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편 -장용의 서신-
-하북성, 북평, 순창표국-
설초의 하루는 이전과 크게 달리 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최고참 쟁자수로서 최근 대거 영입된 신입 쟁자수들을 관리하고 표물의 보관과 창고 정리 등 소소한 일상이 그에게 다시 돌아왔다.
두 가지 바뀐 점이 있다면 노삼 녀석이 표사 시험에 통과했고 장용이 표두가 되었다는 것이다. 설초는 둘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고 그날은 실로 오랜만에 산해객잔에서 얼큰하게 취해 돌아왔다.
오늘따라 운이 좋았는지 마작판에서 푼돈을 좀 챙겨온 그는 서랍 깊숙이 비상금을 숨기다 문득 장용이 전에 일러준 서신이 생각났다.
그는 오늘따라 거나하게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장용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는 노르겠지만 평소라면 생각하지도 않을 무모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내가 장아우의 숙소에 몰래 들어와 버리다니! 이게 다 늙어서 무슨 주책이란 말인가?'
다행히 장용은 노삼에게 잡혀 아직도 산해객잔에 있거나 표국 아래에 간단한 밀전병과 탁주를 파는 선술집에 끌려갔을 것이 분명했다.
설초는 장용의 서랍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었다. 다행히도 그곳에는 ‘설대형 친전(親展)’ 이라고 적힌 봉투가 고스란히 있었다.
꼴깍!
설초는 서신을 꺼내며 침을 크게 삼켰다. 그의 눈은 서신의 내용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설대형! 대형께서 이 편지를 찾으신다면 저는 아마 대형과 노삼을 두고 떠났거나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갔겠지요. 뭐가 되었든 제 월봉은 대형께서 잘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대형과 노아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첫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절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연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형과 함께한 반년은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평화롭고 가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형께서 절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저는 무림인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무공을 사용할 줄 압니다. 이 짧은 편지로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지만 대형과 노삼이 궁금하게 여기실만한 것들을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저는 역적의 아들입니다. 제가 누군지, 혹은 제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대형이 제 이름을 입에 담는 것으로도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부디 저를 잊어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역모에 휘말린 저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저의 부친은 제게 아직 돌도 채 되지 않은 여동생을 맡기시며 저만은 살아남으라 하셨습니다. 고작 열 살도 되지 않은 저로선 한 살배기 여동생과 함께 도망갈 곳을 찾을 수 없었고 저희는 비어있는 술독에 숨었습니다.
하지만 어둡고 컴컴한 술독이 갑갑했는지 이내 제 여동생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아기를 달랠 줄 몰랐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입을 틀어막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항아리의 뚜껑은 저희를 찾던 금의위의 손에 열렸고 저와 제 여동생은 금의위 남진무사 진규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러더군요. 제 손에 축 늘어진 그 아이를 보라고 말입니다. 전 그날 그곳에서 죽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전 제가 살기 위해 아직 채 돌도 안 된 제 여동생의 얼굴을 막아 그 아이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남진무사 진규는 제 여동생의 시신을 가져가고 저를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그곳은 저와 같은 고아들을 잡아다가 무공과 살인 기술을 가르치는 훈련소였습니다. 저는 정확히 그곳에서 십 년을 보냈습니다. 힘들고 가학적인 훈련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때 여동생과 함께 제 마음도 죽어버려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십 년의 교육과정이 끝나고 훈련소를 떠나는 날 저는 제 이름을 버리고 무명(無名) 삼십칠호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십 년 동안 아무 감정이 없는 살인 병기의 역할에만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살인은 제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저는 내가 살기 위해 한살배기 동생을 죽인 용서 받을 수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주어지는 모든 임무를 실패 없이 훌륭하게 수행하다 보니 어느새 제일 높은 등급의 요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임무에서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제 모든 것을 바쳐 일했던 조직의 계획에 의해 무림의 공적이 되었고 그 이후는 아시다시피 항산의 이름 없는 절벽에서 추락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천벌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덕분에 대형과 노삼을 만나게 되었으니 모든 것은 전화위복이라고 해야겠군요. 순창표국에 와서야 죽어버렸던 저의 마음이 조금씩 살아났던 것 같습니다. 허나 이 서신을 보고 계신다면 저흰 이미 작별했겠지요. 더 일찍 마음을 정리했어야 하는데 모두의 따스함에 잠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잠시 잊었었나 봅니다.
대형께 이런 이야기를 서신으로 남기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분이기에 이렇게 서신을 남겨봅니다. 제가 없더라도 예전처럼 노삼을 잘 챙겨주시고 항상 무탈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못난 아우 장용 올림』
설초는 장용의 서신을 빠르게 눈으로 훑어 나갔다.
터벅터벅
장용의 숙소 앞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서신을 부랴부랴 다시 집어넣은 설초는 서랍을 닫은 채 시치미를 떼고 앉아 있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장용이 방으로 들어왔다.
“설어르신! 어쩐 일로 제 숙소에 계십니까?”
“자네와 노삼이 하도 늦어서 한 번 와보았네. 노삼은 어디 있는 겐가?”
“하하! 노아우는 지금 측간에서 토하고 있습니다.”
“아이고! 둘이서 도대체 얼마나 마신게야? 내일 표행은 없다지만 조례에 늦으면 총표두가 불호령을 내릴 걸세!”
“아이고!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노아우까지 잘 챙겨서 가겠습니다.”
장용은 취기가 올라오는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설초는 장용에게 물었다.
“무림의 고수들은 내공을 이용해서 술기운도 밖으로 빼내고 하던데 자네는 할 줄 모르는가?”
장용은 설초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럴 거면 돈을 주고 술을 마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구먼! 그럼 혹시 숨겨온 술이라도 있는가?”
장용은 씨익 웃으며 가슴팍에서 조그만 술병을 하나 꺼냈다.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마침 하나 챙겨 온 것이 있습니다.”
설초는 장용이 꺼낸 술병을 열어 향기를 맡았다.
“아니! 이거 소흥주(紹興酒) 아닌가?”
“역시 어르신을 속일 수 없군요. 한잔 하십시오.”
“그러세. 아! 자네에게 부탁이 하나있네!”
장용은 설초에게 받은 술병을 입에 가져가다말고 그를 보았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설초는 괜히 쑥스러워 하며 말했다.
“앞으로 어르신 말고 대형이라 부르면 안되겠나?”
장용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술병의 술을 들이키며 말했다.
“좋습니다. 설대형! 그렇다면 한 모금 더 하시지요.”
“그래! 나도 좋네! 이리 주게!”
장용의 숙소에는 두 사람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선선한 가을을 알리는 풀벌레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렇게 순창표국에서의 또 하루가 저물어 갔다.
재밌게 읽어 주셨다면 추천과 선작 부탁드립니다.^^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