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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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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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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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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268. 견제

DUMMY

*


“공公.”

“예, 폐하.”


늙은 신하가 목소리를 조금 높여 대답을 했다. 언제나와 같이, 알현실에서의 대화였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바닥. 매일 시종들이 각별하게 관리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먼지가 한 톨도 없게끔.


몇 명의 시종들이 연계하여 알현실 내부의 청소나 관리를 도맡고 있었고. 늘 궁내부의 관리 하나와, 왕실 기사단의 기사나 군병들 중 간부가 그러한 청소를 감시했다. 매일 관리인과 청소를 담당한 시종들의 이름이 서명부에 적히게끔 되어 있었고.

혹여나 왕이 사용하는 공간에 안전 상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서명한 시종이나 관리인이 심한 문책을 받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인적으로도 관리를 하고 있었고, 몇 종의 아티팩트들 역시 국왕을 보호하는 힘으로써 작용하고 있다. 산슈카의 국왕을 암살하고자 하는 암살자가 있다면, 아마 수많은 보호 장치들을 뚫고 이루어내야 하리라. 설령 왕실 본궁에 침입을 해서, 국왕을 목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산슈카의 왕위에 오른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무수한 힘들로 인해서 보호를 받는다는 것. 그런 엄중한 관리와 도움은, 곧 이 나라를 올바르게 통치해달라는 백성들의 간언이나 다름이 없는 말이었다. 벨케임 사슈나 7세는 늘 마음에 새기며 국정을 돌본다.


최근 낌새가 이상하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소란스럽기는 했으나.


“···사절단은 무사히 벨베르 공화국에 도착을 했다고 하는군.”

“다행입니다.”

“벨베르와 이슈칼에 테러를 감행한 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소견이 없으시오, 달리.”

“늙은 머리가 생각이 둔하군요.”


옥좌에 앉은 벨케임 왕의 아랫단, 미하일 요겐 대신관은 안타깝게도, 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왕 역시 미하일이 어떤 완벽한 대답을 주리라 기대한 바는 아니었다. 답답하기에 자문을 구해본 것에 불과하다.


“궁내부를 통해 각지의 정보 요원들이 보내온 소식이 있었소.”

“소식 말입니까.”

“음.”


벨케임 7세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거렸다. 제법 체격이 큰, 둔중한 육신이다. 그러나 옥좌는 어떤 체형의 왕이라고 해도 앉을 수 있을만치 넉넉한 규격이다.

실제로 조금 특이한 체격의 왕이 보위寶位에 오르면, 그러니까 정 안되면. 옥좌를 조금 개조하던가, 혹은 새로 제조하기도 했다.

왕실의 국고 안쪽에는 궁내부의 담당관이나 아는 사실이었지만. ‘소, 중, 대’형의 사이즈별 옥좌 프레임이 보관되어 있었다. 다음 대의 왕이 옥좌를 지나치게 불편해하면 프레임을 가져다가, 외장재를 덧붙이고 또 초상학적 처리를 해서 완제품으로 만드는 식이었다.


벨케임 7세가 앉은 것은 6세의 것을 그대로 계승한다. 보통은 중간 사이즈의 옥좌로 대개 처리가 되는 편이었다.


“···일단 로멜리아 가문 근처에서 공격이 있었다는군.”

“······.”


대신관, 미하일 요겐은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이다.


아무렇지 않은듯 만나고 있는 시간은 소중한 것이었다. 미하일 요겐과 국왕, 벨케임 7세가 대화를 나누는 지금의 자리 말이다. 궁 내의 성전聖殿, 예배용의 궁에 머무르고 있는 미하일이다. 왕이 거하는 본궁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고. 미하일은 문안을 드리러, 별다른 용건이 없어도 높쇠매궁에 들리곤 한다.


반대로 벨케임 7세 역시 다른 전할 말이 없어도 미하일과의 대담對談을 꼭 갖는 편이었고. 미하일은 그의 스승이자 지혜로운 조언가였고, 이 나라의 원로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알현실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알현실 내를 호위하고 있는 병사 외에는 들을 가능성이 없었다. 아마 ‘병사’가 기력술사이며, 특별히 왕의 대화를 엿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소상하게 듣지 못할 테였고. 넓은 알현실의 구석, 숨겨진 방 따위에서 대기를 하곤 했으니 말이다 호위 무사는.


호위 무사는 왕실 기사단, 혹은 왕실 전술사단, 혹은 왕실군 중 실력이 특출난 자 몇이 번갈아가면서 맡게 된다. 지금은 로얄 가드(왕실 기사단 중에서도 특출난 실력자) 한 명과 엘리트 병사 세 명이 알현실 내에 숨어 있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곧바로 직선 거리로 달려와 왕을 지킬 테였고. 그러기 이전에 국왕이 착용하고 있는 여러 아티팩트 따위가 발동하며 방어 체계를 이룰 것이었다.


만일 알현실 내에 첩자가 숨어들어 왕을 공격했고. 그게 성공하지 못해서, 소란이 알현실 바깥으로 넘어간다면. 이제 본궁을 지키고 있는 워메이지가 달려들게 되고.


“그래서, 무사하다고 합니까.”


대신관도 나름대로 눈과 귀가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첩보부가 찾아내는 것만큼은 아니리라. 그들이 산슈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1인자의 세력이니,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자신의 제자였고, 아이였고, 지금은 장성한 왕과의 대담은 미하일에게도 여러 정보를 얻을만한 중요한 자리가 된다.


늙은이가 표정을 조금 구기며, 놀람을 표현했다. 로멜리아 가문에 어떤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듯말이다. 벨케임 왕이 물었다.


“생각보다 더 놀라는군. 일단 근처에 있는 왕실군을 보내어 분쟁을 그치도록 하기는 했네. 로멜리아 령 주변에 있던 남작들이 별다른 명분도 없이 갑작스레 영지전을 신청하고 멋대로 일을 벌였다고 하는데···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네.”

“허.”


미하일은 흰 빛이 섞인 옷을 입고 있다. 벨케임 왕은 치렁한 옷보다는, 그 위에 장구류만 걸치면 그대로 사냥터에라도 뛰어나갈 수 있을듯 몸에 잘맞는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옥좌에 어떤 형태의 옷을 걸치고 앉아 있던, 그건 그의 마음에 따른 일이다. 벨케임 왕에게 군소리를 할만한 자는, 적어도 근처에는 없었다.


미하일은 왕의 홀笏(왕홀;서양권에서 왕, 등이 왕권을 상징하기 위해 쥐고 있던 지팡이)은 아니었으나 짤막한 지팡이를 갖고 있었다. 대신관의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물이었고. 왕의 것과는 다르다. 벨케임은 정식定式을 지켜야 하는 때가 아니라면 굳이 들고 다니지 않았고.


노인은 대신관의 지팡이 끝을 툭, 툭 두드리며 고민하는 티를 내었다. 왕이 묻는다.


“로멜리아 가문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소? 걱정이 심해 보이는군.”

“아니··· 그런 것은 아니오나···.”

“사대 가문이라 그러한가?”


사대 가문, 사대 고가古家. 산슈카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내려오는 가문들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영락한 산슈카와 같이, 영락한 꼴이었지만. 사슈나와 알사드 가문조차 말이다. 로멜리아나 그리턴은 남자작의 위位였고, 하위 귀족이라 할 수 있었다. 알사드와 사슈나는 각기 왕실과 대공가家로서 산슈카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전 산슈카의 전성기 때를 생각한다면, 지금 사슈나 가의 왕실로서 갖는 권위도 하잘 것 없는 무엇이라 할 수 있다. 필리아 대륙을 호령하던 대제국의 황실이나, 그와 같이 권세를 누리던 대가문들의 꼴은 아니다.


제국기 당시 로멜리아 가문이 다스렸던 영토만 하더라도, 지금의 산슈카보다 더 넓을 테였다.


지금은 너무 오래된 문헌 속의 이야기라. 왕실이나 그와 관련된 이들조차 자세하게 아는 자가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가끔 노인들, 혹은 정통주의자들에게 그 이름은 특별하게 여겨졌다. 그리하여 사대고가의 일각인 알사드 가문이, 온갖 귀족들의 집합인 정통파의 수장으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이었고.

물론 알사드 대공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습니다.”


미하일은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벨케임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튼 로멜리아 가문의 일 외에도···. 여기저기 소란한 바가 많소. 화신 사막에서도 부족들끼리 전쟁을 시작했다더군. 아주 없는 일은 아니나··· 그래도 근 삽십 여 년 정도는 평화기를 유지했던 것 같은데 다시 소란스러워지는 모양이네···.”

“전란戰亂의 기세가 필리아에 다시 흐르는 듯합니다.”


필리아는 중부 대륙의 이름이었다. 콘란드konland 대륙은 지구상에 있는 여러 대륙들을 한 개로 모아 놓은 듯한 거대한 크기의 땅덩이였고. 개중에서도 필리아는 중부 대륙을 지칭했다.


‘대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적어도 아프리카 대륙 정도의 크기는 되니까.


각 동서남북, 사방위를 둘러싼 듯한 지역과 떨어져서, 중부 내륙 지방에 위치한다. 그러나 메마른 땅은 아니었고, 굽이치며 올라오는 바다로부터의 긴 지류나, 혹은 지중해地中海라고 할만한 것들이 여러 개 있었기에 살기에 괜찮은 곳이다.

콘란드 대륙 전역에 빼곡하게 사람들의 나라가 서 있지는 않았고. 각 동서남북 대륙과 중부대륙들은 깨나 먼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


분리된 그 황무지, 자연의 땅에는 아직 개척하지 못한 미지의 자연과. 혹은 사나운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렇게까지 보시오.”


벨케임 7세는, 옥좌의 아랫단에 임시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은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백발, 백염. 노인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더 늙은 노신老臣이었지만. 대신관이 정기를 잃어버리는 때는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국사國事에 관한 결정을 할 때 좋은 조언자 하나를 잃어버리는 셈이니까.


왕의 말에 노신이 고갤 주억거렸다. 고갯짓은 아직 힘이 정정하다.


“예. 이미 오랜 시간 평화기가 이어졌습니다.”

“화신 사막의 삼십 여 년은···.”

“사막 민족들의 평화기가 아니라, 필리아의 평화기 말입니다.”“······.”


노신의 말에 벨케임은 입을 다물었다. 알아 들었지만 모르는 체 하려고 말을 돌린 것일 수도 있었다. 사람이란, 뻔히 보이는 것을 앞에 두고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가끔 눈을 돌리니까 말이다. 노신관의 눈빛은 빤, 히 왕을 바라본다. 흔들림도 없다.


늙은 스승의 표정에 벨케임은 입을 다물고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평화기가 길었다, 라.


맞는 이야기였다.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 자유 연맹의 효력이 다했다고 보시오?”

“자유 연맹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저···. 시기적으로. 그럴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할 뿐이지요. 인간은 어리석어 본디 전쟁을 반복합니다. 거대한 일들이 단지 인간의 소견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볼 수는 없지만.


······.

결국 변화는 필요할 겁니다. 자유 연맹보다 더욱, 공고한 질서가 필리아에 들어서야 합니다. 자유 연맹은 아릿시안의 죄를 묻지도 못하며···.”


노인은 입이 말랐는지 침을 바르며 이야기를 했다.

노신관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에서 오는 경험이기도 했고. 또 깊은 식견에서 오는 지혜와 통찰이기도 했다. 사람은 어리석은 짓을 반복한다. 늘. 그건 평화기와 전쟁기의 반복과 주기로 볼 수 있으리라.


어느 정도 기술의 발전이 궤도에 오르고, 선진국이라 할만한 문명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렇다 할 대전쟁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인, 미하일 요겐이 보기에 중부 대륙의 기술력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국민들은 그럭저럭 잘 살아간다. 그가 살아온 이전 시대에 비한다면, 근대에는 흉작도 많지 않았고. 계속해서 연구, 개발되는 기술력들은 수도를 비롯해서 첨단 도시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갔다.


그건 곧 국력의 증진이기도 했고. 병력兵力의 증진이기도 했다.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아무도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일어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전쟁의 억지력이 되리라. 그러나 노인의 눈에 평화기를 지나고 있는 자유 연맹 내부의 국가들이나, 여러 집단들은 아직 목이 마른 존재들이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평화를 이어나갈 의지를 가진 자들 또한 있지만. 발전하고 있는 기술력을 전투적으로 사용해 다음 시대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이들 또한 있을 테다.

평화기는 전쟁을 준비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였고. 모두가 안심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이야말로 위기를 인식하고 숨을 죽이기에 가장 적당한 때였다. 세상사란 그런 법이었으니. 늘 동전의 양면처럼 각기 다른 것들이 붙어 있는 법이었다.


아마 노인이 죽어 사라질 때까지도, 완벽한 평화라는 건 오지 않을 테였다.


그런 논리로 보았을 때.


겉으로 보기에는 감춰진 야욕이 속으로 곪아가다가 드러날 때 즈음이 작금이라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아릿시안 제국은 아직도 노예제를 공인하고 있었고. 중남부의 자유 연맹 가입국들은 노예제를 철폐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제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았던 상흔, 흔적들은 아직도 역사에 남아 있었고. 노인들은 그 흔적을 배워 알고 있었다.

직접 경험한 바는 아니었어도 실제로 겪은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은 셈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 그리고 그 후대는 아마 아릿시안 제국의 무서움을 모를 테였다. 지금 시대에도 전쟁과 어려움, 위험은 끊이지 않고 있었지만. 대륙 전역이 화마火魔에 삼키는 사태를 상상하기는 어려우리라.


노신관은 늘 노인으로서,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왕에게 간언諫言을 올려야만 했다.


필리아 중남부의 나라들은 일단 국가간 공유하는 규율로써 일정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안정기를 이어온 지가 몇 세대이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알게 모르게, 노예 따위를 사고 팔기도 하고.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작자들은 물론 자유 연맹 내에도 많이 있었다. 산슈카에도 분명 많이 있으리라. 왕실이 그것들을 전부 파악하는 일은 어렵지만. 노신관은 그저 아름답고 즐겁기만한 삶이 이 시대 국민들의 삶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순 있었다.


평화기를 지나며 왕 뿐만이 아니라 휘하의 여러 지휘관, 장군, 대귀족들 따위도 힘을 모아왔으리라. 그건 산슈카만의 이야기도 아니었고. 아마 여러 나라들이 동일한 사정이리라.


개중에서 자유 연맹의 흐름과 뜻에 반대하는 이들이 일을 저지른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아릿시안의 압박과 저주 또한 많이 희미해진 요즈음이 아니던가. 도리어 자유 연맹 내의 기조보다 아릿시안의 패도霸道를 따르고자 하는 작자들이 있을 수도 있었고. 전쟁과 정복. 야욕과 탐심으로 이루어진 삶을 추구하는 이들 말이다.


자유 연맹 내에서는 그래도, 주기적이며 활발한 외교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각국 내의 정보들을 많이 공유하는 편이기는 했지만. 그런 개방적인 관계 속에서도 비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각국의 정부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암적 존재들에 대해서는 어차피 나눌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아마 벨베르 공화국과 이슈칼에 테러를 일으킨 존재 또한 그런 이이리라.


그 흉수의 근거지가 어디인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존재’한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런 의지를 가진 미치광이가 엄연히 살아 숨쉬고 있었고. 그건 비단 산슈카 내 뿐 아니라 각국 여러 곳에 있을 수도 있었다.


이토록 길게 평화기가 이어져온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며 각 통치자들의 어떤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사람은 본디 허물어지고 모자라며, 못난 존재이기에. 그 위업이 끊기며 어려운 시기가 온다고 하더라도 놀랄 게 없다.


대신관은 왕의 말에 의해 듣는 여러 정보들을 취합하여. 슬슬 그런 시기가 올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었다.


벨케임 왕 역시, 확고하게 아는 바는 있었다.

평화라는 게 결코 값싼 무언가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막대한 병력, 그리고 분명한 의지를 지닌 지휘권자가 필요했다.


대신관의 말을 그저 노인의 기우杞憂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대신관은 단지 그렇게 치부하기엔 학식이 지나치게 깊은 영감이었다.


“폐하, 아뢰옵기 어려우나···.”

“말씀하시오.”

“세상에는 미치광이들이 참으로 많사옵니다.”

“허허···.”


과연 왕 앞에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노인의 안광은 떨림이 없었고.

왕 역시 동의하는 바다.


왕이 된다는 건, 세상을 지킨다는 말과도 같다.

‘세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창하지만. 가장家長이 된다는 건 가족의 안위와 평화를 지킨다는 이야기였고. 왕王이 된다는 건, 나라의 규모로 그런 일을 한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일국一國’은 곧 타국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만한 단위의 집단이며. 곧 그 나라가 속한 대륙과 세계에 미칠 파장을 염려해야만 했다. 왕은 말이다.


산슈카Sanshuka가 속한 세계.

필리아 대륙이라는 세계를 지키고, 그 안위를 염두에 두는 게 왕위에 오른 인간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정신나간 파괴자들에 대한 견제는 필수이다. 여태까지는 그럭저럭, 잘 해왔다고 생각했다. 유지라는 게 어떤 면에서 발전보다도 어렵다는 걸 생각해보면. 벨케임 사슈나 7세는 성군이라고 불릴 지도 모른다. 훗날에는.


“짐이 어찌하는 게 좋겠소.”


왕이 솔직하게 물었다. 애초에 그것을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알현실은 곧 Hall이었다. 전당. 깨나 넓은 크기였고, 몇 계단 위, 옥좌가 있는 곳도 아주 큰 단상이며. 그 아래의 평평한 곳도 수십의 신하가 도열하기 모자람 없는 공간이다. 아마 수 백, 빼곡히 채운다면 천 이상의 사람도 채울 수 있을 것이었다. 선 채로 말이다.


기둥이 말없이 서있었고, 아름답게 조각된 예술품들은 역대 왕들의 눈을 멀게 만들어, 곧 그것이 평범한 것처럼 보이게끔도 했다. 왕실의 미술품들은 산슈카 최고의 장인들이 벼려낸 것이었으나. 매일 보게 되면 그 특별함도 잘 보이지 않는다.


창이 없는 공간이었고, 옥좌가 있는 단 뒤쪽으로 유리 장식이 창문처럼 걸려 있으나 바깥과 통하지는 않았다.


말 없이 가만히 있으면 한없이 사람을 내리 누르는 듯한, 무거운 공기의 장소였다. 말을 하면 웅웅대며 울리는 감이 약간 있었고.


텅 빈 공간에 한기寒氣는 달리 없다. 대도시의 명문가나 상회, 회관 따위의 건물에도 설치되어 있을 편의를 위한 아티팩트가, 왕궁에 없는 게 말이 되지 않으니. 일 년 내내 사람에게 적당한 온도로 맞추어져 있는 공간이었다.


왕의 말이 조금 울리듯 들렸다. 노인은 곰곰이 생각을 하다 답을 건넨다.

아주 어릴 적, 눈 앞의 장한이 ‘아루스’라고 불리던 때처럼 말이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나 사승간의 관계는 여전했다. 지독하게 고민을 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찾아오며 답을 구한다. 노인은 어떤 말이 좋을까, 늘 단어를 거듭 고르다 입에 올렸고 말이다.


“···알사드 가家를 조사하십시오.”

“뭣.”


뜬금없는 이야기에, 다만 어린 제자는 늘 놀라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여 년이 지났음에도.


노인은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깊은 생각 내의 논리를 끌어내느라 그런 것이다.


“사대고가는 산슈카를 지탱하는 축입니다.”


그리 말하며 알현실의 굵직한 기둥을 가리켰다. 기둥 자체에도 아름다운 음양각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대리석. 거대했고, 왕궁을 받치고 있는 놈들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렇지요. 그건 역사가 증명합니다.

이제는 한미한 가문이 되어버렸으나, 로멜리아와 그리턴은 여전히 일좌로서 유물을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유물 말이오.”


벨케임 왕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유물. 그래, 분명히 중요한 이름이었다. 산슈카를 산슈카이게 하는 것 중 하나이리라.

고대의 역사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강력한 아티팩트들. 개중에서 해석되고, 사용가능한 바가 달리 없기는 하지만. 역사의 후계로서 왕위에 오를 때 배우는 사실들 역시 많이 있었다. 왕가에 숨겨져 있는 물품들. 또 특별한 규칙에 의해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몇 종류의 아티팩트들에 대하야.


“예. 그리턴과 로멜리아는 수도에서 다소 떨어져 있고···.

사대고가로서 산슈카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지만··· 실제적으로 위세가 없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로멜리아가 이유 모를 습격을 당했다고 한다면···. 아마 모종의 계략이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계략이라.”

“아무것도 가진 바 없는 한미한 가문을 노려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 근처의 자남작들이 죄다 미친 자들도 아닐테고.”


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그가 임명한 가문의 후계자들이었다. 대책없는 광인이 있으리라 여겨지진 않았다. 광증 역시 병이었고, 갑작스레 발병할 수는 있었으나. 그래도 너무 뜬금없다.


“모종의 큰 대계를 세우는 자가 일을 벌일까 염려됩니다.” “대계라면.”


“사대고가 중, 사슈나 가를 제외한다면 유일하게 힘을 갖고 있는 가문이 있지 않습니까.”

“알사드 가家가 무슨 다른 꿍꿍이를 품었다는 말이오?”


대신관은 무거운 표정을 짓는다. 노인의 염려가 드러난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결국 대공 가家 뿐입니다. 다른 장군들, 귀족가의 거두들이 많이 있으나···. 저는 묘한 예감이 드는군요.

알사드 대공··· 프린스Prince는 지난 세월 지나치게 잠잠했습니다. 그럴만한 자리가 아님에도요.”

“그게 좋은 것 아니었소.”


대신관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하루 이틀 사이의 일은 아니었다. 프린스 알사드에 대한 견해도 공유한 바가 많았다.

쓸데없는 일을 벌리지 않는다. 귀족 가문들의 편가르기에 놀아나지 않고 중심을 지킨다. 그것이 알사드 대공과 그 가문, 세력에 대한 사적인 평이었다. 두 사람이 나누었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나,


“예, 그렇지만 지금 시기에는 조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국내외에서 이상한 변고變故들이 계속 일어나고···. 오래 지속되었던 평화기가 꺼질지 모를 위기 가운데 산슈카가 있습니다.

그저 작은 일이라고 치부하고 넘길 수도 있겠으나···. 긴 세월 지켜져 온 안정기가 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각국은 많은 힘을 비축해왔고요.

아릿시안 제국과 자유 연맹이 총력을 다하여 부딪힌다면,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럴 때 사람은 헛된 욕심을 품게 마련이지요.”

“······.”


벨케임 왕은 표정이 다소 굳어진 채로, 느리게 반응하며 생각에 잠긴다. 노인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는 것이다.


“누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변고들이 시발점이 되어서 필리아 대륙 전체를 삼킬 화마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각국에서 그러한 흐름에 동조하는 미치광이들이 나올 수도 있고···.

현 산슈카 국내의 정세에서 지켜봐야 하는 곳과 자者는, 알사드슈트의 프린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위험한 일을 한다고 한다면, 그 자뿐이 없습니다. 변경백은 결국 이슈칼과 안단의 움직임에 반응해야 하고.

정치적 세력을 이끌고 있는 벤케인 후작이나 정통파 쪽의 인물들은 그럴만한 힘이 부족합니다. 비축된 힘이요.


대장군이 헛된 마음을 품는다고 하더라도, 군부의 체계가 공고하니 홀로 모든 일을 일으킬 수는 없고···.


오롯이 귀족가의 정점에 서서, 오랜 시간 은둔해 온 프린스만이,


만일 일을 저지른다면 저지를 수 있겠구나, 라고 사료가 됩니다.


사대고가의 일좌라는 것도 중요한 점입니다. 폐하께서조차 다 인지하지 못하는 고대의 유물들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

제국기의 산슈카는 비록 천 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넘었더라도, 그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있을만큼 정녕 위대한 국가였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유물을 가지고 이상한 꿍꿍이를 세운다면···.”


대신관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어도,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라서 그러하다. 그만큼 왕과의 신뢰 관계가 공고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대공 혼자 필리아를 뒤흔들 대계大計를 꾸미고 있다고 해도, 말은 되는 점입니다.”

“······.”


긴,


침묵을 벨케임 왕은 가졌다.


알현실에는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보온용의 아이템이 가동하고 있어 진실로 그렇지는 않았지만. 말없는 두 노장老壯의 안색이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벨케임은 자신이 오랜 시간, 놓치고 있던 게 있진 않았을까, 되새긴다.


“프린스···.”

“누가 ‘가능하냐’는 점에서, 한 번 따져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왕이 말했다.


“알겠소. 일단 알사드슈트의 정황을 살피도록 하지···.”


직접 알사드 공작에게 알리며, 내부를 파악하는 일과. 혹은 알리지 않더라도 왕실의 첩보부를 이용해서 공작령을 알아보는 두 가지 수단이 존재했다.

가장 좋은 건, 둘 모두를 사용하는 일이리라.


물론 왕실의 첩보부도, 대공령의 공작 저邸 내부를 살피기는 어려웠다. 그곳은 왕실에 준하는 초능력자 집단이 상주하며 또 방위 체계를 만들어둔 공간이니까.

잘못되어 들키기라도 하면, 왕王이기는 하나 신하의 독자적 영지를 침해하는 행위가 되어 눈총을 살 수 있었다. 왕이라고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상호간의 존중이나, 혹은 적절한 견제도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왕은 국민들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처럼. 여러 신하, 관료들의 힘을 빌려 나라를 운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정통파의 태두泰斗로 군림하는 대공가는 왕실로서도 불편한 면이 있다.


긴 시간 산슈카를 함께 지켜온 사대고가의 일좌라는 면 또한 그런 불편함을 증대시키는 점이기도 했고.


왕은 손짓으로 무수한 인물들의 행위를 결정한다. 벨케임 왕은, 긴 시간 가만히 두었던 앞마당의 친구에게. 견제의 눈길을 한 번 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의 뜻에 따라 다시 여러 명이 파견되어 움직이리라.


대신관과 왕은 그 뒤로도 얼마간, 국내외의 대소사를 조금 더 논하다가 만남을 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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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291. 벨케임의 고뇌 24.05.01 9 1 19쪽
291 290. 길드원員의 회의 24.04.30 11 1 26쪽
290 289. 사막민民의 회의 24.04.30 13 1 19쪽
289 288. 궁리 24.04.26 13 1 14쪽
288 287. 광자포같은 24.04.25 13 1 25쪽
287 286. Forest orb 24.04.25 13 1 18쪽
286 285. 도망을 잘 친다는 건 24.04.24 14 1 25쪽
285 284. ㅌㅌ 24.04.24 15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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