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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용감한황소 님의 서재입니다.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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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황소
작품등록일 :
2024.05.02 12:59
최근연재일 :
2024.05.21 20:05
연재수 :
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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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47

작성
24.05.09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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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DUMMY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안방에는 여전히 교회의 신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과를 즐기며 얘기를 나눴고 그녀의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들에게 무심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에 등을 기대어 앉아 소리를 엿들었다. 그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좀처럼 듣기 힘든 웃음이었다. 입에 한 가득 담은 보따리를 풀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순간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과장된 호응을 해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다소 경박하게 보일정도로 과감 없이 서로를 드러냈다. 차례를 돌며 이야기를 풀던 중 그녀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소근 거렸다. 마치 진중한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잡았다. 호기심에 문 가까이 귀를 붙여 그녀의 이야기를 훔쳤다.


‘생계.’

그녀는 적빈 속에 쪼들려가며 허덕이는 암울한 현실을 토로했다. 옛적에도 처음 본 이에게 일말의 고민도 없이 빈곤을 고백하더니 제 버릇을 못 고치고 또 다시 감춰도 무방한 것들을 내세우고 있었다. 미성년, 도스토예프스키

수치심을 모르는 그녀는 으레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담아 두어야 할 사실까지 쉽게 털어놓았다. 기꺼이 약점을 내주며 천대당할 명분을 제공하는 지적 능력이 모자란 어른이었다.


‘취업.’

경제적 능력이 떨어지는 가장을 앞세우며 그녀는 앞서 말한 생계의 난의 피해자를 자처했다. 가소로웠다. 그녀가 이 집에 남겨준 것은 대개 음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마치 비운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무능’을 ‘불행’으로 포장하며 가당찮은 동정을 바랐다. 가정의 위기를 자처한 사람은 따로 있다며 책임을 전가하는 그녀에게 환멸을 느꼈다. 되도 않는 가납사니들은 좋다며 맞장구를 치고는 그녀를 비운의 여인으로 치켜세워주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가만히 앉은 채 썩은 고기가 되어버렸다.


사담이 끝이 났는지 가납사니들이 하나 둘 일어나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신자님들 가신데 나와서 인사드려.” 그녀가 다분히 은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못 들은 척 했다. 악담에 가세한 그들에게 불만을 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불복종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의 은밀한 대화. 들어서는 안 되는 그 말 중 그 무엇도 이 방문을 타고 넘어오지 않은 것처럼,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던 것처럼 오로지 그녀를 위해 못들은 척 연기를 할 뿐이었다. 시건방진 태연함은 정말로 그녀를 위해서였다. 문턱을 넘어오는 말들을 계속해서 무시하자 그녀가 구태여 방문을 열며 재차 말했다.

“인사 안 드릴 거야?” 그녀가 평소와는 다른 교양 있는 억양으로 말했다.


못이기는 척 그녀를 따라 나가 인사를 드렸다.

“안녕히 가세요.” 눈조차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거북했다.


“그래요, 잘 있다 가요.” 가납사니가 눈치도 없는지 넉살 좋게 인사를 맞받아쳤다.

“나중에 교회 한 번 나와요.” 가납사니가 염치도 없는지 신앙을 강매하고 있다.

“그래, 같이 좀 나가면 얼마나 좋아.” 그녀는 양심이 없다.

방금까지 사람 하나 바보 만들더니 이제 와서 신의 말씀을 전도하고 있다. 무리에 끼지 못한 외톨이가 먹잇감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까.

“교회 안 나갈 거야?” 그녀가 가납사니들 앞에서 대답을 부추겼다.

고작해야 신에게로 도피하는 것이 전부인데, 뭐 잘난 거라고 권유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우습게도 속박을 당연시 여기고 있었다. 속박에 동조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좋은 말씀은 있는 대로 하면서 정작 ‘다름’을 배척하려 들었다. 신은 자유를 싫어하는 것일까. 홀로 서려는 마음 또한 자유일 텐데.

“·····” 대답하지 않았다. 멍하니 엄지발가락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못마땅한 듯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니깐.” 가납사니들 앞에서는 기세가 등등한 그녀였다.

그녀의 말에 뭐가 그리 웃긴지 서로 장단을 맞추며 웃고 떠들었다.

“너무 보채지 마세요. 결국, 말씀에 따라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자 그녀는 굉장히 뿌듯한 마음으로 들떠있었다. 그녀의 들뜬 기분을 즐기게 해주고 싶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그녀의 밉살스러운 모습에 표정이 굳어 보일까 얼른 방으로 돌아가 얼굴을 숨겼다.


침대에 누워 계좌를 열람했다.


계좌잔고 510,200원


조만간 일을 나가 생활비를 벌어와야겠다.


저녁 무렵, 그녀가 주방에서 요리하는 소리가 났다. 냉장고의 문이 닫히는 소리,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가스레인지의 손잡이가 ‘따닥’이며 불이 붙는 소리, 프라이팬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 이상하게도 그 소리만큼은 안식이었다. 잠시 바보상자를 손에서 내려놓고 주방에서 울리는 소리를 감상했다. 참다운 안식이었다. 그냥 마음이 그랬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불렀다.

“밥 먹어.”

진심으로 은혜로운 목소리였다.

좌식 밥상에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주방에서 난 요란한 소리와 달리 조촐한 밥상이었다. 별다른 말없이 각자의 입에 끼니를 챙겨 넣었다. 그녀는 눈치를 보며 대화를 열려고 했다. 슬쩍슬쩍 말문을 틀려는 제스처를 눈치 챘지만 모른 척했다. 시종일관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알아준다면 그녀와 가납사니들이 꾸민 악담조차 숨김없이 알아주며 화를 토해낼 것 같아 불안했다. 이 순간을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랐다.


“요즘 많이 힘들지.”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일을 벌였다.


“괜찮아요.” 제발 이대로 저녁을 끝내기를 간곡히 바라며 대답했다.


“힘들면 말해. 고생시켜서 미안해.”


시발, 역겨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능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질타를 늘어놓더니 이제 와서 선량한 부인을 자처한다. 줏대라고는 없는 여자였다. 누구에게도 밉보이고 싶지 않은 알량한 심보가 고약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누구에게라도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조잡한 인간이었다.


“·····” 그녀의 위로에 대답하지 않았다. 덕분에 하루에도 두 번이나 못나졌다.


“누구가.”

“어디서.”

“어떻게.”

그녀는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는 것 같았다. 일부러 드러운 인상을 드러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줄창 얘기를 늘어놓았다. 분명 여기서 그녀와의 대화에 입을 연다면 그것은 상처가 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참아야 했다. 조금만 더 먹으면 이 하루가 지난다. 버텨내야 한다.


“수영은 생각해 봤어?” 끝내 그녀는 폭탄을 던졌다.


아, 시발. 그 나이를 먹고도 세상물정에 어두운 미련한 어른이 결국 화를 미쳤다. 여기부터는 응보다.


“무슨 수영이요.” 그녀의 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되물었다.


“저번에 말한 거 있잖아.” 기어코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때를 부리는 것 같았다.


“적당히 좀 하세요.” 그녀에게 쏘아댔다.


“적당히가 아니라, 그냥 말해본 거잖아.” 주눅 든 척 말했지만 결코 미안한 기색은 없었다.


“내가 마냥 나 좋으라고 그래? 무릎에 좋다고 주위에서들 말하니까. 더 나빠져서 큰 돈 들어가기 전에 관리하겠다는 거 아니야. 다른 집에서는 먼저 말 꺼내기도 전에 챙겨준다는데.” 그녀가 평소와 다르게 지지 않고 말했다.


문득 궁금했다. 대체 왜 그녀는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전달할 때 제3자를 곁들이며 발언의 온전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일까. ‘주위의 권유’를 들먹이고 ‘비교’를 내세우며 생각의 출처를 불분명하게 남겨두는 것일까. 일종의 모략이다. 혹여 자신의 요구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면 문제의 원인을 제 3자에게서 찾을 것이다, 의견을 수용해준 이에게 문제의 책임을 전가시킬 것이다. 한 발 물러서서 배려한 자에게 비난의 화살촉이 돌아갈 것이 뻔했다. 뻔했다. 더 이상 속지 않겠다.


“정신 좀 차리세요. 형편이 이런데 무슨 운동이에요.” 언성을 높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 갑작스런 언성에 놀랐는지 그녀는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고생하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죠. 당장 쓸 돈도 부족한데 운동은 무슨 운동이에요.” 아차, 지금껏 즐겼던 커피와 오락이 생각났다. 분명 돈이 들었을 텐데.


“집에서 쉬시면서 벌어다 준 돈 쓰시니까 그새 잊으신 거예요?” 어쭙잖은 대꾸조차 못하게끔 뇌까렸다. “입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그냥 드시던 거나 마저 드세요.” 3)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최후.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여백은 없었다. 소리의 여백은 온통 검게 칠해져 있었다. 지금 소리는 온통 시꺼멓다. 침묵이라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녀의 버릇이 나왔다. 양 손바닥을 각 무릎에 얹히고는 쓸어내렸다. 계속해서 쓸어내렸다. 계속해서 쓸어내렸다. 정말이다. 계속해서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곤경에 빠질 때면 습관적으로 쓸어내렸다.

쾌락을 음미했다! 승리했다는 확신에. 절정에 달아올랐다. 그녀의 낙태한 고양이 상 같은 표정을 보며. 아직 그릇에 밥이 반이나 남았지만 더 먹지 않아도 좋았다. 이것으로 하루가 뿌듯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으려 먼저 밥상에서 일어나고자 했다. 노련한 장수는 결코 상대에게 칼자를 쥐어주지 않는 법이다. 카리스마를 더하기 위한 계획을 구상했다.


(1) 자리를 벅차고 일어남과 동시에 현관문 밖으로 나선다.

(2) “밥 먹다 말고 어디 가?”라고 묻는다면 대답하지 않는다.

(3) 밖에서 적당히 시간 좀 보내고 난 후 그녀가 좋아하는 빵을 산다.

(4) 기다리다 지친 그녀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 때쯤 돌아온다. 피곤한 그녀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방비할 것이다. 이를 이용하자.

(5) 지친 그녀는 더욱 애쓸 것이다. 이 복잡한 상황을 버텨낼 재간이 없기에 얼른 화해하고 싶을 것이다.

(6) 조금 더 기다린다. 혹여 그녀가 걱정과 물음을 보내온다면 철저히 무시한다.

(7) 그녀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잠든다면 밥상 위에 빵을 올려둔다.


그 짧은 시간에 과거의 경험에 의거한 비책을 꾸며내다니 탁월한 전략가였다. 자, 이제 계획한 대로 실천만 하면 된다. 이미 상대의 사기를 꺾어 버린 이상 마무리 일격을 가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면서 일부러 밥상을 툭 치대며 거추장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현관으로 향했다.


“네가 능력이 없으니깐 그렇지.” 그녀가 말했다. 침착한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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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전과는 달랐다.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 봤을 때 이런 적은 결단코 없었다. 이상했다. 전과는 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파리한 몰골로 홀연히 당하고 있어야 했다. 이상했다. 전과는 달랐다. 그녀는 반드시 가련한 피해자가 되어야만 한다.


‘무능하다고? 무능하다고? 이 집의 기둥이 누구인데? 이 집의 가장이 누구인데? 누구 때문에 온전히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너무한 것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평소답지 않게 그녀는 왜 반항하는 것일까. 어디서 저런 용기가 솟은 것일까.


‘역시 가납사니들이 문제다.’


오후의 악담이 연습이 되어준 것이다. 가납사니들과 함께 무능을 노래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감히 분수도 모르고 어깨를 견주려는 것이다.


‘무능하다. 무능하다. 무능하다. 무능하다’ 그녀의 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날린 비수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을 바라보며 멈추어 섰다. 고작 말 한마디에 꽂혀 계획에 차질이 생기다니 얼른 대응해야 한다. 별수로지 않게 현관을 벅차고 나가며 그녀의 기세를 눌러버려야 한다. 허나 이미 분위기는 반전되어 있었다. 등 뒤에 있는 그녀의 표정이 상상되었다. 얼마나 기세가 등등할까. 역전의 장수가 된 그녀는 내심 상대의 당혹함을 즐기고 있을 것이었다.


“무능하다고?” 정신을 부여잡고 대처했다. 최대한 담담하게, 낮은 음성으로 읊조리듯 말하며 위협을 가해봤다.

젠장, 고개가 떨리기 시작했다. 상대를 면전에 두고 당황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개가 미세하게 우측으로 ‘획’하고 돌아가더니 금세 정면으로 돌아왔다. 작은 움직임이지만 분명한 떨림이었다. 그녀가 이 거지같은 버릇을 눈치 채곤 승리를 확정짓기 전에 어서 자리를 떠야했다.

“쿵”

우선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필살의 일격이어야 할 외출이 초라한 도피로 변질되었다.

우뚝 멈추어 서서 상황을 복기해봤다. 실수는 없었다. 분명히 압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과 이유는 타당했다.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객기를 부리는 것일까. 상황을 면밀히 따져보기도 전에 허접한 집중력이 바닥을 드러냈다. 뭐 하나 쉽지 않다.

주제를 바꿨다. 이 싸움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생각해보니까 시비를 건 것은 그녀였다. 일방적인 요구와 식사 자리에서의 무례한 언사는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분명 그녀의 탓이었다. 억울했다. 애꿎은 말을 꺼내어 사람 기분이나 잡치게 해놓다니. 밖에 있어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 호사스럽게 ‘수영’이나 할 팔자가 아니었다. 당장에 내일 먹을 쌀이 떨어지고 있다니깐?


그녀의 예상치 못한 발언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봤다.


“무능하다고?” 혼잣말을 지껄이며 허공에 물었다.

끝내 그 물음에 부정하지 못했다.

붉은 달이 떴다. 구름이 어둠에 몸을 감추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이가 집에 들어갔나 보다. 공터를 향해 걸었다. 주차된 차를 향해 걸었다. 차 앞에 도착했다. 이런, 차키를 가져오지 않았다. 차문에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갈 곳이 없었다. 담배 한 까치를 꺼냈다. 숨을 쉬었다. 이럴수록 호흡에 집중하며 온몸에 산소가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신경써야했다. 숨을 빨아드리고 목젖 가까이 연기를 머금었다. 소리 내지 않고 ‘후’ 뱉으며 한숨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새하얗다. 한숨의 색은 참으로 허옇다. 찰나에 감정이 스쳐갔다. 감정의 정체는 짜증이 아니었다. 분노도 아니며 수치심도 아니었다. 비참하거나 딱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따귀 세례를 받은 것 같았다. 가령, 웬 꼬마가 아장아장 걸어온다. 이뻐해 주겠다며 무릎을 낮추어 시선을 맞춰줬다, 그 꼬마는 다짜고짜 뺨을 후려친다. 근데 그것이 또 은근히 아프다. 아이의 보호자는 “애들이 그럴 수도 있죠.”라며 천연덕스럽게 넘어간다. 느닷없이 폭소가 터졌다. 어이가 없었다. 허탈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섭섭했다. 간곡히 평화를 원했다. 간절하게 바란다면 이뤄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를 모방하며 기도를 흉내 냈다. 손을 곧게 피고는 서로 맞댔다. 눈을 감고 웅얼거렸다.


“신이시여,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무엇하는 양반이십니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버틸 수 있는 고난만을 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고난의 정도는 무슨 기준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버티지 못한다면 온전히 어린 양의 탓입니까. 당신께서는 고작 이 따위에 물러서는 어린 양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당신 입장에서는 ‘고작 이 정도’겠지요. ‘고작 이 정도’에 주저앉는 피조물을 바라보실 때면 당신께서는 얼마나 이를 못미더워하시겠습니까. 허나 당신께서는 어린 양을 질책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마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만들어놓고서는 무책임하게 오늘을 떠넘기시면 안 됩니다. 잉태의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 함부로 지껄이지 마십시오. 결코 바란 적 없습니다. 괜한 것을 낳지도 말고, 이 괴랄한 세상을 만들지도 말고, 이 세상을 위해 피를 흘리시지 않았어야 합니다. 온통 당신 멋대로잖습니까. 당신이 고독을 즐기지 못해 만든 최후입니다. 혹여 당신에게서 비롯된 기준이라면 참으로 이기적인 것이십니다. 당신께서는 스스로를 전지전능이라 떠들어 되시지 않았습니까. 어린 양은 무능합니다. 이토록 무능합니다. 살피어 주시겠다면 친히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춰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책임이라 말합니다. 당신께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평화를 주십시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평화를 주십시오.”


혹시나 기대했지만 평화는 역시나 찾아오지 않았다.


“당신을 믿을 바에는 차라리 나무를 심겠습니다. 그 나무를 보살피겠습니다. 당신처럼 씨만 뿌리고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당신처럼 씨만 뿌리고서 방관하지 않겠습니다. 잘난 새싹에게만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보아라, 말하지 않았느냐.’라며 효심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못난 새싹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애써 자란 새싹에게 다가가 순종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과는 다릅니다. 오로지 하나의 새싹만을 거둘 것입니다. 결코 그 무엇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가 절벽의 끝자락에 섰다. 단언컨대 마지막 기회였다. 푸념 어린 응어리를 가엾게 여겨주어야 했다. 이만하면 못이기는 척 평화를 내려주셔야 했다.


“역시 당신은 믿을만한 재목이 못 됩니다.”


기도를 끝냈다. 여전히 무용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서 그 끝에 불을 밝혔다. 숨을 안으로 들이마셨다. 담배 끝이 붉게 타올랐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담배 끝에 빛이 있다. 고로 이 숨의 끝에 태초가 있다. 여기서부터가 태초이다.

마침 이제 막 자라나는 새싹이 눈에 띄었다.


‘더해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 이만하면 됐다 가서 쉬어라’

담배 불로 새싹을 지졌다. 이 또한 새싹을 ‘돌봄’이다.

추웠다. 집으로 돌아가고자 걸음을 내딛었다. 얼마안가 골목의 제과점이 보였다. 통유리 너머로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몸매를 드러냈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제과점에 들어갔다. 그녀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를 샀다. 비쌌다. 사는 김에 함께 먹을 우유도 샀다. 우유가 든 비닐봉지와 케이크를 손에 쥐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밖에서 바라본 집은 마치 지상으로 고개만 삐죽 내민 두더지 같았다. 목 위로만 겨우 세상을 맞이하는 어두운 구석이다.

마냥 검디 거믄 그 집구석에 인적이 보이지 않았다.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전등을 꺼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자고 있기를 바랐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잠금장치가 열렸다. 그녀의 방에서 TV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오직 그 불꽃만이 이 집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녀의 방 말고는 온통 암흑이었다.

거실로 진입했다. 그녀의 침실이 보였다. 그녀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어두운 배경에 TV의 빛만이 그녀의 얼굴을 어렴풋이 조명했다.

4)그녀는 물고기처럼 표정이 없었다. 별말 없이 거실 밥상에 선물을 올려두었다. ‘부스럭’ 비닐소리가 났다. 민망했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 숨고 싶었다.


“계속 그럴 거면 사오지를 마.” 그녀가 말했다.


‘?!’

부끄러웠다. 어디까지 간파당한 것일까. 사실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 끝이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이 연극의 악역을 계속 맡고 싶지 않았다. 동공이 축소된 느낌이다. 주변 사물이 암흑에 가려져 더욱 흐릿하게 상을 맺었다. 세상이 작아졌다. 평소보다 모든 것들이 멀게만 느껴졌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세계가 없어지고 있었다.


“끝입니다.” 나직하게 말했다.


짐을 쌓았다. 옷가지를 꺼내고 닥치는 대로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지금 이 행동에 이성은 자리하지 않았다. 몸이 시키는 대로, 되는대로 물건을 구겨 넣었다. 그녀는 말리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끝이다.

그녀가 따준 검은 목도리가 눈에 들어왔다. 충동만이 전부인 순간에 멈칫했다. 검은 목도리를 챙겼다. 그렇게 집을 나왔다.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알이다. 완전한 알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올 의지가 없었다. 세계에 나아갈 의지가 없었다.


5)“그 알을 깨지 말지어라, 알속의 세상은 오로지 그 주인만이 볼 수 있는 세계이다. 오로지 독점할 수 있는 ’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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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부터는 꿈이다.


보랏빛 바다 위를 떠다니는 침대 위에 물고기가 누워있다. 미소 짓는 호랑이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어 물고기를 도발했다. ‘함께 놀자는 걸까?’ 물고기는 기뻤다. 때가 묻지 않은 물고기는 순진했다. 침대 한가운데를 벗어나 차츰차츰 바다 쪽을 향해 몸을 뉘었다. 한 호랑이가 수면 위로 날아오르며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를 한입 베어 물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고기는 아프지 않은 모욕은 장난이라고 여기며 멋쩍게 웃었다. 호랑이들도 함께 웃어주었다. 그들의 미소에 물고기가 덩달아 기뻐했다. 호랑이들의 물장구에 바닷물이 침대 위를 쓸고 갔다. 파도가 일렁거렸다. 물고기는 파도에 휩쓸려 하마터면 침대를 벗어나 바다에 빠질 뻔했다. 장난기 가득한 그들 무리를 보고 물고기는 욕심이 났다. 괜히 친한 척을 하며 호랑이들에게 선뜻 장난을 치기도 했다. 괜한 장난에 그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물고기는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호랑이들은 호쾌하게 받아주며 물고기를 유혹했다. 물고기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침대의 외곽으로 이동했다. 한 발짝만 더 가면 완전한 바다였다. 미소 짓는 호랑이들이 물고기를 환영하며 재주를 부렸다. ‘욕심이 아닐 수도 있어.’ 물고기는 과감하게 바다에 몸을 적셨다. “하하호호” 물고기는 호랑이들과 섞여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보라와 빨강이 만나 자주색을 띄었다. 바다는 와인이 되었다.


꿈이 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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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3) 최후, 이상

4) 미성년, 도스토예프스키

5) 데미안,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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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4.05.08 6 1 6쪽
6 24.05.07 6 1 2쪽
5 +1 24.05.06 8 1 10쪽
4 +1 24.05.05 11 1 6쪽
3 +2 24.05.04 15 1 7쪽
2 +1 24.05.03 14 1 3쪽
1 +2 24.05.02 27 1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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