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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할 세계의 아카데미에서 살아남는 법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23.04.03 10:13
최근연재일 :
2023.04.28 07:00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19,722
추천수 :
406
글자수 :
187,515

작성
23.04.1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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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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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9쪽

13 샤하라드-2

DUMMY

핑!


거미의 입에서 쏘아진 거미줄이 화살처럼 공간을 꿰뚫었다.

가공할 속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옆으로 튀어나간 나를 맞추지는 못했다.

나는 지금 놈의 주위를 바람처럼 달리며 돌고 있는 중이었다.


핑! 핑! 핑!


마치 사격을 하듯 계속해서 거미줄을 날아왔다.

간발의 차이로 내 뒤쪽을 지나가는 거미줄들.

대충 내 속도에 대한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이제 다음 발은 위험할 수도 있겠군.’


그러니 변화를 줘야 할 때였다.


‘노움!’


노움을 부르자 앞에 흙이 솟아오르며 발판이 생겼다.

바로 그걸 딛고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노움이 발판을 튕겨준 힘과 내 도약력이 합쳐져 만들어진 탄환 같은 속도였다.


파앙!


그러자 내 뒤로 원래대로라면 나를 맞췄을 거미줄이 또다시 헛되이 허공으로 지나갔다.


핑!


그 순간, 새 파트너의 이름을 불렀다.


‘샤하라드!’

[알았어!]


지금까지 썼던 건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

그리고 지금부터는 새로 얻은 파트너의 능력이었다.


휘이이잉!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던 내 몸이 점점 더 가속하고 있었다.

뒤에서 바람이 밀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내 앞쪽의 공기는 스스로 갈라지며 길을 비켜주고 있는 상황, 내 몸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익!


‘우와우!’


그야말로 질풍 같은 속도였다.

바람처럼 움직인 내 몸이 거미가 제자리에서 몸을 돌리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놈의 뒤를 잡았다.


그 순간 땅을 박차고 방향을 바꿔 놈에게 돌진했다.


파박!


“일단 한 방!”


놈의 약간 위쪽을 향해 힘껏 단창을 던졌다.


슈아아악!


단창 또한 내 몸과 마찬가지였다.

내 손을 떠난 단창이 바람의 힘으로 오히려 더 가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다른 동료들도 다 쓰는 방법이지. 그러니 여기에다!’


그 방법에 나만의 방법을 하나 추가해봤다.

현대에서 과학 교육을 받았던 나만이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샤하라드!’


내 의지가 샤하라드에게 전해지자 단창의 앞쪽 공기가 극단적으로 엷어졌다.

그러니까 진공에 가까운 상태를 만든 것이었다.


‘진공 상태, 다시 말해 대기의 마찰이 없는 곳에서 물체는 등속직선운동을 하게돼지. 근데 거기에 추진력까지 더해줄 수 있다면?’


이론상 우주로도 나갈 수 있을 단창이 유선형으로 방향을 틀어 거미의 뒤통수에 박혔다.


푸우우욱!


“케에에에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단창이 놈의 외골격을 뚫고 입으로 삐죽 튀어나왔던 것이었다.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위력이었다.


머리가 꿰뚫린 거미는 이제 고통스럽게 발버둥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작다 해도 뇌가 파괴된 놈이 나를 노릴 수는 없었다.


‘된다! 진짜 됐어!’


그간 머릿속에서 생각만 해왔던 기술을 실제로 구현해낸 기분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제 나는 그간 갖지 못했던 강력한 원거리 공격 수단을 하나 갖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이걸로 끝이 아니지!’


다시 노움의 도움을 받아 팡! 튀어나간 나는 순식간에 놈에게 접근해 숏소드를 그었다.

놈의 기다란 다리 앞쪽 허공에다였다.


“하아압!”


샤아악!


지난 번 시험해 봤을 때 내 검풍은 1m 쯤 떨어진 곳의 촛불을 끌 수 있을 정도였다.

검이 가르고 지나간 진공상태가 앞쪽까지 공기의 뒤틀림을 만들어 촛불을 껐던 것이었다.


하지만 샤하라드의 능력을 빌린 이번엔 달랐다.

검이 가르며 만든 진공이 앞쪽의 공기마저 벌리며 뻗어나가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시이이이익!


숏소드에서 뻗어나간 진공의 검은 발버둥 치던 거미의 다리 하나를 예리하게 끊어버렸다.

다리의 약한 마디를 정확하게 그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도 된다!’


지금 나는 허공을 격한 참격으로 거미의 다리를 잘라낸 것이었다.

원리는 다르지만 겉보기에는 무협소설에 나오는 검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쩐다! 진짜 쩐다!’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검기라니, 검기라니!

무술을 수련한 사람들에게 있어 로망과도 같은 기술이 아니던가.


‘성공했어! 이번 삶은 성공한 거야! 좀 힘들면 어때?! 검기를 썼는데!’


잠시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몇 초간 부들부들 떨며 감격에 겨워있다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이 기술을 이용해 거미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흠, 거리는 최대 2m정도고 몸이나 머리 쪽 외골격을 뚫을 정도의 위력은 안 되는군. 다리의 마디 정도가 한계야.’


그렇다는 건 지난번 마수화된 멧돼지의 가죽을 베는 정도는 무리라는 얘기였다.

기껏해야 고블린 정도나 동강낼 수 있는 정도.


위력이 살짝 아쉽긴 했다.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내 정령력이 성장할수록 위력도 강해질 테고, 지금 이 상태로도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일단 멋있잖아? 크흐흐흐!’


바로 이거였다.

이래서 내가 바람의 정령을 원했던 거란 말이지!


“와하하하핫! 진짜 쩐다!”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리고는 노움의 도움을 받아 높이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샤하라드의 힘으로 방향을 조종해 거미의 머리 옆으로 떨어져 내리며 숏소드를 내리쳤다.


“하아압!”


푸화아악!


거미의 목이 호쾌하게 떨어져 나갔다.

이미 모든 다리를 잃어버렸던 놈에게 마지막 일격을 피할 힘 따윈 없었다.


나는 해체된 거미 옆에서 눈을 감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로 아까까지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존재에서 한순간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감격스러웠다.


샤하라드 또한 좀 당황한 모양이었다.

말까지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꽤, 꽤나 잘 싸우긴 하네. 무, 물론 내 힘 덕분이긴 하지만.]


그래그래.

네 말이 맞다.

다 네 덕분이란다.

이 예쁜 것.

사랑스러운 것.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문득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거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숲 쪽에 은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세라인이었다.


“세, 세라인?”


낭패였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주변을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건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려고 했었는데···.


“어, 어떻게 여기에···?”


그러자 그녀는 평소와 달리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바람의 정령들이 한 곳으로 모여드는 것 같기에 와봤는데···.”

‘아, 바람의 정령.’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의 하프엘프인 그녀가 바람 정령들의 움직임에 민감한 건 당연한 얘기인 것을···.


게다가 문득 방금 내가 눈을 감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그게 옆에서 보기에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 지에 대한 것도···.

다시 끔찍한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벼, 변태 엘프.’


그때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걱정과는 조금 다른 말투의 목소리였다.


“쥰,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벌써 두 개체의 정령과 계약할 수 있게 되다니. 방금 바람의 정령을 활용한 방법도 엄청났어. 난 그런 건 생각도 못했는데···.”

‘응?’


문득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방금의 목소리에서 비난이나 혐오의 감정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직접 본 그녀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얼굴에 담긴 표정은 오직 순순한 감탄뿐, 다른 종류의 감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벼, 변태 같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어? 역시 세라인!’


마음속으로 열렬히 그녀를 찬양했다.

역시 엘프족의 손꼽히는 영웅이 될 그녀는 내 모자란 생각으로 도저히 잴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순간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근데··· 두 개체의 정령과 계약한 것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고?’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하프엘프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정령을 진화시키지 않고 다른 최하급 정령과 계약했냐고는 묻지 않아?”


그러자 세라인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솔론의 말대로라면 우드엘프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니 좀 아깝긴 하지만, 너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겠지. 쥰, 너는 원래 남들과 같은 길을 가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 그리고··· 방금 너의 싸움을 보고나니 그 이유를 약간 알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솔론의 말처럼 세라인은 차가운 게 아니라 진중한 성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폭넓은 이해심이라니···.


내가 남들과 같은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살짝 오해긴 하지만, 자신의 생각으로 남을 재단하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봐주려 하는 그녀는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때였다.

내 머릿속에선 샤하라드가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얜? 흠, 꽤 예쁜 애네? 물론 나보단 덜하지만. 근데 너랑 무슨 사이야? 설마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겠지? 너 따위를 만나주기엔 지나치게 예쁜 것 같은데? 아니지. 이제 나와 계약했으니 꿀릴 것도 없나? 그래서 뭐야?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그런 거야?]


문득 대화가 가능한 정령과 계약한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끄러워. 그게 말이 되냐? 나 같은 게 어딜 감히 저 세라인 같은 사람과···.’


그러자 내 생각을 읽은 샤하라드가 또 빽빽거렸다.


[뭐라고?! 시끄럽다고?! 게다가 나랑 계약한 게 좋은 게 아니야?! 용서 못해! 용서 안 할 거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언제는 늘 즐겁게 해준다더니만! 막상 계약하니 이딴 소리를 하다니! 역시 너 같은 거랑 계약하는 게 아니었어! 아아앙! 어떡해! 물려! 빨리 물려달라고!]


아 놔.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갑자기 이마를 부여잡자 문득 세라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너무 무리해서 그런가?”

“아니야. 그저 방금 계약한 정령이 엄청 시끄러워서.”


그러자 그녀의 눈이 드물게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시끄럽다고? 그 정령이 말을 할 수 있어?”

“응. 하급 이상의 정령이었던 데다 아무래도 비상형 정령인 것 같거든.”

“비상형 정령이라고?!”


비상형 정령은 물, 불, 대지, 바람과 같은 사대 원소는 물론 얼음이나 숲, 빛, 번개, 용암과 같은 특수 정령들과도 색깔을 달리하는 독특한 존재였다.


그들은 폭풍, 지진, 우박, 해일과 같은 순간적이지만 아주 특별한 현상들이 정령화되는 이질적인 존재였는데, 다른 정령들처럼 도약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며 격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순차적으로 성장해 나간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자 놀란 표정의 세라인이 내게 말했다.


“비상형 정령이라니. 정말 대단해. 아, 그래서 그런 건가? 쥰, 너는 굳이 노움을 노인으로 성장시키지 않아도 우드엘프가 될 수도 있겠구나? 비상형 정령과 계약했으니까. 그걸 생각했던 거야?”

“···응?”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비상형 정령이라는 특수한 존재와 계약했으니, 굳이 노움을 진화시키지 않아도 우선적으로 세계수의 정수를 받을 수 있다고?

어, 그러면 안 되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맞는 말이기도 했다.

비상형 정령과 계약했다는 건 하프엘프인 상태로 노움을 하급정령으로 진화시킨 것보다 더 대단한 사태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현재 생명의 숲에 비상형 정령과 계약한 엘프는 한 명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망한 건가?”


그러자 세라인의 표정이 다시 의아해졌다.


“···뭐라고?”


그녀로선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우드엘프가 된다는 건 모든 하프엘프들의 꿈과도 같았으니까.

그러니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무척 불쾌해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녀에게 솔직히 내 계획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선 그녀의 협조를 얻어야만 했고, 또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 놓고 봤을 때 어쩐지 그녀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세라인. 부탁이 좀 있는데··· 혹시 내가 비상형 정령과 계약했다는 걸 비밀로 해줄 수 없을까?”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지?”

“사실···.”


그녀에게 내가 갖고 있는 계획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나 아카데미 판데온으로 가려고 한다는···.


원래는 대충만 말하려 했었지만, 계속해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점점 자세히 설명하게 되고 말았다.


결국 이 세계의 멸망을 제외한 모든 계획을 다 설명하고 만 나는 살짝 그녀의 눈치를 살펴봤다.

솔직히 불안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오리스도 그냥 받아들였을 뿐 이해해주지는 못했던 계획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는지에 대해···.


‘이번에야말로 혐오스런 눈길을 보내는 게 아닐까? 아니면 한심해하는 눈빛이라도?’


하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설명을 들은 그녀의 반응은 매우 산뜻했다.

그냥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알았어.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나도 비밀을 지켜줄게.”

“···응?”


생각보다 너무 쉬운 수긍이었다.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어, 그게 끝이야? 이상하진 않아?”


그러자 세라인은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쥰, 네가 많이 고민해 선택한 판단일 테니까. 그리고 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살짝 말을 고르던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은 사이잖아? 서로를 믿어줘야지.”

“아···.”


순간 또다시 감동을 받고 말았다.

이게 그 역사시간에 배웠던 화랑도의 ‘붕우유신’같은 건가?

친구 사이에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책으로만 배웠던 걸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니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그래, 이런 멋진 세라인에게 혹시라도 헛된 마음을 품지는 말자. 선의를 호의로 착각하는 실수는 계지훈 때로 족하지. 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그녀에게 슬쩍 물었다.


“아참, 세라인. 내가 계약한 정령이 너무 시끄러워서 그러는데 혹시 바람 정령의 계약자로서 조언해줄 만한 것이 있을까?”


샤하라드는 지금 머릿속에서 아예 빽빽 소리를 지르며 우는 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그녀의 말에 대답도 해주지 않자 벌어진 일이었다.


[엉엉엉! 계약 물려! 물려내라고! 잘 해주겠다고 약속해서 진명까지 알아놓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다니! 속았어! 속았다고! 엉엉엉!]


그러자 세라인이 바로 답을 주었다.


“실체화시켜보는 건 어떨까? 가끔 지나치게 말이 많은 정령들일 경우 선배들은 아예 늘 실체화시켜 놓는다는 얘길 들었거든.”

“응? 실체화? 아! 오오오!”


그랬군.

그런 방법이 있었군!


순간 한 줄기 빛을 본 기분이었다.

확실히 실체화시킨다면 적어도 머릿속에서 떠들어대지는 못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마음속으로 말을 걸어봤다.


‘샤하라드, 너 실체화해볼래?’


그러자 바로 코웃음을 치는 샤하라드.


[흥!]


그러고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삐졌음을 내게 알려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겐 느껴졌다.

실체화란 말에 살짝 기대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실체화해보고 싶긴 한데 내 말을 들어주는 건 또 자존심이 상해서 대답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아, 이게 무슨 삐진 여친 달래기냐? 사람이랑도 못해본 연애를 정령이랑 하게 생겼구먼.’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나마 정신연령이 높은 쪽이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아, 하기 싫은가보구나. 난 샤하라드가 실체화한 멋진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뭐,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엄청 멋있고 아름답고 또··· 완전 쩔 것 같긴 하지만 네가 그렇게 싫다면야···.’


그러자 바로 반응이 왔다.


[흠흠, 그래? 뭐 그렇게까지 내가 보고 싶다면야, 한 번 나가주기로 할까?]


그러고는 바로 실체화했다.


쉬아아아악!


내 어깨 위에서 불그스름한 바람이 뭉치듯 회전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녀가 나타났다.

붉은 머리와 투명한 피부를 가진 십대가 살짝 안 된 듯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와아!”


세라인이 탄성을 터트렸다.

새가 아닌 인간형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의 정령은 최하급인 실프, 하급 실라페, 중급 실라이온까지도 인간형의 모습을 띌 수 없었다.


상급 정령인 실피스트가 되어서야 인간형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는데, 내 샤하라드는 현재 최하급 정령 정도의 힘밖에 지니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아무리 비상형 정령이라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라인은 내 어깨에 앉아 도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작은 소녀를 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정말 아름답구나.”


그러자 샤하라드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흥! 당연한 얘기야. 지겹다고 전해줘.]


하지만 그 말과는 달리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는 모습이 내 눈에는 명확하게 보였다.

웃음을 참으며 세라인에게 전해줬다.


“너무 당연한 얘기라는데?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인가 봐.”


그러자 샤하라드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만 나를 째려봤다.

그러고는 세라인을 힐끗 보며 말했다.


[당연한 얘기긴 하지만 듣기 싫은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고맙다고 전해줘. 너도 꽤 예쁘다는 말도 해주고. 물론 나만큼은 아니지만.]


이것 참.

앞이 막막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건 또 너무 귀여웠다.

피식피식 웃으며 세라인에게 전해줬다.


“지겨운 얘기긴 하지만 고맙대. 그리고 세라인 너도 엄청 예쁘다는데?”

[엄청이라고는 안 했거든!]


그러자 세라인이 환하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눈앞이 환해진다고 느껴질 만큼이나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래, 고마워.”


나는 처음 보는 세라인의 환한 웃음에 잠시 넋이 나가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마치 은빛 달처럼 빛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샤하라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녀를 삿대질하며 빽 소리를 질렀다.


[너 그렇게 웃지마!]


그 갑작스런 행동에 세라인은 바로 웃음을 그치고는 의아한 눈빛으로 샤하라드를 바라봤다.

목소리야 들리지 않겠지만 뭔가 기분이 안 좋다는 건 바로 알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왜 그래? 뭐라고 하는 거야?”

[내 파트너야! 그런 웃음으로 홀리지 말라고!]


이번 말은 차마 그녀에게 전해줄 수 없었다.

짧은 순간 봤던 그녀의 환한 미소만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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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 심연-3 23.04.12 516 1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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