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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할 세계의 아카데미에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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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23.04.03 10:13
최근연재일 :
2023.04.28 07:00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19,667
추천수 :
406
글자수 :
187,515

작성
23.04.0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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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글자
12쪽

6 Endless days

DUMMY

불의 하프엘프들과 몇 마디를 더 나누고 그들을 돌려보낸 후 문득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곳엔 여전히 그녀가 서 있었다.

약간 어두운 은발 머리, 얼음으로 된 조각상처럼 차가운 표정의 아름다운 하프엘프, 세라인이었다.


그녀를 보자 문득 내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이 년 간 말이라도 한 마디 걸어보고 싶었지만 결국 한 번도 그러지 못했던 그녀가, 마치 나를 기다린 것처럼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세라인?”


머릿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나를 지금껏 기다렸던 건가? 왜?

그리고 방금은 왜 도와준 거지?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이제껏 계속 알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중 하나도 밖으로 꺼내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계지훈 시절처럼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괜한 오해를 살까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가장 무난한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세라인.”


그러자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어. 나는 당연히 했어야만 하는 일을 했을 뿐이니까.”


늘 냉정하고 공정한, 그녀다운 차가운 말이었다.

하지만 나로선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말이기도 했다.


“아, 그, 그랬나?”


고작 그런 대꾸를 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얼음 조각 같았던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은 쥰, 네가 아까 했던 일이겠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고마워. 덕분에 많은 동료를 살릴 수 있었어.”

“···어?”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이 년 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짜 그녀가 웃은 게 맞는지는 다시 확인할 수 없었다.

바로 고개를 돌린 그녀가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몸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또 봐!”


휘이익!


바람처럼 가볍게 몸을 날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말이 새어나왔다.


“세상에···.”


저 세라인이 내게 말을 걸어주다니.

그것도 모자라 웃음까지 보여주다니.

우리 지역 모든 하프엘프들의 우상인 저 세라인이···.


‘이건 꿈인가?’


슬쩍 볼을 꼬집어봤다.

아무래도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인 것 같았다.

불 하프엘프들에게 사과와 감사를 받은 것도 그렇고, 저 세라인도 그렇고.


세라인, 그녀는 내게 무척 특별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엄청나게 아름답다거나 모든 하프엘프들의 우상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바로 내게 이 세계의 정체를 알게 해준 장본인, 그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


계지훈으로서 죽기 얼마 전.

그리고 조현성 그놈이 실종되기 전, 나는 녀석과 ‘Endless Days’라는 온라인 게임 하나를 같이 시작했었다.


그 게임은 인간, 엘프, 드워프, 오크, 수인족의 다섯 종족 중 하나를 선택해 세상의 멸망을 막는 컨셉의 게임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그걸 막지 못하면 진짜 세상이 멸망하며 게임이 끝나버리곤 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게임이 시작됐다.


거기까지 떠올리고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건 진짜 충격적인 컨셉이었지. 게임만 다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캐릭터도 처음부터 다시 키워야만 했으니까.’


그랬다.

엔드리스 데이즈에서 세상이 멸망하면 스토리만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유저들이 이제껏 키워왔던 캐릭터들도 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이제껏 했던 현질, 키워온 능력들이 모두 리셋되어 버린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유저들은 다시 시작된 세상에서 처음부터 다시 캐릭터를 키워야만 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원래 플레이 중이었던 유저들은 다시 캐릭터를 선택할 때 약간의 베네핏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저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었다.


‘소송을 걸겠다는 유저도 있었고, 심지어 회사를 폭파시켜버리겠다는 협박글도 많이 올라왔었지.’


하지만 뛰어난 게임의 품질과 더불어 그 극단적인 컨셉이 승부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까?

엔드리스 데이즈는 악명과 함께 인지도를 높이며 대세로 떠오를 수 있었다.


계지훈이었던 내가 친구와 함께 엔드리스 데이즈를 시작했을 때도 이미 게임 속 세상이 두 번 멸망한 후였다.


그 게임을 처음 시작하고 캐릭터를 선택할 때, 나는 무공을 쓸 수 있는 인간과 정령술을 사용하는 엘프 종족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엘프 종족을 선택했었다.

외모에 한이 맺혀 있었던 내게 엘프 종족의 아름다운 외모는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장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똥손이었던 나는 엘프족 최하급 캐릭터인 하프엘프에 당첨됐었고,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시 선택하는데 드는 비용인 십 만원이 아까워 그냥 그걸로 플레이하기로 결심했었다.


‘멍청하게도···.’


지금 생각하면 이가 갈릴 만큼 어리석은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이 세계에 하프엘프로서 탄생하게 됐을 때, 나는 그 기막힌 우연에 어이없어 했었다.

게임에서도 하프엘프였는데 진짜로 하프엘프가 되다니, 이게 내 팔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해 알게 되면 될 수록 점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가 어쩐지 내가 게임 소개책에서 읽었던 ‘엔드리스 데이즈’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엘프들이 살고 있는 ‘생명의 숲’도, 이곳저곳에서 무작위로 나타나는 심연이라는 이름의 공간도.

게임 속 엘프 종족의 시작마을, 그리고 무작위로 나타나던 던전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설마설마 했었는데···.’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내가 속해 있는 현실 그 자체인 이 세상이 게임과 똑같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다 그녀를 보게 됐었다.

방금 내게서 멀어진 그녀 세라인을···.


당시 캐릭터를 선택하기 위해 게임 소개집을 훑어보던 나는 거기에 나왔던 엘프 영웅 NPC들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딱 반하고 말았었다.


그리고 그들 중 분명 그녀 세라인이 있었다.

‘폭풍의 세라인’이라는 엘프족 영웅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야말로 경악하고 말았었다.


‘진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 게임 속 캐릭터를 현실에서 만나게 되다니.’


물론 게임 속 세라인은 지금 같은 하프엘프가 아닌 바람의 상위엘프인 루나엘프이긴 했다.

그녀의 머리카락도 탁한 은발인 지금과 달리 광채를 뿜어내는 눈부신 은발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시점의 문제일 뿐, 그녀가 그 ‘폭풍의 세라인’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도 세라인은 놀라운 재능으로 곧 우드엘프로 승격할 거라고 확실시되고 있었으니까.

그녀라면 아마 그보다 상위인 루나엘프로 승격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그러니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내가 이 세계의 미래를 예상하고 내가 가야할 길을 정하게 된 건.


‘이 세계의 미래···.’


솔직히 여기가 게임 속 세상인 건지.

아니면 어떤 평행차원의 이야기를 지구의 누군가가 우연히 게임으로 만들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건 만약 게임의 컨셉이 이 세계와 같다면 이 세계도 곧 멸망해 버린다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랬다.

이 세계는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멸망해 버릴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는 심연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이 세계의 차원이 붕괴하며 다른 세계와 연결되면서 생겨나는 게 바로 게임에서 균열 던전이라고 부르던 심연이었으니까.

바로 엔드리스 데이즈의 게임 소개집에서 봤던 스토리였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세계의 멸망을 막아야만 해.’


그건 이 세계의 미래를 예상하고 있는 내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미션이었다.

적어도 게임에서처럼 세상이 멸망해도 다시 캐릭터를 만들어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그리고 상태창도 나오지 않는 완벽한 현실인 이 세상에서 다시 캐릭터를 리셋해서 플레이하는 일 따윈 절대 없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했던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문득 한탄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숲 한 가운데 위치한 들판의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하프엘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물의 하프엘프들도···.


특히 그녀들 중 눈물까지 흘리며 필사적으로 중상을 입은 하프엘프에게 치유력을 쏟아내고 있는 여인이 한 명 있었다.


“정신 차려요! 조금만 힘내요, 제발! 살아날 수 있을 거예요!”


흑청색 머리카락을 지닌 물의 하프엘프, 그녀는 바로 내 친구인 아리에였다.


‘아리에.’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대체적으로 물의 정령과 계약한 하프엘프들의 성품이 착하고 자상하기는 하지만 아리에는 그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편이었다.

하긴 그러니 피를 뒤집어 쓴 모습조차 상관하지 않고, 모두가 외면하는 나와도 친구가 되어준 거였겠지만 말이다.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가 치료하려고 하는 하프엘프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아마도 아까 멧돼지에게 물린 채 이리저리 휘둘려졌던 궁수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한쪽 골반이 완전히 으스러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속으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그의 상태는 한 눈에 봐도 회생불가로 보였다.

적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리고 그 기적은 최하 물의 상위엘프인 미스티엘프가 갑자기 나타나 치유력을 쏟아 부어 주거나, 하프엘프를 우드엘프로 승격시켜줄 수 있는 세계수의 정수를 그에게 먹여주는 것을 말했다.


그러니 그건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는 뜻, 그를 살릴 수 있는 확률은 전혀 없다는 뜻과 같았다.


나는 죽어가는 남자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계속해서 치유력을 쏟아내고 있는 아리에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주었다.


“아리에.”


그러자 그녀가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쥰, 어떻게 해. 이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 내가, 내가 좀 더 능력이 있었다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살릴 수 없는 부상자들을 치료할 때마다 늘 그랬듯 울먹이며 얘기하는 그녀에게, 나 또한 늘 그랬듯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그건 네 탓이 아냐, 아리에.”


하지만 역시 언제나 그랬듯, 내 위로는 그녀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상대를 위해 치유력을 쏟아 붇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아마 아리에는 또 저러다 지쳐서 기절할 것이었다.

그러고는 또 몇날며칠을 무력감에 젖어 자책하겠지.

자신에게 더 능력이 있었다면 그를 살릴 수 있었다며···.


하지만 무력감을 느끼는 건 사실 그녀만이 아니었다.

무려 이 세계의 멸망을 막겠다고 결심한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동료들의 시체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너의 능력은 고작 이 정도라고.

세계의 멸망을 막기는커녕, 이런 작은 심연에서 비롯된 웨이브조차 홀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다고 말이다.


이럴 때마다 문득 스스로 되묻게 되곤 했다.


‘내가 정말 이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까? 고작 엘프족의 최하급 캐릭터 하프엘프인 내가?’


답답한 마음에 저 멀리 숲 위로 산처럼 솟아 있는 세계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폐쇄자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우리가 다 죽어나가야 올 셈인가?”


내가 소속된 북동쪽 숲에 소규모 심연이 발생한지 벌써 일주일째, 오늘로 세 번째 웨이브가 발생했던 날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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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 폐쇄자들-2 23.04.07 554 14 16쪽
7 7 폐쇄자들-1 +1 23.04.05 602 12 15쪽
» 6 Endless days 23.04.03 637 15 12쪽
5 5 세라인 +1 23.04.03 679 13 14쪽
4 4 하프엘프 쥰-2 +2 23.04.03 730 13 17쪽
3 3 하프엘프 쥰 23.04.03 820 13 14쪽
2 2 웨이브 23.04.03 954 16 12쪽
1 1. 계지훈, 그리고 쥰 23.04.03 1,478 2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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