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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용감한황소 님의 서재입니다.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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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황소
작품등록일 :
2024.05.02 12:59
최근연재일 :
2024.05.21 20:05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173
추천수 :
20
글자수 :
92,147

작성
24.05.14 16:05
조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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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8쪽

DUMMY

“봉투 필요하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양손에 한가득 라면을 사들고 토끼굴로 갔다. 가는 중에 생각해보니 역시 봉투가 필요했다. 할인이라는 상술에 혹해 단번에 너무 많은 라면을 산 것이 패착인 듯하다. 봉투가 필요했지만 “네, 하나 주세요.”라고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빈대를 기억하는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그렇게 손을 휘저으며 절대 부정을 점원에게 일렀다. 어쩔 수 없이 행동과 일치하는 말을 선보였다. 고작 20원이 아까워 일치시킨 언행이었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주점들이 줄지어 장사를 하고 있고 다가오는 주말을 기념하며 건실한 일꾼들이 고단함을 풀고 있다. 가족, 친구, 연인, 하물며 짐승도 짝을 이루며 저녁을 거닐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먹고 남은 커피를 전봇대 주위에 던져두고 그대로 사라졌다. 전봇대 주위에 쌓여진 폐지에 이물질이 잔뜩 묻었다.


‘이러면 안 되지, 몰상식한 놈들아.’


앞날이 창창한 본인들과는 전연 상관없는 폐지에 배려할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되돌아오는 법이다. 그렇다. 그들은 방심하고 있었다. 이 단란한 주점에 모인 젊은이들과 조직의 기둥인 중장년 중에, 누가 감히 폐지를 주우며 노후를 보내고 있을 미래를 꿈꾸겠는가! 방심하고 있다. 폐지를 소중히 해야 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 푼이 아쉬운 처지, 적절한 표현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동전 한 닢에 생계가 오고가는 그날이 온다면 여기 모인 주정뱅이들은 폐지를 숭배하게 될 것이다. 악취를 뚫고 폐지에게 다가가는 것은 누구인가. 미래를 확신하는가? 다르다. 그들과 다르다. 폐지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보다 나은 노후를 정말로 확신하는가? 오만이다. 오늘날의 폐지꾼 중 과연 단 한 명이라도 ‘수레’를 짊어진 삶을 예상한 이가 있다면 허락하겠다. 돌을 던져라.


그래서는 안 되었다. 하필 거기서 그 여자와 그 소녀가, 폐지꾼이 불현 듯 겹쳐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리 성실한 여자에게 그래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생수 한 병을 샀다. 전봇대로 갔다. 생수 뚜껑을 열고 물을 쏟아냈다. 이물질을 닦았다. 라면 한 묶음을 그곳에 두고 토끼굴로 들어갔다.

2평 남짓한 방, 양손을 좌·우로 쭉 펼치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회전마다 손에 무언가가 닿았다. 제자리에서 고작 한 바퀴도 온전하게 돌 수 없는 공간이었다. 갑갑했다. 속이 막혔다. 어두운 방 안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눈은 떠도, 눈을 감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쩌면 맹인인가. 모르겠다. 무엇을 보고 살아갔는지 모르겠다. 침대에 누웠다. 허기진 배는 뒷전이었다.

춥다. 머리에서 열이 나는 것 같다. 돌아가고 싶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갈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없다. 돌아가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다. 여기가 보금자리임이 분명한데, 보금자리가 아니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곳은 토끼굴이 아니어야 한다. 그렇다면 떠나온 그 곳, 그녀가 있는 집이 돌아갈 목적지인가. 그 또한 아니다. 달리 명확한 목적지가 있었기에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다. 괜한 푸념이다. 돌아가고 싶다.

새우처럼 옆으로 드러눕고 이불을 끌어안았다. 이마 위에 손을 얹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열병이 재발했다. 감기라고 하기에는 무겁다. 사단이 난 것처럼 소란을 떨기에는 가볍다. 단지 오늘 하루가 유독 험악했을 뿐이라고 넘겨짚었다. 손끝이 저려왔다.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것일까. 자세히는 모르겠다. 저린 손끝을 가랑이 사이로 감싸 안아주며 온기로라도 달래봤다. 10분가량 누웠을까. 땀에 절은 육체가 불쾌했다. 고로 땀내를 씻어야 했다. 끼니를 챙겨야 했다. 책상에 앉아 준비를 해야 했다. 할 것이 이리도 많았지만 그것들을 되뇔수록 더 깊이 무기력해졌다. 10분이 모여 시간이 되었고 그렇게 잠들지 않고 누워가며 시간을 버렸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침대와 한 몸이 되어있다면 분명 휴식을 취하고 있음이 맞는데, 편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쾌했다. 불쾌함을 감수하고 저질의 휴식을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 했다. 갈수록 이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잠을 잤다. 잠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취한 것이 아니다. 일종의 도피다. 도피의 동력은 나태함이다. 늘상 그렇게 여겼다.

억지로 잠에 들고 일어나자 4시간이 흘러 있었다. 시계는 어느새 자정에 닿았고 머리는 무거웠다. 열병 탓일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수면을 취했지만 잠에 들지는 않았다. 완전히 감기지 않은 눈, 실눈 사이로 의식이 들락날락거리며 완전한 수면을 방해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여유 있게 다음을 준비할 때를 놓친 것에 약소한 짜증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온전히 휴식을 즐긴 것도 아닌 이 무익한 수면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박동이 소란을 피웠다. 잠에서 덜 깼는지 의식이 또렷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힘차게 뛰는 박동이 목을 타고 머리로 전해졌다. 관자놀이가 땡겨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좌뇌와 우뇌가 관자놀이에 난 작은 구멍 통해 빨려나가는 것 같았다. 그 좁은 관자놀이의 한 점으로 뇌가 쪽쪽 빨려나가고 있었다. 누운 자리에서 바람이라도 쐬면 좋으련만 이곳에 창문은 없었다. 머리에 피가 고여 독이 되었다. 머리에 가득찬 독을 심장이 전신으로 부지런히 옮겨주었다. 그럴수록 박동이 거세졌다. 분명 열이 가득한데 몸은 추웠다. 감기라고 하기에는 무거웠다. 병원에 가기에는 내일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대로 버텨야 했다. 몸이 열병을 못 이기고 도피를 선택했다


***


여기서부터는 꿈이다.


6)천장을 보고 누워있다. 분명 시작은 1인칭 시점이었는데 찰나에 3인칭 시점으로 바뀌었다. 방금까지 천장을 보고 있었는데 마치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이제는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 있다.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없었다. 누구인지 모르겠다. 누워있는 사람은 시체처럼 미동이 없었다. 그 사람은 표정변화 없이 괴로워했다. 그 괴로움이 허공을 타고 넘어왔다. 붉게 달군 바늘로 살갗을 찢는 통증이 감각을 타고 그대로 다가왔다. 요동치는 심장과 죄여오는 머리, 불타오르는 열 탓에 땀이 온 몸을 적셨다.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달밤의 빛이 스며드는 방 안에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몸을 떨며 고개를 좌·우로 까닥였다. 가여운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서성거렸다. 제 모습을 감추고 싶은지 빛이 드나들지 못하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둠에 몸을 숨겼다.

그림자가 달빛조명을 받으며 누워있는 숙주를 쳐다봤다.

“부끄럽다.” 그림자가 말했다.

“부족하다.” 숙주가 되받아 말했다.

그림자는 달빛이 비치는 창문으로 도로 돌아갔다. 그림자가 창문에 기대어 서고는 누워있는 숙주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봤다.

창문에 이는 빛이 그림자를 비추자 숙주의 얼굴에 그림자의 그림자가 생겼다.

그림자는 숙주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누워있던 숙주가 일어나 도끼를 한 손에 쥐었다. 얼굴에 서린 그림자를 내려찍었다. 충격에 안구가 튀어나와 제 구실을 못하자, 바라던 대로 무엇도 볼 수 없게 됐다. 눈이 멀자 그제야 안식이 도래했다.


꿈이 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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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6) 죄와 벌, 미성년,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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