‘무게감’은 사라지지 않기에 바닥 따위에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지 않게끔. 기력술을 사용해 본인들의 몸무게를 가볍게 만들어 이동했다.


감각이 예민한 초인들의 본거지이니까. 자신이 밟은 적 없는 나무 바닥의 어딘가가 눌린다거나,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것을 캐치하고 의심을 품을 수도 있었으니.


‘기력술’을 단지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어려운 기예였지만. 최태현도 제냐도 모두 레벨이 100이상이 되는, 마스터의 경지에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몸 외부에서 기력술을 사용하여.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이 그들의 몸을 잡아 이동시키듯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초상술사들이 하는 것마냥 부유술을 쓴다거나,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적어도 걸음걸음마다 몸무게를 최대한 줄여 없는 것처럼 걸을 수는 있었다. 아래로 향하는 몸무게의 압력만큼을 정확히 기력술의 힘으로 상쇄시키는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 제 몸을 띄워서.


이런 식으로 무게와 관성, 중심 밸런스를 제어하면 그야말로 인간같지 않은 난변화하는 동선을 전투 중에 보일 수 있게 된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기력술사들에게 중요한 소양과 스킬이 여러가지 있었는데. 개중에서 가장 화려하게 눈에 띄는 것이 ‘보법步法’에 관한 스킬들이었으니 말이다.


근접 거리의 격전에서, 제대로 된 풋워크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결국 화려한 검술도 쓸모 없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아무튼 용케도, 이 저택에 있는 여러 워메이지들에게 들키지 않고 그들은 잠입하여, 밀담을 듣는 데까지 성공을 했다.


이제부터는 나가는 일만 남았다. 기왕이면 더 오래 머무르면서 대공의 비밀에 관하여 케고 싶기는 했지만. 과욕을 부리다가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일단의 소득이 있으니. 조금 더 파볼만한 단서는 나름대로 발견을 했다.


제냐 일행과 관련이 깊지 않은 거물급 NPC들을 움직이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단서였지만. 깊은 교우를 가졌고 또 말만으로 서로를 믿어줄 수 있는 관계의 NPC들에게는 도움을 청할 수 있으리라. 그리턴 가나, 로멜리아 가문 말이다.


당장 함께하고 있는 로웰 드버를 통한다면 일이 더욱 편하리라.


자리에 앉아 있는 게오르그 후딘과, 루드 윈터젝.


두 사내는 응접 공간의 소파에서 그렇게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게오르그는 늘 그렇듯 고민하는 기색으로 서류를 바라본다. 루드가 무언가 일감을 가져와 건네줄 때마다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루드는 크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늘 그렇듯 그 역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다.


“그러면 저는 또 이만···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술사님.”


루드가 가볍게 말을 줄여 불렀다. 선임 초상술사, 라고 부르는 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기는 한데. 게오르그는 크게 괘념치 않는다. 그의 마음속에서 루드 윈터젝이라는 인물은, 어차피 싸이코같은 놈이었다.

미치광이가 예의를 조금 차리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에 두지 않는다. 등 뒤를 찌를 것 같은 광기를 당장 내보이지만 않는다면 별 상관이 없는 문제였고. 괜히 자극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드 윈터젝이라는 인물이 게오르그 후딘을 위협할만큼 대단한 초인은 절대 아니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었고. 단순하게 강한 자보다 속을 알 수 없는 머저리가 더 위험하다는 걸, 게오르그는 다년 간의 경험 속에서 깊이 깨달은 바였으니까.


게오르그가 적당하게 손짓을 했고. 루드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냐와 최태현은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소파의 뒤켠에 바짝 붙어 있다가, 천천히 뒷걸음질 쳐 공간을 비웠다.


몸이 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바로 근접한 거리에서, 예민한 작자들은 공기의 흐름들 따위로 제냐와 최태현을 눈치챌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어느 정도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게 옳은 일이리라.


또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가. 갑자기 상대가 넘어지기라도 하면서 부딪히면 불상사가 아닌가. 그러면 당장, 여기에서 게임 오버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은 하겠지만.


단 두 명으로 운트 작힘 백작가의 성보다 훨씬, 몇 배가 더 많고 강할 지 모르는 병력들을 상대하는 건 미친 일이었다.

제냐가 아무리 어려운 방식의 플레이를 즐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정도가 있는 법이다. 아예 이겨낼 만한 건덕지가 보이지 않는 일에 대책없이 들이박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헤쳐나가야 한다면 또 그렇게 하겠지만 말이다.


루드 윈터젝은, 자신의 뒤에 누군가 있다고는 생각을 못한 듯.


태연한 표정으로 일어나, 응접홀 옆 복도로 걸어 빠져나갔다. 그대로 잘 기름칠이 된 나무 바닥을 지나, 아래로 향하는 계단에 다다른다. 그런 루드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제냐와 최태현도 서서히 움직여서 저택을 나선다.


게오르그는 제냐와 최태현이 저택 내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 스트레스가 많은 일 뿐이로군.


하며, 게오르그 후딘은 상념에 젖어 두 사람을 놓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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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292. 벨케임의 고뇌(2) 24.05.01 14 1 22쪽
292 291. 벨케임의 고뇌 24.05.01 10 1 19쪽
291 290. 길드원員의 회의 24.04.30 11 1 26쪽
290 289. 사막민民의 회의 24.04.30 13 1 19쪽
289 288. 궁리 24.04.26 14 1 14쪽
288 287. 광자포같은 24.04.25 13 1 25쪽
287 286. Forest orb 24.04.25 13 1 18쪽
286 285. 도망을 잘 친다는 건 24.04.24 14 1 25쪽
285 284. ㅌㅌ 24.04.24 15 1 17쪽
284 283. 매달린 사내의 시점2 24.04.24 12 1 21쪽
283 282. 매달린 사내의 시점 24.04.23 13 1 13쪽
282 281. 기사A의 시점 24.04.22 12 1 13쪽
281 280. 방호 결계 24.04.21 16 1 15쪽
280 279. 날벼락 24.04.21 12 1 17쪽
279 278. 마른 하늘에 24.04.21 9 1 28쪽
278 277. 월담 24.04.19 16 1 16쪽
277 276. 담벼락 앞에서 24.04.19 10 1 16쪽
276 275. 회담장의 변變3 24.04.19 13 1 12쪽
275 274. 회담장의 변變2 24.04.19 12 1 12쪽
274 273. 회담장의 변變 24.04.19 12 1 12쪽
273 272. 방해 24.04.17 13 1 14쪽
272 271. 회담會談 24.04.17 12 1 30쪽
271 270. 다시 한 번, 24.04.17 14 1 11쪽
270 269. 비척거리며 기다 24.04.17 11 1 10쪽
269 268. 견제 24.04.16 13 1 26쪽
268 267. 썬더 울프. 사막의 밤. 24.04.14 15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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