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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5.08 23:1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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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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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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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35화 앱솔루트에서 온 손님

DUMMY

35화 <앱솔루트에서 온 손님>



도로를 따라서 마차의 바퀴가 지나갔다.

사람들은 가게의 간판을 내려두고 문을 활짝 열었다.

새로이 시작되는 가람왕국의 아침.

온 거리에 활기가 가득했다.


“쯧. 또 시작이구먼.”


모험가 길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2층 계단 바로 앞에서 너구리 수인이 혀를 찼다.

그는 가람왕국의 동 등급 모험가 라군.

어딘가에 시선을 둔 채 해장술을 즐기던 라군은, 익숙한 얼굴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어이, 두 사람. 오늘도 아침부터 출근했구먼?”


모험가 길드의 영웅이자 최근에 가장 화젯거리인 두 사람.

그중 한 명인 캣니스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라군 님 좋은 아침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무슨 일은 무슨. 맨 날 있는 일이지 뭐.”


말을 하고는 쭉 술을 들이켰다.

시원하게 ‘크으’ 소리를 내지만 어딘가 불편한 기색은 여전했다.


“뭔데, 너구리? 무슨 일인데 신경 쓰이게 굴어?”

“정말 별일 아니네. 그저 저쪽 아가씨의 일이 아침부터 소란스러워서 그러지.”


라군은 턱짓으로 접수처 쪽을 가리켰다.

익숙한 붉은 머리가 접수처를 맡고 있었다.


“또 어린놈이 고집을 부리고 있다네.”


캣니스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접수처 쪽을 보았다.

낯이 익은 남색 머리카락이 접수처 앞에 있었다.


“저 소년은···.”


캣니스가 전날에 응접실에서 보았던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대화하는 모습은 평온한 대화와 멀어 보였다.


“셰인 님이 무얼 잘못한 건가요?”


목에 핏대를 세우는 소년과 식은땀을 흘리는 셰인.

의문을 가지고 라군을 바라보자, 그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손을 저었다.


“잘못은 무슨. 저 꼬마가 일방적으로 고집을 꺾지 못해서 문제지.”

“고집을 꺾지 못해요?”

“그래, 고집 말이야. 저놈이 아주-”


아주 쌍욕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말똥말똥 눈을 깜빡이는 캣니스를 보다가 마른기침을 뱉었다.


“크흠, 아무튼! 자세한 건 직접 가서 듣게.”


빈 술잔에 술을 새로 따랐다.

더 이상 그녀에게 해줄 이야기 없음을 일러 주었다.

하기 싫은 이야기를 계속해 달라고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


“네,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해요. 라군 님의 하루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랄게요.”

“너에게도 좋은 먹잇감이 잡히기를 바라지. 혹시 브레드 공을 보게 되면 라군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게.”

“알겠어. 대머리 보면 바로 알려줄게.”


그들은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캣니스가 라군과 멀어지자마자 가더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문지기님. 브레드 님에게 대머리가 뭐예요, 대머리가?”


조금 전의 브레드를 호칭한 단어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가더는-


“대머리를 대머리라 하지 뭐라 해?”


라고 말했다.

이에 캣니스는-


“이름은 두었다 뭐하게요?”


라고 말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일일이 기억해서 뭐 하게?’이었다.

결국 캣니스는 할 말을 잃고 시선을 돌렸다.

그나마 얼굴이라도 기억하고 있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그들이 그러는 사이.

접수처에서는 더욱 큰소리가 오갔다.


“이게 말이 돼? 너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지!”


접수처 앞을 떠나지 않는 소년.

자일리는 자신이 받은 처우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나무패 등급이라니 웃기지 마! 이 천재 마법사 자일리의 실력을 무시하는 거야?”


모험가 등록을 진행하던 중에 벌어진 실랑이.

자일리가 셰인의 판단을 믿지 못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자일리 씨, 진정해 주세요. 자일리 씨의 실력을 무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처음 접수처를 맡았을 때라면 모를까. 셰인도 많이 성장했다.

며칠간의 경험을 토대로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실망스러운 마음 이해됩니다. 하지만 자일리 씨의 스테이터스 종합수치는 E등급입니다. 모험가 지침서에 따르면 E등급의 모험가는-”

“그러니까 네가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거 아니냐고!”


-쿵


옳은 이야기를 해도 접수처를 내리치는 과격한 행동으로 돌아왔다.

셰인은 그런 태도에 난처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길드의 지침대로 이야기해도 받아들이질 않는다.

심지어 루나와 바네샤가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기에 스스로 이겨내야 했다.


“무려 천재 마법사인 내가 모험가가 되는 거라고! 그런데 너 같은 바보가 일을 맡아서 이따위로···!”


꾸욱. 이어지는 독설에 아랫입술을 씹어 눌렀다.

셰인이 처음 받은 교육은 ‘웃음을 잃지 않을 것.’

반론의 여지도 할 말도 많지만,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예비 모험가님. 모험가님께서 보여주신 활약으로는 등급을 올리기에 문제가 있어요.”

“그러니까 너의 그 기준이 잘못된 거라고 말하잖아! 멍청아!”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물어뜯을 듯 덤벼든다.


“나무패 등급이라니 완전 밑바닥이잖아! 그게 나랑 어울린다 생각해?!”

“모험가님. 제가 외운 길드 지침서에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낮은 등급인 나무패 등급이라도 차근차근 증명해 가시면 훗날에 얼마든지 높은 등급이 될 수 있으니···”

“아, 몰라! 그런 거 모르고! 어제 그 여자 다시 불러와! 너 같은 한심한 애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지친다고!”


셰인의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조금 전의 그가 한 말은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였다.

이런 아이하고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이 피곤했고, 유능한 선임들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절실했다.

하지만 차마 그들을 부르러 발걸음을 뗄 수는 없었다.

접수처를 홀로 맡게 한 믿음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민폐를 끼칠 수 없어!’


손바닥에 난 식은땀을 남몰래 감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정신으로 무얼 하겠다고.


‘나도 할 수 있어!’


지난날에 느꼈던 치욕을 떠올리며 의지를 다잡았다.

갈비뼈가 오르게 심호흡하고, 이상적인 종업원의 모습을 연기하였다.


“뭐, 뭐야? 왜 그래? 왜 그렇게 웃어···?”


기고만장하던 자일리가 불안한 눈빛을 보였다.

만만해 보였던 셰인이, 웃는 얼굴로 위압감을 풍겼다.


“자일리 씨?”

“어?”

“제 말을 못 믿으시니, 직접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탁자 밑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한 두께.

무려 쪽수가 칠천에 달하는 모험가 길드 지침서였다.


“자, 함께 살펴볼까요?”


은밀한 행동과 자료수집. 대인 전투 능력과 함정 타개 능력을 겸비한 성기사.

그중에서도 독한 기질을 지닌 성기사만이 뽑히는 게 발자취다.

셰인은 근성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리라 자신했다.

설령 상대가 정론이 통하지 않는, 상식 밖의 꼬맹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모험가님이 말씀하시는 부분은 1,323쪽에서 1,346쪽까지 나와 있어요. 잘 살펴보시고 궁금한 점 있으면 물어봐 주세요.”


생긋 웃는 얼굴로 웬만한 백과사전을 내로라하는 두께의 서적을 들이밀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자일리의 안색이 울긋불긋해졌다.


“너! 네가 모자란 거를 이런 식으로···!”


-쾅


부당한 대우라 소리치며, 길드 지침서를 주먹으로 내려친 그때였다.


“셰인 님.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불쑥, 금발 머리의 소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푸른 눈동자를 본 자일리는 말을 멈추고 입만 뻐끔거렸다.


“너, 너는 어제 그?”


펄쩍, 뒤로 물러났다가 다리가 꼬였다.

엉덩방아를 찧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일리는 갑작스레 끼어든 캣니스를 삿대질하며 눈에 띄게 당황해하였다.


“읏. 으읏! 창피하게 진짜···!”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러나 캣니스는 그가 난처해하거나 말거나 접수원에게 말을 걸었다.


“셰인 님. 이 아이랑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아, 음···. 그냥 작은 문제예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아뇨. 약간의 오해가 있을 뿐이니 캣니스 님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진심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태도로 도움을 거절했다.

며칠 전까지 캣니스에게 의존하던 모습과 비교하면, 정말 많이 성장한 것이다.


“너, 너 때문에 이런 꼴을 당했잖아!”


자일리가 버럭 소리쳤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태연히 대화하는 셰인이 가증스러웠다.

마음에 둔 여자아이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손가락질하며 제 험담하는 셰인이 미웠다.

실제 사실이 어떠하든. 그가 보는 세상에서 셰인은 그런 존재였다.


“감히 평민 주제에!”


성숙하지 못한 시야가 위험한 행동을 불러왔다.

자일리의 손바닥 위로 불덩이가 만들어졌다.

난데 없이 행하는 위협행위.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멍청한 아줌마가!”


마력으로 이루어진 불덩어리가 사람을 노리고 날았다.

불덩이가 향한 목표는 그의 원망을 한 몸에 받은 길드 종업원이었다.


“셰인 님!”

“악! 아아악!”


순식간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이목이 단번에 쏠렸다.

의자가 넘어지고 사람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악!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그런데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불 마법이 향한 대상과 달랐다.

엉망이 된 접수처 너머로, 자일리의 몸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큭.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인가요! 하마터면 캣니스 님의 존안에···!”

“이거 안 놔?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런 식으로 대우해?! 나는 톨스 가문의 넷째···”


이즈음 되니 셰인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벽에 생긴 그을림을 확인하고 놀란 표정의 캣니스를 바라보자 더더욱 그러했다.


“닥치세요.”

“아아악!”


셰인이 자일리의 팔을 잡고 뒤로 빼자, 어깨에서 뚝뚝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관절 본연의 위치가 어긋나기 직전이었다.


“너. 얼굴 기억해 뒀어! 모험가를 패는 여자 기억해 뒀다고! 톨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너를 실직자로 만들겠어! 이런 몰상식한 사람을 내놓은 이 길드를 망하게 할 거라고!”

“누가 그런 협박에-”

“해 봐! 계속 잡고 있어 봐! 감히 천한 신분이 만질 자가 아니라는 거를, 내가 똑똑히···”

“도련님!”


-벌컥


안쪽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톨스 가문의 기사, 카이스트였다.

그의 시야에는 어린 주인을 폭행하는 종업원이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호위 기사답게 판단은 빨랐다.

순식간에 셰인을 자일리에게서 떨어트렸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내고는 주인을 습격한 셰인의 목을 겨누었다.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계십니까!”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가 셰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톨스 가문의 어린 자제를 폭행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물었다.

셰인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 원인은 카이스트 때문이 아니었다.


“바네샤 씨. 루나 씨···.”


바네샤와 루나.

각기 다른 위치에서 이쪽으로 뛰어왔다.

두 사람 모두 이 소동에 놀랐는지, 충격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셰인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오해예요! 제가 이러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그만···.”

“셰인.”


셰인은 바네샤의 한 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응시하였다.

지금껏 잘못을 보듬어줄 때와 차원이 다른 분노가 엿보였다.


“죄, 죄송······.”

“저 놈에게 고개 숙일 생각 하지 마.”

“정말로 죄송합니··· 네?”


셰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정정되는 일은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부르지. 아프지 않아?”


다정한 손길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화염 마법이 스쳐 지나가면서 생긴 화상자국이 따끔거렸다.


“아, 저는 괜찮은···.”

“바네샤냥. 여기 들고 왔다냐!”


루나가 화상치료제를 가져왔다.

손 마디에 약을 잔뜩 짜낸 다음, 셰인의 얼굴에 발라주었다.

쓰라린 통증 때문일까.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아, 그런 거였군요.”


카이스트가 이마를 짚으며 탄식하였다.

자신이 무엇을 착각했는지 상황 파악이 끝난 후였다.


“도련님의 잘못을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

“야! 너는 내가···!”

“닥치세요, 도련님.”

“으악!”


반성의 기미가 없는 자일리를 잡아서 공중에 들어 올렸다.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어린 주인은, 카이스트에게 붙잡힌 옷을 놓기 위해 발버둥 치기 바빴다.


“놔! 이거 놓으라고!”

“저, 여러분?”


접수처가 난데없이 일어난 사고에 소란스러운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일단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떨까요?”


캣니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이었기에 수많은 이목이 모든 행동에 따라붙었다.

이 이상 현장에서의 소란은 양측 모두에게 득이 될 게 없었다.


“크흠, 그래. 일단 우리 자리를 옮기도록 하자.”


제안에 답한 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당당한 자일리의 태도 때문에 가문의 기사는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을 느꼈다.

그 외에 다른 이들은 어이가 없었다.

캣니스마저 말문이 막혔다.

가더만이 태평하게 하품하였다.



*****



“정말 죄송합니다!”


길드장 업무실에서 카이스트가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어린 주인의 머리를 힘껏 눌렀다.


“야! 너는 주인의 머리를 그렇게 막!”

“이 일은 가주님께도 보고 올리겠습니다.”

“야, 그건 너무하잖아. 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명백하게 약자에게만 강한 태도.

적어도 다른 이들의 눈에는 자일리의 인성이 그렇게 보였다.


“사죄해도 용서하면 안 돼요!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바네샤가 익숙한 면면이 모인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두 눈을 셰인이 겪은 일에 대한 분노로 불태우며. 아직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건방진 꼬마를 노려봤다.


“우리 길드원에 대한 명백한 공격 행위. 이 일을 단순한 실랑이로 벌어진 일이라 넘어가서는 안 돼요!”


그 완고한 태도에, 카이스트는 아연실색하였다.

그래도 제 주인이 멍청했다며 넙죽 던져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린 주인님의 만행을 외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아직 어린 나이에 저지른 잘못. 그 잘못을 감독하지 못한 제게 책임을 물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방에서 노골적인 적의가 날아왔다.

그래도 식은땀을 외면하며 끈질기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거듭되는 사과에 분위기가 냉랭해진 그때였다.


“그렇군요. 사정은 대충 알았습니다.”


탁. 서류의 끝단을 맞춘 클레인이 안경 끝을 올렸다.

감정을 보이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그들을 마주하였다.


“그래서 셰인.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네? 저 말인가요?”


셰인은 한쪽 볼에 커다란 거즈를 붙인 모습으로 두 눈을 깜빡였다.

카이스트가 재빠르게 움직여서 그녀 쪽으로 무릎을 꿇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떤 처벌이라도 받을 테니, 부디 도련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주인을 위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카이스트.

셰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이스트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카이스트 씨가 잘 감독해 줄 거라고 믿을게요. 이번 일은 저도 크게 다친 게 아니니까요.”

“셰인!”

“괜찮아요. 바네샤 씨. 저 원래 튼튼하잖아요?”


관대한 처분을 받은 카이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어린 주인에게 다시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셰인도 용서했으니 이번만큼은 넘어가도록 하죠.”


클레인이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 꼬마가 무슨 일로 우리 종업원을 괴롭힌 건지는 확실히 알고 넘어가도록 할까요? 재발하지 않는다는 약조도 어김없이 받아내고, 말이죠.”


오만한 말이었지만 카이스트는 얼른 그러겠다고 답했다.

클레인에게서 종이를 건네받고 얼른 주인에게 건넸다.

그러나 복병은 언제나 아군이라 믿는 이에게서 나오는 법이었다.

건네받은 깃펜이 잉크째로 땅바닥을 굴렀다.


“흥! 나는 저 여자가 내 모험가 등급을 잘못 판단해서 항의한 거뿐이라고!”

“도련님!”

“아, 몰라. 내쫓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나 같은 천재 마법사를 놓친 걸, 너희는 평생 후회하라고!”


자일리는 호위의 조언마저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예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길드장실의 열린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일리 씨. 아직 이야기는 안 끝났습니다.”


-쾅


매서운 바람이 길드장실을 휩쓸고 문을 닫아버렸다.

자일리가 눈을 치켜뜨며 문고리를 잡으려던 그때.

바닥에 떨어졌던 깃펜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서 문에 박혔다.


“나, 나를 이렇게 겁박해도 무사할 줄 알아?”


피가 나는 손을 부여잡은 채 모험가 길드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정작 듣는 이는 아무렇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겁박이라니 곤란하네요. 이대로 보내기에는 억울해 보여서 오지랖을 부려봤을 뿐인데요. 당신의 말대로 모험가 길드에도 잘못이 있다면 꼼꼼하게 따져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홧김에 저지른 일을 무마하기 위한 거짓말이라 할지라도요.”


범접하기 힘든 기세에 반박하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어디 보자. 모험가 등급이 잘못됐다고요? 셰인, 작업하던 서류를 가지고 오세요.”

“아, 네!”


‘우리 종업원’이라는 말을 듣던 순간부터 헤실헤실 웃던 셰인이 정신을 차렸다.

클레인이 서류를 받고 검토하는 동안, 누군가에게는 가시방석 같은 시간이 계속되었다.


“자일리 톨스. 모든 스테이터스 수치가 E등급 이하네요. 그나마 봐줄 점이 있다면 마력 수치인데···.”

“당연하지. 나는 앱솔루트 왕국의 천재 마법사! 왕립 아카데미도 다녔다고!”

“하지만 그것조차 미미한 수준이네요. 네, 정말로 형편없어요.”

“그, 그렇게 말할 정도는 아니거든!”


적나라한 평가를 부정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클레인이 내린 평가를 바꿀 일은 결단코 없었다.


“사용이 가능한 마법은 하급 마법 정도. 그 외의 스킬은 안 적혀 있네요?”

“나는 그런 거에 의지 안 해도 강해!”

“판단은 당신이 아니라 우리 모험가 길드에서 정하는 거예요. 이 정도 능력이니까 당연히 나무패 등급부터 시작하겠죠.”

“그래도 난 강하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고블린에게 죽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죠. 하지만 그러네요. 이견이 있다면 최대한 수용하는 수밖에요.”


클레인이 안경을 벗고 뒤를 돌아봤다.

곁에 서 있던 루나가 고양이 귀를 쫑긋 움직였다.


“클레인. 그걸 하는 걸까냐?”

“맞아. 그분에게 전달해 줘.”

“알겠다냐. 다녀오겠다냐.”


재빠르게 서류를 받고 나갔다.

톨스 가문의 두 사람은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식은땀만 연신 흘렸다.


“혹시 중요한 일처럼 보였는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습니까?”


카이스트가 조금 전의 대화에 대해서 조심히 물었다.


“정말로 도련님의 등급을 올리는 방법이 있는 겁니까?”

“네, 물론이죠.”


탁. 들어올 때부터 확인하던 서류의 끝단을 맞추었다. 책자 안에 끼워 넣고 책장 안에 집어넣었다.

클레인은 질문을 한 카이스타가 아닌, 자일리를 돌아본 채 입을 열었다.


“모험가라면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자일리 씨의 용기 있는 모습은 보답받아야 옳다고 생각했어요.”

“보, 보답···?”

“네, 그렇게 자랑하시던 실력을 마음껏···”

“바네샤! 허락 받았다냐!”


방을 나갔던 루나가 돌아왔다.

루나의 활기찬 모습에 카이스트의 눈동자가 더욱 방황했다.


“허락받았다니···. 무얼 말하는 겁니까?”

“실력은 있는데 증명할 수단이 없다. 이 경우를 대비해서 모험가 길드가 시행하고 있는 제도가 있답니다.”


손가락이 콧잔등 위로 올라가고 미소 지었다.

그 행동이, 모험가는 백 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보인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였다.


“여기가 맞는가?”


쿵.

문을 가로막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바네샤여. 내 도움이 필요하다 하여 왔다네.”


카이스트는 시선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근육으로 터질 거 같은 셔츠와 빛을 발하는 민머리가 시선을 강탈했다.

앱솔루트의 기사라면 모를 리가 없는. 금 등급 모험가 브레드 머슬릿.


“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카이스트가 기겁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스킬을 두 개나 봉인 당했다고 들었는데!”


브레드의 악명은 앱솔루트에 자자하였다.

앱솔루트의 신입 기사단장을 능욕한 사건은, 기사단 괴담으로 회자 될 정도로 끔찍한 치욕이었다.


“브레드 씨. 바쁘신 와중에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러한 자를 불러서. 클레인은 태연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감사까지야. 오히려 내 쪽이 이런 기회를 얻어서 고맙다고 생각하네. 그런데 내가 듣기로 상대하는 건 한 명이라 들었는데···. 둘 중 어느 쪽인가?”


브레드의 시선이 톨스 가문의 두 사람을 향했다.

두 사람은 바짝 몸을 긴장하였다.

카이스트는 기사단의 악몽 같은 존재에 대하여 불안한 눈빛을 숨길 수 없었다.


“카이스트 씨? 들어본 적 있으시죠? 모험가의 실력 평가예요. 부디 그쪽 도련님이 한 이야기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기를 바랄게요.”


카이스트는 무미건조하게 들려온 말에 이마를 감쌌다.

어린 주인의 어리석던 행동에 진심으로 탄식하였다.


“흠. 이왕이면 이쪽 기사이기를 바라였는데 말이지.”


이 순간, 브레드 못지않게 자일리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형편 좋을 리 없었다.


“소년.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준비해서 내려오게나. 먼저 연무장에 가서 기다릴 터이니.”


자일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녹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부터 그나마 갖고 있던 허세는 조금도 보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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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하하.... 죄송합니다. 성실함이 작가의 기본인 건 아는데. 대학교 종강하고 나니까 기운이 쭉 빠져서 나태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최대한 글쓰기 패턴을 되돌리려 노력 중인데 요 기간 동안만 마음 넓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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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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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66화 재침공 23.05.10 45 0 19쪽
76 65화 다시 한번 던전 23.05.05 46 0 18쪽
75 64화 다시 한번 던전 23.05.02 49 0 12쪽
74 63화 다시 한번 던전 23.04.29 47 0 14쪽
73 62화 다시 한번 던전 23.04.25 54 0 18쪽
72 61화 다시 한번 던전 23.04.22 50 0 18쪽
71 60화 다시 한번 던전 23.04.21 48 0 20쪽
70 59화 옛 인연 23.04.17 54 0 26쪽
69 58화 옛 인연 23.04.12 55 1 21쪽
68 57화 옛 인연 23.04.05 61 0 20쪽
67 56화 베르 23.04.01 54 0 13쪽
66 55화 길드 23.03.29 55 0 22쪽
65 54화 길드 23.03.25 61 0 16쪽
64 53화 길드 23.03.11 58 0 12쪽
63 52화 길드 23.03.08 59 0 12쪽
62 51화 길드 23.03.01 58 0 13쪽
61 50화 길드 23.02.26 71 0 11쪽
60 외전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23.02.26 65 0 10쪽
59 49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21 73 0 17쪽
58 48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17 63 0 13쪽
57 47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13 68 0 14쪽
56 46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10 50 0 13쪽
55 45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08 56 0 14쪽
54 44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04 54 0 11쪽
53 43화 던전 23.02.01 56 0 11쪽
52 42화 던전 23.01.29 57 0 18쪽
51 41화 던전 23.01.26 56 0 21쪽
50 40화 던전 23.01.25 59 0 17쪽
49 39화 던전 23.01.13 65 0 15쪽
48 38화 던전 23.01.02 70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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