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남궁 동생(2)
아까 그 아귀의 독한 모습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정중한 모습.
칠대 명문세가인 남궁세가 도련님다운 모습이다.
“고맙소이다, 대협.”
“고맙다고?”
음, 상대의 손목을 날려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머리를 없애버리면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것이로군.
“이성을 되찾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된 거야? 넌 선천진기를 잃은 거 아니야?”
선천진기는 단순한 기가 아니라, 영혼(靈魂)을 이루는 근간이다.
우현은 분명 그걸 잃은 자는 아무것도, 못하고 소멸한다고 했다.
아귀는 그런 선천진기를 잃고 그저 흔적만 남은 존재.
나랑 우현이 괜히 아귀를 시체라 부르는 게 아니다.
그러자, 녀석이 좀 그럴듯한 말을 꺼냈다.
“지금 전 사념(死念)입니다. 저도 정확히 모르지만, 이 세상을 살며 얻은 기억과 무공이 내공 속에 자리 잡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덕분에 오랫동안, 의식을 잃은 채 제 내공 속에 갇혀 통곡할 수 없었습니다.”
아귀란 건 생각보다 잔인한 결말이었구나.
차라리 무급처럼 아예 내공이 없으면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내공이 있는 무림인이면 아귀가 되고서도 온전히 죽지 못한 채 단전에 있는 내공에 속에 갇힌다니.
“물론, 선천진기에다가 이전 내공까지 전부 잃은 전... 이제 얼마 못 가겠죠. 그래서 끝을 맞이하기 전에 감사를 표하고자 왔습니다, 대협.”
“그래. 네 이름이 남궁청이지?”
“아, 제 기억을 보셨나 보군요.”
“뭐, 어쩌다 보니.”
“아, 괜찮습니다. 그럼, 제 이름을 아시니 저도 대협의 성함을 알고 싶습니다.”
“대협은 아니고, 그냥 운도명이라고 해. 운 형이라 부르면 더 좋고.”
“운 대협이군요.”
“그냥 운 형이라 불러도 돼. 그게 더 익숙하거든.”
“아닙니다! 이런 구명지은(求命之恩)을 입었는데 당치도 않습니다, 운 대협.”
나참, 명문 세가 자식 아니랄까봐, 예의에 대해선 꽉 막혔구만.
“그럼 그 구명지은 갚는다 치고 내가 뭣 좀 물어봐도 될까? 사실 내가 이 지옥에 대해 잘 모르거든.”
“아, 물론이죠, 대협! 저도 경험은 길지 않지만,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건 뭐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가부좌를 앉은 채 묻자,
녀석은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은 채 밝게 대답했다.
아, 이렇게 좀 불편하게 굴 필요 없는데...
어쨌든, 나는 먼저 돌직구를 던졌다.
“여기 지옥에도 너처럼 정파 무림인이 있니?”
물론, 녀석의 기억을 보면 역린일 수 있지만,
그만큼 꼭 해야할 질문이었다.
정파.
특히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에 관련된 정파놈들이면.
‘그 빌어먹을 사인방과 관련될 확률이 커.’
“특히 무당이랑 화산, 그리고 소림과 곤륜에 관한 거라면 더 좋아.”
내 말에, 확실히 녀석이 주저했다.
허나, 놈은 곧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만나긴 했습니다.”
“그... 딱 한 번?”
“예... 역시 그것도 보셨군요.”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너도 그 망할 재판을 겪어봤으면 알잖아?”
“예, 대협 역시 그 네 존자분을 만나셨군요.”
“존자는 개뿔. 치매 온 무당벌레랑 시정잡배 같은 꽃돌이에 빌어먹을 땡중이랑 재수 없는 아줌마지, 뭘.”
“푸흣! 아, 아, 죄송합니다, 대협.”
놈도 내 욕지거리가 나쁘지 않은지 살짝 웃었다.
하기야, 이 녀석도 부패한 재판의 피해자니.
다만, 그 뒤에 나온 말은 내가 바란 대답이 아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화산파 놈들이란 것밖에. 갑자기 구름을 타고 나타나더니, 절 공격해서... 흐음... 그...”
“모르면 됐어. 굳이 말하지 마. 그럼 다른 것 좀 물어볼게.”
그 뒤에 온 정보도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이 하오(下五) 지옥은 그야말로 붉은 황무지였다.
있는 거라곤, 아귀랑 덩치 큰 짐승, 거기에 같이 화목하게 살아가도 모자랄 판에 서로의 선천진기를 노리는 사파 도적이 가득하다고 한다.
“아, 이건 대협이 좀 흥미로워할 정보군요.”
“뭔데?”
“이곳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더군요. 몇 개의 마을을 방문한 적 있거든요. 그 사람들에게 듣기론 뭔가 도시나 성도 있다고 들었지만요.”
오, 그건 좀 귀한 소식이다.
그걸 끝으로, 녀석의 정보가 끝났다.
난 조심히 녀석에게 물었다.
“근데, 넌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글쎄요...”
그가 좀 슬픈 표정으로 자조하듯 웃었다.
“선천진기를 잃어버린 자는 영멸(靈滅)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걸 압니다, 대협.”
영멸(靈滅)
그래, 그런 뜻이구나.
선천진기를 잃은 망자가 영원히 죽음을 맞이하는 결과.
“솔직히, 그저 절망 속에 영원히 이 아귀가 된 몸뚱아리에 갇혀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대협 덕분에 적어도 인간답게, 저 자신답게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막상 내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만.
그럼에도 녀석의 눈엔 여전히 슬픔만 가득하다.
그래, 아무리 의연한 척 해봐야 애지.
젊은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이 많았겠지.
안다, 내가 다 알아, 요놈아.
“안다, 힘들었지?”
“아...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의인께 괜히 이런 모습이나 보이고. 면목 없습니다, 대협.”
안타까웠다.
그저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 아이.
그런데 정작 가족이란 것들은 이 아이를 독살했다.
방계가 감히 뛰어나다는 이유로 말이다.
심지어 지옥에 끌려가선,
같은 정파인에게 선천진기를 빼앗겨 최후를 맞았다.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내가 읽던 무협지의 주인공이 될만한 자질의 아이가.
너무도 허무하게 스러졌다.
대체 이 지옥엔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져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난 녀석을 껴안아 줬다.
“괜찮다. 다 괜찮아.”
“대, 대협?”
“꼭 내 동생 같아서 말이다. 싫더냐?”
“아, 아니... 싫진 않습니다. 오히려... 오히려... 크흡.”
괜히 예의상 한 말이 아니다.
잘 보니, 아직 제대로 성장도 안 된 아이.
꼭 리윤 녀석 같다.
내 어릴 때 키워준 점소삼부터 점소십의 녀석들도 그렇고.
다들 어렸을 땐 참 귀여웠는데.
녀석의 얼굴은 처음엔 혼란이었다.
그러다가 다음엔, 뭔가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그 고운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살아있을 적엔 가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죽어서도 같은 정파 놈들에게 당한 울분과 원한.
그 모든 게 녹아내리는 것 같아 보인다.
녀석은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하긴... 기껏해야 지학(15세)에서 몇 살 더 산 수준.
그런 어린아이에게 너무도 가혹한 삶이다.
“흐으어엉, 흐아아아앙...”
“괜찮아. 이제 괜찮아. 울고 싶은 만큼 울어도 돼.”
난 그저 등을 토닥여줬다.
결국 무(無)로 돌아갈 삶이라지만...
그 마지막만큼은.
사랑받길 원했다.
*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녀석이 천천히 마음을 다잡았다.
녀석이 그저 말없이 다시 포권지례를 올리더니,
내게 부탁 하나를 건넸다.
“부디, 제 검을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어차피 뺏을 검이긴 했다만.
이젠 합법적으로 내 것이 되었다!
야호! 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영원히 눈을 감을 아이한테 검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
녀석의 말에 따르면, 이 청천궁창검(晴天穹蒼劍)은 소가주 후보자에게만 주어지는 검이었으나, 가주가 몸소 그에게 선물한 검이라 한다.
난 예의상, 괜찮냐고 물었다.
“어차피 제겐 슬픔만 가득한 검입니다. 이게 도리어 제 목숨을 빼앗았으니까요.”
녀석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난 바로 이해했다.
확실히 이 물건이 암살의 주원인이 됐을 터.
아무래도 소가주를 상징하는 물건을 받았단 것은,
말 그대로 소가주에 오를만한 인물, 즉 권력의 위협이었단 뜻이니.
“그럼, 작별을 고할 때인 것 같습니다.”
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든 사족일 뿐이다.
손님 보낼 땐 깔끔하게.
그게 내 점소이의 신조니까.
그렇게...
반시진이 지났다.
한 시진이 지났다.
...어
...어?
“어... 언제, 사라지는 거죠?”
“그을세? 나야 모르지?”
결국, 우리 둘은 서로 머리를 맞댔다.
“뭐지? 선천진기가 없어도 살 수가 있는 건가?”
“그, 그건 아닐겁니다, 대협. 저도 나름 지옥을 거니면서 영멸당한 이들을 보았거든요.”
“음... 그러고보니 여긴 네 의식 속이지? 그럼 네 의식부터 무너져야 하지 않나?”
“제 의식이요? 이상하군요, 대협. 선천진기를 잃은 존재한테 의식세계가 있는 겁니까?”
“어?”
“어!”
그렇다.
녀석은 일단 선천진기가 없는 존재.
사실상 영멸이 확정된 존재다.
근데 왜 의식이 있지?
그 생각이 들 때 즈음에야 한 가지 답이 나왔다.
그렇다.
이곳은 남궁청의 의식이 아니다.
바로...
“내 정신 속인가?”
“맞는 것 같습니다, 대협.”
그러고 보니, 우현이 이 무아(無我) 자체가 내 머릿속이라고 생각하랬지?
그리고, 녀석은 이미 선천진기를 전부 빼앗겼고.
한 마디로 이 검은 세상은 나의 머릿속 세계.
내 심상세계(心想世界)다.
내 머릿속이 이렇게 거무죽죽하다니.
음, 좀 그렇군.
그 생각을 했을 때,
“어? 어어어! 대협. 이게 대체?”
갑자기 녀석의 전신에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그 푸른 빛이 무아의 모든 곳에 퍼져나갔다!
한순간에 검었던 세계가 푸르고 높은 하늘로 변했다!
내 세계에 높고 푸른 하늘이 생겨났다.
*
난 다시 이 정겨운(?) 지옥으로 돌아왔다.
‘그럼 전 이곳에서 뭘 할 수 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대협. 나중에 또 뵈면 좋겠군요.’
뭐, 결국 내 머릿속이니 어떻게든 다시 만날 터다.
음, 내 머리 안에서 남궁의 도련님이 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이상하다만.
“나쁜 아이는 아니니 괜찮겠지.”
거기에, 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통해 내 단전의 선천진기를 살폈다.
“무아와의 연결이 더 넓어졌어.”
확실히 느껴졌다.
무아와 내 단전 사이에 선천진기의 줄기.
실 같이 얇았던 게,
지금은 나름 밧줄 수준으로 굵어졌다.
“이 정도면 상시로 선운보를 써도 되겠는데?”
선운보 같은 경공술 자체가 선천진기를 많이 쓰진 않지만,
그래도 그걸 매 순간 쓸 정도로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헌데, 지금 무아에서 흘러오는 선천진기 양이면,
충분히 이젠 걷거나 뛰는 대신, 모든 이동에 경공을 사용해도 될 수준이다.
“꼭 말을 얻은 기분이네.”
난 휘파람을 불며, 먼저 땅을 파냈다.
거기에 먼저 가부좌를 튼 내 시체부터 대충 구겨 넣었다.
그 뒤엔, 아이의 머리 없는(내가 했지만) 시체로 나아갔다.
사실, 녀석은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검을 비롯해 자기 품에 뭔가 쓸모 있는 건 챙겨가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착한데다 눈치도 빠른 녀석이야.
아주 맘에 들어.
난 그 말에 따라 녀석의 시체를 뒤적거렸다.
“아, 다행이다. 주머니는 멀쩡하구나.”
천갈뢰장에 휘말리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소지품은 전부 멀쩡해 보였다.
생각보다, 녀석이 지닌 물건이 많았다.
방계여도 나름 명문의 도련님답게 지금까지 턴 아귀의 물건 전부보다 더 많다.
금창약과 붕대, 검 가는데 쓰는 숫돌, 검을 비롯해 다양한 물건을 수납할 수 있는 허리띠까지! 거기에 검대까지 붙어있는 명품!
심지어 작은 주머니엔 벽곡단과 쓸만한 약초, 은자 열 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최고의 전리품은 따로 있었다.
“오오... 지도라.”
그건 바로 지도였다.
녀석은 자기도 오랫동안 살아남은 건 아니라지만,
꽤 섬세히 기록한 이 지도엔 쓸만한 정보가 쏠쏠했다.
“아귀들이 특히 많은 곳에, 거대한 짐승이 있는 동굴... 그리고 흠, 이게 하오층에 가장 세력이 큰 사파놈들 소굴이구나.”
제대로 된 강호초출을 하기도 전에 죽었다더니.
만약, 이 정도로 뛰어난 길눈으로 강호에 나갔다면 꽤 명성을 날릴 텐데.
쩝, 여러모로 아쉬운 녀석.
뭐, 어쨌든, 검보다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뒤 떨어지지 않는 수확이다.
여기에 우현에게도 이 하오층의 정보를 얻어낸다면...
“제대로 탐사하기도 전에 반은 먹고 들어가겠네. 후후.”
뭔가 하나둘, 이 지옥을 돌파할 조각이 하나둘 맞춰져 가는 느낌.
이제 딱 하나만 해결되면 되는데...
난, 그 마지막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 역린을 건드려도 그저 딸깍 소리만 나는 이 장난감.
우현의 손에선 천하제일인 저리 가라 할 신병이기였는데.
“대체가... 이 인간은 왜 이거 쓰는 법을 안 알려주는 거야?”
때론(아니 사실 자주) 이해가 안 되는 스승이다.
보통 이런 걸 주면 어떻게 쓰는지라도 알려줘야 하지 않나?
내가 거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그 인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 내가 대포 얘기를 했을 때 잘 알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
내가 벽룡포를 보고 작은 대포라 여겼을 때,
그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분명 자기 작품에 대해 그렇게 자신감이 가득한 인간이 말이지?”
그렇단 것은, 벽룡포는 대포와 그 원리가 다르지 않다는 소리.
난 대포의 작동원리를 떠올렸다.
“내가 알기론... 대포용 벽력탄을 대포의 뒤쪽 구멍에 넣고, 장전한 뒤에... 불을 붙여서, 펑! 이었지?”
확실하진 않지만, 대충 그럴 거다.
그럼, 그 벽력탄, 그러니까 탄환(彈丸) 역할을 하는 게 뭘까?
그때, 난 내 머릿속에서 딱 한 가지 생각이 일었다.
“설마... 그래,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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