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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님의 서재입니다.

선인과 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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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뿔
작품등록일 :
2022.05.12 17:08
최근연재일 :
2022.06.02 20:20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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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4
글자수 :
81,001

작성
22.05.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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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02.

DUMMY

신사동 닭 강정.

간판업체 인부 하나가 허름한 가게에 ‘신사동 닭 강정’이란 입간판을 내걸고 있다. 전직 야구선수인 아빠가 야심차게 준비한 우리 부자의 밥줄이 될 가게. 아빠는 도시나 시골이나 강남이 대세라며 신사동에서 살았던 과거를 동네사람들에게 어필했다. 아빠는 입으로 동네사람들에게 잘 부탁한다며 인사했지만 어디까지나 립 서비스일 뿐 촌놈들이라며 그들을 발밑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빠는 이사 오는 내내 입간판을 ‘신사동 치킨’으로 할지, ‘신사동 닭 강정’으로 할지 무진 고민했었다. 치킨으로 내걸면 술손님까지 상대할 수 있지만, 닭 강정을 내걸면 맛으로 승부를 걸어야 된다는 위험부담이 있었다. 그만큼 아빠는 이번 일에 고군분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되지 않는 전 재산을 쏟은 사업이었다. 수원에서 살던 마지막 한 달. 아빠는 모든 생업을 때려치우고 속초에 가서 닭 강정의 고수에게 맛을 하사받았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인 사업에 닭 강정을 뺄 수 없었는지 결국 닭 강정으로 입간판을 내걸었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 난 잘 모른다. 하늘은 내게 똑똑한 뇌를 준 대신 미각을 앗아갔다. 달고, 쓰고, 맵고. 단세포적인 맛만 느낄 뿐 그게 깊은 맛인지 혀에 착착 감기는 맛인지 난 결코 알지 못한다.


“에라, 썩을 놈의 새끼. 재수 없게 벌주 대낮부터 무전취식이야.”

핑크레이디 다방에서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왔다. 진한 화장을 한 작부 하나가 남자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작부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가게에서 물 양동이를 들고 와서는 남자에게 뿌렸다. 하지만 남자는 아빠를 방패막이 삼아 도망을 쳤고, 작부의 물세례는 여지없이 아빠에게 쏟아지고 말았다. 아빠는 젖은 바짓단을 보면서 난감해했다. 작부는 ‘신사동 닭 강정’이란 간판과 아빠를 번갈아 보았고, 그 짧은 시간에 아빠의 모든 것을 간파한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머, 초면에 미안해서 어쩐대요?”

작부는 얼른 치렁치렁한 소매로 아빠의 바짓단을 닦았다. 소매 따위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작부는 유난을 떨며 구두에 떨어진 물까지 닦아냈다. 아빠의 환심을 사기 위한 늙수그레한 여자의 몸짓이었다. 작부가 계속해서 아빠의 바짓단을 닦아내자, 아빠는 얼른 작부의 손을 잡고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작부는 남자의 손길이 처음이라는 듯 소녀마냥 부끄러워했고, 자신을 핑크레이디 다방의 곽마담이라고 소개했다.

“바지가 많이 젖었어요.”

“액땜하고 좋네요.”

“벗으세요. 제가 이삿짐 나르는 동안 말려드릴게요.”

곽마담은 가게에서 추리닝 하나를 가져왔고, 끈질기게 아빠의 바지를 말려주겠다며 교태를 부렸다.

“그만 좀 하세요!”

아빠가 버럭 신경질을 냈다. 여자를 좋아하는 아빠가 웬일로 작부의 손길에 난색을 표했다. 아빠는 이목이 집중된 곳에서 함부로 바짓단을 벗어 제칠 수 없었다. 곽마담의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물론 가식의 눈물이다. 햄릿이 그랬지. 여자의 눈물은 믿지 말라고.

“어차피 이삿짐 옮기다보면 더러워질 텐데요. 초면에 폐 끼치기도 그렇고.”

아빠는 마지못해 변명했다. 죽으나 사나 이 동네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자가 먼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뽀로통한 곽마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삿짐을 나르며 치근덕거렸다.


“신사동이면, 강남에서 오셨나 봐요.”

“네. 한 십 여 년을 살았죠.”

“어쩐지, 귀태가 남다르다 했어요. 식구는 아드님 하고 달랑 둘인가 봐요?”

곽마담은 가게 구석구석을 살피며 물었다.

“사별하셨어요?”

곽마담은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퍼부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아빠는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엄마가 도망갔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돌싱인가 보네.”

“네?”

“돌아온 싱글요. 이혼하셨구나. 어쨌든 잘 오셨어요. 동네일이라면 뭐든 물어보세요. 제가 이 동네 소식통이거든요.”

“그래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곽마담.”

“이제 이웃사촌이잖아요. 벌써 한 가족이나 다름없죠.”

하하, 호호.

곽마담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동네에 메아리쳤다. 때마침 오토바이 배달부가 상자 하나를 내려놓고 가버렸다. 아빠가 주문한 떡상자였다. 떡상자를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이 나왔다.

“어머, 이사떡인가보네.”

곽마담은 시루떡 한 조각을 떼서는 입에 우적우적 집어넣었다. 떡에 립스틱을 묻히지 않으려는 곽마담의 입이 마치 오리 주둥이처럼 보였다.

“간 참 잘 뱄네. 이웃들한테 돌리실거죠?”

“그래야죠.”

아빠는 시루떡을 은박지 접시에 한 조각씩 담아냈다.

“이리 주세요. 이런 건 여자가 해야 제 맛이죠. 동네 사람들한테 다 돌릴 필요는 없고, 꼭 필요한 어르신들한테만 돌리면 터 잡는데 편하실 거예요.”

“곽마담이 도와줘서 일이 수월해졌어요. 이따 다방에 들러 커피 한 잔 팔아드리리다.”

“한잔만 사시게?”

“아니죠. 곽마담 것까지 두잔.”

곽마담은 까르르 웃으며 아빠의 애간장을 녹였다. 미장원에 서 있는 중년의 미용사는 곽마담을 못마땅한 눈으로 비웃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남자에게 웃음을 파는 곽마담이 늘 못마땅했다. 그 이면엔 곽마담을 향한 질투와 시기도 섞여 있었다. 하긴.... 동네 남자들의 평균 연령대만 봐도 아빠의 등장은 동네 아낙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어딜 가든 50대 이상의 남자들이었다. 어쩌다 만나는 택배 기사, 어쩌다 만나는 양아치들, 어쩌다 만나는 젊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죄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그에 반해 아빠는 꾸준히 운동을 한 탓에 - 구타도 운동은 운동이니까 - 근육은 다부지게 잡혀 있었고, 고등학생 학부형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동안이었다.


곽마담은 신선한 먹잇감을 먼저 찜했다는 아빠의 팔짱을 끼며 친분을 과시했다. 아빠는 곽마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나를 불러 인사시켰다. 곽마담은 내 엄마라도 되는 양 시루떡 한 조각을 내 입에 내밀었다. 쳇. 난 곽마담이 꼴도 보기 싫어 책 한권만 들고 나와 버렸다. 싸가지 없는 아들놈이라며 용서를 구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책 한권을 들고 낯선 마을을 배회했다.

언덕 위에는 앞으로 내가 다닐 고등학교가 있었고, 고등학교 인근은 민둥산마냥 허허벌판이었다. 평일 대낮. 삼삼오오 모여 하교하는 초등학생들만 보일뿐, 내 또래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사육당하고 있는지 눈썹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집 건너 하나 있다는 편의점은 마을을 통틀어 2개 있었고, 그 많던 은행은 농협과 국민은행이 전부였다. 유흥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문명과 동떨어진 동네에 큰 불만은 없었다. 단지, 나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랄까. 잡초가 무성한 작은 공원이 있기는 했지만 놀이터에 붙어 있어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공원은 한산했다. 아이들은 공원에서 놀기보다 집에 들어가기 바빴고, 노인들은 공원보다 노인정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의 아지트가 될 청산공원. 난 그렇게 탈출구를 찾으며 청산에 적응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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