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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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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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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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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46

DUMMY

이스피리아들을 기숙사로 안내해주고, 부탁을 들어준 비젠탈에게도 감사를 전한 리카드는 마차의 뒷정리도 손수 마치고선 유쾌한 발걸음으로 학원의 복도를 걸었다.


그렇게 상당히 흡족한 기색으로 자신의 집무실―― 학원장실로 향하고 있던 리카드는 방금 막 보았던 광경이 떠올라 중얼거렸다.



“흠흠. 일부러 리벨리타스 영애의 옆으로 정했는데······ 정말 좋은 선택이었군요. 다행이에요.”


성격이 온화하고 평민에게도 친절한, 나름 괴짜라 불리는――물론 본인 앞에서는 말할 수 없다――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라면, 만약 이스피리아가 평민이라는 걸 들켜도 모질게 대하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 있긴 했다.


그런데 계산을 뛰어넘어 그녀는 이스피리아에게 귀족으로서의 교양을 가르쳐주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아마 이스피리아 양이 평민이라는 것도 알아차리셨겠죠.’


분명 사교계에서 귀족의 모범이라 찬송 받는 라프리트라면 한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오산으로 끝났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다 수많은 영애가 바라는 라프리트의 교육을 받는 거니 이스피리아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녀에게도 협조를 구해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염화]라······ 엄청 편리한 마법이군요.’


이스피리아의 방으로 다가온 자신에게 갑자기 머릿속에서 직접 들리는 듯 착각이 드는 목소리가 전해져왔었다.


그것은 바로 찬크에르의 목소리로, 그는 『지금 라프리트라는 여자가 찾아와 리아와 아이리스를 가르치고 있다』라고 알렸다.


약간 노기를 띤 음성이었지만, 상태를 보러올 겸 기본적인 교양을 알려주러 왔다가, 이 [염화]라는 마법에 여러가지 의미로 깜짝 놀랐다.


호기심이 부쩍 피어올랐으나, 찬크에르는 방해하지 말라는 분위기였다. 이쪽도 젊은 여성들이 자신을 갈고 닦는 현장을 급습하는, 눈치 없는 짓을 하긴 뭐 하여 그 길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스피리아가 동년배 여성과 친해지는 걸 막았다간 또 찬크에르에게 무슨 소릴 들을 거다. 그 마을에는 이스피리아와 동년배인 여성은 없는 듯하니 백방.


그건 좀 사양하고 싶다.


어찌 됐든 일이 잘 풀린 듯하여 기분이 좋은 리카드는 발걸음도 가볍게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오, 세리오 씨. 다녀왔습니다.”


리카드의 말에 맞은편에서 오던 여성, 세리오 리벨리타스는 속도를 높여 거의 뛰다시피 다가왔다.



“학원장님, 지금 오셨나요?”

“아니요. 좀 더 일찍 왔습니다만, 제가 데려온 분들에게 한 번 다녀온 길입니다. 뭔가 급하신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 아뇨. 그런 건 딱히 아니고······ 맞다! 하, 학원장님이 데려오신 분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음. 저도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 이야기는 제 집무실에서 해도 될까요? 물론 세리오 씨가 급하지 않다면.”

“그렇죠. 이런 곳에서 이야기할 거린 아니죠······.”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의 이름으로 추천하지 않았던 학생의 등장이다.


이 일을 모르는 사람도 많긴 하지만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라, 그 학생―― 이스피리아의 정보를 얻으려 하는 자들은 많았다.


그러한 자들은 자신의 약점을 잡으려 하는 자부터, 순수하게 그 학생의 능력을 알아보려 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그런 다양한 속셈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누가 들을지 모를 복도에서 떠드는 건 지양해야 할 것이다.


세리오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말하였다.



“시간은 괜찮습니다. 제 일은 끝마쳤거든요.”

“그렇습니까? 마침 잘 됐군요. 그럼 같이 가도록 하죠.”


리카드는 고개를 끄덕인 세리오와 함께 학원장실로 향했다.


자신의 집무실에 도착한 리카드는 열쇠――잠금장치와 세트인 마도구로 리카드가 만들었다――를 넣어 돌렸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 마력을 넣어――지문인식과 비슷―― 문을 열었다.


처음엔 이런 장치들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학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불법으로 침입해 자료를 흩트려놓는다든지, 방에 있던 마도구가 한두 개 사라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였기에 달아놓게 된 것들이었다.


못된 장난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정도가 점점 심해져 갔고, 연구를 방해받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까닭에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잠금장치 말고도 문을 직접 부수고 들어오지 못하게 문의 강화와 각종 경보시스템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스피리아의 마을에 들르기 몇 달 전부터 등골이 간질간질한―― 불안한 느낌이 들었기에 더더욱 많은 방어기제를 설치해뒀다. 이를 모르고 멋대로 들어왔다간 제법 크게 혼쭐이 날 것이다.


이러한 집무실에 오래간만에 온 듯한 리카드는 변함이 없는 실내의 모습에 침입자는 없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흐음. 누군가가 들어오려 했던 모양새가 남아있던데, 괜한 걱정이었나요?’


자신 말고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여벌의 열쇠를 준 세리오가 유일했다. 그러니 문고리에 마력등록도 끝마친 그녀가 이렇게 대놓고 침입하려는 흔적을 절대 남길 리가 없었다.


침입자라고 봐야 했는데, 결국 들어오진 못하고 돌아갔나 보다.


리카드는 문의 밑 부분을 발로 밀며 억지로 열려던 흔적을 보며 용케 차진 않았다고 중얼거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자, 세리오 씨도 편하게 앉으세요.”

“······어디에요?”

“아, 그게······.”


리카드는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온 천지가 서류와 연구자료, 마도구들이 즐비했다. 테이블과 의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상태로 앉기엔 조금 힘들어 보인다.



“아휴, 정리 좀 하시라니까요. 제가 정리해드리고 싶어도 어떤 게 중요한 건지 전혀 알 수 없으니 치울 수도 없잖아요. 자신만의 규칙으로 정리했다는 사람도 있다니 함부로 손댈 수도 없고.”

“오! 저도 비슷합니―― 아뇨, 치우도록 하죠.”


번뜩이는 세리오의 시선을 피해 리카드는 황급히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했다. 단순히 옆으로 치워두는 거지만.


먼지는 세리오가 이따금 청소해주는 탓에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어느새 세리오는 마른걸레를 들고 대충 치우고 있는 자신의 곁으로 왔다.



“[물]”


자신만의 스타일로 짧게 변형한 발동어를 외친 세리오는 익숙한 모습으로 테이블에 남아있던 먼지를 닦았다.



“하하. 감사합니다, 세리오 씨.”

“됐어요. 학원장님이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투덜댄 세리오는 개수대로 가 또다시 짧게 [짜]라 외치고는 오염된 걸레를 빨았다.


조금 좌불안석의 느낌이었던 리카드는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차를 준비하러 갔다. 그러다 문득 마음에 걸려 곁눈질로 세리오를 보았다.


‘흠······ 걱정스러웠습니다만 이젠 괜찮으신 모양이군요.’


마력레벨을 측정한 뒤로는 어딘가 기운이 없어 보이는 세리오였었다.


필시 기대보다 마력레벨이 낮아서 실망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는 조금 더 본인을 높게 평가해도 됐다. 술식이라는 틀에 갇힌 시스템에서 아까처럼 발동어를 짧게 줄여 마법을 사용하기란 쉽지 않으니 말이다. 굳이 마력레벨에 연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저도 아직 술식이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요.’


술식을 상식처럼 여기고 평생을 배워왔으니 그럴 만도 했고, 이 시스템이 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걸 눈치챈 것도 2년 정도밖에 안 됐으니 당연했다.


‘많은 국민에게 마법을 널리 배포한다라······.’


이 뜻은 정말 좋다고 생각은 한다. 실제로도 수많은 사람이 술식으로 인해 마법의 은혜를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성장의 방해는 정말 엄청났다.


그 마을에서 만난 이스피리아의 조부인 에이브안. 그의 마력량은 자신보다 꽤 적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만약 그와 싸운다고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상대나 가능할지 의심밖에 안 든다.


그러한 생각과 동시에 떠오른다. 이스피리아의 결혼식 당일, 그녀가 오기 전 단상 위에 있던 에이브안이.


그때 에이브안은 살며시 바람을 일으켜 낙엽을 모조리 날려버렸는데······


――완전한 무영창이었다.


당시에는 막 도착해 경황이 없어 마법을 사용한지도 몰랐다.


그러나 베르다드로 오는 7일간 마차 안에서 생각할 시간은 많았기에 즐거웠던 마을에서의 일을 떠올려보다 보니 알게 되었다.


그건 분명히 마법이었고, 에이브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고.


이스피리아처럼 무언가 동작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눈으로 힐끗 쳐다보니 바로 마법이 발동됐다.


낙엽을 치우는 정도야 자신도 [바람] 정도만 외치면 가능은 하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세기로 불게 해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불게 해야 할지를 정하고 일일이 거기에 맞는 술식을 짜서 마법을 써야 했다.


즉 공정이 많다는 소리다.


아무리 익숙해졌다지만 발동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고, 에이브안에 비하면 굼벵이가 기어가는 수준이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무영창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만약······ 술식 없이 생각만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거라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건 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아주 크게만 여겨졌다.


그 근거는 찬크에르와 이스피리아에게 있다.


찬크에르는 술식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스피리아라고 다르지 않았다. 술식이 뭐냐며 신기한듯이 되물었었다.


‘어쩌면 그 마을은 전원이 무영창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 아닐는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 헛웃음이 나오는 상상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하나 확실한 건,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그 마을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적을 거란 거다.


그건 분명했다.


술식으로 체계화시킨 마법을 보급한 이유가 마법 사용자를 늘리기 위함이니 말이다.


리카드는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벨루디스의 왕을 떠올렸다.


이 술식 체계가 성장에 큰 방해 요소가 된다는 걸 알리자 이 나라의 왕, 아크티알 네우라 디안 벨루디스 폐하에게 따로 직접 불려가 이야기를 듣게 됐다.


――건국왕의 의지로 백성들을 위해 이러한 체계를 만들고, 이를 위한 학원, 베르다드를 만들었다고.


마족과 큰 전쟁이 있었던 시기였기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비록 간단한 마법일지라도―― 많아진다면, 생활에는 엄청난 보탬이 될 수 있었다.


적어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렇기에 베르다드라는 학원을 만들어 귀족, 평민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를 늘이기로 했고, 착실하게 실효를 거두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족쇄도 차게 됐다.


‘그러니 정말로 생각만으로 마법을 사용한다면, 못해도 초 단위까지 발동 시간에 차이가 날 거 같군요.’


아마 마법――술식형태――을 잘 못 쓰는 사람이라면, 분 단위로까지 넘어갈 만큼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한데 무영창을 할 수 있는 에이브안과 대결한다면······ 아마, 압도적으로 마법의 연사력에 밀려 단번에 승부가 날 것 같다.


마력량을 앞세워 강력한 한 방을 날린다?


나쁘진 않은 방안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는 건 의외로 파훼법을 찾기 힘드니.


다만 그만한 것을 준비하는 동안에 바로 머리가 떨어질 거다. 발동 속도가 느리니까. 강력한 마법일수록 더욱.


‘반대의―― 에이브안 님의 경우엔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애당초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아닌데 그러한 공격은 불필요하지만요.’


그보단 간결하고 빠른 공격이 훨씬 효율적일 거다. 사람 간의 싸움은 치명적인 일격이 한참 중요하니 말이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 그런 큰 마법은 필요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마법 한 번으로 승부가 날지도······.’


아예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을 듯싶다.


분명 그런 무영창자와 대결한다면 자신은 좋은 샌드백 정도밖에 안 될 거다. 상대방이 공격하도록 기다려 줄 리도 없을 테니.


지금 당장 무영창으로 마법을 쓸 수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결국 근본적으로 술식이란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으니 결과는 변함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몇몇 마법들은 무영창이 가능하긴 했는데, 오히려 발동어의 생략으로 인한 이미지 구축에 어려움이 생겨 마법의 발동만 느려질 뿐이었다. 실전에 사용할만한 것들이 전혀 아니었다.


이 근본적인 차이를 메꾸지 않는 한 에이브안과의 대결은, 대결이라 불릴만한 것으로 성립이나 될지······. 일방적으로 맞다 끝날 거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 생각만으로 마법을 쓴다면 응용력 면에서도 차이가 극심할 것이다.


좋은 표적으로밖에 되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더욱더 든다.


‘자꾸 의지만 하는 건 좋지 않지만······ 이스피리아 양께 도움을 받는다면.’


상식에 가까운 걸 바꿔야 하니 쉽지만은 않겠지만, 꿈을 위해서라도 제자리걸음만 할 순 없었다. 염치없는 건 알지만 부탁해보는 수밖에.


찬크에르는······ 무서워서 부탁하기가 겁난다.



“여차하면 정말로 신발을 핥으면서 부탁드려볼까요······.”

“엑······.”

“응?”


엄청나게 질색하는 소리에 리카드는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정말 엄청나게 질색하는, 뭔가 더러운 것을 봤다는 표정인 세리오가 있었다.



“아무리 학원장님이라도 안 됩니다!”

“······네?”


양팔로 몸을 감싸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세리오.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저기, 세리오 씨 무엇을······”

“아, 아니. 나도 평범히 친해지고 발전하는 거라면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발을 핥거나 그러는 건 좀. 애초에 그 정도로 학원장님이 벼은태랄까······ 구음주렸다든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고는······”

“세리오 씨······?”


자기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는지 세리오는 한동안 혼잣말을 이어갔다.


그런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공포, 혼란, 매혹, 광기 등 갖가지 상태 이상에 효과가 있고, 하물며 일부 정신병에도 효과가 있는, 상위마법에 속하는 [면역]을 리카드가 사용하고 나서였다.



“죄, 죄송합니다. 설마 연구의 부탁일 줄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세리오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하지만 이쪽이야말로 설마였다. 치유마법 대신 위급상황에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까 힘겹게 배워놨던 [면역]을 세리오에게 사용할 거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했었다.


그 황당함에 리카드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도대체 어떤 착각을 하신 겁니까?”

“하, 하······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말고 넘어가 주세요. 부탁드려요.”


리카드는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내쉬고 세리오의 잔에 차를 따라줬다.



“알겠습니다. 일단 혹시 모르니 차 한잔 마시면서 마음을 가다듬으세요.”


조금 비꼬는 말처럼 들렸나, 세리오는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진 없지 않나”라며 투덜댔다. 그러나 잘못한 것이 있으니 세게 나가지는 못했고, 차는 감사하다며 마셨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리카드는 그녀가 좀 진정했다 판단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세리오 씨.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네! 네! 괜찮아요! 멀쩡하다고요!!”


상당히 가시 돋친 대답이었으나 정상적인 대화는 가능할 것 같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리카드는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 모습에 세리오도 평소의 다부진 얼굴로 돌아와 말을 기다렸다.



“우선, 제가 데려오신 분들······ 이스피리아 양들을 보셨습니까?”

“아니요. 몇몇 서류를 정리하느라 아직 못 봤습니다.”

“흐음······.”

“학원장님, 그분들은 입학서류에 출신, 신분 등 인적 사항이 꽤 누락되어있던데. 어디서 오신 분들이길래 그런 겁니까?”

“······어디서 오셨을 것 같습니까?”

“글쎄요······ 학원장님은 탐험하러 나가시자마자 곧바로 돌아와 그분들의 수속 절차를 밟았던 것이니 잘―― 응? 저기, 학원장님. 혹시 나 싶지만 설마······?”

“맞습니다. 마국 국경 근처에 있는 숲에서 모셔 왔습니다.”

“예?! 그런 데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요?!”

“쉿! 소리가 큽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사과를 한 세리오는 목소리를 낮추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방음이 잘되는 방이니 저리 조심할 것까진 없지만, 리카드도 만약을 위해 조심하기로 했다. 알려져선 좋을 게 하나도 없고, 무엇보다 어떻게 얻은 협력자인데 사소한 실수로 신뢰를 저버릴 순 없었다.


만약 신뢰를 저버린다면······?


신발을 핥건, 뭐를 하건 절대 되돌릴 순 없을 것이다. 죽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을까.



“그, 그런데 그분들은 서쪽 기숙사에 머무시는 게?”

“맞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배정하였지요.”

“그······ 이런 말씀 드리긴 조금 그런데, 마국 국경 근처에서 오셨다면······ 아마 평민이시지 않나요?”


세리오는 평민이 고위 귀족이 머무는 서쪽 기숙사에 머무는 상황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 상황으로 인해 이스피리아들이 곤란해질 일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리카드는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감탄했지만······ 그녀의 걱정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솔직히 리아들의 신분은 이 나라의 누구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자신도 그저 최대한 대접한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서쪽 기숙사로 배정한 것뿐이었지만, 지금 보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세리오 씨? 절대, 절대로 소리를 높이면 안 됩니다. 알겠지요?”


의아해하면서도 세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 잘 들으세요. 그분들은, ――폐하보다도 위에 계신 분이라 여겨주세요.”


눈과 입을 크게 한 세리오에게 순간 접근한 리카드는 빠르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큰 소리를 낼 거였다.


끄덕이는 모양새가 미덥지 않아 혹시 몰라 대비했는데 최고의 판단이었다. 다행히도 늦지 않았다.


살짝 발버둥을 치는 세리오에게 리카드는 얼굴을 가까이하여 작게 말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알겠습니까?”


살짝 마력도 내어 위압했더니 세리오는 침착해진 눈으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드는 막았던 손을 놓고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실례를.”

“아, 아니요. 저야말로 실례했습니다. 약속까지 해놓고.”

“궁금하신 게 많을 겁니다. 전부 알려드릴 순 없지만 가능한 부분까진 최대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감사합니다만, 어째서 저에게?”

“그야 세리오 씨를 믿고 있어서죠.”

“저, 저를요?”

“물론이죠. 믿고 있으니 자유롭게 이 방에 출입하실 수 있도록 열쇠도 준 것이 아닙니까. 제가 아무런 걱정 없이, 맘 놓고 연구실에 틀어박힐 수 있던 것도 전부 세리오 씨 덕분입니다.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


도중까지는 홍조가 어린 반짝반짝한 눈인 세리오였지만 어째서인지 급격하게 침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고는 “헤~ 그렇죠. 전 학원장님의 알람 정도죠.”라며 작게 중얼거렸다.



“세리오 씨?”

“아무것도요.”

“아······ 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세리오가 먼저 이 분위기를 털고 말을 걸었다.



“그보다. 결국 그분들은 누구십니까?”

“으음.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다만 방금 한 말 그대로이신 분들입니다.”

“반역죄로 처형당하실 만큼 위험한 발언인 건······ 아시죠?”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 말씀드리러 왕성에 가보려 합니다.”

“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절규랄까, 절박하게만 느껴지는 세리오를 보며 리카드는 당황했다. 큰소리를 내었건만 말릴 생각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



“세, 세리오 씨?”

“어쩜 사람이 그리도 순해 빠진 거예요! 그냥 저희끼리 비밀로 하면 되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보처럼 곧이곧대로 폐하께 말씀드리러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꼬마 아이도 당신처럼 하진 않을 거라고요!”


눈물을 흘릴 듯 세리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이유를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리카드는 더욱 당황하여 허둥지둥 달래보려 했다.



“저, 저기 세리오 씨. 진정하시고. 함부로 폐하라 크게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니까, 저도······. 네. 결정했어요!”


작아지는 목소리와 함께 점점 내려갔던 고개를 번쩍 들고 세리오는 외쳤다.


뭔가 불안함을 느끼면서 리카드는 물었다.



“뭐, 뭘 말입니까?”

“내일! 당신이 왕성에 가지 못하도록 이곳에 붙잡아두겠어요! 아뇨, 왕성 근처엔 평생 다가가지도 못하게 할 겁니다!”

“네??! 세리오 씨, 대단히 큰 착각을――”

“――서, 선빵필승!”


빠르게 접근해 주먹을 날리는 세리오.


루시아스 교단과의 대적을 상정하고――비록 혼자일지라도―― 수많은 상황에 대비한 훈련과 이미지트레이닝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자신이다.


그리고 그 상황 중에는, 지금처럼 기습당하는 것도 당연히 존재했다.


뿌리치는 건 손쉬웠고, 이를 실행하려 습관처럼 리카드는 빠르게 품 안쪽에 있는 작은 지팡이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도중에 멈췄다.


세리오를 공격하다니.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반복된 훈련으로 인한 것이었다지만,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던 세리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손을 뻗었다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며, 리카드는 위급 시에 발동되는 마도구의 작동도 멈췄다.


‘이 또한 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기선 여태 많은 신세를 진 세리오 씨에게 사죄의 의미를 담아 얌전히 맞는 게 보답하는 길일지도 모르겠군요.’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된 건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마음을 굳힌 리카드는 눈을 감고 그녀의 주먹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이상하게 주먹이 오질 않는다. 날아오던 주먹의 속도와 거리를 생각하면 이미 맞았어야 했건만.


리카드는 슬쩍 실눈을 떠봤다.


앞에는 커다랗게 보이는 주먹이 있었다.


뒤늦게 눈앞에서 멈춰 크게 보이는 것임을 깨닫은 리카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움직였다.



“저······기요? 세, 세리오 씨?”


세리오는 주먹을 내민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안경. ······안경 어디 갔어요?”

“아, 그게······ 눈이 좋아져서 빼뒀습니다. 안경은 여기에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리카드는 품속에서 고이 간직하고 있던 안경을 꺼내 내밀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지만 세리오의 시선이 안경으로 향한 것이 느껴진다.



“시력이? 그만한 치유사가······? 애초에 학원장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죠. 교단에 속한 치유사는.”

“그렇다는 건?”

“예. 이스피리아 양은 치유사입니다. 그것도 분명 굉장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십니다.”


사실은 눈의 치료는 다른 사람이 해준 것이나, 그래도 이스피리아가 굉장한 치료사라는 건 절대 거짓이 아니다.


이스피리아는 시력의 치유보다 한참 힘들 것 같은 상처를 한순간에 치유한 전적이 있었으니까.


다만 자신이 입힌 상처를 치유한 것이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으응?!”


안경을 보고 있던 세리오는 깜짝 놀라더니 주먹을 거두고는 바짝 다가갔다.



“모양! 디자인이 달라요!”


너무 가까이 다가와 패기가 넘치게 말하는 세리오의 기세에 리카드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최대한 실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몸을 최대한 뒤로 젖혔다.



“그게······ 제 부주의로 망가졌었습니다. 그래서 고치다 보니 조금 모양이 다르게 됐습니다.”

“조오오금? 이게요? 아예 다른 건데요? 렌즈도 없고요. 혹시 거짓말을――”

“――아닙니다! 맹세코 이 안경은 세리오 씨에게 선물 받았던 그 안경이 맞습니다. 지혜의 신, 세베브리나 님께 맹세합니다!”


리카드가 신봉하는 신의 이름까지 거론되니, 세리오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일단 조금 물러났다.



“흠. 일단 알았어요. 어디에서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디자인이 엄청나네요.”


까탈스럽게 말한 세리오는 테이블을 돌아 자리에 앉았다.


어린 여자아이가 쓰면 어울릴 것 같은 안경을 품에 도로 넣은 리카드도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속으로는 세리오가 이성을 되찾은 것에 매우 안도하면서.



“이것도 포함해서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 이 안경은 이스피리아 양이 고쳐준 겁니다.”

“네? 그분께서요? 방금 학원에 오시지 않으셨나요?”

“아아. 학원에 오고 고쳐주신 게 아닙니다. 마차 안에서 고쳐주셨습니다. 마법으로요.”

“[주조]요? 도구도 없이 마차 안에서 즉석으로 사용할만한 마법이었나요?”

“아뇨. 저도 [주조]인 줄 알았지만, 비슷한 효과의 다른 마법이라 합니다. 참고로 말씀하시길 금속, 목재, 암석 등 가리지 않고 성형할 수 있다더군요. 드는 마력의 양은 전부 다르다고 하시지만.”

“괴, 굉장하네요. 마력만 충분하시다면, 걸어 다니는 대장장이로 명성을 떨치시겠는데요? 어떤 마법인지는 모르겠어도.”

“더 놀라운 건 완성까지 걸린 시간이 3초쯤으로 매우 짧았습니다.”

“3, 3초?? 술식 짜는 시간을 빼더라도 너무 빠른 거 같은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그녀에게 리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안경의 잔해를 받자마자 바로 하셨으니 술식 짜는 시간까지 포함입니다. 그것도 발동어도 없이 손가락만을 튕겨서요.”


경악한 세리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한 모습에 리카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일을 공유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기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정말 그러합니다. 놀라자빠져 버릴 만한 일을 하는데도 이스피리아 양의 주위는 모두 당연하다는 듯해서 오히려 저만 이상한 놈이 된 기분이었었죠.’


그곳에선 자신만 붕 뜬 존재였다. 하지만 세리오의 반응을 보니 내가 이상한 건가 싶었던 의혹들도 말끔히 걷혔다.



“무, 무영창이라고요? 그 속도로요?”

“예. 그리고 확실하진 않지만, 저희처럼 틀에 갇힌 마법이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무영창으로도 그만한 발동 속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걸어 다니는 만능점포······ 돈을 긁어모을 수――가 아니라!”


황홀한 눈을 하고 있던 세리오는 헛기침하고는 진지한 시선을 보내왔다.



“어, 어쨌든 굉장한 분들인 건 알겠어요. 술식에서 벗어났다는 게 뭘 말하는지는 솔직히 아직도 감이 안 잡히지만요. 그렇지만 서쪽 기숙사로 배정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흠. 세리오 씨도 그분들을 직접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실 겁니다. 오히려 동쪽 기숙사에 그분들이 있는 게 더 어색해 보일 겁니다.”


의문이 가득해 보였지만, 세리오도 직접 보면 바로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특히 누구 때문에 더욱.



“그런데다 실제 신분이랄까······, 그것에 관해 폐하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 뵈러 가는 겁니다.”


이 말에 세리오는 벌떡 일어났으나 이내 침착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처음부터 폐하께 가실 모양이셨군요.”

“네. 처음 상황과는 상당히 달라 말씀드릴 내용은 많이 달라졌지만요.”

“하아······ 제가 오해한 거군요. 전 영락없이 죽으러 가시는 줄 알았어요. ······말씀해주지 않는 것들은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란 거죠?”

“그렇습니다. 세리오 씨를 못 믿기에 알려드리지 않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렇겠죠. 분명 절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겠죠······.”


작게 중얼거린 세리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저에게 바라시는 건 그분들이 학원 생활에 적응하실 수 있게, 혹은 문제에 휘말렸을 때 도와달라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세리오 씨에게 부담 주려는 건――”


“――괜찮아요. 도와드릴께요.”


말까지 자르며 세리오는 너무나 선뜻 승낙해줬다.


놀라면서도 감사의 말을 전하려던 리카드였지만, 뒤이어 나온 그녀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대신! 학원장님이 하시려는 일에 관해서는 듣고야 말겠습니다! 그게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어떻게 알았는가. 교단과 부딪치게 된다면 반드시 폐를 끼칠 거라는 걸 알기에 조심했건만.


‘그게 아니더라도 일의 중요성 때문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 언행 하나에도 신경을 썼는데······’


리카드는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심각한 분위기로 세리오를 쳐다봤다.



“제가 하려는――”

“――아아. 됐습니다! 위험이고, 뭐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도 좋아요. 오히려 기쁘게 학원장님이랑 도망칠 거라구요.”

“도망자로 끝나면 다행입니다. 잘못하면······ 죽습니다. 가문까지도 휘말릴 수 있고요.”

“그럼 오늘부로 리벨리타스를 나오도록 하죠. 저는 어차피 분가이니 별문제도 없을 것이고, 본가에 영향이 미치지도 않을 거예요. 죽는 거는······ 좀 싫지만, 그래도 학원장님과 함께라면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네요. 웃으면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만족하며 죽을 수 있어요. 정 못 믿으시겠으면 루시아스―― 아니지, 흠흠. 절 믿는다고 하신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 님께 맹세하죠. 전 이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어,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건······ 후후. 혼자 고민해보세요.”


세리오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일에 관여하려는 것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세리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아. 여전히 멋진 분이시군.’


더럽기만 한 파벌싸움과 암약, 모략이 난무하는 곳에서 그녀―― 세리오가 곁에 있어 준 건 정말 행운이었다.


분가라고는 하나 리벨리타스 가의 일원인 그녀가 오만하거나 꾀를 쓰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묵묵히 노력하는 모습은 언제나 눈이 부셨었다. 이루기 벅차기만 한 꿈에 좌절될 때도 그 모습에 힘을 얻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에게 힘을 주었던 그녀이기에 더욱 이 일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세리오 씨가 함께라면 저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지금 부탁한다고 하는 것인가.


마음과 정반대의 말을 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입은 쉼 없이 열렸다.


치유마법의 대한 연구를 위해 리아 일행들을 데려온 것부터, 그 후에 진행될 교단에 대한 대항까지. 자신이 오랫동안 바라고, 이제 시작하려는 모든 일을 나불나불 떠들어댔다. 여태 그렇게까지 조심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왜 그런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기분도 좋아졌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인가. 무거웠던 마음도 아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저의 일에 끼어드시겠습니까?”


세리오는 눈을 전혀 피하지 않았다.



“네. 제 마음은 조금도 변치 않았어요.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의 곁에서.”


여전히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리오였다. 망설임 따윈 전혀 없는 듯했다.


마음을 정한 리카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리오 씨.”

“후훗. 네. 잘 부탁해요, 리카드 님.”


조용히 미소짓는 세리오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왠지 마음이 충족되는 기분에 이대로 조금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할 일은 제법 많았다.



“자~ 전 이제 왕성에 면회를 신청하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 그렇지요. 제가 너무 오래 잡아뒀군요.”

“아닙니다. 무거웠던 짐이 내려간 기분입니다. 제가 감사를 해야 할 판이죠.”

“뭐, 뭘요. 전 아무것도 안 한걸요.”

“후후, 그럼 그렇단 거로. 아, 그 전에 세리오 씨. 아무리 절 도와주신다지만, 정말로 집안과 연을 끊진 마세요.”

“네? 왜, 왜요? 오늘 빠르게 가주님께 다녀오려 했습니다만?”

“아, 아니······ 세리오 씨. 행동력은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여차하면 뒷배가 필요할 때도 있을 겁니다. 제 집안은 아시다시피 저 말고 다른 사람은 있지도 않은 이름뿐인 귀족이니까요.”

“하긴. 그러한 일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갑자기 연을 끊는다고 하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요.”

“네. 말씀대로입니다. 폐를 끼칠 것 같으면 그때 리벨리타스 후작께 말씀드려도 늦진 않을 겁니다.”


――그럴 리가 있나.


만약 그런 상황까지 간다면 리벨리타스 가에도 무조건 영향이 갈 것이다.


그때가 되어 뒤늦게 연을 끊는다고 하여도 교단 측에서 ‘아~ 그렇습니까’하고 넘어갈 리가 없다. 반드시 리벨리타스 가도―― 아니, 잘못하면 벨루디스까지 교단 측과 분쟁에 휩싸일 수 있다.


그러니 되도록 혼자 행동하려 했으며, 자신이 하려는 일을 들키지 않으려 조심했다. 물론 분쟁에 휩싸이더라도 방파제 역할이 있는 벨루디스에 그리 큰 압박은 못 줄 테지만.


그런데도 이런 일을 하는 건 세리오를 위해서였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나 하나로 끝나면 된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로 돌아가면 될 뿐이고. 그러니 그녀는 집안과 연을 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모든 계획을 털어놨으면서도 이스피리아의 일행들의 정체만큼은 말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정보는 교단과 대항하는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중요한 것이니까.


‘이미 끌어들여 놓고 이 무슨 후안무치인가.’


완전 멋대로라는 건 자각하고 있고, 믿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세리오에게도 속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그녀가 이 일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은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행인 건 세리오가 분가라 이런 정치 쪽과 큰 연관이 없어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이것만큼은 절대 들킬 수는 없다.



“세리오 씨. 이스피리아 양과 아이리스 군을 부탁합니다. 크게 도와줄 필요는――”

“――거기까지만요. 다른 분들과 마찰이 있을 때 정도만 도와주라는 거죠? 제가 마구 도와주면 오히려 눈에 띌 테니.”

“예. 정확합니다. 역시나 세리오 씨입니다.”


마주 웃는 두 사람은 남은 차를 들이켜 목을 축였다.



“잘 마셨어요. 학원장님.”


미소로 대답한 리카드는 일어났다.


세리오도 따라 일어났고, 둘은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그는 뭘 하고 있나요?”


문고리에 손을 올리던 리카드가 마침 생각이나 물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세리오의 표정은 확 나빠졌다.



“요즘은 ‘남자라면 검이지’라며 검술을 배우십니다만······ 또 금방 싫증 내고 투정을 부리겠죠.”

“······참 곤란한 분이군요. 제가 부르긴 했습니다만.”

“이제 와서인데······ 왜 용사―― 흠! 왜 그분을 부르신 겁니까?”

“그게······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일은 리카드도 의문이었다.


당시에는 막연히 해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만, 막상 끝나고 나니 왜 그런 일을 한 것인지 좀처럼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의문은 그뿐만이 아니다.


애초에 이계에서 다른 자를 소환할 능력이 자신에겐 없다는 것이다. 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도 못 부르는데, 어찌 다른 세계의 사람을 부르겠는가.


연구실을 조사해봤지만 남아있는 것도 별로 없었다.


머릿속에 조금은 연구했던 내용이 떠올랐으나, 그 내용도 많진 않았고 뭔가 흐리멍덩해서 많은 것을 기억해낼 순 없었다.


표정을 흐리니 세리오가 급하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맞다. 학원장님 그분이 이제 자신을 ‘아서 알펜리트’라 칭하고는 그리 불러달랍니다.”

“뭡니까, 그게?”

“그분의 세계에서 유명했던 영웅의 이름을 조금 따왔다는데······ 저야 모르죠.”

“영웅의 이름을 함부로······. 하아······ 부디 얌전히······ 하다못해 이스피리아 양과 부딪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정말 어찌 전 그런 일을 했던 걸까요?”


리카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젠 아서 알펜리트라 칭한 그는 근래에 들어서 경험하지 못한, 안 좋은 쪽의 경험이었다.


22살―― 성인을 넘긴 나이라 하건만 방약무인한 행동 하며, 생각은 어찌 그리 얕은지.


그는 이세계에 왔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주인공’이 어쩌고, ‘굉장한 능력’이 저쩌고 하며 요란법석을 떨었다. 행동조차도 안하무인이어서 질리다 못해 학을 뗐다.


‘저에게도 그리 때를 쓰더니 결국 그리도 매달리던 마법에서 검으로 옮기셨습니까.’


아무리 술식으로 마법을 사용하기 쉬워졌다지만,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그나마 학원은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6:4 정도로 마법반이 많았지만, 나라 전체로 보면 3.5:6.5 비율로 한참 적었다.


그런데도 그는 분명 자신은 마법을 쓸 수 있다며 야단법석이었었데······ 이제야 현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기왕 깨달은 김에 본인의 위치를 깨닫고 얌전히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하, 하······ 아예 안 부딪치는 건 힘들지 않을까요. 같은 서쪽 기숙사인데.”

“그렇겠죠. 그저 이스피리아 양과 그를 화나게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말로요······. 아아! 세레브리나 님! 그에게 총명······까진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진지하게 기도를 올리는 리카드와 어색한 웃음으로 지켜보던 세리오는 몇 가지 주의사항에 대해 말을 나누고 학원장실을 벗어났다.






탁.


문이 닫히고 학원장실은 조용해졌다.


그런데 그때, 그 조용한 침묵을 깨고 자료들이 많이 쌓인 학원장실 구석에서 인기척이 나타났다.



“이야~ 생각지도 못한 걸 들었는데? 치유마법의 배포와 교단과의 항쟁······이라고 해야 하나? 혼자인데. 아니지, 이제 두 명인가? 뭐가 됐든 엄청난걸? 우리의 학원장님은. 과연 역대 최고라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랑은 노는 물이 전혀 달라.”


정체 모를 자는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며 일어섰다.



“어이쿠. 너무 시끄럽게 하면 안 되지. 아직 근처에 있을 수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정말 월척인걸? 그저 리카드가 데려왔다는 놈의 정보만 좀 캐내려 했을 뿐인데 말이야. 크큭.”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해 발광하는 듯 윤기가 흐르는 금발의 남성은 자신의 긴 금발을 어깨너머로 넘겼다.



“아티팩트의 힘은 정말 엄청나네. 저 리카드가 눈치채지 못한 데다, 술술 불기까지 하다니.”


남성은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은색의 작은 보주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다 집어넣고, 주변의 자료들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문으로 다가갔다.


바깥에서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한 남성은 품에서 아무런 무늬가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파란 카드를 꺼내 문 근처에 가져갔다.


그러곤 조심스레 문고리를 슬며시 돌리면서 잡아당겼다.


찰칵.


억지로 열었지만, 침입 방지를 위한 마도구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걸 확인한 남성은 문이 닫히지 않게 발을 문틈에 끼워두고, 허리춤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마력을 주입한 남성은 그대로 밖으로 나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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