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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할 세계의 아카데미에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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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23.04.03 10:13
최근연재일 :
2023.04.28 07:00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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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1
추천수 :
406
글자수 :
187,515

작성
23.04.19 15:00
조회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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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16 세계수

DUMMY

폐쇄자들 중 유일하게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던 물의 우드엘프 비야는 홀로 세계수로 돌아갔다.

나중에 빙결의 창 비야라 불리게 될 그녀는 세라인과 더불어 엘프족 냉미녀 이인방의 한 명이 될 사람답게 떠나는 순간까지도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잠시 우리를 바라보다 등을 돌려 걸어갔을 뿐이었다.


그 후 놀랍게도 우리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우리들 생명의 숲 북동쪽 숲 방어자들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주어진 여유를 만끽하며 자연 속에서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나를 제외한 대부분은 그랬다.


‘솔론···.’


엘프족들은 지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오래 간직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죽음 또한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연의 웨이브가 있을 때마다 동료들이 수없이 죽어나가도 잠시 안타까워하고 슬퍼할 뿐 곧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살아가곤 했다.

이곳에서 가장 마음이 여리다고 할 수 있는 내 친구 물의 하프엘프 아리에조차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난 삶의 친구 조현성 녀석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나와 마음을 나눈 사람들의 죽음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땅의 하프엘프 동료들에게 정을 줄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그랬다.

아무리 나무 위를 날듯이 뛰어다니고 정령들과 대화할 수 있어도, 결국 나는 엘프가 아닌 인간인 것이었다.

하프엘프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인간···.


게다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솔론이 내게 드리운 그림자는 너무도 짙고 넓었다.


그는 내가 두 번의 삶 동안 만나 본 사람들 중 최고의 리더였다.

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면서도 한번 결정하면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일을 진행했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홀로 짊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그래, 그의 모습은 마치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던 아버지의 모습과도 같았다.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는 가정을 버린 채 집을 나가버렸던 계지훈의 아버지가 아닌, 진짜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의 모습.


그래서 그랬다.

남들과 다른 내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는 게 아니라 가능성을 발견해줬고, 늘 어엿한 한 명의 전사로 대우해주곤 했던 그를, 나만큼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면, 내게 빙긋이 웃어주며 고맙다고 말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여전히 선연하게 떠오르곤 했다.


“후우우우···.”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요즘 나의 아침은 늘 이런 한숨과 함께 시작하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축 처져 있지는 않았다.

현성이 녀석이 죽었을 때 배웠듯, 산 사람은 삶을 이어가야만 하니까.

그래야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도 매일 미친 듯 울고만 있었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기에 사채업자들을 찾아다닐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애써 힘차게 중얼거렸다.


“자, 또 하루를 시작해 볼까?”


친구의 사인을 알 수 없어 그걸 찾아다녔던 그때완 달리,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나 스스로를 더욱 단련하는 일이었다.

힘을 키우고 또 키워 심연을 폐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 그게 솔론의 유지를 잇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멸망을 막는 것. 그거야말로 솔론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겠지.’


그런 생각에 나는 요즘 전보다 더욱 열심히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게를 늘이기 위한 철갑옷을 착용하고는 잠시 몸을 풀던 나는 문득 뒤에서 난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왔어?”


그러자 역시 커다란 철갑옷을 걸치고 있는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응,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일어났어.”


내가 만들어 준 철갑옷을 입고 나와 함께 아침수련을 하는 그녀는 바로 세라인이었다.

바람 하프엘프의 리더인 그녀가 내 수련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 가볼까?!”

“그래.”


세라인과 함께 철갑옷을 입은 채 나무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 수련의 시작이었다.


세라인이 나와 함께 아침수련을 시작한 건 심연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그러니까 벌써 한 달째였다.

그녀는 심연 안에서 내게 했던 말처럼 당연하다는 듯 나를 찾아와 내 수련에 대해 물었고,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수련을 시작한다고 말하자 바로 다음날부터 일찍 일어나 나와 함께 하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싶은 엘프의 본능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덩치 큰 겁쟁이 오리스는 일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힘들어 하고 있는데 말이다.


‘역시 엘프족의 영웅 폭풍의 세라인!’


그런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세라인이라도 역시 모든 분야를 다 잘 할 수는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건 맨손 격투법과 검술이었는데, 아직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점을 감안해도 검술 쪽에선 좀처럼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맨손 격투술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세라인이 합류해서 변화가 생긴 건 세라인 본인보다 오히려 내 쪽이겠지.’


그녀의 합류로 내겐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그중 가장 작은 변화는 내가 그녀의 미소에 익숙해 졌다는 점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좀처럼 웃지 않는 세라인은, 그래서 지난 이 년 간 한번도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그녀는, 요즘 내 앞에서만큼은 종종 그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줘 넋을 잃게 하곤 했다.


원래 사적인 자리에서만 웃어서 그간 내가 못 봤던 건지, 아니면 진짜 내 앞에서만 웃어주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에이, 당연히 내가 못 봤던 거겠지. 내가 뭐라고 내 앞에서만 웃어 주려고.’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좀 더 큰 변화는 이제 아무도 나에게 혐오스러운 시선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심연에서 돌아온 후, 세라인과 아리에는 심연 안에서 있었던 일들과 내 활약상을 있는 그대로 하프엘프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제껏 혐오스러운 다크엘프 비슷한 존재처럼 인식되던 내 이미지가 한순간 유능한 폐쇄자로 바뀌어버린 순간이었다.


게다가 우리 지역 모든 하프엘프들의 우상인 세라인이 나와 함께 철갑옷을 입고 철검을 휘두르며 수련을 시작했지 않은가.

이젠 혐오스러운 눈빛은커녕 오히려 경외에 찬 눈빛들에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혐오가 경외로 바뀌어서인지 여전히 말을 거는 하프엘프들이 없다는 건 똑같지만 말이야.’


불 하프엘프들의 리더인 타키 녀석도 더 이상 내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내 눈에 전혀 띄지 않는 것이 어쩌면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바람 하프엘프인 내 친구 파르암이 전해준 소식에 따르면 요즘 불 하프엘프들 사이에 타키를 마땅치 않아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고 했다.

자칫 잘못하면 불 하프엘프들의 리더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소식이었다.


그밖에도 겁쟁이 오리스가 세라인에게 자극받아 더 열심히 수련에 힘쓰게 됐다던가 하는 일도 있었지만, 앞에 일들에 비해선 극히 소소한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다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 일어난 큰 변화가 이게 다가 아니었다는 걸.

더 큰 변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약간 더 후의 일이었다.


세라인, 오리스와 함께 아침수련을 모두 마쳤을 시간이었다.

갑자기 우리를 찾아온 우리 지역의 책임자 우드엘프 하만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예?! 동반자께서 저희를 호출하셨다고요?!”


경악해 묻는 내 말에 우드엘프 하만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대답해줬다.


“그래, 쥰 자네는 물론 세라인, 타키, 아리에 모두를 부르셨다네. 그것도 세계수의 가지 위로 말일세!”


내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 예. 세계수의···. 예에에?! 세계수요?! 우리가 정말 세계수로 간다고요?!”


잠시 멍해있던 나는 이제 경악해서는 입을 닫을 수조차 없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평소엔 표정이 거의 없는 세라인조차 놀란 표정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육체에 비해 정신연령이 한없이 가벼운 오리스야 더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세, 세, 세계수라고요?! 우와아아아악! 아아아악! 쥰, 들었어?! 너 세계수로 간대! 동반자께서 부르셨다고···! 응? 지금 뭐 하는 거야, 쥰?”

“으으으···.”


나는 귀를 움켜잡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오리스가 내 귀 옆에서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었다.


으으, 이 망할 놈이 음파공격을 시전하다니, 가뜩이나 하프엘프가 된 후 청력이 예민해진 귀를.

지난번엔 반가운 척 조르기를 시전하더니만, 이놈은 아무래도 사실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간신히 청력을 회복한 후 오리스의 엉덩이를 발로 뻥뻥 차줬다.


“죽어, 이 자식아!”

“미, 미안, 쥰.”


그러고는 잠시 후 하만에게 다시 물었다.

그는 우리의 그런 행동마저도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 가야 하는 건가요?”


그러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나를 볼 때면 느껴지던 살짝 못마땅한 표정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바로 오라는 전언이셨네. 준비해서 내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게.”

“아, 그렇게 빨리요?”


세계수, 내가 세계수에 가게 되다니···.

정신이 멍했다.


세계수는 모든 엘프들의 실질적인 어머니이자, 이 생명의 숲 전체를 관장하는 반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니까 엘프족의 육신과 정신 모두가 이 세계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세계수가 있는 곳은 엘프족의 성지로서 하프엘프들은 물론 우드엘프들도 갈 수 없었다.

정확히는 세계수의 가지에서 태어난 우드엘프들은 태어났을 때만, 그리고 하프엘프에서 급을 높여 우드엘프가 된 이들은 세계수의 정수를 받을 때만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엘프족 지도자인 ‘세계수의 동반자’의 호출로 그 세계수로 가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상급 엘프들도 아닌 하이엘프들이 거주한다는 가지 위로 말이다.


‘지난번 게이트 형 심연에 대한 조사 때문일까?’


지난 번 사태에 관해 뭔가 조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지난 한 달 간 아무 일도 없었기에 그냥 비야의 증언만 듣고 넘어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하긴, 생각해보면 인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사는 엘프들의 시간관념은 매우 느릿느릿했었다.

그러니 이제야 부르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내가 인간의 기준으로 이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짓다가는 문득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끝없이 펼쳐진 숲의 지평선 위로 홀로 거대하게 솟아있는 산과 같은 세계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엘프들의 성지이기에 게임에서도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던 세계수.

그곳을 하프엘프가 된 내가 현실에서 가게 되는 것이었다.


뭔가 커다란 변화의 시기가 내게 오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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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 심연-3 23.04.12 516 11 17쪽
10 10 심연-2 23.04.10 522 16 15쪽
9 9 심연-1 23.04.09 538 1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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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 하프엘프 쥰-2 +2 23.04.03 732 13 17쪽
3 3 하프엘프 쥰 23.04.03 820 13 14쪽
2 2 웨이브 23.04.03 955 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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