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남궁호의 창궁무애검법 전수는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검왕으로서도 남궁호의 성장 속도는 상정하지 못한 수준이었기에,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궁호가 이 기간을 그냥 무의미하게 흘려보낼 리 없었다.
그는 세가의 외당 무사들이 지내는 곳에 방문해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뒤에 새치기 하지 말고 줄 서세요! 어차피 차례차례 다 봐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외당에서도 남궁 성씨를 지니지 않은 하급 무사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찰을 봐주는 것.
물론 처음에는 아무도 남궁호에게 몸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이공자님이 기행을 많이 하시더니 이번엔 의술이야?”
“괜히 잘못해서 더 망가질 수도 있어.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원에게 가라고 하잖아.”
“우리 같은 놈들은 몸이 재산인데, 남궁호 공자가 이번엔 장난이 좀 과했구먼.”
남궁세가는 정도 무림에서 한 손에 꼽히는 유력가였다.
하급 무사라고 이곳에 고용되었다는 것은 할지라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히려 남궁의 핏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궁세가에 소속된 몇몇 인물들보다 더 명민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무료라는 것 하나로 하급 무사들의 선택을 받기는 어려웠다.
‘특히 의술은 더더욱 그렇지. 우리 세가에서 급여를 적게 주는 것도 아니고.’
황석일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왜 남궁세가 하급 무사직을 택했겠는가.
웬만한 직업보다 벌이가 나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몸이 아프면 지금의 일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니 남궁세가에 고용된 무사들은 의료비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남궁호가 비집고 들어가기엔 쉽지 않은 분야라는 것.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지. 나한텐 남궁세가 무사들한테 실습 겸 신뢰도를 얻어야 할 이유가 있거든.’
남궁호는 몇몇 하급 무사들에게 정중하게 거절당한 뒤에 방법을 바꿨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동일했다.
어딘가 불편한 듯한 표정의 무사에게 가서 진료를 권하는 것.
그러나 중요한 변경점이 있었다.
“요즘 복부팽만감이 심하고 밤잠을 설치죠?”
“아니, 공자가 그걸 어찌 아십니까?”
“아마 의원에서는 충분한 휴식과 금주를 하라고 했을 겁니다. 근데 솔직히 근무 시간도 있고 사회생활도 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지키겠어요. 제가 말씀드리는 방법을 써보세요.”
남궁호는 무림영웅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 인물들에게 접근했다.
그들의 고민을 미리 알고 있으니 공부한 의술을 활용해 얼굴만 보고도 건강상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남궁호가 최근 들어 생긴 걱정을 먼저 짚으며 다가오니, 하급 무사들은 그가 얼굴만 보고도 병세를 알아차렸다던 화타의 환생처럼 느껴졌다.
덕분에 조금씩 남궁호의 실력을 믿는 하급 무사들이 생겨났다.
“무릎이 아프다고? 남궁호 공자님께 가 보게! 나도 예전에 무릎에 화살 맞았던 자리가 시큰거렸는데, 공자님 덕분에 많이 호전됐지 뭔가!”
“이공자야말로 남궁세가의 큰 복지라고 할 수 있지.”
“솔직히 처음에 진료를 봐주겠다며 돌아다닐 땐 관심도 없었어요. 근데 요즘은...!”
슬슬 입소문이 퍼지는 걸 알아차린 남궁호는 한 가지 수법을 더 사용했다.
“일도객도 남궁호 공자한테 처치 받던데?”
“아니, 일도객께서 신뢰할 정도면 엄청난 거 아닌가?”
“듣자하니 정문의 황 무사 있지? 그치도 몰래 남궁호 공자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대!”
낭인들에게 있어서 일도객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진료 한다니?
남궁호의 실력은 못 믿어도 일도객의 안목은 믿을만했다.
절정 고수가 될 때까지 낭인으로 살아남은 데엔 분명 수많은 의원들의 역할도 있었을 테니까.
게다가 하급 무사임에도 정문 위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황석일도 외당에선 요주의 인물 아니던가.
남궁호가 실제로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에 이런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의료를 받는다니까 폭발적인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스타 마케팅이다 이거야.’
무림에서 이런 홍보 방식을 접해본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식견이 넓지 않은 하급 무사들이.
덕분에 남궁호의 무료 진료는 금세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편두통이 좀 있으실 거 같은데....”
“아이고, 이쪽 근육이 좀 단축됐네요.”
“아까 아침에 봐드렸잖아요? 근데 왜 또...? 아, 그새 아주 괜찮아졌다고요? 다행이네요. 나중에 완전 괜찮아지면 가볍게 비무라도 한 번 하시죠, 하하!”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에는 아픔을 공유하는 것 만한 게 없었다.
남궁호는 며칠 사이에 하급 무사들과 부쩍 친해졌다.
자신들과 다른 세상에 사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공자가 건강 상담도 해주면서 친근하게 다가왔으니 기꺼울 수밖에.
무사들은 자신들의 시시콜콜한 얘기도 곧잘 떠들고, 심심할 땐 서로 가벼운 비무를 하면서 무공도 발전시켰다.
어느새 남궁호는 그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하급 무사들 사이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녹아들었다.
“휴우...! 수련 도구를 착용하고 비무하니까 실력은 쭉쭉 느는데 몸이 고단하긴 하네. 경문아, 나 물 좀 줄래?”
“옙, 공자님.”
하급 무사들과 한바탕 어울린 뒤 잠깐 휴식을 취하는 남궁호.
그의 옆에서 오경문이 수통을 내밀었다.
그런데 녀석의 표정에서 뭔가 묘한 구석이 보였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
“공자님.”
“응?”
“이러다가 하급 무사들이랑 곧 호형호제도 하시겠습니다! 너무 격의 없이 가깝게 지내시는 거 아닙니까...?”
오경문이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소가주가 되시려면 어느 정도 위엄을 갖추셔야 하지 않나 해서 말입니다. 주제넘지만 조금 걱정이 됩니다. 제가 다른 일꾼들 얘길 들어보니까 여러 기관들의 수장들이 공자님 행동을 안 좋게 보고 있답니다.”
오경문은 남궁호가 그에게 바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세가의 모든 이야기는 하인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 집안 소식을 파악해오는 게 남궁호에겐 큰 도움이 됐다.
“가문의 일을 제일 많이 해주는 사람들이 하급 무사들인데 가깝게 지내는 게 중요하지. 이런 걸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은 내가 뭘 해도 손가락질 할 생각일 거야.”
“그러면 앞으로도 세가의 일꾼들이랑 친하게 지내실 생각이시란 말씀이십니까?”
“그럼, 물론이지.”
남궁호의 대답에 오경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렇다면... 공자님의 곁을 제일 오래 지킨 이 무림제일시종. 공자님의 오른팔. 수족이나 다름없는 제가 제일 먼저 형동생을 뚫는 게 옳게 된 순서 아니겠습니까? 혹시 제가 형이라고 ㅂ.... 악! 공자님 저 뼈 맞았습니다, 뼈!”
웬일로 진중하게 맞는 말을 하나 싶었더니, 결론은 또 맞을 말을 뱉는 오경문.
남궁호는 녀석의 다리를 걷어차 입을 다물게 만들어버렸다.
“임마, 친한 것도 선을 넘지 않는 정도에서 해야 할 거 아냐. 남궁태 그놈도 형이라고 안 부르는 마당에....”
“그건 삼공자님이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삼공자님도 이렇게 몇 번 맞으면 바로 공중제비 돌면서 형님이라고 부를 걸요? 아무튼 전 다른 소식 들으러 가보겠습니다.”
오경문은 남궁호에게 또 맞을까봐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 뒤를 보며 피식 웃는 남궁호.
‘짜식이 생각 이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네.’
남궁태도 그렇고, 남궁운을 지지하는 원로원도 소가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세가 내 기관들의 수장과 간부들을 공략하고 있었다.
특히 원로원은 전대의 당주, 대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여러 수장들에 대한 장악력이 엄청나리라.
게다가 남궁운은 개인의 무력도 뛰어났다.
따라서 그가 소가주 자리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남궁운이 세가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큰 변수가 없으면 남궁운이 소가주를 거쳐 가주까지 되었지. 매번 자리를 맡으면 훌륭하게 수행해냈고.’
능력이 출중한 남궁운은 책임을 지게 됐을 때, 개인의 욕심을 내려놓을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대외적으로도 가주의 장자에, 지난 세월 무림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원로원이 밀어주는데 구설수에 오를 여지도 없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판을 뒤집을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거든. 그리고 내 기억에 무림영웅에서도 남궁운은 가주가 될 때보다, 한 사람의 무림인으로 사는 게 더 즐거워 보였어.’
사람마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고, 타인을 이끄는 데에서 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남궁운은 전자에 가까운 천성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가...?’
무림영웅에서의 남궁운에 대해 떠올리던 남궁호는 문득 자기 자신의 성향에까지 생각이 닿았다.
하지만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게임 속 캐릭터가 뭘 좋아하는지는 꿰고 있으면서 본인은 뭘 선호하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고민할 거 없이 한 번 해보면 알 수 있겠지.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하던 무림영웅 속에 들어왔으니까. 괜히 속으로 끙끙댈 것 없이 시도해보고 안 맞으면 다른 길 찾으면 되지. 그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전작업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남궁운과 남궁태가 수뇌부를 포섭할 때, 남궁호는 다른 전략을 취했다.
말단 무사들 사이에서 기회를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 오경문의 말대로 거의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특히 의술을 매개체로 삼는 게 핵심이지.’
확신에 찬 남궁호의 눈.
거기다가 그의 시야에는 동일한 안내 문구가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협행 점수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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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무사들과의 인연이 발전하면서 협행 점수도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곧 체질 강화도 해볼 수 있겠어.’
남궁호의 입이 기분 좋게 호선을 그렸다.
* * *
보이지 않는 소가주 후보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남궁세가.
그런 와중에 돌연 외당에서 북쪽에 있는 곽산의 산적을 소탕하겠다고 무사들을 동원했다.
명분은 근래에 창궐하기 시작한 산적 무리가 양민들을 괴롭히는 걸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모든 이들은 그 저의를 알고 있었다.
“외당이 일공자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움직이는구나!”
“하긴, 안휘성 사람들의 마음까지 얻어놓으면 남궁운 공자의 인지도를 공고히 할 수 있겠지.”
“산적들이 남궁세가의 무사들에게 티끌만큼이라도 피해를 줄 리 없으니 손쉽게 공을 쌓겠네. 이건 아무래도 능구렁이 같은 원로원의 꾀겠지?”
남궁운을 위한 게 뻔히 보이는 출정.
하급 무사들은 괜한 집안싸움 때문에 고생하게 생겼다며 얼굴을 찌푸린 채 채비를 갖췄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앳된 얼굴 하나가 싱글벙글하면서 끼어 있었다.
‘손쉽게 공을 쌓기는? 누구 마음대로!’
하급 무사들은 이번 토벌 작전에 남궁호가 몰래 따라가는 걸 눈감아줬다.
누가 봐도 간단한 싸움이 벌어질 게 뻔했으니까.
이에 남궁호는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하급 무사들 틈에 합류했다.
‘뻐꾸기 생존법 간다!’
뻐꾸기는 남의 노력으로 성장하는 탁란의 대표주자였다.
- 작가의말
아프시다고요?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스... 뭐라고 하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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