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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하의 서재입니다.

100가지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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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가이하
작품등록일 :
2013.07.21 10:58
최근연재일 :
2014.08.14 17:16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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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859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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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2,354

작성
13.07.2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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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취직

DUMMY

모든 일은 지석의 뜻대로 흘러갔다.

오픈을 하지 않은 오전과 밤 시간을 이용해 며칠에 걸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큰 냉장고가 2층으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일은 당연히 더 편해졌고, 여유까지 생겨 수다를 떨 시간도 많아졌다.

얼마 전, 2층에 새 아르바이트가 들어왔고 다시 오늘 한 명이 더 들어왔다.

“또, 사람을 뽑다니…. 2층에 여섯 명이나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한분은 지배인이라잖아.”

유재선의 물음에 지석이 답하자, 기둥에 기대 서 있던 문영미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응, 우리보다 나이가 많대. 4살인가?”

“그래요?”

김진숙이 멀찍이 떨어져서 세 사람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문영미는 그를 의식하지 못한 채 얘기에 열중했다.

“아까 봤는데, 그 사람 잘 생겼다. 제임스 딘 닮았어.”

“제임스 딘이요? 에이, 말도 안 되잖아요.”

제임스 딘은 한때 미국을 풍미하던 인물이다. 어이없다는 듯한 유재선의 반응에 지석이 답했다.

“맞아. 그렇게 생겼어. 똑같지는 않지만, 느낌이 꽤 비슷해.”

“너도 봤어?”

지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오늘 얼굴을 보진 못했다. 어디까지나 과거의 회상에서 알 수 있던 것이니까.

‘꽤 오래 있었지. 그 사람…. 내가 그만둘 때도 이곳에 있었으니까.’

사장은 여러 번의 연봉협상을 아까워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이 가게 이름이 제임스 딘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흥, 제임스 딘이 뭐가 잘생겼다고.”

김진숙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세 사람에게까지 들렸다. 얄궂게도 그 순간, 사장이 그와 함께 2층으로 올라왔다.

사장에게서 힐난의 눈초리를 받은 김진숙이 잘못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어 사장은 손짓으로 모여 있던 세 사람과 막 서빙을 끝낸 신참 고성진까지 불러놓고 일렀다.

“소개하지. 이쪽은 정상영. 오늘부터 2층 지배인을 맡게 될 사람이야.”

우수에 젖은 눈빛과 훤칠한 이마, 오뚝한 코와 반항적인 입매 그리고 날렵한 턱선은 분명 그를 닮았다. 확연한 차이가 있다면 바로 동양인의 특징인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심한 근시라는 점까지 닮아 늘 알이 굵은 안경을 끼고 있다는 점이 다소 흠이긴 했지만, 워낙에 잘생긴 외모라 안경마저 잘 어울렸다.

“잘 부탁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먼저 손을 뻗은 정상영과 김진숙, 문영미, 유재선, 고성진이 차례로 악수를 나눴다.

지석도 손을 내밀 찰나였다.

“각자 얘기들 나누고, 지석씨는 잠깐 나 따라서 올라와.”

정상영이 입가에 근사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거뒀다. 지석은 악수를 못한 채 사장을 뒤따라 계단을 올랐다.

또각. 또각.

하이힐 위로 가는 발목과 길고 곧게 뻗은 다리가 지석의 시선을 앗았다. 평소 그녀는 중년이었음에도 늘씬한 몸에 잡티 하나 없는 얼굴이 돋보였다.

치마는 속옷이 보일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치마가 몇 센티만 더 짧았어도 여지없이 드러났을 터.

남자라면 누구나 흥분이 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석은 곧 마음을 추슬렀다.

3층과 4층은 아직 영업 시작 전이다.

4층에 도착한 그녀가 빈 테이블과 소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부터 지석씨는 4층 지배인을 맡아.”

“네?”

되묻는 지석에게 그녀가 일렀다.

“어려울 일은 없어. 모르는 건 가르쳐줄 테니까. 사입만 제대로 하고, 장부 맞추면 돼. 나머진 종업원 관리.”

“원래 지배인이 있던 것으로 압니다만….”

“그만뒀어. 어제 부로.”

냉혈마녀라는 별명까지 있는 그녀다. 오로지 이익만을 쫓아 사람을 관리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층의 지배인이 일을 그만둔 건, 그녀가 종용했을지도 모르는 일.

‘사실 4층의 매상이 별로야. 지석씨가 한 번 끌어올려봐.’

그녀의 눈빛에서 지석은 대강이나마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열심히는 해보겠습니다.”

퍽 믿음직스러운 대답은 못 되었지만, 사실 그녀는 그 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맡겨만 달라고 큰소리쳤던 전 지배인이 떠올라서다.

“월급은 2층에서 일했을 때보다 더 올려줄 거야. 그리고 이거 받아.”

“이게 뭐죠?”

흰 봉투를 받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지석에게 그녀가 자신의 얇은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얼마 안 되지만 정장이라도 해 입어, 머리도 좀 하고. 지배인은 멋도 좀 부릴 줄 알아야 해.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출근해. 잔돈은 남겨올 필요 없어.”

떠밀리듯 가게를 빠져나온 지석은 봉투를 매만졌다.

그리 두툼하진 않았다.

그러나 안을 확인하자, 십만 원 권 수표가 세 장이나 들어있었다. 지금이 1990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삼십만 원은 꽤 큰돈이다. 버스비가 성인기준 단돈 140원이었으니까.

‘이 아줌마, 꽤 통 크네.’

과거엔 몰랐던 사실이다.

그땐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해서, 사장과 말을 섞을 기회조차 별로 없었으니까.

대로변으로 나간 지석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종로 4가로 향했다.

지석은 광장시장부터 동대문시장까지 두루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며 두 시간 이상을 물건을 고르고 흥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백둘… 백셋….’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다.

팔굽혀펴기를 쉬지 않고 행한 결과였다.

열 개부터 꾸준히 늘린 팔굽혀펴기가 이제는 백 개를 육박한 것.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서니, 제법 근사한 육체가 드러났다.

배에는 윗몸일으키기로 다져진 복근이 뚜렷하게 잡히기 시작했고, 가슴은 볼록 튀어나왔다. 이두박근과 삼두박근도 제법 탄탄해졌다.

지석은 일을 하기 시작한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해왔던 것이다.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수도가 있는 마당으로 나가자, 집 주인인 고령의 할머니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에그머니.”

그에 지석이 웃음을 지었다.

“할머니, 손자 없으세요?”

“있지.”

“그냥 손자다 생각하세요.”

“내 손자는 뚱뚱해.”

“보기 껄끄러우시면 샤워는 나중에 할게요.”

할머니는 한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껄끄럽기는…. 해도 돼. 해!”

“그럼 하겠습니다.”

그녀는 자리를 피하는 듯하더니, 기둥 뒤에 숨어 지석이 찬물을 끼얹는 광경을 빠끔히 바라보는가싶더니 자신의 뺨을 탁탁 치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내가 주책이지. 다 늙어서는….’

대충 샤워를 마친 지석은 몸을 닦은 수건을 빨랫줄에 건 뒤, 쪽방으로 돌아갔다.

1평도 채 안 되어 보이는 공간이지만 발 뻗고 자기엔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지석은 방 한 구석에 고이 모셔둔 정장을 꺼냈다.

정장바지를 입은 뒤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고, 재킷까지 걸쳤다. 물론, 일할 땐 벗어둘 재킷이지만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편이 좋다.

여분으로 바지는 정장의 검은색 외에도 색상이 다른 회색 톤과 줄무늬가 들어간 감색을 더 구입했고, 와이셔츠는 회색과 자주색을 추가로 택했다.

덕분에 사장이 준 돈이 오히려 모자라긴 했지만….

정장을 갖춰 입고 벽에 덕지덕지 붙은 남자연예인들의 웃는 사진을 보며 지석은 그들과 최대한 비슷한 표정을 지어보려 애썼다.

표정의 변화는 인상의 변화까지 불러왔다.

언뜻 봐도 차이가 느껴졌다. 원래는 조금 날카롭고 험한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워졌지 않은가.

어쩌면 체형이 변하고 군살이 빠진 이유도 있을지 몰랐다.

돌연 어머니 생각이 난다.

동전 몇 개를 챙겨 쪽방을 빠져나온 지석은 거리로 나와 인근 공중전화를 찾았다.

전화박스 안은 비어있었지만, 선뜻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어머니는 화를 내실까? 아니, 아버지가 받으실 수도 있겠어.’

그러나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영영 안 볼 분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모친의 목소리였으나, 굉장히 힘이 없는 듯하다.

죄진 심정으로 지석이 어렵사리 입을 열어 말했다.

“어머니, 저 지석입니다.”

(지석아! 너 어디니?)

“공중전화에요. 잘 계시죠?”

(어디 공중전화? 엄마가 당장 갈게. 말해봐.)

격정에 휩싸인 그녀의 어투에도 지석은 차분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저 잘 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걱정하지 말라니, 엄마가 어떻게 걱정이 안 돼? 그러지 말고 들어와. 엄마가 아빠한테 잘 말해볼게. 시험은 내년에 다시 치고. 더 좋은 대학 가면 되잖니. 요즘 삼수하는 사람도 많다고….)

“죄송하지만 갈 생각 없어요. 대학 나온 친구들보다 더 성공해서 멋지게 살게요. 믿어주세요.”

(지석아, 아빠랑 엄마 말 좀 들어주면 안 되겠니? 우린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분명 거짓말은 아닐 터. 하지만 부모님들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학력자가 넘쳐나는 요즘세대를 과거세대에 빗대는 실수를 하고 계셨으니까.

“알고는 있어요. 절위해 하시는 말씀이라는 거. 하지만 전 제가 잘하는 것을 하겠습니다. 그 편이 더 세상을 살기 이롭거든요. 꼭 성공해서 돌아갈게요. 그럼….”

(지석아, 지석아!)

지석은 기어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어쩌면 이 세상은 뭔가를 포기해야 다른 걸 얻을 수 있는 구조일지도 모른다.

또, 편한 걸 찾으면 인생이 비루해지고, 끝없이 매달리면 원하는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작금은 씁쓸하기만 했다. 가정을 포기하고 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두르지 않았더라도 과거보다는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석은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

‘기왕 다시 사는 거라면 확실하게 바꾸는 게 나아. 설령 이게 죽음 뒤 찾아온 망상이라 할지라도….’

학원에서의 꿈이 진실인지, 아니면 지금 사는 것이 진실인지는 사실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무엇이 망상이든 간에, 실패한 인생을 살았던데 지석은 한이 맺혔었다.

두 여성이 그렇게 고뇌에 빠져있던 지석을 흘끔거리며 지나쳤다.

“저 사람, 멋지지 않아?”

“응, 근사하네.”

작게나마 그들의 대화를 들은 지석이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괜찮은 건가?’

쪽방으로 돌아온 지석은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누워 낮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려 오늘 새로 산 옷을 의식했다. 옷 몇 개 더 쌓아놓았다고 방이 확 비좁아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원래 이방은 창고로 사용하던 곳이라 했었다.

‘슬슬 다른 집을 알아봐야 하나? 집을 옮기긴 해야 하는데….’

이곳을 터무니없이 싸게 구한 점을 감안하자니 집을 옮기는 게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여긴 한 달 6만원이다. 그러나 조금 넓고 쓸 만한 방으로 옮긴다면 못해도 월세로 20만원은 줘야 할 터.

“조금 더 참아보자. 아직 다리 뻗을 자리는 있으니.”

그렇게 마음을 굳힌 지석은 내일을 위해 서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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