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겸 연재글입니다.
(중략)망설여지는 게 당연했다.
이제껏 돈을 크게 써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만원 단위가 우습게 넘어가는 가전제품 같은 건, 단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진공청소기란 물건이 생소한 것만은 아니었다. 소속사에서 그리고 방송국에서 자주 보았었으니까.
저건 그냥 밀기만 하면 청소가 된다고 했다. 더군다나 지나간 자리에 먼지가 남지도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고 했다.
정확한 가격은 알 수 없었지만, 사면 유용하게 쓰일 터. 지석이 형의 말마따나 돈 있는데 그리 궁색하게 굴 필요까진 없어보였다.
마음을 굳힌 김민석은 조심히 손에 쥔 먼지뭉친 빗자루를 들어 보았다.
“이건 버려야 되나?”
아쉬운 마음부터 들었다. 오래 같이 지내다보면, 물건에도 정이 느껴지게 마련이다. 특히나 이 집에 와서 처음 같이 한 것들에게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것도 이 빗자루는 무려 3년을 넘게 같이한 녀석이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빗자루를 꼭 버려야 할 필요까지는 없어보였다.
“아니지. 내 방에 놓으면 되잖아. 형도 뭐라고 하시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마음을 정한 김민석은 거실의 남은 부분을 쓸었다. 지석의 방은 반쯤 문이 열려있었다.
“어? 벌써 일어나셨어요?”
급히 책상 앞에 앉아있던 지석은 급히 보고 있던 종이를 숨기며 잠이 덜 깬 얼굴을 만지는 듯 딴청을 부렸다.
“그, 그래. 일어났냐?”
“예. 형 방도 쓸까요?”
“아니, 여긴 놔둬. 형이 나중에 쓸게.”
거실로 나와 빗자루를 제 방에 고이 두면서 김민석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뭘 보고 계셨던 거지?’
당황하는 기색으로 보았을 때, 보여주기 힘든 무언가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받은 러브레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싫은 사람에게 받은 러브레터라면 일찌감치 처분했을 터.
형이 누군가와 다정하게 걷는 것을 상상하니, 김민석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그 여성이 누구일지 굉장히 궁금하기는 했지만, 서두를 문제가 아닌 듯했다.
어련히 때가 되면 알려주실 터.
김민석은 곧 진공청소기를 구입할 것이란 기대감에 사로잡혀 흥에 겨운 나머지 작게나마 휘파람을 불어댔다.
***
건물 안은 쾌적했다.
언뜻 보이는 스튜디오로 스태프들이 무대장치를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기에 방송이 근사하게 전파를 타는 셈이다.
행인들처럼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다수가 연예인이었다.
최명우와 김민석이 안면이 있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서도 지석은 멀뚱히 있어야했다.
다행이 심심함이라도 덜어주려는지 최명우가 인사를 시켜주려는 모양이었다.
“노PD, 인사해. 이쪽은 한지석 씨. 알지? 한국 투자 컨설팅 실장님.”
“그럼 이분이 한 실장님입니까?”
“그래.”
노PD라는 사람이 지석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꼭 뵙고 싶었습니다. 노영우PD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지석입니다.”
얼결에 악수를 나누고 나자 노영우가 자신의 명함을 건네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명우 형님 소개로 용돈 좀 번 놈입니다. 하하하.”
최명우를 통해 투자를 했던 사람인 모양이다.
지석도 흔쾌히 자신의 명함을 건네었다.
“아, 그렇습니까? 저도 제 명함 드리겠습니다.”
명함을 받은 노영우는 감탄사부터 터트렸다.
“와, 명함이 굉장히 세련되었군요. 나중에 소개 좀 시켜주십시오.”
사실 명함의 디자인은 지석이 명함제작자에게 직접 부탁한 것이다. 2013년의 명함까지 보았던 지석에게 이 시대의 명함 디자인은 한참 뒤쳐질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지석은 자신의 명함 디자인에 대해 웃돈까지 줘가며 자세한 요구를 했었다.
그렇게 세심한 신경까지 쓴 건, 명함이 제 2의 얼굴이라는 걸 알아서다. 타인에게 심어주는 첫인상이나 이미지는 때론 일의 성패까지 좌우하게 마련이었다.
상대가 호의적인만큼 지석도 호의로 임했다.
“그러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최명우에게 한 여성이 알은 체를 했다.
“최PD님.”
“아! 윤혜선씨.”
윤혜선. 근래 들어 한참 뜨는 미스코리아 출신의 여자배우다. 훤칠한 키와 늘씬한 다리, 그리고 앳되고 청순한 외모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쏠리게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어머, 노PD님도 계셨네.”
“어? 어….”
“요즘 통 불러주지 않으시고. 두 분, 저 버리신 거 아니죠?”
“하하, 그럴 리가 있나?”
그녀가 곁눈질로 김민석을 보다 지석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도 잠시, 그녀는 두 PD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빼앗은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먼저 갈게요. 연락주세요.”
“그래.”
땀이라도 흐를 듯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노영우.
그 옆의 최명우에게 김민석이 물었다.
“잘 아시는 사이인가요?”
“알다마다.”
부연설명은 노영우가 대신했다.
“말도 마라. 만나는 PD들마다 배역 달라고 얼마나 보채는지….”
으레 있는 일일 터. 방송국 쪽 사정을 잘 모르지만, 지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열심히 하는 것 아닙니까?”
“좋게 생각하면 그렇긴 합니다만, 저희 입장에선 조금 피곤합니다.”
노영우의 말을 듣고 나니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맞물려 의구심도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뜨질 않았지?’
전생의 기억에서 그리 연기력이 부족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주연을 맡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비록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내비추긴 했지만, 그녀가 맡은 배역은 주로 조연이었다.
지석은 자리에서 그녀의 기준을 정했다.
‘저렇게 열심히 다녀도 배역을 따지 못하는 걸 보면 별로 가까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더군다나 그녀는 여자다. 남녀가 만나다보면 감정에 얽매여 공과 사를 그르치기 쉽고 인생을 허비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게 지석의 판단이었다.
“저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한 실장님, 저도 나중에 밥 한 끼 사겠습니다.”
노영우의 말에 지석이 웃으며 화답했다.
“요즘 제가 공짜 밥 먹을 일이 많아지는군요. 마음이시니, 받겠습니다.”
멀어지는 노영우를 등지고 지석과 김민석은 최명우의 안내를 받아 5층의 국장실에 다다랐다.
머리카락이 없어 이마가 훤히 드러난 장년의 남자가 지석을 주시하며 최명우에게 물었다.
“이쪽이 한 실장인가?”
“예, 국장님.”
대답을 들은 그가 지석을 향해 인상을 활짝 피며 지석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바쁜데 오라고 한 게 아닌지 모르겠군. 초면이긴 한데, 연배가 내가 높은 것 같으니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 편이 저도 편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자네에 대해 얘기는 많이 들었네. 난 김병환 국장이라 하네.”
“한국 투자 컨설팅의 실장 한지석이라고 합니다.”
“한지석? 이름 괜찮군. 일단 이쪽으로 앉지.”
지석과 김민석 그리고 최명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김병환은 직원에게 사람 수에 맞게 커피를 주문하고서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듣자하니, 자네 회사가 투자에 일가견이 있다던데….”
“제 입으로 그렇다고 말씀드리기엔….”
“겸손할 것 없어. 사실을 묻는 거니까 그대로 답해주면 돼.”
“그럼 그렇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말이 잘 통하는 친구군. 그런데 자네 회사 대표치고는 너무 젊은 것 같군.”
“사실 대표님은 따로 계십니다. 실무를 제가 담당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언짢을 일이긴 했다. 최소한 격은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애당초 김병환은 그를 따질 생각이 없었다.
“나는 실무자를 더 좋아하네. 이유가 뭔지 아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지위보다 능력을 중시하기 때문이지. 이곳에서 잦은 인사이동이 있는 것 또한 그 이유야.”
확실히 이 방송국은 현 시기에 성장이 굉장히 두드러졌다. 그에 국장의 능력도 간과할 수는 없는 듯했다.
“사실 이번 민석이가 출연한 드라마도 국장님의 지원이 있어서 촬영이 가능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시나리오는 있었어도 국민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었죠.”
“국민대다수가 못 사는데 누가 재벌드라마를 보냐는 거야. 현실을 직시하자면 솔직히 그렇지. 근데 바꿔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었어. 못 사니까 희망이라도 줘보자. 그들이 동경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난 그렇게 생각했지.”
지석은 그제야 전생과 현생에 공전의 히트를 쳤던 이 드라마가 나온 배경을 깨달을 수 있었다.
커피가 나오자, 김병환이 본론을 꺼냈다.
“자네 회사에 나도 투자 좀 할 수 없겠나?”
“가능하긴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은 크게 이윤을 낼만한 일이 없습니다.”
“그럼 언제쯤?”
“1년 정도 후에 생길 것 같습니다.”
“다른 투자회사들은 시기 저울질하지 않고 투자금부터 받아 챙기는데, 자넨 다르군.”
“성과를 내드려야 투자자들께서 저희 회사를 더 신뢰하실 테니까요.”
김병환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눈앞의 이익보다 신뢰를 먼저 챙기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답지 않아. 머잖아 이 친구, 굉장한 재목이 될지도 모르겠군.’
크게 될 나무는 뿌리부터 다르다. 사업수완도 좋은 데다 생각이 깊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현명함까지 지녔으니 필히 그렇게 될 것이다.
김병환은 얌전히 커피만 마시고 있던 김민석에게도 눈을 돌렸다.
“이번에 민석군이 잘해줬어. 그런데 한 가지가 궁금해. 주변에서 하지 않으려던 배역이었는데, 왜 그 배역을 택했지? 듣기로는 민석군 소속사에서 상당한 지원을 받는 입장이라고 하던데.”
즉, 김민석은 다른 배역을 맡을 수도 있었단 뜻이다.
최명우가 그에 대신 답했다.
“그 대본을 추천한 건 여기 계신 한 실장님이라고 합니다.”
저절로 김병환의 눈이 다시금 지석에게 이동되었다.
“자네 대본도 볼 줄 아나?”
김병환의 물음에 지석은 빠르게 사고했다.
‘이 일은 이익이 될 일인가?’
당장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쯤 보험을 들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 섰다.
“약간 볼 줄 압니다.”
“자네, 이쪽에 경험도 있나?”
“없습니다.”
김병환도 지석이 이쪽 방면에 재능이 있다는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아직 한 작품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지석은 알고 있었다. 머잖아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 것이라는 걸.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후에 김병환은 좀처럼 꺼내지 않던 자신의 명함을 지석에게 선뜻 내주었다.
“투자할 수 있는 때가 되면 연락 주게. 기다리고 있겠네.”
- 작가의말
독자님들이 성원을 너무 잘해주셔서 연재를 너무 많이 해버린 듯합니다. 출간이 계획되어 있던 글이라 조금 전에 잘랐어야 했는데, 본의 아니게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오랜만에 연재를 하면서 독자님들께 많은 배움을 얻은 점,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사실 연재를 끊기 가장 두려웠던 부분이 독자님들께 더 조언을 구할 수 없을 거란 점이었습니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차후의 내용들에 대해서 그리고 이전의 내용들에 대해서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권은 미인마녀님의 조언에 따라 연재사이사이 빈 부분들이 채워졌습니다.
이미 2권이 집필 중이니, 출간은 9월 초나 중반 중으로 될 듯 합니다만 좀 더 빨라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차후, 출간일정이 나오면 다시 공지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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