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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님의 서재입니다.

선인과 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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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뿔
작품등록일 :
2022.05.12 17:08
최근연재일 :
2022.06.02 20:20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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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1,001

작성
22.05.1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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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05.

DUMMY

댕기미용실.

청산에 있는 유일한 미장원. 곽마담의 조언에 머리를 자르는 형국이 돼버렸지만, 전학을 앞둔 상태라 울며 겨자 먹기로 미장원 문을 두드렸다. 전학생이란 딱지도 거슬리는데 제멋대로 기른 머리칼로 또래들의 시샘을 받고 싶지 않았다. 있어도 없는 척, 알아도 모른 척, 자신 있어도 자신 없는 척. 긁어 부스럼 만들 일은 애초에 차단하는 것이 내가 사는 방법이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미장원은 한산했다. 반면 길 건너에 있는 이발소는 면도를 하는 아저씨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미장원 문을 닫았다 해도 이발소는 가기 싫었다. 라면머리 제조사인 동네 미장원도 싫지만 그렇다고 바리캉으로 군인 머리를 제조하는 이발소는 더더욱 싫다.


미장원에는 손님도 주인도 없었다.

아무리 장사가 안 된다고, 주인까지 자리를 비우다니. 이래갖고 먹고 살기는 하는 걸까. 꼴에 남 걱정하는 주책을 떨어버렸다. 할 수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이발소를 향하려던 순간,

“머리 자를 거지?”

어디선가 들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또래의 여자아이. 여왕벌에게 돈을 뺏긴 순한 양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지만, 이 동네는 코딱지보다도 더 작은 동네였다. 오전에는 가식 덩어리 여왕벌을 만나더니 지금은 산업 전선에 뛰어든 어린 양을 만났다. 그네에 앉아있어 잘 몰랐지만, 순한 양의 키는 나와 비슷했다. 평균치로 자라고 있는 내 키라면 분명 여자 동급생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할 것이다. 덩치 큰 아이가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사는 걸까. 물론 패거리들이라 어쩔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솔직히 여왕벌 따윈 맘만 먹어도 한방에 쓰러뜨릴 작은 체구였다.

“많이 기다렸니?”

순한 양은 손님한테 발말 찍찍 날렸다.

“난 유나라고 해. 청산고 3학년. 넌 몇 학년이야?”

유나라는 애는 원사이드 통성명을 하고는 이발준비를 했다.

“긴장할거 없어. 이 동네 남학생 머리, 웬만하면 내가 다 자르거든. 못 보던 얼굴인데.... 시내에서 일부러 오지는 않았을 테고. 이사 왔어?”

유나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리에 앉았다. 내 발로 가게 문을 박차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이런 애송이한테 내 머리를 맡길 순 없다고, 이성으로는 싫다고 거부했지만 내 육체는 사육된 코끼리마냥 순하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유나는 내 어깨에 보자를 두르고는 커트를 시작했다.

“많이 잘라야겠다. 여기 학교는 머리칼이 귀 위로 올라와야 돼. 학주한테 잘못 걸리면 머리 한가운데 고속도로 생기거든.”

두근두근.

내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유나는 내 심장이 뛰는 걸 간파라도 한 걸까. 거울 속의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유나는 미장원 보조라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미용 보조를 시작해서, 지금은 커트 자격증도 있다고 했다. 산업전선에서는 여왕벌에게 구타당하는 순한 양이 아니었다. 자기 일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가위질이 능수능란한 프로페셔널 여고생이었다. 유나는 일방적으로 자기 얘기만 늘어놓으면서 내 머리를 가차 없이 가위질 했고, 이발소 못지않은 군인 머리로 만들어놓았다. 군인머리. 그토록 싫어했던 군인머리를 유나라는 아이가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난 불평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유나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나가 내 이상형도 아닌데 내 입은 병신 새끼 마냥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유나는 자신의 작품에 감격했고, 서비스랍시고 내 머리를 감겨줬다. 샴푸 질을 할 때마다 그녀의 풍성한 가슴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가슴골은 보일 듯 말 듯 시소를 탔고, 그때마다 내 중심부는 발정난 개 마냥 꿈틀꿈틀 일어서려고 했다. 난 순한 양에게 음란한 마음을 들킬 수 없어 미용실을 박차고 나왔다. 거품 숭숭한 내 머리는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


청산고교.

새 교복을 입고, 새로 만든 명찰을 차고 담임의 뒤를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오대웅.

그래, 오대웅으로 새 출발 하는 거야.

가슴에 달린 명찰이 긴장한 나를 올려다보며 응원했다.

드르륵.

교실 문을 여는 소리가 내 가슴을 서늘케 했다. 내 인생의 2번째 전학인데도 교실 문을 여는 소리는 늘 간담을 조여 왔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담임의 등장에 제각각 뛰놀던 아이들이 자리에 착석했다. 똘망똘망하고 게슴츠레한 눈들이 나를 포박했다. 어디선가 향긋한 화장품냄새도 풍겨왔다. 남녀합반. 4분단으로 되어 있는 교실은 남학생분단과 여학생 분단으로 나눠져 있었다.

“여러분들과 공부하게 될 오대웅이다. 도시에서 왔다고 텃세부리지 말고, 친하게 지내도록. 알겠나?”

학생들은 “네!” 라고 기계적으로 답했다. 난 비어 있는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남학생들은 신고식이라도 할 듯 지나가는 내게 발을 걸었다. 난 알고도 모른 척 속아줬다.

키득키득.

우월한 종자임을 확인한 그치들이 유치하게 웃어댔다. 난 말없이 내 자리에 앉았고, 담임은 그치들의 허세를 본체만체 눈감아주며 자습 지령을 내린 후 나가버렸다. 담임이 나가자마자 누군가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각생이다. 일어나자마자 뛰어온 듯 머리는 헝클어져있고, 교복도 엉성하게 걸쳐 있었다. 지각생은 나의 옆 분단에 앉았다. 그 아이였다.


어린 양. 미용사 유나.

유나는 나를 보자 눈을 찡긋거렸다. 당황한 난 얼른 책을 꺼내며 그녀의 눈길을 무시했다. 유나는 미용사답게 가방에서 꺼내는 물건들도 남달랐다. 남들은 교과서를 꺼냈겠지만 유나는 패션잡지와 헤어디자인 스크랩북을 꺼냈다. 오로지 프로페셔널 한 미용사가 되겠다던 일념으로 책이 아닌 패션잡지를 숙독했다. 반 아이들은 관심 없는 척 하면서 나에게 더 집착했다. 도시에서 온 전학생. 촌놈 무시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잘 났나 지켜보겠어. 다들 입으로는 잘 지내자며 미소 짓고 있었지만 뒤에서는 나에게 뭐 뜯어먹을 게 없나 지켜보는 들개마냥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난 그들과 섞이고 싶지 않았기에 모든 정신을 책에 집중했다.

“너, 머리 좋은가보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내가 보는 책에 딴지를 걸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 말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태규는 싹퉁 머리 없는 걸 보여주려는 듯 내 책을 가져가 뒤적거렸다.

“그냥 폼이야. 이런 책 보면 있어 보이잖아.”

난 맘에도 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럼 그렇지. 이런 책은 호영이나 보는 책인데.”

호영? 호영이가 이 교실의 브레인인가 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보통의 머리로 읽기에는 부담되는 철학 산문시다.

“맨 앞에 궁디 땀띠 나게 공부하는 애 있지? 걔가 호영이거든. 전교1등. 쟤 여동생은 전교2등. 둘이 쌍둥이거든. 신은 죽었다니까. 모든 재능을 두 사람한테만 몰아주고.”

신은 죽었다. 태규는 차라투스트라가 뭐라 말했는지도 모르면서 신은 죽었다는 그럴듯한 농담을 날렸다. 호영이는 반 아이들이 떠들든 말든 EBS 수능교재를 풀고 있었다.

“양반되긴 글렀네. 쟤가 호영이 쌍둥이 동생이야.”

태규는 뒷문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여왕벌, 약국여자의 딸 지영이었다.


누군가 호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영의 등장을 알렸다. 전교 1등이라는 호영. 호영이 지영에게 다가가자, 지영은 바쁜 사람마냥 만 원짜리 몇 장을 호영의 주머니에 찔러주고는 가버렸다. 그 돈은... 분명 놀이터에서 뺏은 유나의 돈 일 것이다. 유나는 지영을 보고도 모른 척 했다. 피해자인척 티도 안냈고, 자기 돈이 호영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걸 보고도 뺐지 않았다. 호영은 알고 있을까. 조신하고 착하다는 자신의 반쪽이 두 얼굴을 가진 마녀라는 걸. 아마 모를 것이다. 알았다면 유나의 돈으로 서점에서 사고 싶은 책을 맘껏 구입하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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