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x용감한황소 님의 서재입니다.

나 아포칼립스에서 전당포 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완결

용감한황소
작품등록일 :
2024.04.02 22:15
최근연재일 :
2024.04.14 22:3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215
추천수 :
3
글자수 :
76,713

작성
24.04.08 22:30
조회
12
추천
0
글자
25쪽

애미 없는 둘리들.

DUMMY

"총각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


할멈의 첫 마디였다.


이 다음에 뭐라고 했더라.


"다 큰 총각 꼬라지가 이게 뭐야."


그러고 보니 할멈과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었지.


겨울의 시작이었던가. 그럼 10월이겠지. 아니야. 겨울의 끝자락일 수도 있다. 그럼 1월인가.


사실 구체적인 날짜 따위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그날의 인상만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모쪼록 그해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다.


"잘 곳은 있어?"

"...."

"갈 곳은 있고?"

"...."

"시방 으른이 물어보는데 어디서 싹바가지 없게 멀뚱멀뚱 눈깔만 껌벅여."

"...."

"벙어리여?"


할멈은 '벙어리여?'라고 말하는 동시에 내 뒤통수를 가격했었다.


나중 가서 때린 이유를 물어보니, 입 다물고 있는 꼴이 밉살스러워서 후렸다고 한다.


내가 진짜 벙어리라서 대답 못한거면 어쩌려고 때린 건지.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냅따 후리는 걸 보면 편건 없는 늙은이였던 것 같다.


"사내 새끼가 대낮부터 매가리 없게 자빠져 있고 그래."

"...."

"동태 눈깔 작작 껌벅거리고 어여 일어나. 가서 밥 먹게."

"...."


할멈이 내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나는 되려 그 손길을 뿌리쳤다.


"다 큰 자식이 나잇값 못하고 고집은 무슨 고집이야."


할멈이 또 내 정수리를 후려첬다.


때린 데 또 때리는 걸 보면 헌터 기질이 다분한 여편네였다.


"굶어 뒈지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할멈은 곧장 뒤돌아섰고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굽은 등이 눈에 밟혔다.


그간 얼마나 많은 짐을 이고 살았을까. 그녀의 등에 얼마나 많은 계절이 쌓였을까.

벼는 익을수록 허리를 숙인다는데, 할멈의 척추는 짓물러 썩기 직전이었나 보다.


"...."


사라지는 할멈을 보며 나는 침묵으로 배웅했다.


이내 할멈이 완전히 종적을 감추자 안 그래도 인적 드문 골목이 유난히 적적하게 느껴졌다.


***


우리가 다시 만난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굶어 뒤지든지 말든지 네 알아서 해."


할멈이 내 코앞에 양은 냄비를 들이 밀었다.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 넣은 것이 멀리서 보면 개밥 찌꺼기 같았다.


나는 한 술조차 뜨지 않고 눈을 감았다. 할멈은 잔소리 대신 쯔쯔 혀를 차며 사라졌다.


***


그리고 또 다음날이었다.


"아직도 명줄이 달려 있었네. 아주 용하다 용해. 누가 보면 제사상 없이 굿이라도 지내는 줄 알겠다."


***


또 다음날이었다.


"세상만 멀쩡했으면 내가 어디 테레비에 제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야. 어떻게 사람이 물 한 방울 안 마시고 여태 살아있어. 옥황상제랑 불알 까고 사우나라도 하고 왔냐? 명줄 하나는 기가 막히내 기가 막혀. "


그 다음날도. 그그 다음날도. 그그 다다음날도.


할멈은 매일 같이 찾아와 양은 냄비를 들이밀었다.


"요즘 애들은 먹을 거 귀한지도 모르고 커서 배가 불렀지."

"...."

"먹기 싫으면 말아라. 뒀다가 복날에 잡을 개새끼한테나 먹여야지."


이만 했으면 갈 줄 알았다. 다들 그랬으니까. 내 고집에 못 이겨 떠났으니까. 할멈도 똑같으리라 여겼다.


"온 김에 나도 끼니나 때우다 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자빠져 있어."


할멈이 찌게 국물에 밥알을 적시며 야무지게 비벼댔다. 숟가락 가득 건더기를 뜨더니 입에 넣었다.


거참 입 좀 다물고 드시지 연신 쩝쩝거리신다.


그런데 저 할멈.. 앞니는 어따 팔아 먹은 거지? 뭐- 통풍은 잘 되겠네.


"이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데 이왕 저승가는 길에 양껏 퍼먹다 가련다. 할미 곱게 차려 입고 떠나면 노잣돈이라도 넣어줘."

"...."


할멈의 먹방은 미디어가 폭파된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쇼였다. 나는 한참이나 그 모습을 지켜봤다.


"다 늙은 할미 얼굴 뭐 이쁘다고 빤히 보냐. 왜 이놈아, 지꺼 뺏기니깐 이제야 군침이 돌아?"

"...."

"거 배고프면 염불이라도 외워봐. 걸뱅이 불쌍타고 동냥이라도 해줄지 누가 알아."

"...."

"자라 새끼마냥 고개는 뭐더라 내밀어. 궁금하면 봐라, 봐.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배고프면 와서 수저 좀 뜨던지."


김장 김치 특유의 구수한 쉰내가 코끝을 찔렀다.


고춧가루의 야무진 붉은색이 시각을 자극했다.


평상시엔 쳐다도 안 봤던 두부가 오늘따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쌀은 항상 옳았다.



할멈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건던기에 고기가 없어."


뒤통수가 아려온다. 아무래도 뼈 맞은 거 같다.


***


'부모님께 효도해라. 사람 간에 인사는 기본이다. 해야 할 것을 미루지 말아라. 선의를 가지고 살아라.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선 안 된다. 염치와 양심을 지켜라.'


유년시절부터 지겹도록 들은 훈화 말씀이다.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난 단 한 번도 어른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 본 적이 없다.


바른 말은 지나가는 서당개도 하는데, 사람 좋은 척 혓바닥 놀리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애들 앞에서 주름을 잡는지 모르겠다.

정작 당신들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굴 가르치려 드는지 가소로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한다. 어른들은 너무 바빴으니까. 어른들은 너무 피로하니까. 그래서 늘상 쉬운 길을 선택하고 싶어 했으니까. 아가리만 털어대는 건 쉬웠으니깐.


모범을 떠들어대고만 싶었겠지.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할머니 뭘 이런 걸 다 줘요."

"누가 네 먹으라고 주는 줄 알아. 가서 자식들 하고 나눠 먹으라고 주는 거지. 한창 애들 클 때인데 굶겨서야 쓰겠냐."


할멈은 남의 자식도 제 새끼마냥 여기며 쌀을 나눠줬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매번 도움만 받고.."

"공짜로 빌려주는 것도 아닌데 죄송할 필요 있나. 나중에 여유되면 천천히 갚아."


도움 받는 사람의 감정까지 헤아려 줬다.



"돕고 살아. 사람끼린 돕고 사는 거."


할멈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동시에 내 생의 유일한 모범이었다.


***


"할머니 저 젊은 친구는 누구예요?"

"손주."

"손주? 할머니가 언제부터 손주가 있으셨다고요?"

"있지 왜 없어. 한 집에서 먹고 자고 키우면 그게 다 내 손자지."


할멈은 매번 나를 손주라고 소개했다.


물론 동네 사람들은 나를 할멈의 손주보단 낯선 이방인으로 취급하며 경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차차 나를 할멈의 병풍 정도로 여기며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저 친구가 경인마트 손주래."

"그 독거노인한테 가족이 있었나?"

"노망난 노인네가 정 붙일 곳이 필요해서 사람 하나 거둔 거겠지."

"혹시 저 친구도 소문 듣고 온 거 아니야?"

"이 사람아 그 소문 믿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나 홀로 동네를 떠돌아 다닐 때면 동네사람들이 곧잘 수군거렸다. 대체 그 소문이란 게 무엇이길래 꼬리표처럼 따라오는지 모르겠다.


***


밤 열시가 넘은 시간.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 가게문을 두드렸다.


"할머니 계세요? 저 은정 엄마예요."

"애기 엄마가 이 시간에 웬일로 찾아 왔데."

"저 다른 게 아니라 해열제 좀 얻을 수 있을까 해서요."

"약? 약은 당장 없는데.."

"약이 없다고요? 왜요? 할머니가 안 가지고 계시면 우리 애는 어떻게 하라고요."


손님치곤 말투가 아니꼽다. 누가보면 할멈한테 맡겨놓은 약이라도 있는 줄 알겠네.


"내가 근래에 몸이 쑤셔서 미처 약을 구해놓지를 못 했어. 애들 아픈데 못 도와줘서 어떻게 하나.."

"말로만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든 약을 구해주시면 되잖아요."

"이 시간에 약을 어디서 구한다고 그래. 내가 내일 날 밝는대로 수소문 해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아니 할머니! 애가 당장 아픈데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우리 애 잘못되면 할머니가 책임지실 거예요?"

"은정 엄마.."

"정말 약 없는 거 맞아요? 주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예요?"


은정 엄마란 작자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할멈을 쏘아봤다.


할멈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마트 진열대에서 초콜릿 한 봉지를 꺼내 들었다.


"당장 못 도와줘서 미안해. 우선 이거라도 받아서.."

"애가 아프다는데 세상 어느 부모가 애한테 초콜릿을 먹여요. 할머니 생각을 하시고 행동하세요."


결국 난 보다 못한 나머지 방문을 열어 젖히고는 매장 진열대로 나갔다.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서 무례한 빈객을 내려다봤다.


"우리 손주 왜 자다 일어났어. 할미 얼른 들어갈 테니까 신경 쓰지말고 가서 자."

"...."


난 아랑곳하지 않고 은정 엄마를 노려봤다


기세등등하던 여자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 내 눈치를 살폈다.


어이가 없네.

방금까지 할멈에게 못된 말을 쏘아댈 땐 언제고, 이젠 주둥아리를 삐죽 내밀면서 불쾌한 티를 낸다.


혓바닥을 놀리거나 혹은 입술을 내밀거나.

여자란 종족은 정녕 입을 가만둘 줄 모르는 것이란 말인가.


"내일까지 우리 애 먹을 약 구해주실 수 있는 거죠..?"

"그려 그려. 내일 오면 할미가 약 꼭 구해둘께.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조심히 들어가 봐."


어처구니 없는 일은 앞으로도 연신 일어났다.


"어르신 죄송합니다만 한 번만 더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이렇게 계속 도와줄 순 없어.. 저번에 빌려간 쌀도 아직 다 안 갚았으면서.."

"어르신 제가 안 갚는 게 아니라 못 갚는 거잖아요. 급한 불만 끄면 바로 되갚아드리겠다니까요."

"그래도.."

"섭섭하네요. 그간 저희가 봐온 정이라는 게 있지. 사람이 어렵다는데 어떻게 매몰차게 거절하실 수가 있으세요."


할멈이 호의를 베풀수록 사람들은 이를 당연시 여겼다.

아무래도 세상엔 둘리가 많은 거 같다. 오는 사람마다 엄마 없는 게 티가 난다.


***


할멈의 심부름을 가는 길이었다.


"젊은 친구 잠깐 일로 와봐."

"...."

"혹시 그 소문 듣고 노인네한테 붙어 먹은 거야?"

"...?"

"경인마트 아들네미가 멸망주의자였다는 소문 때문에 붙어 있는 거 아니냐고."


멸망주의자.

세계의 종말을 기대하며 지하벙커와 식량을 구비해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안보와 치안이 귀신같이 떡락한 오늘날 가장 이상적인 생존 인구였다.


"그 소문 믿고 노인네 곁에 있는 거면 일찌감치 손 떼. 우리도 그 소문 듣고 노인네 집 뒤적거려 봤는데 벙커에 비읍(ㅂ)자도 안 나왔어."

"...."

"노인네 돈은 많아서 식량은 곧잘 구해오는데, 그 이상은 쓸모가 없어. 젊은 친구도 괜한 짓해서 힘 빼지 말고 살 길 찾아."

"...."

"이거 왜 이래. 요즘 같은 세상에 우리끼리 순진한 척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당신이나 동네사람들이나 다 자기 잘 먹고 잘 살자고 그 노인네 이용하는 거 아니야."

"...."


평범한 동네.


평범한 거리.


평범한 사람.


오늘따라 이 동네가 역겹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요즘 이웃주민들이 젊은 총각 때문에 걱정이 많아. 늙은 할멈 구슬려서 괜한 짓 하려는 건 아니지? 자네가 동네 사정을 몰라서 그러는데 그 할멈이 가지고 있는 물자는 엄연히 마을을 위한 생필품이거든."

"마을 사람들끼리 돌려가며 빼먹어야 하는데 불청객이 끼어드는 게 아니꼽다는 말씀입니까?"

"젊은 총각이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오해가 있게 하고 그래. 좋게 말하자면 경인 마트 물건은 마을 구호품이다~라고 생각하자는 거지."


어느샌가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왔다. 그들의 눈은 불신으로 얼룩져 있었다.

도둑놈들이 엄한 사람 붙잡고 도둑 취급 하는 꼴에 헛웃음이 나왔다.


일순간 사이렌이 울렸다.


"지역 자치군에서 안내드립니다. 현시간부로 비상 경계령 2단계를 발령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현시간부로 비상 경계령 2단계, 비상 경계령 2단계를 발령합니다. 인근에 계신 주민 여러분은 군의 안내에 따라 즉시..."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게이트가 발생했고 위험 경보 발령에 마을 사람들은 피난소로 대피했다.


"주민분들은 저를 집중해주십쇼. 지역 대비 벙커로 이동하기 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견장에 무궁화 한 송이 피어올린 군인이 팜플렛을 ~펄럭~ 였다.


「대 이계 임시 예비역 모집.」


"이미 몇 차례 보셔서 익숙하신 분도 있을 겁니다. 군에서는 원활한 지역 방위를 위하여 게이트 출현 24시간 내 임시 예비역을 모집하고 있으므로 신청하실 분은 사열대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임시이기 때문에 군인처럼 적진 한 가운데 투입되는 일은 없습니다. 약속된 기한까지 지역 방위에 힘써주신다면 소정의 보상을 약속드립니다."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 임시 예비역은 어떤 작전에 파견되나요?"

"지역 수호를 위한 지진 구축에 투입되며 그 밖에 인원은 초병 근무에 할당됩니다."

"진지라면..?"

"게이트 출현지에서 각각 3km, 6km, 9km 떨어진 거리에 진지를 구축할 예정입니다. 임시 예비역은 이 중 3차 저지선인 9km 지점에서 작전을 수행합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경찰도 군인도 헌터도 아닌 민간인이 괴물을 상대할 의무는 없다.


"사태가 시급합니다. 임시 예비역은 대체로 저지선 일대 방어 구축에만 동원될 예정이며 결코 전투에 가담하는 일은 없습니다. 만일 이대로 지역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여기 계신 모두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가족분들을 위해서라도 필히 지원해주셨음 합니다."


총구만 들이밀지 않았을 뿐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나를 포함한 다수의 남정네들이 가족들의 안전을 담보로 임시 예비역에 지원했다.


"소.... 손주야."


할멈이 내 손을 쓸어내리며 안면 근육을 축 늘어뜨렸다. 당장이라도 눈물 콧물 다 쏟아낼 기미였다.


"돕고 살라면서요. 걱정하지 마시고 여기 계신 분들이랑 벙커에 들어가 계세요."


게이트 출현지에서 9km 떨어진 지점.

그간 내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역량이라면 고작 이란 곳에서 목숨을 잃은 확률은 희박하다.

오히려 티 안 나게 대 이계 부대를 조력하면 나뿐만 아니라 주변 이웃들까지 생존할 확률이 올라간다.


***


"씨팔새끼들이 D 듭급 게이트라고 했잖아?!"

"중대장님 방금 막 상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현 상황으로 추측컨대 이중 게이트가 발현된 것 같답니다."

"이중 게이트라면 게이트 안에 게이트??"

"네. 근래에 보고된 신종 게이트입니다. 게이트 내부의 또 다른 게이트가 못해도 B 등급 게이트로 예측됩니다. 아무래도 마력 측정 중에 불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중 게이트에서 고위험군 게이트가 출몰하는 바람에 변수가 발생했다.


전장에서 잘못된 현장 파악은 곧 잘못된 작전으로 이어졌고 결과는 당연하게도 괴멸에 가까운 패배였다.


"후퇴!!! 후퇴!!!!"

"더 이상 물러날 진지도 없는데 어디로 후퇴하라는 겁니까?!!"


2차 3차 저지선까지 군부대가 밀려났다. 당연히 작전에 지원한 민간인들도 전투에 휘말렸고 상당한 사상자가 동반됐다.


"상부에서 하달된 명령은?"

"지역민들을 포기하고 퇴각하랍니다."

"뭐?!"

"상황이 여의찮답니다. 이대로 병력을 지원해봤자 인력과 물자만 낭비하게 되는 꼴이라고.."


지금 한국은 절대적으로 물적 자원이 모자란다. 하물며 게이트가 전 세계에 퍼진 까닭에 자원을 사올 수도 없다.

수출 수입 무역로가 막힌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는 최소한의 손실로 최대한의 이익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고로 정부와 국방부는 가망없는 싸움을 멀리하며, 되는 싸움만 선택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비열하고 참담한 전략이지만 그 의의는 타당했다.

소수의 민간인 보호를 위해 물자를 낭비했다가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테니깐.


"시발놈들아!!!! 네들이 이렇게 도망가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도와달라고 해서 왔더니 버리고 가는 게 사람이 할 짓이냐? 네들이 그러고도 군대야?"

"선생님!!! 선생님들!!!! 이대로 포기하면 민가에 있는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아무리 벙커에 들어가 있다지만 저지선이 싹다 밀리면 다 뒤지기밖에 더 합니까?!"


군대는 냉정했다. 냉정해야만 했다. 만일 온정에 못 이겨 승산 없는 싸움을 했다면 도리어 나는 실망했을 것이다.


다행히 군대는 소정의 라이플만 남겨둔 채 전장을 이탈했다.


***


지원간 남정네들 67명 중 살아남은 것은 14명.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동네를 수호할 수 있었다.


"겨.. 경인마트 손주라고 했지? 자네 대체.."

"...."

"자네 같은 사람이 왜..?"

"...."

"피곤할텐데 옆에서 괜한 질문을 해댔구만. 미안하네."


생존자들은 부상자를 부축한 채 민가로 내려갔고 나는 가장 뒤쪽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 꼴이 엉망이군."

"그러게요. 남은 사람들은 괜찮을까요."

"얼른 벙커로 가보세."


아파트가 부서졌으며 학교는 불타고 있었다. 아마 몇몇 소형 괴물들이 민가에 내려와 소동을 일으킨 것 같았다. 벙커 또한 녀석들의 표적이 되었겠지.


불행 중 다행인 점은 게이트가 출현한 지 17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크립이 분포하지 않은 걸로 보아 제아무리 소형체라도 지금쯤이면 생명력이 다해 자연 소멸했을 것이다.


"벙커에 아무도 없습니다.."

"시체도 없는 걸로 봐선 단체로 이동한 것 같으니 벌써부터 낙담하지 말자고."


난 그들이 어디로 간지 알 것 같았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젊은 친구가 경인마트로 가자는데요?"

"거기라면 식량을 제외하곤 딱히 몸을 방어할 만한 이점이 없을 텐데? 남은 사람들이 뭐더러 거길 가?"

"그게.. 경인마트 손주 말로는 마트 지하에 벙커가 있다고.."

"벙커? 소문으로만 듣던 그 벙커? 사람들이 죄다 뻥카라고 하던데?"

"밑져야 본전인데 가보기라도 해보죠.."


내 예상대로 였다. 경인마트로 가는 길에 마을 사람들의 발자국이 무수히 많이 찍혀 있었다.


"그럼 그 할머니 아들이 멸망주의자였다는 게 사실이야?"

"글쎄.. 자칭 손주라고 하는 사람이 그 할멈한테 뭔갈 들었으니까 벙커 애기를 꺼낸 거겠지."


개새끼들.


다 들으라는 듯 얘기하네.


"젊은이 어디가? 경인마트로 가려면 이쪽이야."

"건물 후면부로 갈 겁니다. 그곳에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일일이 묻지 말고 따라와 주십쇼."


건물에 가까워질수록 불길한 생각이 엄습했다.


동네 구성원은 대략 54가구. 숫자로 치면 140여명 정도. 그중 1/3은 진지 구축 중에 괴물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렇다면 남은 인원은 100명이 조금 안 된다.


문제는 할멈의 벙커 규모로는 백여명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물며 천장 높이도 낮아서 위아래로 꾸겨 넣는데 한계가 있다.


"젊은 친구 가다 말고 멈추면 어떻게 해."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실례했습니다. 이대로 직진하면 바로 실외 계단이 보일 겁니다. 그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십쇼. 그곳 중심부에 있는 사다리를 타고 도로 1층 가건물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1층 가건물? 경인마트에 그런게 있었던가?"

"일일이 묻지 말라 경고했을 텐데요."


불길한 생각이 엄습할수록 속이 메스껍고 쓰러질 것 같았다.


"저.. 젊은 친구?!! 이리로 와 봐!!"

"저거 그 노인네 아니야?"

"왜 혼자 쓰러저 계셔..? 다른 사람들은?"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심장이 내려 앉았다.


".... 할멈?"


하 시발것 진짜.


할멈의 손이 차다.


진짜 왜 매번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인생 살맛 좀 난 싶으면 왜 꼭 엉망이 되는지 도통 모르겠다.


"젊은 친구.. 입장은 안타깝지만 길을 계속 안내해줘야겠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면 빨리 벙커를 찾아야 한다고."

"할멈 밑."

"응?"

"할멈의 밑에 입구가 있습니다."


주변 남정네들이 내 눈치를 살피는 척하더니 이내 할멈의 몸통을 들어올려다. 그리고는 할멈의 몸통을 할멈의 다리가 있는 곳에 맞춰두었다.


인간 샤넬은 들어봤는데.. 살다살다 인간 엑조디아를 직관할 줄이야.


"좀 도와줘들 봐!! 입구가 안 열려!"


남정네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벙커의 입구를 당겼다.


콱 닫혀 있던 문이 몇 차례 흔들리더니 '뻑!'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벙커 내부는 아비규환이었다.


만일 우리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벙커 안은 대규모 압사로 단체 초상을 치렀을 것이다.


"여보!!"

"아빠!!!"

"오빠!!"

"아들!!"


사람들을 차례대로 꺼내어 벙커 안을 조금씩 비웠다. 숨통이 트인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남자들을 찾으며 울부짖었다.

애석하게도 난 그들의 눈물 겨운 상봉에 동참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


'저들 중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궁금하다. 근데 그래서 왜 우리 할멈만 혼자 바깥에 있던 거야?'


돌연 동네 이장격으로 보이는 인물이 내 팔을 쓸어내렸다.


"그 할머니 손자라고요? 맞네 맞아. 할머니가 손자라며 소개해 준 얼굴이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 그쪽 할머니한테 목숨을 빚졌어요."


뒤이어 나온 설명은 이러했다.


지역 자치군에서 마련한 벙커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경인마트 할멈이 앞장 서서 자기 벙커로 사람들을 안내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을 수용한 나머지 문이 닫히지 않자 자기가 손수 희생양을 자처하며 문밖을 나섰다는 것이다.


ㅋㅋㅋ 재밌네.


"동네에서 할머니를 위해 기념비라도 세워드려야겠어요."

"정말 여러모로 고마우신 분이죠."

"근데 돌아가신 마당에 할머니 마트에 있는 식자재와 약품은 어떻게 하죠?"

"그야 당연히 할머니 손주분께서 소유하시지 않을까요?"

"할머니 혈연이 아니라는데요? 소문으로는 길바닥에 나앉아 있던 청년 거둔거라고.."

"그럼 할머니 유산이 꼭 저 청년에게 갈 필요는?"

"그쵸 그쵸. 할머니께서도 마을 사람들을 아끼셨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눠 쓰는 걸 바라시지 않을까요?"


벌써부터 몇몇 인물이 마트 물품을 가삿말 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그저 멍하니 생존자들의 즐거운 희망찬가를 듣고 있을수밖에 없었다.


"아.. 아저씨."


마을 이장이 사라지더니 이번엔 꼬마 아가씨가 내게로 왔다.


"저 실은 해줄 얘기가 있어요."

"...."

"어른들이 아저씨한테 거짓말한 거예요."

"...?"

"할머니가 자진해서 나가신 게 아니고.. 사람들이 문이 안 닫힌다고 쫓아냈어요.."

"응..?"


아이가 울먹였다.


허나 나는 그 아이의 눈가에 왜 눈물이 고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한 아이구나. 이름이 뭐니."

"은.. 은정이요."

"네가 은정이였구나."

"절 아세요?"

"그럼 아저씨가 너네 엄마랑 얼마나 친한데."


내가 아이와 붙어 있는 꼴이 보기 싫었을까. 은정이의 부모님이 대뜸 나를 밀쳤다.


"할머니 일은 안타깝지만 우리 애한테는 가까이 안 오셨으면 합니다."

"이 동네 사람도 아닌데 볼장 다 봤으면 이만 떠나주시는 것도 예의라고 생각해요."


음... 이때부턴 기억이 희미하다.


사람들이 무어라 떠들어대긴 했는데 모든 소리가 웅웅거리는 백색소음으로 들렸다고나 할까.


아마 난 그때 당시 손가락으로 사람들 머릿수를 헤아리느라 유난히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103명."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은정이와 눈이 마주쳤다.


"착한 아이를 제외하면 102명."


내부는 여전히 만남의 광장이었다. 다른 의미로는 한 명도 이곳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로 입구만 틀어막는다면 도망칠 곳은 없다.


"젊은 친구. 사람들 오가야하는데 사다리를 막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할머니 시신은 우리가 협심해서 안치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

"혹시 괜찮으면 의약품은 우리가 쫌 가져가도 될까? 편찮으신 분들이 많아서."

"여길들 봐 봐! 벙커 내부에 창고가 또 있어! 늙은이가 어디서 물건을 공수해 오나 했더니 보물단지를 숨겨두고 있었네!!!"


결국 이날의 난 할멈의 엑조디아를 완성시키지 못 했다.


할머니의 몸통, 머리, 하반신까지는 어렵지 않게 찾았지만..


할머니의 양팔과 둘리들의 몸뚱이가 뒤섞이는 바람에 누가 누구의 것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많이도 모아놨네."


멸망주의자의 벙커답게 내부에는 기호품과 식량 및 기타 자재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어쩌면 난 단지 이 많은 자원들을 독식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먹고 살만 하겠어."


덕분에 아포탈립스에서 잘 먹고 잘사는 중이다. 아마도.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나 아포칼립스에서 전당포 한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개 같이 운수 좋은 날 편을 삭제하겠습니다.. 24.04.10 15 0 -
공지 중요한 건 꺽이지 않는 마음. 24.04.02 20 0 -
11 잘 먹고 잘 살아라. 24.04.14 9 0 14쪽
10 내막 24.04.14 4 0 13쪽
9 식구 24.04.12 8 0 11쪽
8 버려진 과거 Ⅱ 24.04.11 8 0 15쪽
7 버려진 과거 Ⅰ 24.04.10 12 0 11쪽
6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 24.04.09 13 0 12쪽
» 애미 없는 둘리들. 24.04.08 13 0 25쪽
4 동네 바보. 24.04.06 17 0 15쪽
3 췤지피티. 24.04.04 26 0 25쪽
2 약육강식. 24.04.03 32 1 15쪽
1 나 전당포 한다. 24.04.02 73 2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