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징비님의 서재입니다.

선인과 악인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투뿔
작품등록일 :
2022.05.12 17:08
최근연재일 :
2022.06.02 20:20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465
추천수 :
4
글자수 :
81,001

작성
22.05.17 18:10
조회
23
추천
0
글자
8쪽

06.

DUMMY

태규는 수업에 필요한 교재를 사는데 도움을 주겠다며 서점까지 따라왔다.

서점에는 호영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고르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호영의 손에 니체의 철학서가 들려 있었다. 난 문제집을 고르는 척 하면서 호영을 살폈다. 책을 보던 호영은 나의 시선을 눈치 채고는 뭘 봐 하는 식으로 나를 노려봤다. 같잖은 또래의 등장이 짜증난 듯 호영은 책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도둑놈.

호영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2장을 꺼내 계산했다.

“나한테 할 말 있어?”

호영은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내게 마지못해 말을 걸었다.

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만 들썩였다.

“도시에서 왔다고 너무 뻐기지 마라. 오죽 못났으면 이 촌구석까지 왔을까.”

호영이 먼저 내게 선방을 날렸다. 평소의 나라면 아가리를 날려버렸겠지만 인내심이 이미 극락에 도달한 상태라 그저 웃으면서 넘어갔다. 호영은 기도 안찬다는 듯 나를 항해 썩을 미소를 던지고는 나가버렸다.

“네가 참아. 365일 생리하는 녀석이거든.”

보다 못한 태규가 내 편을 들었다.

“촌구석에서 1등해 봤자, 서울 가면 꼴찌라며? 괜히 너한테 심술부리는 거야.”

태규 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호영을 공공의 적으로 여긴다고 했다.

“어디에서 이사 왔어?”

“수원.”

“수원? 수원이면 어디? 우리 사촌 형이 수원고 다니거든. 넌 어느 학교야?”

태규는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었다. 수원이라는 동네가 태규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말해도 잘 몰라. 후진 학교 다녔거든.”

난 대충 얼버무렸다. 기억을 잊게 하는 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가 누구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추하디 추한 악몽일 뿐이다.


날이 갈수록 아빠는 동네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아빠를 추켜세울수록, 아빠는 동네에 정감이 간다는 둥, 뼈를 묻을 거라는 둥 설레발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누구도 아빠에 대해 해코지 하는 사람이 없었다. 곽마담 조언대로 양로원에 무료 치킨을 쏜 뒤로는 인간성 좋은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폭군에 주정꾼인 아빠가 좋은 사람이라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아빠는 동네 사람들에게 신사동 아저씨로 불리며 터를 잡아갔다. 술을 마시는 날도 현저히 줄었고, 야구 배트를 휘두르지도 않았다. 일어나기 바쁘게 가게 앞을 청소하며 주민들과 인사를 나눴고, 일주일에 한번은 닭 강정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무료 시식을 하도록 했다. 인심 좋은 신사동 아저씨. 평화로운 마을에서 아빠의 긴장은 그렇게 느슨해져가고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구식 전화벨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렸다.

아빠는 배달이라도 간 건가. 주방에는 닭을 튀긴 도구들이 너저분하게 늘려 있었다. 늘 깨끗했던 주방. 언제부턴가 아빠는 긴장에서 방심의 단계로 넘어서고 있었다. 전화벨은 주인을 찾을 때까지 울려댈 모양이다.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전화는 날 놀리려는 듯 끊어졌다. 10월에 접어들었는데도 태양은 식을 줄 모르고 더위를 발산했다.

“아저씨가 닭 한 마리 금방 튀겨줄게. 그냥 주는 거야.”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심 좋은 신사동 아저씨였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고생이 많겠어. 엄마도 돌아가셨다며.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아빠는 누군가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설마 잘못 본거겠지. 하지만 내 눈앞에는 신사동 아저씨가 불쌍한 어린 미용사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주겠다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빠는 나를 보자 얼른 어린 미용사의 손을 놓았다.

“미장원에서 일하는 아이야. 네 머리도 잘랐다며?”

아빠의 머리가 곱슬머리로 변해있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미장원에 앉아 파마를 했던 모양이다. 아빠는 부모 조실한 유나가 불쌍해서 치킨 몇 점 주려고 데려왔다고 했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

“혼자 산다잖니. 너랑 같은 반이라며. 서로 알고 지내면 좋잖아.”

아빠는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았다.

“거지같은 년.”

난 유나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두 번 다시 우리 가게에 왔다가는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도 불사했다. 잘못은 아빠가 했는데, 쌍욕은 유나에게 해버리고 말았다. 유나의 얼굴은 금새 불거졌고, 누가 볼까 무섭게 미장원으로 뛰어갔다. 영문 없이 당한 나의 일격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다.

“개 버릇 남 못주지?”

“그게 아니라....”

아빠는 궁색한 변명 늘어놓기도 지쳤는지 애꿎은 닭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한 토막, 두 토막, 세 토막... 생닭은 프라이드치킨도 아닌 닭 강정도 아닌 어정쩡한 크기로 잘려나갔다.

“그 애가 먼저 꼬리쳤어? 나 잡아드쇼 다리라도 벌렸어? 여기가 마지막 종착지라고? 웃겨,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퍽.

아빠의 주먹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코에서 흐르는 선혈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비릿한 철분냄새가 후두를 자극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 했지.”

아빠는 주먹도 부족해 소주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의도와 상관없이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젠장. 망할 놈의 세상. 소리 지르고 싶어도 지를 수 없는 더러운 세상. 나의 발길은 어느덧 청산공원을 향하고 있었다.


***


“그 소식 들었어?”

태규는 책상에 앉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삼삼오오 몰려서 수군거리는 아이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표정들이었다.

“지영이가 살해당했대. 호영이 쌍둥이 동생.”

태규는 마을에 일어난 살인사건에 아주 많이 흥분된 모양이었다. 호영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경찰서에 있거나 여동생의 장례식 준비 중일지도 모른다. 유나는 오늘도 지각을 했다. 금방 일어난 듯 뻗친 머리하며 대충 걸쳐 입은 교복걸이하며....

“놀이터에서 시체로 발견됐대.”

태규의 말에 유나도 놀란 얼굴이었다.

“놀이터에 경찰들 쫙 깔렸어. 호영이 완전 줄초상이네. 아버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동생까지 죽고.”

담임이 들어와 웅성거리던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담임 역시 태규 못지않게 학생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면서도 살인사건에 다소 격앙된 얼굴이었다.


여고생 살인사건.

태규 말대로 놀이터는 경찰들과 주민들로 북적거렸다. 간혹 어린 아이가 폴리스라인 안으로 들어서면 경찰이 얼른 제지했다. 곽마담은 동네 무서워 어떻게 사냐며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속옷이 반쯤 벗겨졌대.”

태규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특급비밀이라도 된 것 마냥 내 귀에 속삭였다. 자기 꿈이 경찰이라고 주구장창 떠들어대더니 물 만난 듯 사건 하나하나를 추리하고 있었다. 오밤중에 지영이는 놀이터에 왜 나왔을까, 누구를 만났을까, 속옷이 반쯤 벗겨진 건 똥개 짓일 수도 있고, 만약 똥개 짓이라면 사체에서 나온 증거는 똥개에 의해 오염돼서 증거로 채택되기 어려울 거라며 어설픈 추론을 펼쳤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동네 사람들은 모였다하면 살인사건에 대해 떠들었다. 여학생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들어갔다. 그 누구도 늦은 밤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저녁 무렵 치킨에 맥주 한잔을 하던 사람들도 일찌감치 귀가했고, 가게는 며칠째 배달주문 전화도 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한동안 마을은 적막감에 휩싸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선인과 악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3 23. 22.06.02 14 0 11쪽
22 22. 22.06.02 13 0 8쪽
21 21. 22.06.01 15 0 8쪽
20 20. 22.05.31 15 0 7쪽
19 19. 22.05.30 19 0 8쪽
18 18. 22.05.29 15 0 7쪽
17 17. 22.05.28 16 0 8쪽
16 16. 22.05.27 16 0 8쪽
15 15. 22.05.26 15 0 8쪽
14 14. 22.05.25 16 0 7쪽
13 13. 22.05.24 16 0 9쪽
12 12. 22.05.23 16 0 7쪽
11 11. 22.05.22 17 0 9쪽
10 10. 22.05.21 16 0 9쪽
9 09. 22.05.20 17 0 7쪽
8 08. 22.05.19 15 0 7쪽
7 07. 22.05.18 15 0 8쪽
» 06. 22.05.17 23 0 8쪽
5 05. 22.05.16 25 0 9쪽
4 04. 22.05.15 28 1 7쪽
3 03. +1 22.05.14 30 1 8쪽
2 02. +1 22.05.13 42 1 8쪽
1 01. +1 22.05.12 51 1 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