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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할 세계의 아카데미에서 살아남는 법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23.04.03 10:13
최근연재일 :
2023.04.28 07:00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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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5
추천수 :
406
글자수 :
187,515

작성
23.04.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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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27 체린

DUMMY

괴물들을 피해 숲속으로 들어간 후 감각을 총동원해서 빠르게 수풀을 헤쳐 나갔다.

그 안에 또 뭔가 있을까봐 걱정했었지만 다행히도 더 이상 감당 못할 괴물들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물론 고블린이나 다른 중소형 몬스터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숲의 종족 엘프인 내가 선두에서 나무 위를 달리며 정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지.’


나무 위에서 앞서 달리던 내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손바닥을 들어 땅에서 따라오는 드라카를 정지시켰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땅으로 내려서며 속삭였다.


“앞쪽에 고블린 무리가 있어.”


그러자 드라카 역시 속삭여 물었다.


“고블린 정도면 잡고 가는 게 낫지 않겠나?”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소란을 피우다 오거 같은 놈이 따라올 수도 있어. 피할 수 있는 건 피해 가는 게 낫을 것 같다.”

“그렇군. 알았다.”


미래에 전향자 측 빌런 검은 마수가 될 드라카는 의외로 꽤 고분고분했다.

적어도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몬스터들이 있는 곳을 잘 피하며 숲 안쪽으로 계속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앞으로 전진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내 등에 계속 업혀 있던 마법학부 지원자 여인이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전 이제 괜찮아요. 좀 내려주시겠어요?”

“아!”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 그녀를 업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녀가 워낙 가볍기도 했고 온통 주변에만 신경을 집중한 나머지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이외의 여자를 등에 업은 건 처음 아니었나?’


그러자 몸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이 이제야 느껴졌다.

하지만 잠시뿐, 목숨이 위험한 지금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그녀의 부탁도 들어줄 수 없었다.


“이곳은 숲속이라 안전한 곳까지 빠르게 이동해야 합니다. 내려서 우리처럼 빨리 이동하실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업혀 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당연히 마음으로 수긍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것까지 신경 써 줄 정신은 없었다.


지금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곳은 숲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이었다.

저 바위산에서 작은 동굴이라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일단 한 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위산을 집으로 삼고 있는 괴물들이 없을 때 얘기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딘가에 숨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대로 한 이삼십 분을 더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우리는 드디어 바위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들어갈 만한 적당한 바위동굴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제야 뒤에 업었던 여인을 숲에 내려주고는 조용히 드라카를 불렀다.


“드라카.”


그러자 녀석도 양팔에 안고 있던 사람들을 내려주고는 소리 없이 내게 다가왔다.

사냥에 익숙한 수인족이라 그런지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진짜 맹수같이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스스슥!


우리는 눈짓과 손짓으로 간단히 뜻을 맞추고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동굴로 접근했다.

저런 동굴이라면 분명히 다른 주인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토끼나 사슴처럼 귀여운 쪽이라면 좋겠지만···.’


이 섬의 컨셉을 생각했을 때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자 노린내가 훅 풍겨왔다.

안에 무언가 있는 게 확실했다.


우리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고민했다.


‘어쩌지?’


이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싸움을 거는 건 현명한 짓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소리를 듣고 주변에서 뭐가 달려올지도 알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곳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저 숲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게 끔찍한 건 둘째치고라도, 동굴 입구의 크기로 봤을 때 뭐가 있든 우리보다 많이 큰 놈들은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단 동굴 입구의 바로 위쪽 절벽으로 도마뱀처럼 기어 올라갔다.


스스슥!


그러고는 드라카에게 손짓을 했다.

대충 네가 안의 놈들을 밖으로 끌어내면 내가 위에서 덮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손짓을 하면서도 살짝 걱정이 됐다.


‘이걸 녀석이 알아들으려나?’


놀랍게도 녀석은 바로 알아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굴 앞쪽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행동에 오히려 살짝 당황스러웠다.


‘···왜 호흡이 잘 맞지?’


드라카는 내가 동굴 입구 위쪽 절벽에 완전히 거꾸로 붙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동굴 안쪽으로 고개를 넣었다.

그리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는 동굴 안을 향해 크게 불어넣었다.


“후우우!”


그러곤 훌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오오오!’


아마도 냄새를 이용해 유인하려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노련한 전사다운 모습.

그리고 그 순간, 몸을 밀착시킨 절벽을 통해 뭔가가 후다닥 일어나는 듯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진동을 예리하게 분석하며 생각했다.


‘여러 마리, 크기는 그리 크지 않군.’


다음 순간, 놈들이 밖으로 달려 나오는 진동도 느껴졌다.


두두두두!


나는 뒤로 빠져 있던 드라카를 보며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해볼만 하다는 뜻이었다.

진동으로 판단하건데 아마도 인간 정도의 체중을 지닌, 대여섯 마리 정도의 놈들인 것 같았다.


곧 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릉!”

“크아앙!”


다음 순간, 동굴 밖으로 뛰쳐나온 놈들은 개의 머리를 가진 인간형 몬스터 ‘놀’이었다.

놀 여섯 마리가 조잡한 철제 무기를 들고는 동굴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놈들은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멀찍이 서 있던 드라카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바로 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컹! 컹!”


그 순간 절벽에 매달려 있던 내가 공중제비를 돌며 놈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동굴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뛰쳐나간 놈의 머리 위였다.


휘리릭!


자유 낙하의 속도에 회전력까지 더한 내려찍기가 놈의 머리에 작렬했다.


빠각!


“캐애애앵!”


두개골이 함몰된 놈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즉사였다.


나는 즉시 놈이 떨어뜨린 글레이브(서양식 언월도)를 주워서는 드라카에게 던져줬다.


“드라카!”


그러자 씨익 웃음지은 검은 호랑이 수인이 허공에서 빙빙 돌며 날아온 글레이브를 간단히 낚아채더니만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놈들을 향해 그어버렸다.


“훕!”


푸하악!


“캐애애앵!”

“캬아아앙!”


녀석의 모습에 나는 순간 감탄사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와우!”


삼국지의 장비가 저랬을까?

글레이브를 젓가락처럼 휘두른 드라카가 놀 네 마리를 그야말로 순식간에 갈라버리고 있었다.


푸학! 푸화아악!


“캬아아앙!”

“캐갱!”


아까 맨 손으로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놈도 만족스러운 듯 대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달려가던 놀 한 마리를 뒤에서 기습해 쓰러뜨렸다.


퍼억!


“캐앵!”


하지만 그땐 이미 네 마리를 처리한 드라카가 글레이브에서 피를 털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압도적인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자식, 장난 아니네.’


무기를 든 녀석은 과연 검은 폭풍이라 불릴 만했다.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무위.

그 압도적인 실력을 보니 새삼 이 녀석이 네임드 캐릭터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문득 불안감이 밀려왔다.


‘···괜히 도와줬나?’


문득 이 녀석을 도와줬던 게 정말 잘한 일이었는지 살짝 걱정이 됐다.

하지만 뭐, 이제와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그래, 아까 와이번, 오거들이 튀어나왔으니 어차피 죽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뭐.’


우리는 놀의 시체를 적당히 처리하고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우우!”


동굴은 딱 우리가 쉴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작았다.

온통 노린내로 가득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꽤 아늑한 곳이었다.


그러자 내내 짐짝처럼 들려왔던 마법학부 지원자들도 풀을 깔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들도 이제야 마음이 좀 놓였던 모양이었다.


그때 일남이녀 중 작고 귀엽게 생긴 여인 한 명이 훌쩍훌쩍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이건 너무해. 난 그저 마법이 좋아서 배우러 왔던 것뿐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으로 보내버리다니. 이게 입학시험이라니. 마법 도구 하나도 없이 이런 곳으로 보내버리면 우리에게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으흐흑!”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다른 일남일녀도 침울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바다가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자 드라카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당장 소리라도 지를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행히 내가 먼저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는 그가 뭐라고 하기 전에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러자 밖으로 나온 드라카가 내게 소리쳤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군! 뭐라도 해서 살아남을 생각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질질 짜고나 있다니! 하여간 나약한 인간족들이란!”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렇게 큰 소리로 말할 거면 그냥 동굴 안에 있는 거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차피 다 들릴 텐데.


기본적으로 이놈에겐 배려라는 게 좀 부족해 보였다.

게다가 자꾸 인간족과 수인족을 비교하며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투도 불편했다.


저런 식이라면 굳이 베가드가 수를 쓰지 않았더라도 아마 곧 왕따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좀 선을 그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녀석에게 물었다.


“수인족들 중에는 마법사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나?”

“음? 마법사? 마법사는 없다. 하지만 무녀는 있지. 일족의 앞날을 예지하고 신령스런 힘을 전사들에게 내려주시는 분들이시다.”

“그래? 그럼 그 무녀들도 너처럼 잘 싸우냐?”

“···그렇진 않다. 그 분들은 여인인 데다 나와 역할이 다르니까.”

“그렇지? 근데 그 무녀들은 존중하는 네가 무녀들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마법사들은 왜 무시하는 건데? 너도 아까 그 베가드란 놈과 똑같이 수인족과 인간족을 차별하고 싶은 거냐?”


내 질문에 녀석은 곧 당황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 그건 아니다! 하지만 여자들이면 모를까 우리 수인족 남자들 중에선 그렇게 비리비리한 녀석들은 없단 말이다!”

“그러냐? 근데 인간족을 왜 너희 수인족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그런 기준으로 따지면 오크족들은 여자들도 힘세고 잘 싸운다던데 그럼 오크족이 수인족들보다 우월하다고 봐도 되는 거냐?”


그러자 녀석이 급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냐?! 감히 오크 따위와 우리 수인족을 비교하다니! 네놈이 지금 우리 수인족을 모욕하겠다는 거냐?!”


북방의 같은 영토에서 경쟁하며 살아가는 수인족들과 오크족들은 서로를 끔찍하게 싫어하고 경멸했다.

그렇기에 녀석이 오크족보다 열등하다는 내 말에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그러라고 한 말이기도 했고 말이다.


분노하는 녀석에게 피식 웃으며 말해줬다.


“지금 내가 한 말이 네 말과 뭐가 다른데? 오크족의 기준으로 수인족을 바라본 내 말이, 수인족을 기준으로 인간족을 바라본 네 말과 다른가? 아니면 너는 남들을 비교할 수 있어도 남들은 너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아까 베가드란 놈이랑 똑같이?”


그러자 분노로 가득했던 녀석의 표정이 금세 당황한 표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오크족의 기준, 수인족의 기준이라고?”


혼란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던 녀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그런 녀석의 모습에 나 또한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녀석.’


내가 기대했던 건 논리로 녀석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었지, 놈이 고민하고 반성하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사람이란, 특히 어른이 된 사람이란 말 몇 마디로 쉽게 변하는 존재들이 아니니까.

오죽하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사람이 변하는 게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 드라카 이 녀석은 내 말 한 마디에 고민하며 자신을 돌아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순수하고 마음이 열려 있는 놈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녀석이 전향자 측의 네임드 캐릭터인 검은 마수라니, 아무리 봐도 거리가 있어 보였다.


‘혹시 진짜로 지금의 녀석은 아직 전향자가 아닌 걸까? 나중에 어떤 계기를 통해 그쪽으로 가게 되는 거고?’


만약 내 예상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진짜로 그걸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나쁘지 않았다.


‘검은 마수가 전향자가 아닌 우리 편이 된다라···.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최곤데?’


적의 전력을 깎고 우리 전력을 높일 수 있다면 최고의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생각에 잠겨있던 녀석이 문득 내게 말했다.


“그랬군.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오크와 수인족을 비교하는 게 안 된다면 수인족과 인간도 비교하면 안 되는 거였겠지. 내가 잘못했다. 사과하겠다.”


그렇게 말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녀석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깔끔한 인정과 사과라니.

감탄이 나왔다.


게다가 녀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녀석이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근데··· 그럼 인간의 기준에서는 저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건가? 나는 저들을 어떻게 봐야 하지?”


헛웃음이 나왔다.


‘하, 이 녀석은···.’


순식간에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내게 조언을 구하는 모습이 그렇게 순수하고 담백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일부 인간들보다 훨씬 나은 모습.

마치 백지 상태의 도화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뭘 그려줘도 쑥쑥 흡수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잠시 생각하다 천천히 얘기해줬다.


“수인족에서 무녀들이 하는 일들을 인간족은 남자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너에겐 가장 쉬운 이해겠지. 인간족들은 남녀의 신체 능력 차이가 너희 수인족만큼 크지 않거든. 그러니 남자들도 직접적인 무력을 쓰는 역할이 아닌 조력자로서의 역할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다. 사실 단순히 조력자라고 보기도 힘들지. 시간과 상황만 주어진다면 우리 전사들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는 존재가 마법사들이거든.”


그러자 녀석이 크게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 하긴 다미아도 여자이면서 남자들처럼 전사가 되고 싶어 판데온에 왔었지. 그런 것처럼 인간족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무녀의 역할을 할 수가 있는 거였군.”


그러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내 어깨를 세게 두드리며 말했다.


퍽! 퍽!


“고맙다! 내게 깨우침을 주다니, 너는 현명한 전사로구나! 나 묵시안 드라카는 너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입었지. 그러니 화야 여신의 이름을 걸고 내 목숨이 다하기 전 반드시 은혜를 갚을 것이다!”


아윽!

굉장히, 매우, 지나치게 아팠다.


하지만 아픈 와중에도 가슴은 뿌듯했다.

저 드라카가 여신의 이름을 걸고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하다니,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큰 수확이기 때문이었다.


수인족들은 성정이 거칠고 단순한 만큼 한 번 맹세한 말은 목숨을 걸고 지키기로 유명했다.

하물며 그들이 믿는 여신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라면야···.


씨익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쥰이라고 한다. 은혜를 갚기보단 친구가 되는 쪽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러자 녀석이 감동한 표정으로 내 손을 굳게 잡으며 대답했다.


“쥰, 넌 현명하고 긍지 높은 전사로군. 너와 같은 전사와 친구가 되어 기쁘다. 죽음까지 함께 하겠다.”


뭘 또 죽음까지···.

문득 삼국지의 도원결의가 생각나는 말이었다.

거기까진 안 가도 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굳이 말로 꺼내진 않기로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전향자 측의 누군가가 이 녀석에게 은혜를 입혔다면, 이 녀석은 그에게도 이런 맹세를 하지 않았을까?

혹시 그래서 전향자가 된 건 아니었을까?


알 수 없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내가 먼저 그의 맹세를 받을 수 있게 된 건 정말 다행한 일일 것이었다.


그와 찐한 악수를 나눈 후 이제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말했다.


“나는 일단 산 위로 올라가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어 볼 생각이다. 드라카 너는 이 주변의 정찰과 안쪽 사람들의 보호를 부탁한다.”


내 말에 녀석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맡겨둬라.”


검은 마수 묵시안 드라카, 호랑이 같이 사나워 보이는 녀석의 웃음이 그렇게 듬직해 보일 수가 없었다.


***


동굴 안, 마법학부 지원자인 체린 라마트는 대놓고 울고 있는 여자와 훌쩍거리고 있는 남자 사이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처지와 심정 또한 저 울고 있는 여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 또한 성공한 상인의 딸로서 부유하게 살아왔고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마법을 접할 수 있었던 사람에 불과했으니까.


어려서부터 마법을 익히며 재능이 있다는 얘기를 지겹도록 들어왔었고, 그녀 스스로도 마법을 연구하는 것이 싫지 않았기에 판데온에 지원해봤던 거였었다.


그러니까, 아주 가벼운 마음이었단 얘기였다.


‘그랬는데···.’


이런 지옥 같은 곳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다니, 판데온의 교수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생존하는 게 마법을 연구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참을 수 없는 불합리함에 대한 억울한 감정이 두려움과 함께 울음이 되어 치밀어 올랐다.


“흑!”


하지만 그녀는 이내 이를 악물고 울음을 억눌렀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절대 울 수 없었다.


체린 라마트, 타고난 미모와 그보다 더한 마법 재능으로 늘 남들에게 떠받들어지며 살아왔던 그녀는 그동안 전사라는 족속들을 경멸해왔었다.


‘폭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는 야만스럽고 무식한 자들!’


이게 그녀가 전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심지어 고등 존재인 인간이면서도 아직 진화가 덜 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자들이라고 비웃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아까도 베가드란 자가 다른 이들을 자기 밑에 무릎 꿇리려 했을 때 눈살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쳤었다.


‘역시 전사란 작자들은!’


하지만 그 후 갑자기 상황이 변해버렸다.

거짓말처럼 쉽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자신 또한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버린 상황.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심지어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마법사인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완전히 백치 같았지···.’


그간 쌓아온 마법 지식 따윈 전혀 소용없었다.

마법 도구가 없는 건 둘째 치고 너무 무서워 움직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무력했다.

다리가 풀려 그저 주저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런 자신이 그렇게 멍청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한심해, 너무···.’


근데 그런 상황에서 그녀를 구해준 것이 바로 전사들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경멸해왔던 바로 그 전사들.

무식하고 야만스러운 전사들 말이다.


‘그들은···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나처럼 주저앉아 있지 않았어.’


또한 그들은 냉정도 잃지 않았다.

심지어 그 위급한 상황에서 그녀 자신을 포함하여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구해내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자신이라면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행동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이렇게 안전한 장소까지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때까지의 과정이 너무나도 매끄럽고 능숙해 보여 멋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체린은 문득 주먹을 불끈 쥐며 생각했다.


‘···분해.’


그녀에겐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치욕적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내려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진짜 그럴까봐 두려워했던 마음도, 그들이 멋있다고 생각했던 마음도 모두 다.


너무도 치욕스러웠다.

그간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들, 자신이 살아왔던 삶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문득 동굴 밖에서 호인족 거한이 하는 말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군! 뭐라도 해서 살아남을 생각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질질 짜고나 있다니! 하여간 나약한 인간족들이란!”


체린은 이를 악물었다.

분했다.

그 말이 너무나도 옳은 말이라 더더욱 분했다.


호인족 남자의 말은 백번 옳았다.

지금은 질질 짜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뭘 해야 하지? 내가 뭘 할 수 있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엇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무력감이 자괴감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설움에 무릎사이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때였다.

그녀를 업고 왔던 잘생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인족과 달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선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녀들은 존중하는 네가 무녀들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마법사들은 왜 무시하는 건데? 너도 아까 그 베가드란 놈과 똑같이 수인족과 인간족을 차별하고 싶은 거냐? ···오크족의 기준으로 수인족을 바라본 내 말이, 수인족을 기준으로 인간족을 바라본 네 말과 다른가? 아니면 너는 남들을 비교할 수 있어도 남들은 너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의 말을 집중해 듣던 체린은 한순간 도끼로 머리를 찍힌 것만 같은 기분이 되고야 말았다.


그는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마법사들과 전사들은 역할이 다르다는 말.

역할이 다른 자들을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을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체린도 깨달았다.

자신 또한 그간 저 수인족 남성처럼 자신의 기준으로 역할이 다른 전사들을 판단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름을 틀림으로 치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득 헛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나는 정말 바보였구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전사들에겐 전사로서의 역할이, 마법사인 자신에겐 자신의 역할이 따로 있었다.

이제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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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할 세계의 아카데미에서 살아남는 법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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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체린 23.04.28 362 7 22쪽
26 26 재난 23.04.27 367 8 13쪽
25 25 베가드 23.04.26 371 6 13쪽
24 24 3차 시험 23.04.25 397 9 18쪽
23 23 친구 +2 23.04.24 397 10 18쪽
22 22 면접 23.04.23 406 6 17쪽
21 21 꼰대양의 기사 +2 23.04.21 423 7 16쪽
20 20 판데온-2 23.04.20 429 10 14쪽
19 19 판데온-1 23.04.20 443 8 15쪽
18 18 세계수-3 +8 23.04.19 451 6 20쪽
17 17 세계수-2 23.04.19 437 7 15쪽
16 16 세계수 23.04.19 442 7 11쪽
15 15 탈출-2 +1 23.04.17 446 11 12쪽
14 14 탈출-1 23.04.16 463 11 14쪽
13 13 샤하라드-2 23.04.16 458 8 19쪽
12 12 샤하라드 23.04.14 484 12 12쪽
11 11 심연-3 23.04.12 515 11 17쪽
10 10 심연-2 23.04.10 521 16 15쪽
9 9 심연-1 23.04.09 538 14 12쪽
8 8 폐쇄자들-2 23.04.07 554 14 16쪽
7 7 폐쇄자들-1 +1 23.04.05 602 12 15쪽
6 6 Endless days 23.04.03 637 15 12쪽
5 5 세라인 +1 23.04.03 679 13 14쪽
4 4 하프엘프 쥰-2 +2 23.04.03 730 13 17쪽
3 3 하프엘프 쥰 23.04.03 820 13 14쪽
2 2 웨이브 23.04.03 954 16 12쪽
1 1. 계지훈, 그리고 쥰 23.04.03 1,478 2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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