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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님의 서재입니다.

선인과 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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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뿔
작품등록일 :
2022.05.12 17:08
최근연재일 :
2022.06.02 20:20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467
추천수 :
4
글자수 :
81,001

작성
22.05.1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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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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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8쪽

03.

DUMMY

난 그 흔한 친구가 없다.

유일한 친구는 책밖에 없다. 책 속에 친구가 있고, 책 속에 멘토가 있고, 책 속에 내 인생의 해법이 있었다. 일평생 친구 셋을 만들면 성공한 삶이라고 했지만, 난 성공한 인생 따위는 관심없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내 뒤통수에 칼을 꽂은 자들은 모두 내 인생의 베스트 프렌드였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것도 친구를 통해서 배웠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맬 때 책은 내게 벗이 돼주었고, 삶과 죽음의 귀로에서 망설일 때 책은 내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맥 배스는 내게 ‘어쩔 수 없는 일은 잊을 수밖에 없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라고 했고, 플루타르코스는 ‘자살은 명예를 빛내기 위한 일이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치스러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충고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귀뚤귀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공원의 무성한 잡초는 내게 침대가 돼주었고, 석양이 내려앉은 하늘은 이불이 돼주었다. 청산공원은 적막에 잠겼다.


끼익, 끼익.

고막을 긁는 기분 나쁜 쇳소리가 들려왔다.

쇳소리는 계속해서 공원의 침묵을 깨뜨렸다.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제멋대로 뻗은 잡초들이 나의 상반신을 가려줬다.

침묵을 깬 건 내 또래의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은 그네에 기대 앉아 있었다. 몸뚱이를 그네에 의지하다보니 움직일 때마다 쇳소리가 들려왔다. 여학생은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 든 돈뭉치를 꺼내서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둘, 셋.... 만 원짜리 지폐를 세는 그녀의 손이 즐거운 리듬을 타며 지폐를 넘겼다. 돈을 다 센 여학생의 얼굴에 아쉬움과 만족함이 교차했다. 여학생은 돈을 봉투에 넣은 다음 주위를 살폈다. 난 얼른 몸을 숨겼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여학생은 만 원짜리 2장만 지갑에 넣었고, 나머지는 다시 흰 봉투에 넣었다.

어디선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학생은 그네에서 벌떡 일어났다. 돈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얼른 운동화 밑창에 구겨 넣었다. 묵직한 돈 때문에 발꿈치가 신발 밖으로 삐져나왔다. 여학생은 손에 든 지갑을 얼른 감추려고 했지만, 지갑은 이미 패거리의 대장이 가로채갔다. 여왕벌은 지갑을 열어 돈을 확인했다.

“뭐야, 고작 2만원?”

여왕벌은 순한 양을 노려봤다.

“아줌마가 이번 달 월급 늦게 준댔어. 알잖아. 요즘 경기 어려운 거.”

젠장. 이사 온 첫날부터 동네 여왕벌이 순한 양의 지갑을 터는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동네 여왕벌은 못 믿겠다는 듯 순한 양의 가방을 뒤졌다. 여왕벌은 이렇다 할 별 소득을 얻지 못하자 가방을 놀이터에 집어던졌다.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여왕벌은 순진한 양의 털을 밀어버리기라도 할 듯 으르렁거렸다.

“걱정 마. 받자마자 줄 거니까.”

순한 양은 돈을 지키기 위해 양치기 소년의 길을 택했다. 여왕벌과 패거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돌아섰다. 순한 양은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여왕벌의 시선이 반쯤 벗겨진 순한 양의 운동화에 꽂혔다. 순한 양은 운동화를 신는 척 했지만 여왕벌의 레이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여왕벌은 순한 양의 운동화를 벗겼다. 운동화에 숨어있던 돈 봉투가 떨어졌다. 여왕벌은 봉투 안의 돈을 확인하고는 순한 양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날 속여?”

순한 양은 얼른 무릎을 꿇었다.

“내 돈이야. 언제까지 미장원에 얹혀 살 순 없잖아.”

순한 양의 변명이 점점 궁색해져갔다. 여왕벌은 순한 양의 사정을 이해한다며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이내 손을 들어 따귀를 때렸다.

“그건 네 사정이고.”

여왕벌이 패거리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패거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순한 양을 덮쳤다. 머리채를 휘어잡고, 발길질을 하고, 놀이터에 굴러다니는 나무 막대를 주워 개패 듯 팼다. 순한 양은 찍소리도 못하고 거짓말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며 그 모든 폭력의 고통을 참아냈다. 순한 양에게 흑기사가 필요하겠지. 하지만 난 순한 양을 도와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졸업하는 그날 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다가 동네를 떠날 생각뿐이다. 정 붙이고 싶지도 않았고, 정 따위를 내 안에서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패거리들은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순한 양은 피투성이 몸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먹어본 치킨 중에 제일 맛있어요.”

곽마담은 안주인마냥 가게에 눌러 앉아 있었다.

“치킨이 아니고, 닭 강정이라니까.”

그 짧은 시간에 아빠와 곽마담은 오누이처럼 가까워졌다.

“이게 말이지, 그냥 강정이 아니야. 내가 속초까지 내려가서 배워왔거든.”

“비법이 뭐래요?”

“비법?”

아빠는 천 만 원이나 투자해서 받은 비법을 알려주기 싫은지, 나를 보자마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밥은 먹고 돌아다니는 거냐?”

“언제부터 내 걱정했다고 그래.”

“저게, 저게, 말본새하고는.”

아빠는 금방이라도 야구방망이를 날릴 기세였지만, 곽마담을 보자 꾹 참았다. 그럼 그렇지. 술을 끊겠다는 인간이 맥주도 모자라 소주까지 퍼마시고 있다.

“아줌마가 라면 끓여줄까. 내가 다른 건 못해도 라면 하난 자신 있는데.. 어, 그러고 보니까 머리 잘라야겠다. 서울학교는 어떨지 몰라도, 여기 학교는 귀 위로 바짝 잘라야 되거든.”

곽마담은 꼬일 대로 꼬인 목소리로 내 머리를 지적했다. 이 여자, 내 엄마가 되고 싶어서 저러는 건가. 후후. 아빠의 실체를 알고도 저런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곽마담의 어쭙잖은 배려가 우습기만 했다. 코웃음도 사치다 싶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빠의 야구배트가 날라 오든 말든, 또 다시 동네를 뜨든 말든 오늘 하루 만사 귀찮기만 했다.


성인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작은 방.

방에는 아직 풀지 않은 이삿짐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아빠는 얼른 짐부터 풀고 저녁을 먹으라고 성화를 부렸지만, 난 이삿짐 박스를 구석에 밀어놓고는 벌렁 누워 버렸다. 벽지를 새로 발랐다지만 천정에는 담배에 찌들다 못해 곰팡이까지 피어 있었다.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 한 마리가 내려올 듯 말 듯 씨름하고 있었다. 거미가 추락한다면 내 머리에 떨어지겠지. 거미가 떨어진 것도 아닌데, 난 얼른 벽에 기대어 앉았다. 옷부터 갈아입을 생각에 옷상자부터 열었다. 회색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교복 상의에 명찰이 달려 있었다.


오.영.수.

나의 두 번째 이름. 주민등록등본에 오영수란 이름이 마르기도 전에 난 오대웅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구청에 들러 개명허가를 신고했고, 새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한국인 70명 중 1명이 이름을 바꾼다고 한다. 대법원은 범죄 은폐 등 불순한 의도만 아니면 원칙적으로 개명을 허가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름이 촌스럽거나, 출생신고를 잘못했거나, 희대의 범법자와 이름이 같다거나, 성명학 적으로 이름이 좋지 않으면 얼마든지 이름을 바꿀 수 있다. 나의 개명 사유는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촌스러운 이름도 아니었고, 살인자 이름도 아니었고, 성명학에 연연하는 취향도 아니었다. 법원은 나의 첫 번째 개명을 쉽게 허가해줬고, 두 번째 역시 불쌍한 놈 한 번 더 봐준다는 식으로 아주 쉽게 대웅이란 이름으로 갈아타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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