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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님의 서재입니다.

선인과 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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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뿔
작품등록일 :
2022.05.12 17:08
최근연재일 :
2022.06.02 20:20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461
추천수 :
4
글자수 :
81,001

작성
22.05.1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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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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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6쪽

01.

DUMMY

대웅 이야기.


덜컹덜컹.

한숨만 나왔다.

포장인지 비포장인지 모를 국도를, 트럭을 타고 달린지 벌써 1시간이나 지났다.

이렇게까지 후미진 동네로 이사 갈 줄은 몰랐다. 서울에서, 수원에서 그리고 지금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촌구석으로 와버렸다. 갓길에 심어놓은 은행나무 외에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가 전부였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더니 그건 세상 물정 좀 겪은 벼들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들녘의 푸른 벼들은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 지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노기충천했다.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노부(老夫) 하나만이 삽을 들고 나타나 혈기왕성한 벼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트럭을 운전하는 아빠의 얼굴은 금의환향 그 자체였다. 낯짝이 두꺼워도 여간 두꺼운 게 아니다. 아니면 하드용량이 아주 많이 딸리던가. 하긴 생각하는 머리를 갖고 있다면 그딴 짓은 저지르지 않았겠지. 하드용량이 딸린 게 아니라 어쩌면 부속품 자체가 엉망인 불량품일 것이다.


덜컹덜컹.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더니 이놈의 국도는 십리는커녕 조금만 가도 덜컹거렸다. 농부들이 국도에 삽질을 한 것도 아니고 아낙들이 호미질을 한 것도 아닐 텐데 국도는 여기저기 흠집투성이였다. 트럭이 덜커덩 거릴 때마다 아빠는 이삿짐들이 튕겨 나가지 않을까 흘끔흘끔 백미러를 올려다봤다.


“보기엔 시골이어도, 우리가 살 곳은 나름 읍내란다.”

아빠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내 눈치가 보였는지 애써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수원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있을 거 다 있는 전원도시라고 했다. 충청남도, 태안시, 청산읍. 아빠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또박또박 알려준 시골 주소. 아빠 말보다 정부의 구역 편 가르기를 믿었다. 인구 5만 이상인 시(市) 보다 한 단계 아래인 읍(邑)이기에 그런대로 구색 갖춘 도시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 말대로 2시간이면 도착한다는 동네. 그 동네까지 이제 10분 남았다.


‘청산마을 방문을 환영합니다.’

감정 없는 현수막 하나가 청산읍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극장도 없고, 대형마트도 없고, 고층 아파트도 없는 무니만 읍(邑)인 작은 촌 동네였다. 우리 부자는 동네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 또한 아빠가 어떤 작자인지 아무도 모른다.


“다 왔다.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야.”


아빠는 콧노래를 불렀다. 생면부지의 동네에 정착하는 불안함이나 부담감 따윈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고향에 온 아들마냥 하품만 늘어지게 내뱉었다. 차 안 가득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간밤에 퍼마신 술들이 역류하여 혀 안에 달싹 들러붙은 모양이다.


“술도 끊고, 손찌검도 끊고, 그 짓도 끊는다.”


난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아빠란 작자는 물보다 술을 더 마셨고, 시도 때도 없이 엄마와 나를 구타했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 해부터 그 짓을 해왔다. 전직 야구선수인 아빠는 술독에 빠졌다하면 야구방망이로 엄마와 나를 타작했다. 한때 위용을 과시하며 집안에 전시됐던 야구배트는 피를 부르는 무기로 변신했다. 아빠는 정신만 돌아오면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 술김에 어쩔 수 없었다며 가당치 않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개 버릇 남 못준다고,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난 아빠란 작자를 믿지 않는다. 그가 설령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해도 절대로 믿지 않는다.


엄마는 아빠의 전용 샌드백 자리를 나에게 물려주고는 야반도주했다. 아빠 말에 의하면 술집 기둥서방이랑 눈 맞아서 도망쳤다는데, 난 그 말도 믿지 않는다. 설령 엄마의 외도가 사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난 나를 버리고 도망친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더럽고 끔찍한 아빠에게 기생하며 연명하는 내 주제에 누구를 탓하겠는가. 오히려 엄마의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한 때, 내 안의 피를 갈아엎고 싶은 마음에 교통사고를 내려고도 했었다. 수혈이 필요한 강력한 교통사고. 내 안에 숨어 있는 아빠의 유전자만 쏙쏙 뽑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었다. 그 유전자가 전국 1% 안에 드는 좋은 머리라고 해도, 판검사쯤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해도, 아빠를 닮았다 이유 하나만으로 가차 없이 갈아엎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 용기란 놈은 없었다. 아빠에게 대항할 용기도, 아빠에게서 도망칠 용기도, 아빠를 없애버릴 용기. 난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기생충이고 밥벌레였다.


코끼리가 그랬다. 거구의 코끼리는 작은 말뚝에 묶여 있으면서도 도망칠 줄을 몰랐다. 병신 쪼다 새끼라고 해도 코끼리는 말뚝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코끼리를 길들이는데 많은 노동을 들이지 않는다. 말뚝 하나면 됐다. 어린 코끼리를 말뚝에 묶어두면 그 코끼리는 도망가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는 포기한다. 천하장사의 힘을 가져도 도망칠 방법을 몰랐다.

말뚝에 묶여 있는 코끼리. 코끼리가 바로 나였다. 말뚝을 뽑아낼 수 있어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빠는 내게 용돈을 주는 물주였고,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주는 가장이었고,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줄 자본가였다. 길들여진다는 건, 참 무서운 것이다.


아빠와 난 트럭을 몰고 마지막 종착지가 될 청산에 들어섰다.

그 흔한 카페도 없고, 극장도 없고, 대형마트도 없고, 고층 아파트도 없는 무니만 읍(邑)인 작은 촌 동네였다. 우리 부자는 동네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 또한 아빠가 어떤 작자인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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