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검푸른 별, 서장(序章)
시리도록 하얀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북악(北岳) 항산의 깎아지른 절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능선을 타고 빠르게 가로질러가는 한 사내만 아니었다면 여전히 순백의 도화지 같은 산이었으리라. 사내가 흘린 피는 마치 새하얀 종이 위에 그려지는 붉은 매화와 같았다.
눈밭을 미끄러지듯 달리는 사내의 모습은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깊게 눌러쓴 죽립은 검기와 도기에 스쳐 군데군데 이빨이 나가 있었고 얼굴의 인피면구도 절반은 뜯겨 나가 있었다. 결국, 절벽 끝에서 멈춰선 사내는 들고 있던 이빨 빠진 장검을 바닥에 꽂았다.
“헉...헉 쿨럭”
잠시 숨을 고르던 사내는 피 한 움큼을 뱉어냈다.
‘내가 무림맹주를 죽였다.’
그는 하늘을 무심히 올려다보더니 중얼거리고는 바닥에서 눈을 한 줌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입에 털어 넣은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끈질기게 사내를 추격하던 무림맹 추격대의 목소리가 아래서부터 들려 왔다.
“마교의 악적을 잡아라!”
“핏자국이 여기 있다!"
“놈이다! 놈이 저기에 있다!”
채 반 각도 되지 않아 소림사와 화산파의 인물들이 그를 포위했다.
“아미타불, 시주 이제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소? 검을 버리고 순순히 포박을 받으면 살계를 펼치지 않고 따로 해명할 기회도 드리겠소! 아미타불”
그러나 노승 옆의 도사 차림의 중년 사내가 말했다.
“혜능선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자는 무림맹주와 오왕야(황제의 다섯 번째 숙부)를 무참히 살해한 마교의 악적 입니다! 뭣들 하느냐?! 매화검수는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죽여라!”
혜능의 말을 끊은 화산파의 중년 사내는 자신의 뒤에 포진하고 있는 검수들에 턱짓했다. 그러자 두 명의 검수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들고 있는 검에 매화문양의 수실이 달린 것으로 보아 화산의 자랑인 삼십육 매화검수의 일원이 분명했다.
일주일 전, 마교의 암습으로 무림맹주가 사망할 때 그를 호위하던 매화검수가 다섯이나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절벽에 서 있는 사내를 본 매화검수의 수장 철매신검(鐵梅神劍) 임천옥의 눈에서는 살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철매신검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 냈는지 뛰쳐나가는 두 매화검수의 검에서 푸른 검광이 일렁였다. 사내는 비릿하게 미소를 짓고는 바닥에 꽂아둔 장검을 뽑아 들었다.
‘좌측 이십사수매화검법 구 초 매화구변(梅花九變), 우측 이십사수매화검법 사초 매개이도(梅開利導)’
사내는 놀랍게도 달려오는 자세와 발검을 보고 무공과 초식까지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검을 들어 우측의 매화검수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매화검수 진서량이 사내를 베기 위해 오른발을 내딛으려 하자 사내의 장검이 진서량의 무릎으로 뻗어 왔다. 화들짝 놀라 뒤로 일보 물러선 진서량은 눈 깜짝할 새 그를 시야에서 놓쳐버리고 말았다. 진서량은 갑자기 등줄기를 파고드는 섬뜩함을 느끼고는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그 사내는 자신이 일보 물러난 자리에 어느새 몸을 숙여 파고들어 와 있었다. 진서량이 대경실색하여 검을 고쳐 잡으려는 순간, 그의 검두(검손잡이 끝부분)가 자신의 어깨를 인정사정없이 내려찍고 있었다.
“으악!”
진서량이 내려앉은 어깨를 잡고 물러서자 그의 사제인 육우현이 매화구변(梅花九變)의 초식을 펼쳐 사내에게 따라붙었다. 검 끝에서 피어난 매화가 채 일곱 번을 변하기도 전에 자신의 머리에서 피 분수를 흩날리며 쓰러지는 사제를 보고 진서량은 큰 충격에 빠졌다.
“어찌.. 이럴 수가? 육사제!”
진서량은 어깨의 고통도 잊고 쓰러진 육우현을 안아들었다. 다행히도 관자놀이를 스친 검기에 충격을 받아 잠시 기절했을 뿐, 사제의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음을 알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매신검 임천옥은 기가 막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 저.. 어떻게..”
혜능선사가 임천옥에게 물었다.
“임대협 무슨 문제가 있소이까?
임천옥은 계속해서 고개를 젓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혜능이 임천옥에게 물었다.
“임대협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철매신검 임천옥이 넋 나간 표정으로 혜능에게 대답했다.
“혜능선사, 저 마교의 악적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의 파훼식을 알고 있었소! 본 파에서도 파훼법을 아는 사람은 장문인과 몇몇 장로들뿐이오!”
혜능은 그 이야기를 듣고 깊게 침음했다. 화산파가 아닌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파훼법이 아니라 그저 적절한 대처와 훌륭한 판단으로 승기를 잡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선재로다 선재야..”
“정현은 앞으로 나오거라.”
그러자 십팔나한을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어 보이는 나한이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나선 정현에게 혜능선사는 은밀하게 전음을 보냈다.
‘정현은 상반팔선곤(上盤八仙棍)을 사용해서 저 시주와 한번 겨루어 보거라!’
상반팔선곤(上盤八仙棍)은 소림 칠십이절예 중 하나로 변화가 무궁무진하지만, 살상력이 높지 않고 변화가 너무 많아 곤법을 체계적으로 수련한 소수만이 익힌 무공이었다. 정현은 굳이 상반팔선곤을 사용해서 마교의 간자와 대결하라는 혜능의 지시에 갸우뚱했으나 일단 곤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아미타불 소림의 정현입니다.”
사내는 말 없이 검을 뽑아 들고 말없이 정현의 앞에 섰다. 정현은 상반팔선곤에서 가장 변화가 많고 복잡한 팔선출세(八仙出世)를 펼쳤다. 정현의 곤이 수십 가지 변화를 일으키며 사내를 압박해갔다,
‘상반팔선곤 이십사초, 팔선출세(八仙出世)다.’
또 한 번 무공과 초식까지 정확히 꿰뚫어 본 사내는 수십 가지의 허 속에서 단 한 번의 실이 중완혈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지금이다!’
머리, 가슴, 팔, 다리를 스쳐 간 눈속임 후에 드디어 섬전 같은 찌르기가 그의 중완혈로 찔러 들어왔다. 사내는 몸을 틀어 곤을 피한 뒤 왼손으로 찔러 들어온 곤을 잡았다. 곤의 회전력에 사내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곤을 겨드랑이에 끼어 꽉 틀어쥐고는 곤을 잡은 정현의 손을 향해 검을 쓸어 내려갔다.
자신의 손을 향해 내려오는 칼날에 결국 정현은 곤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정현이 곤에서 손을 놓는 순간 사내는 번쩍 뛰어올라 정현의 턱을 차올렸다.
퍽
소리와 함께 정현이 몸이 나풀나풀 날아가 처박혔다.
혜능 역시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상반팔선곤이 무림에 나온 것은 벌써 십 년도 더 전의 일이었으며 그것의 파훼식을 마교의 간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정신을 차린 혜능이 소리쳤다.
“십팔나한진을 펼쳐라! 단, 살계는 허락하지 않는다. 마교의 간자를 생포해서 알아내야 할 것이 있다!”
기암절벽을 등지고 서 있는 사내 앞에 태산북두 소림의 십팔나한진이 펼쳐졌다. 사내는 무심하게 절벽 뒤를 돌아보았다. 깎아지른 기암괴석들 사이로 운무가 흘러내렸고 바닥은 보이지도 않았다.
‘여기까진가.’
사내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휘야. 죽지 말고 살아라. 너만은 꼭 살아남아야 한다. 내 아들아.’
사내는 문득 그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갑자기 눈앞에 습기가 부옇게 차올랐다. 그는 다시금 바닥에서 눈을 한 움큼 집어 입안에 털어 넣고는 장검을 다시 곧추세웠다.
십팔나한들은 어느새 사내의 눈앞까지 들이닥쳤다. 십팔나한진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사내의 코에서는 코피가 흘렀다. 흐르는 코피를 무심히 닦아낸 사내는 십팔나한진으로 뛰어들었다,
십팔나한들은 진 안으로 들어온 사내를 둘러싸고 공격을 시작했다. 여섯 명은 공격을, 여섯 명은 방어를, 나머지 여섯 명은 곤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염불을 시작했다. 머리, 무릎, 발목, 손목 쉴 새 없이 곤들이 사내를 노리고 날아들었고 그는 그저 정신없이 피하는 수 밖에 없었다.
어깨를 찔러오는 곤을 피하고 검을 찔러가면 어디선가 세 개의 곤이 날아와 사내의 검을 막고 옥죄었다. 첫눈이 내리는 엄동설한의 항산에서 사내의 등판은 땀으로 젖어가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방법밖에는..’
사내는 무언가 결심한 듯, 몸을 뒤로 날렸다. 그러자 십팔나한들도 사내를 압박하기 위해 따라붙었다. 사내의 몸이 절벽 끝으로 거의 몰렸을 때, 사내의 검에서 강렬한 빛이 폭사 되려 했다.
사내의 검이 강렬한 빛을 내뿜으려 하자, 십팔나한진 뒤에서 염주를 굴리며 지켜보던 혜능은 다급하게 앞으로 뛰쳐나갔다.
‘검강이다!’
혜능이 소리쳤다.
“동귀어진이다! 피해라!”
그 순간, 사내를 멀찍이 둘러싸고 있는 군웅들 무리에서 검 한 자루가 빛살처럼 날아가 사내의 장검과 충돌했다.
쩌엉
사내의 검은 반 토막으로 부서졌고 입에서는 연신 피를 게워냈다. 사내가 비틀거리며 부러진 장검을 고쳐 잡는 사이 구름같이 모여 있던 군웅들의 무리가 갈라지면서 백의를 입은 청년이 앞으로 나왔다. 군웅들은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창천일룡(蒼天一龍)이다!”
“검존(劍尊)의 후계자가 십팔나한을 구했다!”
“강남맹(江南盟)이 무림맹(武林盟)을 도우러 왔다!”
백의를 입은 청년의 이름은 남궁명 이었다. 그는 남궁세가 직계가 아닌 방계 출신이었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검존(劍尊) 남궁진천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일찍부터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고작 약관의 나이에 절강성에서 악명을 떨치던 절강삼악(浙江三惡)을 참살하고 창천일룡 이라는 별호와 함께 강남 제일의 후기지수로 단번에 등극한 남궁명은 심지어 수려한 외모까지 갖추어 강남제일공자라고 불리며 강남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그를 칭송하고 우러러보았다.
그는 뒷짐을 진채로 걸어 나와 오만하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으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해충이나 벌레를 잡을 때 짓는 사람의 표정, 그것은 ‘경멸’ 이었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남궁명에게 달려들었다.
‘날 그런 눈으로 내려다보지 마!’
남궁명은 뒷짐을 지고 있던 오른손을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으로 뻗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검이 그의 손으로 빨려오듯 날아와 잡혔다. 군웅들은 또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격공섭물(隔空攝物)이다!”
“이제 이립(而立-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격공섭물이라니!”
“역시 강남제일기재 답구나!”
반 토막 난 검을 든 사내와 남궁명의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남궁명의 검은 사내가 막을 새도 없이 가슴과 허벅지를 가르고 지나갔다. 상처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내는 죽을힘을 다해 또다시 남궁명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남궁명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하고 사내의 옆구리에서 피 분수가 쏟아졌다.
“끄으으으.”
사내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남궁명은 처음 사내에게 왔을 때의 오만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사내를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끝인가?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무림맹주를 죽였다니, 시시하군.”
사내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자 남궁명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 순간 눈을 번쩍 뜬 사내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아있었는지 절벽을 향해 달려가 몸을 힘껏 던졌다.
사내의 달음박질 소리에 뒤를 돌아본 남궁명은 절벽으로 떨어지는 사내에게 검을 날렸다. 남궁명의 손을 떠난 검은 사내의 다리를 스치고는 그와 함께 천애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군웅들은 절벽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어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창천일룡에게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마교의 악적이 절벽으로 떨어졌다!”
“창천일룡이 마교의 악적을 죽였다!”
“창천일룡 만세! 남궁명 만세!”
남궁명은 뒤돌아서 군웅들에게 연설했다.
“남궁세가의 남모가 여러 군웅께 부탁드립니다. 무림맹주를 암살한 마교도가 방금 절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자의 시신을 찾아오시는 분께는 은자 오천 냥을 남궁세가에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남궁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군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절벽 아래를 수색하기 위해 하산하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혜능이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철매신검 임천옥은 남궁명을 보고 코웃음을 치고는 매화검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매화검수는 들어라! 지금부터 시체 한 조각이라도 찾아야 한다. 무조건 찾아라! 그리고 수급을 베어 무림맹으로 가져갈 것이다..”
철매신검의 명령에 매화검수들은 뿔뿔이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혜능은 불호를 외우다 십팔나한에게 명령했다.
“아미타불, 십팔나한도 마교의 흉수를 수색해라!”
한편 절벽으로 몸을 던진 사내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여기서 죽는다!’
사내는 두 동강이 난 장검을 오른손으로 힘껏 절벽에 박아 넣었다.
콰가가가가가각 뿌득!
오른쪽 어깨가 빠지는 소리가 사내의 귓가에 들렸다.
“크아아아악!”
사내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도 그는 마지막까지 검을 놓을 수가 없었다,
쨍강!
어깨의 고통을 참아가며 박아 넣은 칼날에 추락하는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 싶었으나 결국 남아있던 반 토막의 장검도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사내는 다시 중심을 잃고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쿵!
튀어나온 암석에 머리를 부딪친 사내는 의식을 잃었고 그대로 뿌연 운무 속으로 파묻히고 말았다.
“까악 까악 까악”
사내를 집어삼킨 운무 위로 검은 까마귀 한 마리만이 빙빙 돌다 날아갔다.
그것이 금의위 최정예 특수요원 무명(無名) 삼십칠(三十七)호 남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재밌게 읽어 주셨다면 추천과 선작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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