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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할 세계의 아카데미에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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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23.04.03 10:13
최근연재일 :
2023.04.28 07:00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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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8
추천수 :
406
글자수 :
187,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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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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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8 세계수-3

DUMMY

삼십대? 아니면 오십대?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신비한 얼굴이었다.


세계수의 동반자 타나에 라만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느라 고생했구나. 비야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너희가 무척 보고 싶었단다.”


그의 첫인상은 마치 이야기 속 성인과도 같았다.

미소는 자애로웠고 얼굴은 여인처럼 아름다웠다.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백색의 머릿결은 나이가 들어 보인다기보단 오히려 만년을 존재해온 눈처럼 그를 더 신비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양 옆에 서 있는 하이엘프들 역시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인 것 같았다.

아니, 하이엘프 자체가 몇 명 되지 않으니 알고 있는 이들이 아닐 리 없었다.


성녀처럼 은은한 후광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젊은 여인은 ‘숲의 신부’ 에사로 아난, 그리고 엘프치곤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청년은 ‘숲의 송곳니’ 타마라스.

엘프족 전체에서도 ‘세계수의 동반자’ 타나에 라만에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위치를 차지한 네임드 캐릭터들이었다.


‘뭐야, 이 상황은? 대체 왜···?’


우리는 지금 세계수의 숲에서 가장 위에 있는 세 명의 하이엘프를 모두 만나게 된 상태였다.

마치 고등학생에게 표창장을 준다고 해서 가봤더니 그곳에서 우리나라 대통령과 삼X 그룹 회장, 서울대학교 총장을 한꺼번에 만난 것만 같은 상황.


꿀꺽!


너무 당황스러웠다.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스스로를 엘프라고 생각지 않는 내가 이럴 지경인데 다른 동료들이 어떨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 동료들은 모두 감동과 긴장감으로 덜덜 떨고 있는 중이었다.

감정이 풍부한 아리에는 물론이고 늘 무심한 표정이었던 세라인도, 요즘 항상 침울해 있었던 타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반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타나에 라만은 여전히 여유로운, 동시에 자애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의 웃음에서 어쩐지 만족스러운 감정이 읽어졌기 때문이었다.


‘···만족스럽다고?’


뭔가 이상했다.

감동을 받은 우리를 보고 만족스러운 감정을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그걸 다 떠나 이건 너무 과한 대접이지 않은가?

고작 심연에서의 일을 듣기 위해 저들 모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게 원래 엘프들의 방식인가?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권위의식이 없는 엘프들이기에 지위 상관없이 모두 다 손님을 맞이하는 게 원칙일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계지훈 시절부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꽤 신뢰하는 편이었다.

직감, 또는 본능이라는 것이 내게 해주는 경고가 꽤 정확할 때가 많았으니까.


일단 우리는 모두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세계수의 동반자를 뵙습니다!”

“세계수의 동반자를 뵙습니다!”


엘프들은 인간들과 달리 권위적인 면이 별로 없었지만, 엘프족 전체의 지도자인 ‘세계수의 동반자’에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존경을 표시하는 게 그리 어색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 순간, 세계수의 동반자 타나에 라만의 시선이 슬쩍 나를 스쳐가는 걸 분명히 포착할 수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너희를 오라고 한 건 상을 내리기 위해서란다.”


그 말에 우리 모두는 표정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상이라고?


타나에 라만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희가 비야와 함께 돌아와 준 덕분에 우리는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단다. 만약 너희가 그래주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더 많은 폐쇄자들을 또 잃어야만 했겠지. 정말 고맙구나. 형제들의 희생을 막아줘서, 무엇보다 살아 돌아와 줘서 말이다.”


모든 엘프들의 지도자인 세계수의 동반자가 우리에게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감동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동반자님···.”


아까부터 붉어져있던 아리에의 눈에서는 이제 감동의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동료들의 표정 또한 감동으로 가득 차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직 나만은 아니었다.


‘살아 돌아와줘서 고맙다라···. 그럼 지금 이 순간에도 숲의 외곽에서 소모품으로서 죽어가고 있을 다른 하프엘프들은? 그들에겐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저 소모품을 채우는 것처럼 하프엘프들을 생산해 배치해왔던 그가 이제 와서 우리를 걱정해준 것처럼 얘기한다고?’


내가 이미 색안경을 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계지훈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반골 기질 때문일까.

내 마음속에선 그의 말에 대한 거센 반발심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의 말에 감동받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이런 마음을 들켜서 좋을 건 없을 테니까.


그러자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타나에 라만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결정했단다. 아직 좀 이르지만 큰 공을 세운 너희들에게 전원 세계수의 정수를 지급하기로 말이다.”

“!”

“!”


그 말은 동료들은 물론 나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선사해주었다.

모든 하프엘프들이 목숨을 걸고 십 년간 방어자의 역할을 수행하려는 이유.

그 보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수의 정수를 바로 지금 주겠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놀라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정수를··· 주신다고요?”

“그, 그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가 곧 격렬하게 감사의 말을 전하자 문득 타나에 라만의 시선이 나를 똑바로 향했다.

그러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특히 쥰, 너는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지? 너에게는 특별히 세계수의 정수 세 개를 상으로 내리도록 하겠다. 아마 너라면 상급엘프가 되는 것도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

“예에?!”

“쥰! 잘됐어!”


이젠 머리가 띵해졌다.

정신을 차리기엔 너무 엄청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수의 정수 세 개라고?

상급엘프?


가만있자?

그럼···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굳이 아카데미로 갈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세계수의 정수는 세계수에서 열리는 열매였다.

그 열매에는 엄청난 마나가 깃들어 있어 그걸 먹은 하프엘프들을 순혈의 우드엘프로 바꿀 수 있는 영약이었다.

또한 당연히 쉽게 열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 년에 몇 개 정도?


만약 그게 많이 열리는 것이었다면 하프엘프들에게 마구 뿌려서 우드엘프의 숫자도 쉽게 늘릴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럼 엘프가 출생률 부족에 시달릴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당연하게도 정수의 수는 매우 적었다.

십 년간 몬스터들과 싸우고 살아남은 하프엘프들에게만 간신히 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걸 우리 모두에게 다 주겠단 말이지? 그것도 내겐 한 개가 아닌 세 개나 한꺼번에 주겠다고?’


슬쩍 둘러보니 다른 동료들도 모두 놀란 눈빛이었다.

특히 타키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충격과 불신, 질투가 범벅된 복잡한 눈빛.

최근 아무 티를 내지 않아 나에 대한 감정이 바뀐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냥 숨기고 있었을 뿐.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녀석의 눈빛 덕분에 좀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칫 감격에 빠져 넘어갈 뻔했던 마음을 제어했다.


‘자, 자, 정신 차리고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지금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너무 이상했다.

그간 마치 내게 감정이 없어진 것처럼 굴던 타키 녀석이 저런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파격적인 상황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과한 호의에는 독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걸 인간 계지훈은 잘 알고 있었다.


‘왜지? 대체 뭣 때문에 우리에게, 특히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타나에 라만이 주려는 상에 혹시 독이 들어있는 게 아닌지를 알려면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문득 타나에 라만을 향해 물었다.


“저, 동반자님. 혹시 우리와 함께 들어갔던 비야도 상을 받게 되나요?”


그러자 타나에 라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감격에 겨워 펄쩍펄쩍 뛰지 않는 내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가 대답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이미 상을 받았단다.”


바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아, 역시! 잘됐네요! 혹시 그녀는 어떤 상을 받았는지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가 잠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비야는 미스티엘프가 되었단다.”


그 대답에 동료들이 탄성을 질렀다.


“미스티엘프?!”

“와아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세라인과 아리에가 부러움이 담긴 감탄성을 뱉었다.

나 또한 겉으론 그들과 함께 감탄하며 속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오오! 대단하네요! 정말 잘 됐습니다!”


비야의 나이를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아직 미스티엘프가 될 나이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최소 백 년 이상을 살아야 상급 엘프가 될 자격을 갖출 수 있는데, 그녀는 우드엘프 중에서도 어린 편이라는 얘기를 그때 들었으니까.

최소 몇 십 년은 이르단 얘기였다.


그러니 비야가 상급 엘프가 됐다는 건 아마 그녀에게 상급엘프가 될 때까지 세계수의 정수를 공급했다는 얘기인 거겠지.

그 귀한 정수를 말이다.


문득 머릿속에서 퍼즐의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건 상이 아니라···.’


나는 비야가 미스티엘프가 되었을 때의 호칭을 알고 있었다.

‘빙결의 창 비야’.

그녀는 ‘폭풍의 세라인’과 더불어 사대 원소가 아닌 정령을 다루는 엘프족의 네임드 캐릭터였다.

각각 얼음과 폭풍이라는 특수 정령과 비상형 정령을···.


‘그러니까, 똑같은 게이트 던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두 사람이 우연찮게도 사대 원소가 아닌 특수정령과 비상형 정령을 다루게 된단 말이지? 그게 진짜 우연일까?’


문득 최근 세라인이 내게 해줬던 얘기도 떠올랐다.

그녀는 얼마 전 심연에 들어갔다 온 후 그녀의 실프가 묘하게 조금 난폭해진 느낌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나도 공감했었다.

내 노움 또한 요즘 전보다 많이 활달해진 느낌이었으니까.


‘만약 비야와 세라인이 새롭게 얼음과 폭풍의 정령과 계약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갔다 온 정령들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났던 거라면?’


어쩌면 심연 안에서 정령들이 잠들어 있던 그 시간이 변이를 거치는 과정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심연 안에 남은 엘프들, 솔론과 나미트리아도 이미 그 과정을 겪었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당시 솔론의 자신감 넘쳤던 태도도 이해가 갔다.


‘솔론···.’


그를 떠올리자 가슴이 또 욱신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부분에 집중해야 했다.


‘결국 타나에 라만이 원하는 건 그거였군.’


특수정령, 또는 비상형 정령이 된, 혹은 될 가능성이 있는 우리의 정령들.

그는 우리의 행동 때문에 상을 주는 게 아니라 그런 정령으로 진화할 가능성 때문에 정수를 투자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그게 이유라면 그가 나를 특별 대우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속에 꼭 숨어있던 샤하라드에게 물었다.


‘샤하라드, 너의 존재를 다른 정령들이 느낄 수 있을까?’


그러자 그녀가 짜증을 내듯 속삭였다.


[보면 몰라, 바보야? 저기서 실피엘 님이 아까부터 지켜보고 계시잖아.]


실피엘.

그 이름은 바람의 정령왕의 이름이었다.

계약을 맺지는 못했지만 타나에 라만과 친구로서 지내고 있다는 바람 정령의 절대자.


‘역시!’


그 대답에 확신을 얻고는 씨익 웃음 지었다.


‘이미 비상형 정령과 계약한 나를 빨리 전력화하고 싶은 거였군.’


내 몸값이, 정확히는 샤하라드의 몸값이 상당히 높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상을 준다는 핑계로 은근슬쩍 묶어두려 했단 말이지?


‘미안하지만 그렇게 싼 값에 팔려갈 수는 없습니다, 동반자님.’


의미심장하게 웃음 지었다.

이젠 내 비싸진 몸값을 어떻게 이용해봐야 할지 고민해볼 시간이었다.

어쩐지 동반자 타나에 라만이 이상한 물건이라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날.

나는 홀로 원 근무지인 생명의 숲 북동쪽 구역으로 돌아갔다.


“쥰!”


나를 발견한 내 덩치 큰 순둥이 친구 오리스가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소리쳤다.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 왜 혼자 돌아왔는지 따위의 의문은 전혀 생각도 안 하는 듯 반가움만 가득찬 순박한 미소.

가슴이 아려왔다.


걱정이 됐다.

내가 없는 녀석은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계속 살 수 있을까?


복잡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 오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쥰? 왜 그래? 왜 또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그 말에 살짝 당황했다.

내가 지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걱정스런 표정이 아니라?


그제서야 나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아마도 슬픈 모양이었다.

녀석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그 헤어짐이 영원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조현성 그 녀석처럼 말이다.


어렵게 입을 열어 녀석에게 말했다.


“나 떠나야 돼, 오리스.”


그러자 녀석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응?! 무슨 소리야?”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동반자께서 판데온 아카데미의 입학금을 지원해주시기로 했거든. 대신 바로 떠나야 한다고 하셨어. 그래서···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


녀석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말해왔던 이별이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다가올 줄은 녀석도, 나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


생명의 숲에 남아 상급 엘프에 도전하느냐, 아니면 하프엘프인 채로 판데온으로 가서 내가 생각해왔던 성장을 추구하느냐.

두 가지 선택지 중 내가 선택한 건 후자였다.


물론 지금 좀 더 실현 가능성이 높은 쪽은 전자일 것이었다.

동반자 타나에 라만은 비상형 정령인 샤하라드와 계약한 나를 절대 우드엘프인 채로 내버려 둘 리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폐쇄자로서도 우수한 가능성을 보인 나였으니, 그는 아마 최선을 다해 나를 키우려고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데온으로 가야만 한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엔드리스 데이즈에서 모든 캐릭터들은 아카데미에서 성장했을 때 가장 높은 성장 속도를 보였었어. 게다가 모든 사건의 중심지이고, NPC 영웅들이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곳이기도 했지.’


그에 비해 이곳 생명의 숲은 세계의 외곽에 위치한 곳이었다.

다시 말해 이곳에 있으면 세상의 멸망이 완전히 가시화되기 전까지는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세라인이 아직 ‘폭풍의 세라인’이 아닌 하프엘프에 불과하다는 점을 볼 때, 지금 시기는 게임의 시작보다 약간 이른 시간대인 것 같았다.

그러니 이곳은 앞으로 꽤 오랜 시간동안 메인 스트림에서 벗어난 상태로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다면 이곳에 계속 있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뭔가 발버둥이라도 쳐 보려면 반드시 판데온에 가야만 해.’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반자 타나에 라만의 제안을 완전히 거절한 건 아니었다.

완전히 포기해버리기엔 너무나도 탐나는 제안이었으니까.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저, 동반자님. 제 꿈은 사실 아카데미 판데온으로 가서 소드마스터가 되어보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죄송스럽지만 동반자님이 주시는 것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응, 거짓말이었다.

그러자 타나에 라만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소드마스터가 되겠다고? 하프엘프인 네가 말이냐?’

‘예, 제 반은 인간이니까요. 물론 제 고향은 이곳 생명의 숲이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엔 다시 이곳에 돌아와 동료들과 함께 싸울 생각이긴 했습니다. 그래서 입학금을 위해 마정석을 모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푹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제 내 표정을 보지 못하게 된 그가 한동안 침묵했다.


그에게 딜을 건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카데미에 가야 하니 우드엘프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졸업 후엔 다시 돌아올 생각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대답할까?

그가 절대 놓칠 수 없을 비상형 정령의 계약자인 내 말에 대해 말이다.

당연히 일단은 설득해보려 하겠지?


‘···인간들의 사회는 몹시 위험하다. 태어난지 이 년밖에 안 된, 게다가 숲 밖으로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너로선 절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생각대로였다.

그러니 그런 종류의 설득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눈에 굳은 의지를 담아 그를 바라보며 씩씩하게 대답해줬다.


‘제 꿈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다른 동료들도 언젠가 세계수로 오겠다는 꿈을 위해 지금도 목숨을 걸고 심연의 웨이브를 막고 있지 않습니까? 그에 비한다면 그렇게 위험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하프엘프들도 이미 꿈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있지 않느냐?

이 질문은 그에게 있어 아마도 가드가 불가능한 기술, 가불기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은 이제 완전히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잠시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 내내 의지가득한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엔 생명의 숲으로 돌아올 생각이라고 했느냐?’


예쓰!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터트렸다.

내가 딱 바라고 있었던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겉으론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이곳 아닌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타나에 라만은 약간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엘프족 최초일 국비유학생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


그 상황을 적당히 각색해 오리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오리스의 표정이 금세 침울해졌다.


“정말··· 떠나는 거야, 쥰?”


녀석의 슬픈 표정에 나도 울컥했다.

하지만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고는 녀석을 타박하듯 말했다.


“그래, 인마! 최대한 빨리 판데온에 다녀오라고 하셨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도 나 없이 혼자 살아남아야 돼. 알겠어?!”

“······.”

“뭐야, 그 표정은?! 그럼 나 없다고 죽을 거냐?!”

“하지만··· 솔직히 나 혼자선 자신이 없단 말이야.”

“하여간 덩치만 커가지곤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서야!”


녀석을 갈구고는 있지만 사실 가장 불안한 사람이 나였다.

어쩌면 녀석 자신보다도 더 불안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녀석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떠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잠깐 녀석을 타박하고는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또 해법을 마련해 줄 수밖에.”


그러자 녀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해법이라니?”


씨익 웃으며 녀석의 앞에 준비한 것을 꺼냈다.

그러자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붉은색의 작은 과일, 녀석으로선 처음 보는 것이었겠지만 이렇게 짙은 마나향을 뿜어내고 있는 과일을 몰라볼 리 없었다.

녀석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쥬, 쥰! 이, 이건?!”


그랬다.

내가 녀석에게 주기 위해 꺼낸 건 바로 세계수의 정수였다.

숲의 동반자 타나에 라만이 주기로 한 세 개의 정수 중 아카데미 졸업 후 받기로 약속한 두 개를 제외한, 미리 받은 한 개.

나는 그것의 반을 녀석에게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녀석은 너무 경악한 나머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거 반 개를 먹는다면 네 한심한 정령력도 엄청 올라갈걸? 그러면 나 없이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래,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다.

그래서 세상의 멸망을 막겠다는 내 행동이 내 친구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기를 말이다.

그러길 위해서라면 솔직히 이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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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 폐쇄자들-1 +1 23.04.05 602 12 15쪽
6 6 Endless days 23.04.03 638 15 12쪽
5 5 세라인 +1 23.04.03 679 13 14쪽
4 4 하프엘프 쥰-2 +2 23.04.03 730 13 17쪽
3 3 하프엘프 쥰 23.04.03 820 13 14쪽
2 2 웨이브 23.04.03 954 16 12쪽
1 1. 계지훈, 그리고 쥰 23.04.03 1,478 2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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