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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할 세계의 아카데미에서 살아남는 법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23.04.03 10:13
최근연재일 :
2023.04.28 07:00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19,689
추천수 :
406
글자수 :
187,515

작성
23.04.03 15:00
조회
1,480
추천
22
글자
20쪽

1. 계지훈, 그리고 쥰

DUMMY

푸욱!


“크윽! 이 새끼···!”

“혀, 형님!”

“형님! 저 새끼가 감히!”

“저 새끼, 담궈!”


푸욱! 푹! 푸욱!


“크윽!”


내 이름은 계지훈.

무려 백제의 마지막 명장이신 계백장군님의 후손으로 그분의 뜻을 물려받아 불굴의 기상과···.


됐고.

내 친구들은 다 나를 개지훈이라고 불렀다.

미친 개지훈.


물론 남자들 사이에서 이름에 ‘개’자 붙여 부르는 거야 흔한 일이다.

친근감의 표시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단 한 번도 그 개지훈이란 별명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고?

그놈들이 부르는 개지훈은 친근감이 아니라 멸시의 표현이었거든.

키 작고 힘 약한, 그래서 괴롭히기 좋은 쪼다를 부르는 명칭.


그래 맞다.

난 키도 작고 힘도 약했다.

심지어···.


“형님! 괜찮으십니까?!”

“이 새끼··· 이 새낄 좀 떼어, 으아악!”

“억! 이 미친 새끼! 이 새끼가 형님 목을 물었어!”

“이 못생긴 난쟁이 새끼가!”


이런 씨!

못생긴 난쟁이라니, 씨발!


근데··· 솔직히 그 말이 맞다.

그래, 난 못 생기기까지 했었다.

작고 약한데 심지어 귀엽지도 않은 남자.

그게 바로 나였다.


하, 생각하니 진짜 뭣 같네.


근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그 짜증나는 현실에 그냥 찌그러져 순응하고 살았다면 몸이라도 편했을 것을.

빌어먹게도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형님! 형님!”

“좀 떨어져, 이 새끼야!”

“크크크크!”

“이 새끼가 진짜!”


푸욱! 푹!


크으윽, 졸라 아프네.


나는, 나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계백장군의 후손이니까.

뭔 개소리냐고? 크크크크.


초등학교 오학년 때 집을 나가버린 후 다시는 보지 못했던 아버지는 내 어린 시절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계백장군의 후손이고, 계백장군의 후손은 절대로 시련에 굴하지 말고 언제나 당당해야만 한다고.


뭐, 자기는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으니.

그런 사람이 시련이 어쩌고 큰소리친 걸 생각하면 졸라 웃긴 얘기긴 한데.

아무튼 내겐 그 말이 생사도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았다는 얘기였다.


아마 그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왜소하고 약한데다 못생긴 주제에 자존심만 더럽게 셌던 이유가.


“떨어져, 이 새끼야! 지금이라도 떨어지면 너도 병원에 데려다 줄게!”

“그래, 이 새꺄! 너도 살려준다니까!”


크크크, 이 새끼들이 약을 파네.

지들이 칼로 찔러 놓고 병원에 데려다준다고?

다들 사이좋게 자수하시려고?

온힘을 짜내 비웃어줬다.


“크흐흐, 조까.”

“이, 이 새끼가!”

“안되겠다! 일단 빨리 죽여!”


푸욱!


······.

그래, 어쩌면 그냥 내 성질머리가 더러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를 무시하고 놀리던 놈들에겐 언제나 악을 쓰며 화를 냈었고, 나를 괴롭히던 힘 센 놈들에겐 아득바득 대들곤 했었다.

그 결과야 뭐···.


늘 얻어 터져서 집에 돌아왔던 나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죽어라 공부하는 동시에 어려운 형편에도 어머니를 졸라 근처 도장을 다니기 시작했었다.

처음엔 태권도로 시작했다가 택껸, 권투, 우슈, 킥복싱 등등. 근처에 있는 도장들을 옮겨 다니며 아득바득 수련에 열중했었다.


그 결과, 두 가지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냉정하고 혹독한 현실이 깨닫게 해준 두 가지 사실.


그중 한 가지는 이거였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서 고양이가 호랑이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랬다.

현실은 냉혹했다.

무술을 익힌다고 해서 갑자기 강자가 되는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소하고 허약한 내 몸으론 발전 한계가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 거머리냐?! 쬐그만 놈이 왜 이렇게 안 떨어져?!”

“씨발! 졸라 끈질긴 새끼 같으니!”


크크크크.

놀랐지?

내 장점이 딱 하나 있다면 그거거든.

졸라 끈질기단 거.


그때 내가 깨닫게 됐던 나머지 한 가지 사실이 바로 이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라 끈질기게 노력하다보면 뭔가 이루어지긴 이루어진다는 거.


그랬다.

내 노력이 극적으로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마치 일 년에 1cm씩 자라 마침내 6m의 거체가 된다는 그린란드 돌상어처럼.

비록 외관상의 키는 크지 못했어도 사람으로서의 내 자신은 계속 성장해 나갔던 것이었다.


‘그래, 그랬었는데···. 젠장.’


그래서 좀 아쉽다.

이제야 겨우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임용고시에 합격해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작고 왜소한 체격이 아니라 작지만 단단한 체격이 되어 여유 있는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그런 남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씨발.


“형님! 형님!”

“이 지독한 새끼야, 좀 떨어져라!”

“팔이라도 잘라 버려!”


내 온몸을 쑤신 칼날과 불에 탄 듯 화끈한 통증, 그 리고 점점 안개가 낀 듯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경찰들조차 손을 뗀 친구의 갑작스런 실종, 그리고 죽음을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외면하고 넘겨버렸었다면.

그래서 녀석이 한번 언급했었던 사채업자들을 의심해 조사하고 다니지 않았었다면.


그러다 오늘 밤 갑자기 습격해온 놈들과 맞서 싸우지 않고 그냥 얌전히 얻어맞기만 했다면.

실실 웃으며 친구 놈을 죽였다고 말한 놈에게도 광분해 달려들지 않았었다면.

그래서 나를 찌르려던 칼을 뺏어 놈을 찌르지 않았었다면···.


그랬다면 아무 일도 없이 계속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 삶은 정말 행복했을까?


···잘 모르겠다.

이제 머리가 흐려져서 그런가보다.


“이 거머리 같은 새끼! 이제 의식도 없는데 왜 안 떨어지는 거야?!”


왜애애애애앵! 애애애앵!


“에이 씹! 경찰이다!”

“야! 튀어!”

“형님은 어쩌고?! 형님을 두고 가면 어차피 걸린 텐데?!”

“이런 씨발!”


크크크크.

아까 놈들이 둘러쌌을 때 통화하던 핸드폰을 끊지 않고 주머니 속에 넣어놨었지.

통화하던 친구 놈이 신고해줄 걸 기대했던 건데 진짜 했었나보네.


그래, 이제 됐다.

아무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모양이다.


문득 이제야 편안한 한숨이 나왔다.


“하아아아.”


근데 숨을 내쉬니 너무 졸리다.

그만 자고 싶다.

이게 아마··· 죽는 거겠지?


젠장.


아무래도 이게 진짜 끝인 것 같으니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원 한번만 빌어보자.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그래, 그게 진짜 가능한 일이라면.


그땐 부디 키도 크고···.

아니아니, 키는 안 커도 좋다.

그냥 좀 잘 생긴 얼굴로 살아봤으면 좋겠다.

나도 연애라는 걸 한번은 해 볼 수 있게 말이다.


못난 외모로 아득바득 악만 쓰며 사느라 남들 다 하는 연애 한번 못해봤었거든.

크크크크, 병신.

이게 삶의 마지막 아쉬움이라니.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녀석을 다시 만나고 싶다.

다시 만나서 함께 늙어가 보고 싶다.


내 영혼의 단짝, 현성이 그 새끼를···.


하아아···.


졸리다.




******

****

***

**

*

*

*

*

**

***

****

********





“멧돼지들이다! 오염된 멧돼지들! 그리고 그 뒤엔 고블린들이 올 것이다! 너희가 그걸 막아야 한다!”


두두두두두두!


지축이 울렸다.

백 미터 전방의 울창한 수림에서부터 거대한 멧돼지 한 놈이 우리를 향해 맹렬히 돌진해오고 있었다.

SUV 차량만한 크기의 몸체, 거기에 코끼리 같은 거대한 엄니가 무려 네 개나 달린.

멧돼지라기보다는 그야말로 괴수에 가까운 놈이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무슨 매머드와 코뿔소의 혼종이냐?’


게다가 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놈을 선두로 좀 작은 놈들 십여 마리가 역시 숲에서 뛰쳐나와서는 놈의 뒤를 따라 돌진해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꾸이이익!”

“꾸이익!”


기마병들의 돌격을 연상시키는 쐐기 대형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무겁고 파괴적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무려 마기에 침식된 멧돼지니까.


저기에 부딪친다면?

아마 죽는 걸 넘어 산산이 분해되어 버리겠지.


두두두두두!


그런 놈들과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백 미터, 팔십 미터, 육십 미터.


다시 한번 마른 침을 삼켰다.


꿀꺽!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나와 함께 방어진을 담당하며 서 있던 하프엘프들이 모두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한 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점이 위안이 됐다.


그때였다.


“준비!”


우리 지역의 책임자인 우드엘프 하만이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모두가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소환을 준비했다.

엘프들의 소환수이자 영혼의 단짝이라고 할 수 있는 정령들의 소환준비였다.


두두두두두두!


사십 미터, 삼십 미터, 이십 미터.


얼마나 지났을까.

마치 몇 분처럼 느껴지는 몇 초의 시간이 지났을 때, 마침내 하만이 소리쳤다.


“소환!”


그 순간, 하프엘프들은 일제히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나와라, 노움!”

“노움, 소환!”

“부탁해!”


그러자 우리 앞쪽 오 미터 전방의 땅에서 두꺼운 흙기둥들이 불쑥불쑥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쑤우욱! 쑤우욱!


성인 남자가 두 팔로 안을 수도 없을 만큼의 두꺼운 흙기둥들.

그것들은 대충 일렬로 늘어서며 벽을 만들고 있었다.


“뀌이이익?!”


그러자 바로 눈앞에서 솟구친 두터운 흙벽에, 멧돼지들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맹렬하게 들이받고 말았다.


퍼어어억!

퍼어어억


“뀌이이익!”

“꾸웨에에엑!”


흙기둥들이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비산했다.

단 한 번의 충돌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단단히 뭉쳐진 흙기둥을 들이받은 멧돼지들 또한 무사할 수는 없었다.

놈들 대부분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돌진을 멈췄다. 뇌진탕에 걸린 듯 제자리에서 비틀거리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랬다는 건 그렇지 않은 놈들도 있다는 뜻.

우드엘프 하만이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안 돼! 저걸···!”

“꾸이이이익!”


박살난 흙기둥의 뿌연 먼지 사이를 뚫고 멧돼지 세 마리가 뛰쳐나오고 있었다.

아까 선두에서 달려왔던 SUV크기인 놈을 포함한 세 마리였다.


“뀌이이이익!”


놈은 울부짖으며 가장 가까이 있던 하프엘프들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퍼어억!


“으아아아악!”

“끄아아악!”


흙기둥과 충돌했던 여파인지 놈도 아까만큼의 돌파력은 갖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가벼운 하프엘프들을 조약돌처럼 날려버리기엔 충분했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튕겨 올라가는 하프엘프들.

그들이 토해낸 피가 하늘에 흩뿌려졌다.

온 몸의 뼈가 으스러진 듯했다.


나는 그 거대한 놈이 전열을 돌파해 후열의 하프엘프들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힐끗 보고는 급히 다른 놈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거대한 놈도, 나머지 두 놈도 다행히 내 쪽으로는 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자 바로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엘프치곤 꽤 건장한 체격을 지닌 흑녹색 머리카락의 하프엘프, 이곳에서 사귄 몇 명 안 되는 내 친구인 오리스였다.


“오리스!”


멧돼지 한 놈이 내 친구 오리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꾸이이이익!”


두두두두두!


놈은 덩치가 무색하게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덜덜 떨며 겁에 질려 눈까지 질끈 감아버린 상태.

저대로 받치면 즉사일 것이 뻔했다.


“눈떠, 이 멍청아!”


소리를 지르며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몇 안 남은 내 친구를 저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파박!


하프엘프인 내 속도는 바람과도 같았다.

순식간에 달려가 제때 오리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멧돼지가 막 삼 미터 앞까지 돌진해오고 있는 상황에서였다.


두두두두두!


승용차만한 거대한 야수가 눈앞에서 돌진해왔다.

진동에 지진처럼 몸이 흔들렸다.


꿀꺽!


솟구친 엄니가 바로 이 미터 앞까지 다가온 순간,

나는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숙여!”


동시에 쳐들고 있던 오른손을 아래로 힘껏 눌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서였다.


화악!


그 순간이었다.

멧돼지가 앞발로 디디려던 땅이 쑤욱 꺼져버렸다.


푸욱!


“꾸이이이익?!”


순간 마성만 남은 멧돼지의 눈 속에서 당황의 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땅이 쑥 꺼지며 놈의 앞발이 땅 속으로 훅 내려가 버렸던 것이었다.


‘좋았어!’


바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꺼졌던 땅이 확 조여들며 밑으로 빠졌던 멧돼지의 앞발을 붙잡아버렸다.

돌진해오던 놈의 관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였다.


“뀌이이이익!”


앞발이 붙잡힌 놈의 거대한 몸체는 자기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엉덩이부터 위로 붕 뜨고 말았다.

그리고 땅에 붙잡힌 놈의 앞발은.


우드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며 꺾어진 다리가 흙을 뿌리치며 확 뽑혀져 나왔다.

내가 주먹을 살짝 풀어줬기 때문이었다.


놈은 맹렬히 회전하며 앞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몸을 푹 숙이고 있던 나와 오리스의 머리 위쪽을 지나서였다.


쿠당탕탕탕탕!


“꾸이이이이익!”


고통스런 괴성을 토해내며 둥근 바위가 된 듯 앞으로 맹렬히 굴러가는 모습.

워낙 강력했던 돌진의 관성 때문이었다.


그걸 보며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우우!”


나는 방금 놈이 발을 막 땅에 디디려는 찰나, 거의 0.1초나 될까 싶은 순간을 정확히 맞춰 그 밑 땅바닥을 꺼지게 했었다.

완벽에 가까운 타이밍이었다.


‘아니지. 완벽에 가까운 게 아니라 완벽했지.’


뿌듯했다.

수없이 연습해왔던 결과였다.

전에도 몇 번 성공했던 기술이긴 하지만 성공의 감각은 언제나 짜릿했다.


콰아아앙!


땅을 구르던 멧돼지는 무서운 기세로 아름드리나무에 부딪쳤다.

그러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옆으로 쓰러져 꿈틀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끗 본 후 친구의 안부부터 챙겼다.


“오리스, 괜찮냐?!”


그러자 내 말대로 납작 엎드린 상태에서도 덜덜 떨며 눈을 꼭 감고 있던 덩치 큰 겁쟁이는 이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는 입을 열었다.


“···쥰?”


녀석은 슬쩍 주변을 살펴보고는 바로 환한 표정이 되어 내게 소리쳤다.


“없어졌다! 살았어! 쥰, 고마워!”


그 해맑은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아아.”


녀석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다.

대체 눈은 왜 감는 거냐? 그냥 영원히 감게 해주랴?

그 덩치는 대체 뭐에 쓰려고 있는 거냐?

마수들 오래 드시라고 몸 키워 놓은 거냐? 등등.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참아야 할 것 같았다.

우리를 돌파한 두 마리의 멧돼지들이 후방의 궁수들을 유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빨리 놈들을 제거해 궁수들이 활을 쏠 수 있게 해주지 않으면 간신히 흙기둥으로 막아 놓은 다른 멧돼지들까지 정신을 차리게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상태까지 가면 거의 전멸이 되겠지.’


나는 덩치 큰 겁쟁이 오리스의 어깨를 툭 쳐주고는 다시 전방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흙기둥에 부딪쳐 비틀거리던 멧돼지들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뒤쪽 숲속에선 고블린들이 개떼처럼 뛰쳐나와 달려오고 있었다.

손에는 블로우 건을 하나씩 든 채였다.


“켁켁켁!”

“케케케켁!”


마기에 침식된 멧돼지들과는 달리 놈들은 심연에서 직접 뛰쳐나온 마물들이었다.

또한 멧돼지들을 앞세워 적들을 혼란시킨 뒤 습격해올 만큼의 지능이 있는 놈들이기도 했다.


오리스에게 급히 말했다.


“오리스, 고블린들이 온다! 저놈들을 좀 막아줘! 난 후방으로 간 멧돼지들에게 가봐야겠어!”


그러자 오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후방의 멧돼지들? 그건 궁수들이···.”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바로 몸을 날렸다.


파박!


시간이 없었다.


원래 우리 방어진의 구조는 이렇게 되어있었다.

앞에서 땅의 정령과 계약한 하프엘프들이 일 차로 벽을 만들어 적들을 막아준다.


그러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람의 정령 실프와 계약한 궁수들, 그리고 불의 정령 샐라의 계약자들이 협력해 몬스터들을 저격했다.

쉽게 말해 탱커와 딜러로 구성된 방어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스템이 무너져 버렸지!’


방어진을 돌파해 들어간 멧돼지 두 마리가 후방으로 달려들자, 궁수들이 놀라 흩어지며 활을 날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러면 앞에서 탱커 역할을 해주던 땅의 정령 계약자들만 죽어나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땅의 정령으로 벽만 만들 줄 알았지 싸우는 방법을 전혀 몰랐으니까.


“그러니까!”


소리를 지르며 땅을 박찼다.


파악!


내 몸이 허공으로 가볍게 솟구쳤다.

기분 좋은 속도감과 부유감.


삼 미터 정도를 솟아올랐던 내 몸은 막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는 멧돼지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금 내가 땅을 구르게 했던 그놈이었다.


등에 매고 있던 단창을 뽑아 하늘 높이 치켜든 채 외쳤다.


“내가!”


내리 꽂히는 힘으로 놈의 측면에 단창을 힘껏 박아 넣었다.


푸욱!


“꾸에에에에엑!”


버둥거리던 놈의 귀 아래쪽 목뼈. 계지훈이던 시절 알게 됐던 큰 멧돼지들의 급소였다.

그러자 뜨거운 피가 확 튀며 내 몸을 적셨다.


촤아아악!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던 놈은 괴성을 지르며 다시 풀썩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쿠웅!


녀석의 뇌와 몸을 이어주는 척추신경이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꾸이이이이익!”


몸을 부들부들 떨며 쓰러져있는 멧돼지를 보고는 씨익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나서줄 수밖에.”


계지훈일 때 알게 됐던 사실인데 200kg이 넘는 멧돼지들은 두꺼운 지방과 가죽, 그리고 튼튼한 견갑골로 심장을 보호하고 있어 사냥총으로도 심장을 꿰뚫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나 같은 하프엘프의 힘으로, 그것도 200kg은커녕 일 톤 이상은 나갈 것 같은 이런 괴물의 심장을 노릴 수 있을 리가 없지.’


뛰어난 각력과 민첩성이 엘프의 강점이라면 빈약한 근력은 엘프의 약점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척추 신경을 부술 수 있는 것도 지난 이 년 간 죽을힘을 다해 단련해온 덕분이었다.


‘뭐, 하긴 심장을 찌를 수 있는 힘이 있어도 소용없었을지도 모르지만.’


큰 멧돼지들은 탄환에 심장을 관통당하고도 삼백 미터 이상을 질주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지구의 일반 멧돼지들도 그랬었는데 하물며 마기에 침식된 이놈들이야···.


아무튼 척추 신경을 손상당한 놈은 당장 죽지는 않을망정 더 이상 움직이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이제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자, 그럼.”


쓰러진 놈에겐 더 미련을 두지 않고 뒤를 돌아 다시 전방 쪽을 바라봤다.


“켁켁켁켁!”


퓩! 퓩!


“아악! 고블린들이다!”

“빠, 빨리 궁수들을!”

“윽! 맞았어!”


전방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블로우 건을 날리며 덮쳐오는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과 다시 일어나 흙기둥을 부수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멧돼지들.

그걸 보며 중얼거렸다.


“저러다 진짜 큰일 나겠는데?”


땅의 하프엘프들은 어떻게든 흙기둥과 흙벽을 소환해 멧돼지들과 고블린들을 막아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거대한 멧돼지와 작은 고블린, 어느 한쪽만 있다면 모를까 둘을 동시에 막는 건 흙의 정령 노움만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지.’


나 또한 최하급 땅의 정령 노움과 계약한 일개 하프엘프일 뿐, 저 상황을 뒤집을 능력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후방 쪽을 바라봤다.


“꾸이이이이익!”

“으아아아악! 살려줘!”

“이쪽으로 온다!”

“안 돼! 로난이 물렸어!”


그쪽 또한 난장판인 건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멧돼지 두 마리가 궁수들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유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활만 쏠 줄 알았지 근접전 능력이 거의 없는 하프엘프들은 지근거리까지 돌진해온 멧돼지들을 상대할 방법도, 투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활을 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흩어져서는 멧돼지들을 피해 우왕좌왕 달아나고만 있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일은 명확했다.


‘저놈들을 먼저 잡아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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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 재난 23.04.27 369 8 13쪽
25 25 베가드 23.04.26 371 6 13쪽
24 24 3차 시험 23.04.25 398 9 18쪽
23 23 친구 +2 23.04.24 397 10 18쪽
22 22 면접 23.04.23 407 6 17쪽
21 21 꼰대양의 기사 +2 23.04.21 423 7 16쪽
20 20 판데온-2 23.04.20 430 10 14쪽
19 19 판데온-1 23.04.20 444 8 15쪽
18 18 세계수-3 +8 23.04.19 452 6 20쪽
17 17 세계수-2 23.04.19 439 7 15쪽
16 16 세계수 23.04.19 442 7 11쪽
15 15 탈출-2 +1 23.04.17 447 11 12쪽
14 14 탈출-1 23.04.16 464 11 14쪽
13 13 샤하라드-2 23.04.16 458 8 19쪽
12 12 샤하라드 23.04.14 485 12 12쪽
11 11 심연-3 23.04.12 515 11 17쪽
10 10 심연-2 23.04.10 521 16 15쪽
9 9 심연-1 23.04.09 538 14 12쪽
8 8 폐쇄자들-2 23.04.07 554 14 16쪽
7 7 폐쇄자들-1 +1 23.04.05 603 12 15쪽
6 6 Endless days 23.04.03 639 15 12쪽
5 5 세라인 +1 23.04.03 680 13 14쪽
4 4 하프엘프 쥰-2 +2 23.04.03 732 13 17쪽
3 3 하프엘프 쥰 23.04.03 820 13 14쪽
2 2 웨이브 23.04.03 955 16 12쪽
» 1. 계지훈, 그리고 쥰 23.04.03 1,481 2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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