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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님의 서재입니다.

선인과 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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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뿔
작품등록일 :
2022.05.12 17:08
최근연재일 :
2022.06.02 20:20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462
추천수 :
4
글자수 :
81,001

작성
22.05.2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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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14.

DUMMY

엄마와 지영의 아버지는 연인 사이였다.

동네 사람들은 엄마가 지영 아버지의 일회용 섹스파트너라고 했지만, 그들의 데이트를 목격한 나로서는 그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와 아저씨는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라고 외칠 수도 없었다. 유부남과 동네 창녀의 사랑. 지나가는 개도 웃다가 사래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지영 아버지는 다 쓰러져가는 우리 집에서 자주 만났다. 아저씨와 연애하던 엄마는 다방 일을 접었고, 밤 마실도 다니지 않았다. 철딱서니 없던 엄마가 눈물을 적시며 가슴앓이 하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엄마는 무엇을 후회하는 걸까. 동네 창녀로 군림한 화려한 과거를 청산하고 싶었던 걸까. 뒤늦게 만난 진실한 사랑에 애가 타는 것일까. 어쨌든 엄마는 아저씨를 만나면서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나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옷을 사주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해줬다. 엄마가 변했다. 사랑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더니, 엄마의 사랑은 진심이었다. 지영 아버지는 가끔 내 손에 용돈을 쥐어줬다. 미장원에 머리를 자르러 올 때도 늘 내게 부탁했고, 수고했다며 원장 몰래 팁도 쥐어주곤 했었다.

아버지.

처음으로 내게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라고 부르는 느낌은 어떤 걸까.

아버지라고 부르는 느낌은 또 어떤 걸까.

내 주제에 배부른 소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생긴다면 지영 아버지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상하고, 따뜻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런 아버지만 있다면 그 누구도 날 막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와 지영 아버지가 모텔에서 비명횡사하던 날. 비난의 화살은 내게 쏟아졌다. 사람들은 나를 향해 욕했고, 엄마의 영정 사진에 침을 뱉으며 지영이를 위로했다. 약국 여자는 미용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지영이는 정신적 물질적 지주인 아빠가 엄마 때문에 죽었다며 죽을 그날까지 돈을 바치라고 했다. 한 술 더 떠,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호영이는 날 투명인간 취급했다. 지영이가 준 돈으로 책까지 사서 봤다. 호영이는 알고 있을까. 지영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 내 피와 땀이 찐하게 밴 돈이라는 걸. 아마 모를 것이다. 모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자상한 아버지를 닮은 호영이 동생의 만행을 알고도 날 투명인간 취급할거라고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


신사동 닭 강정.

동네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다.

아버지와 아들. 이사 온 사람은 달랑 두 명이었다. ‘신사동’이 유난히 크게 강조된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일까. 곽마담은 일찌감치 이삿짐을 날라주며 신사동 아저씨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다. 파리채로 파리를 잡던 원장이 곽마담을 보며 눈을 흘겼다. 여자 망신은 곽마담이 죄다 한다며 구시렁거렸다.

신사동 아저씨와 이사 떡을 돌리던 곽마담이 들어왔다. 곽마담은 신사동 아저씨를 먼저 찜했다는 듯 친분을 과시했다. 신사동 아저씨는 예상대로 한때 신사동에서 살았다고 했다.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했고,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시골로 내려왔다고 했다. 신사동 아저씨의 얼굴에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꿈의 도시 서울. 서울에서도 말로만 듣던 신사동에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저씨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신사동은 어떤 동네일까. 연예인들마다 신사동에서 머리를 하고, 신사동에서 성형수술을 하고, 신사동에서 마사지를 받는다는 잡지 기사를 자주 접했다. 언감생심 넘볼 수 없는 동네를 아저씨의 입을 통해 그 생생한 현장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곽마담의 욕심 때문에 아저씨는 오래 앉아 있지 못했다. 또 다른 집에 인사를 가야된다며 곽마담이 끌고 나갔다.


“파스 하나 주세요.”

간밤에 지영의 패거리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바람에 온몸이 욱신거렸다. 미용실에서 가까운 희망약국에서 살 수도 있지만 일부러 멀리 떨어진 청산약국으로 달려왔다. 약국 여자에게 당신 딸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고자질 할 수도 있었지만, 약국여자가 나를 보는 순간 남편의 배신감에 치를 떨까봐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다.

파스를 붙이자마자 미용실을 향해 뛰어갔다. 원장이 미용사 모임으로 시내에 나갔고, 나 또한 자리를 비웠기에 미용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뿔싸.

미용실 유리문 너머로 손님이 보였다. 재수 없는 년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평일 대낮에 그렇게 손님이 없더니 오늘따라 손님 하나가 미용실 안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신경질적인 손님이 아니길 바라며 문을 열었다.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이 원장 귀에 들어가면 그 동안 쌓은 신뢰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다행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 손님은 내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머리 자를 거지?”

남자 아이는 신사동 아저씨의 아들이었다.

“많이 기다렸니?”

신사동에서 살았다는 아이는 쑥스러운 듯 나의 눈을 피했다.

“난 유나라고 해. 청산고 3학년. 넌 몇 학년이야?”

남자 아이는 미용실을 나갈 듯 말 듯 뻘쭘하게 서 있었다.

난 거울 앞의 커트 의자로 안내했다.

“긴장할거 없어. 이 동네 남학생 머리, 웬만하면 내가 다 자르거든. 못 보던 얼굴인데.... 시내에서 일부러 오지는 않았을 테고. 이사 왔니?”

난 이사 온 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침묵했다. 원하는 스타일이 있냐고 물어도 침묵했고, 이름이 뭐냐고 물어도 침묵했다. 신사동 아저씨와는 반대로 과묵한 아이였다. 남자아이는 머리가 다 잘려나갈 때까지 침묵했다. 나의 가위질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머리를 감겨주자 남자아이가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 거칠게 만져 머리가 아팠나. 일부러 두피 마사지를 부드럽게 해주자 남자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미용실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머리에 아직 샴푸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하지만 그 아이는 소매로 머리를 훔치고는 신사동 치킨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자 아이는 다음날 교실에서 재회했다.

오대웅.

수원에서 온 전학생.

대웅이는 학교에서도 말이 없었다. 도시에서 왔다고 촌놈들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는 아이. 그런 면에서는 나와 비슷했다. 이 아이도 나처럼 사랑에 굶주린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대웅이의 얼굴에 그늘이 보였다. 나 역시 그늘이 있기에 외로운 사람을 보면 자석처럼 한 번 더 돌아보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이 녀석의 외로움을 함께 나눌 용기는 없다. 나도 이 녀석 만큼이나 동네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은 부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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