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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님의 서재입니다.

선인과 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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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뿔
작품등록일 :
2022.05.12 17:08
최근연재일 :
2022.06.02 20:20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457
추천수 :
4
글자수 :
81,001

작성
22.06.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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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3.

DUMMY

“아빠! 아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 아빠가 들었을 마지막 나의 목소리.

동네 사람들이 가게 안으로 몰려들었다.

곽마담도, 미용실 원장도, 부동산 사장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난도질당한 아빠를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용실 원장은 비위가 약한지 오바이트를 했다.

유나는 아빠를 보고 뒤로 물러났다. 두 손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호영이도 가게 안을 보고는 뒤로 물러났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날 동정했다.

우매한 대중들도 인정머리라는 건 있는 법이다.

인두겁을 쓴 괴물의 아들이라도, 아버지가 능지처참을 당한 상황에서 날 비난하는 건 매우 인간적이지 못한 행동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살인자는 범행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더니, 호영이가 그랬다.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검시관들이 아빠의 시신을 거둬갈 때까지 가게를 떠나지 않았다. 호영이는 계속해서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휴대폰을 찾고 있을 것이다.


경찰들은 내게 어젯밤의 알리바이를 물었다.

밤10시쯤에 집에 왔고, 문이 잠겨 있어서 유리문을 깨고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경찰들은 지영이 죽었을 때처럼 가게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밤 10시 전에는 뭘 했지?”

나이든 형사가 또 다른 알리바이를 추궁했다.

형사는 나를 용의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 나를 범죄자로 몰려고 했지만 나 역시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다. 내 주머니에는 호영의 휴대폰이 들려있다.

“호영이 엄마, 병문안 갔어요.”

“...?”

“호영이가 먼저 사과했어요. 아빠를 범인으로 오해해서 미안하다고요.”

“그래?”

경찰들이 의아해했다.

호영이가 나를 받아줬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나 역시 호영이 엄마 일이 걱정돼서 병문안 갔어요. 병원에서 밤 10시 조금 못돼서 나왔어요.”

“정말이야”

“그럼요. 호영이한테 직접 확인해보세요.”

경찰들은 날 돌려보냈다. 갈 곳이 없었다. 집에는 바리게이트가 쳐있다. 경찰들이 여관에 임시 숙소를 마련해줬지만 언제까지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경찰들이 차를 몰고 어디론가 향했다. 분명 나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러 병원에 가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를 택시를 세워 병원으로 향했다.


경찰들이 병원복도에 서 있었다.

나이든 경찰이 담배를 피려다 금연인걸 알고는 담뱃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호영이 죽어가는 얼굴로 나왔다. 경찰들이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새가슴으로 살인까지 하다니. 호영이 팔자도 참 기구하다고 생각했다.

경찰들이 호영에게 질문을 했다.

호영은 경찰들의 눈을 피하며 질문에 대답했다.

“대웅이가 여기서 몇 시쯤 나갔지?”

경찰 하나가 나의 알리바이를 물어봤다.

호영이는 난처한 지 고개를 갸웃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 호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녀석의 휴대폰을 갖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만 했다. 호영이는 내 손에 있는 자기 휴대폰을 보고는 안도하더니 이내 날 경계했다. 호영의 살인을 목격한 사람, 그리고 그걸 방관한 사람이 바로 나란 걸 아는 모양이다. 호영은 경찰들의 질문에 내가 병문안 왔다는 알리바이를 확인시켜줬다. 곽마담도, 미용실 원장도, 유나도 밤 10시 넘어 내가 문 두드리는 걸 봤다고 이미 증언했었다. 이것으로 더 이상 경찰들은 내게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경찰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멍하니 서 있는 호영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줬다. 호영의 눈은 살인현장을 목격했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아무말 없이 병원을 나섰다.

이 녀석은 이미 많은 고통을 겪었다. 아빠가 죽고, 엄마는 자살을 시도하고, 동생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엄마가 살아서 다행이지만, 앞으로 이 녀석이 감내해야 할 고통은 이제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런 녀석에게 살인자라는 낙인까지 안겨 줄 수는 없었다. 호영이가 감옥에 간다 해도, 살인자의 아들을 둔 약국여자는 모든 죗값을 치르겠다며 또다시 자살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호영이 비록 아빠를 죽인 살인자지만, 호영은 내게 그 누구도 주지 않은 자유를 줬다. 허전함이 밀려왔다. 아빠의 부재가 현실로 다가왔다. 사고는 이미 일어났고, 용기를 내서 헤쳐 나갈 일만 남았다.


아빠의 죽음으로 유나와 호영이 방황했다.

호영이는 늘 경찰서를 맴돌았고, 유나도 내 눈치를 보며 결국엔 자수를 택했는지 경찰서에 달려왔다. 난 들어가려는 유나를 붙잡고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내일 동네를 떠날 거야.”

유나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

안양에 있는 작은 아버지가 나를 거두기로 했다.

어디로 가냐고 묻는 유나에게 목적지를 밝힐 수 없었다.

“지영이 내가 죽였어.”

유나가 말했다.

가슴에 묵혀뒀던 비밀을 말하자마자 속 시원하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유나는 잘못 들었다는 듯 손으로 귀를 후볐다.

“지영이 죽던 날. 나, 여기 있었어.”

유나는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정글짐이 보이는 놀이터 한 가운데 서 있다.

도둑고양이가 울던 바로 그곳이었다.

죽은 지영이가 응시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유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봤어? 전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자수할 거야.”

“....”

“경찰에 자수해서 모든 일을 바로 잡을게. 너희 아빠가 지영이 죽인 거 아니라고 해명해줄게.”

“그래서?”

“어?”

“그래서 달라지는 게 뭔데? 아빠 누명 벗겨주고, 성범죄자 낙인도 없어지게 해줄 수 있어?”

“그건....”

유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살인누명에서 벗어났다 해도 아빠는 여전히 전자발찌를 찬 공공의 적일 뿐이다.

“넌 내가 무섭지 않아?”

“왜? 너희 아빠가 성범죄자라서?”

“....”

“그럼 난? 넌 내가 불결한 아이라고 생각해?”

“...?”

“우리 엄마는 동네 창녀잖아.”

유나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웃을 줄도 아네? 언제나 화난 얼굴이잖아.”

웃음.

유나 말대로 언제 웃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이 모여서 웃고 떠들던 때가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보기 좋다. 아빠는 아빠고 넌 너잖아. 엄마가 그랬어.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영역구분하면서 살라고. 동네 창녀 엄마도 가끔은 필요한 말을 할 줄 알거든.”

“자수 하지 마.”

유나가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건 정당방위였어. 여왕벌, 아니 지영이가 네 머리채를 잡았고 넌 밀었을 뿐이잖아.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마.”

“그건 경찰이 정할 일이야.”

“아니. 설령 네가 정당방위로 풀려났다 치자. 동네 사람들이 널 예전의 너로 받아 줄 거 같아? 천만에. 실수로 죽였든 고의로 죽였든 넌 사람을 죽였어. 사람들 눈에 넌 살인자일 뿐이라고.”

유나의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 살인자라는 말에 당혹했다.

“사람들이 그렇다는 거야. 애들이 나한테 하는 짓 봤지? 죄 없는 나를 범인으로 만들었어. 변기통에 머리를 쑤셔 박고, 바지를 벗기고 성추행까지 일삼는 녀석들이야. 살인자라는 오명에 그런 대접 받고 살고 싶어?”

유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아. 죽을 힘 다해서 살아. 기회가 오면 잡으랬어. 넌 엄마 죽고, 난 아빠 죽고.... 어쩌면 우리한테 찾아온 마지막 기회야.”

모르겠다.

유나의 자수를 막는 일이 최선의 선택인지.

유나가 지영의 살인자로 밝혀지고, 호영이 성추행 범을 죽인 살인자로 밝혀지고 그리고 난 자유가 그리워 아빠의 죽음을 방관한 패륜아로 낙인찍히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신은 죽었다.

신이 죽었다면 누군가 신의 역할을 대신해야만 했다. 무지한 개떼들에게 우리의 죄를 심판해달라고는 할 수 없다. 신이 없다면, 법이 없다면, 개인의 죄를 심판하는 건 개인의 몫이 아닐까. 유나가 자수를 한다고 해도 더 이상 말리지 않을 것이다. 그건 유나 자신을 심판한 결과일 테니까.


가게 안의 폴리스 라인은 경찰들이 떼어갔다.

아빠가 쏟아낸 피를 누군가에 걸레질에 사라졌지만 바닥에 말라붙은 검붉은 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가게에 홀로 앉은 나는 칼을 가져와 바닥에 붙은 피딱지를 떼어냈다.

미안했다.

여왕벌을 죽인 살인자로 몰아서.

또 미안했다.

아빠의 살인을 막지 못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피딱지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핏덩어리는 내 눈물에 녹아 붉은 선혈이 되었다.

들개들은 아무 일 없는 다방에서, 미장원에서, 부동산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먹잇감을 놓쳐 재미없다는 듯 하품도 늘어지게 했다.

희망약국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약국여자는 지금도 병원에 누워 있다.

누군가 오랫동안 닫힌 약국에 홀로 앉아 있었다.


약국에는 호영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호영이는 약병에 든 알약을 꺼내서는 먹을까 말까 망설였다.

“설마 죽을 생각 하는 건 아니지?”

진심으로 호영이가 걱정됐다.

“꺼져!”

호영이는 약병을 감췄다.

“걱정하지 마. 내일이면 영원히 꺼져 줄 테니까.”

호영이가 그제야 날 바라봤다.

“내일 떠나. 이 동네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다.”

“떠나든 말든 관심 없어.”

호영이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빠 죽인 사람... 난 그 사람의 처벌 따위 관심없다.”

호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서 휴대폰을 돌려줄 때보다 많이 야위어 있었다. 살인. 그건 성인이 못된 아이가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신고, 왜 안 했니?”

“신고해서 좋을 게 뭐 있어. 아빠를 죽인 사람은 내게 자유를 줬어.”

호영이는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질까 천장을 올려다봤다.

계산대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책이 놓여 있었다. 읽다 말았는지 끝부분이 접혀 있었다.

“신은 죽었다.”

내 말에 호영이의 시선이 니체의 철학서로 향했다.

“난 널 용서할 자격도, 용서해야 될 의무도 없어. 평생 살인자란 낙인을 안고 살 건지, 엄마한테 평생 살인자를 낳은 어미라는 손가락질 받게 하던지. 신은 바로 여기에 있어.”

난 호영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쿵쿵.

호영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내 손에 전달됐다.

“내 본명은 오석민이야.”

난 내 이름을 말하고 약국을 나와 버렸다.

개명한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나의 본명을 말해 버렸다.

이름을 밝힌다는 게 이렇게 벅찰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공중에 떠버린 이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이름.

오석민.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불러봤다.

오늘 밤 난 새로운 이름을 생각하면서 오석민이란 이름을 가슴에서 영원이 묻어버릴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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