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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점소이의 탑 등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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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공장
작품등록일 :
2024.06.2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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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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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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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부정한 재판과 지옥 탑

DUMMY


숨이 끊어지자, 되려 혈색이 돌아오고,

눈앞이 완전히 검어진 뒤에야, 그 뒤에 모든 것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췄다 다시 가는 그 기분.


그 뒤에, 난 진평 객잔이 아닌, 어떤 구름 속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눈앞엔 그 덩치가 구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며, 내가 제정신인지 확인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하겠네.”


눈앞의 그 덩치가 말했다.


“그대는 지옥행일 것이야.”


순간, 그 말을 들은 내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참자, 참자, 참아...


아니 못 참아!

어떻게 참아!


“내가 왜!”


진평 객잔의 점소이이자 이젠 망자(亡者)인 내가 항의했다.


평생, 무림인을 동경하면서도 무림인에게 냉대받은 인생.

심지어 천수를 누리고 죽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객잔에서 미쳐서 날뛰던 놈에게 죽었다.

어떻게 죽은 지도 아직도 눈에 선하다.


평생 써 본 적도 없는 내공 담는 그릇이라는 단전,

그 단전이 있는 배가 놈의 손에 뻥 뚫려버렸다.


동시에 내 몸속에 평생 담고 있던 내장이 통째로 사라지는 느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어보았다.

이토록 허전한 느낌은 처음이다.

동시에 눈이 감기려고 했다.

너무... 너무도 졸리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 나는 마지막에 용기를 냈다.

내 뒤에 있는 동생 같은 신입 아이와 객잔의 사람들을 위해.

분명, 그들이 내 다음이 될 터니까.


그렇기에 회광반조(回光返照)가 준 시간을 통해 들고 있던 호신용 단도로 놈의 목을 찍어버린 것이다.


그 뒤에 몇 번 정신을 놓았다 잡았다 하더니 저 헛소리 하는 놈 앞에 있었다.

지금 눈앞의 존재는 내 정신상태처럼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옥과 황금이 요란하게 장식된 은철로 만든 갑옷에 대추 같은 피부와 뿔과 긴 수염.

꼭 그 삼국지의 관우 같은 모양새다.


난 아마 죽었을 거고, 눈앞엔 오색찬란한 갑옷의 무장.

이게 바로 옛날이야기에서만 들어봤던 저승사자(監齋使者)?


“저, 그럼... 재판조차 안 받는 겁니까? 생전에 듣기론 망자는 재판을 받는다던데...”

“음, 형식상의 심판은 받지. 하지만, 천년신장(千年神將)인 이 몸의 관록으로는 그렇게 될 게다.”

“예...? 천년신장...? 저승사자가 아닙니까?”

“저승사자 중에서도 천년이란 시간 동안 그대 같은 이들을 저승으로 인도한 자가 받는 칭호다. 그 관록으로 그대가 지금 지옥행일 게 분명하다고 말한 게다.”

“왜죠? 어째서? 평생 죽엽청 하나조차 폭리를 취해본 적이 없는데?”


정말이다!

뭐, 가끔 한두 푼 더 받긴 했지만!

그게 지옥 갈 일인가!

애초에 이 무림강호에서 사람 마구잡이로 죽여대는 인간 백정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내 항의에 그는 반딧불이 같은 빛이 합쳐진 듯한 특이한 서책을 만들어냈다.

그는 그 공중에 떠 있는 서책을 손짓만으로 뒤적거렸다.


“그대 이름은 운도명. 고아로군. 뭐 부모가 누군지 중요치 않고... 뭐, 점소이로 평생을 살았단 것도 별로... 나이는 약관(20세)을 조금 넘기고, 음 딱히 처자들에게 인기 있던 녀석은 아니군. 음... 얼굴은 나름 반반한데... 고자인가? 뭐, 이건 좀 불쌍하긴 하군.”


...이놈이? 왜 거기에서... 그리고 고자 아니다, 이놈아!


“허나 중요한 건...”


그가 손을 휘휘 젓자, 서책이 다시 빛무리가 되어 흩어졌다.


“중요한 건, 그대가 죽기 직전에 사람을 죽였단 사실이지. 그렇다고 살인을 덮을 만큼의 도가의 깨달음이나 불자의 공덕은 없고.”

“하지만 그저 호신이었을 따름입니다! 게다가 전 그놈에게 결국 죽었다고요!”


보통 점소이로 살면 고개 숙이는 것에 익숙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현실을 그 반대다.


수많은 고수가 왔다가는 객잔에서 깡다구 없는 놈은 점소이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어차피 내겐 천년 묵은 산삼 같은 저승사자든.

돌멩이만큼 흔한 삼류무사든.

맨손으로도 날 찢어발길 수 있다는 점은 똑같다.


“그래, 그래서 그놈도 똑같이 지옥에 갈 거다. 분명 자네보다 훨씬 많이 죽였으니 더 밑으로 가겠지.”

“밑? 밑이라뇨?”

“이상하군. 점소이라면 여러 이야기 정돈 듣고 살지 않나? 그렇다면 불자나 도가 사람에게 지옥이 여러 층으로 되어 있는 탑이란 걸 들은 적이 없던가?”


아, 그래. 들어본 적 있다.

무림 명문 정파인 곤륜파의 도사들이 그리 말하곤 했지.


신들이 사는 신계와 신선들이 사는 선계가 있다.

그리고 그 밑엔 그래도 선한 사람들이 사는 천계가 있다.

그리고 그 밑에 흔히들 명계라 부르는 지옥.

지옥은 대충 여러 지옥이 있다 듣긴 했는데.


그게 탑의 형식이라니.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뭐, 결국 그대가 가게 될 곳이니 대충 말해주지. 지옥은 대충 구 계층까지 존재한다. 그리고 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도 천차만별인 곳이지. 뭐, 그 뒤에는 거기로 가고서 알게 될 것이고. 거의 다 왔다.”

“예?”


갑자기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구름이 걷혔다.

난 주위를 둘러봤다.


알고 보니 이 구름은 마차처럼 날 어디로 옮기고 있던 것이다.

난 허탈한 나머지, 그 구름에 주저앉았다.

일단, 그 재판정이란 데 가면 뭐라도 되겠지.


음, 그건 그렇고 푹신푹신한데?

음, 생전에 앉아 본 적은 없다만, 상단주나 장문인들이 앉는 의자들이 이렇게 푹신하려나.


어쨌든, 날 태운 구름은 하늘에 떠 있는 한 궁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점소이인 나로선 금자 일 냥조차 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헌데, 눈앞의 궁전은 주춧돌부터가 시작해서.

모든 곳에 황금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다.


키가 산만한 천년 묵은 저승사자 같은 거 보다, 저 황금산이 정말 이곳이 비현실적인 장소라는 걸 느끼게 만들어줬다.


“미친, 저거 다 합하면 금자가 몇 냥인 거냐?”


명패엔 일황천도궁(日皇天道宮)이라 쓰여 있었다.


“여긴 지옥치곤 밝은데요?”

“여긴 천하계다. 물론 네가 살 곳은 결코 아니지. 뭐, 네가 순순히 죽었다면 모르겠다만. 차라리 순순히 죽지 그랬나? 그랬다면 천하계는 안 되더라도, 바로 밑인 범인(凡人) 계층에라도 갔을 터인데.”


빠직.

순간 분통이 터졌다.

그래도 명색이 신장이라는 놈이 순순히 죽임당했으면 좋았겠다고 말하다니!


“뭐, 불만 있나?”

“아뇨.”


하지만 말은 안 했다.

점소이의 깡다구는 강하게 나갈 때와 저자세로 나올 때를 구분하는 법이다.

딱 눈의 혈관 깃든 거랑 저 불같은 얼굴을 보니 보통 저럴 때, 뭐라 하는 놈들은 좋은 상태로 끝나지 않은 게 보인다.


그래도 내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지, 저딴 헛소리 하는 놈과 더는 말을 섞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어갔다.


말 수십 마리가 한 번에 들어갈 듯한 큰 문을 통과했다.


그곳엔 나와 별 차이 없는 복장의 인물부터 거지나 무림인, 상단의 거부 같은 인물들이 그득했다.

난 거기서 그 저승사자와 함께 줄을 섰다.


“근데 이상하군요. 왜 다른 이들은 옆에 저승사자가 없는 겁니까?”

“뭐, 바빠서 그렇지. 망자가 생기는 일에 규칙이나 정황 따윈 없으니.”

“그럼 당신은요?”


내 질문에 그가 귀를 후볐다.


“귀찮네. 천년신장이란 이름을 달면, 이 정도의 여유를 부릴 자격은 되는 법이지.”


나 참, 생긴 건 관우 같아 가지곤, 하는 짓은 그야말로 한량 그 자체로군.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난 내 게으른 저승사자와 함께 옥석이 깔린 재판장으로 나아갔다.


그곳엔 날 심판하시겠다는 높으신 분들이 엄청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찌나 높게 앉았는지 내가 고개를 번쩍 들어서 봐야 할 수준이다.


순간, 난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무, 무, 무당파의 개파조사 음양검성 장룡훈!”

“음...? 이 노부를 아나? 이 노부가 등선한 지 꽤 되거늘 놀랍구먼. 허허.”


“거기에! 화산파의 가장 위대한 매화검존이자 천마참검인 이소! 소림의 전성기를 이끈 여래불존 유존강... 서역에서 몰려온 백귀야행 대군을 전부 베어낸 곤륜파의 운룡도신 서진화련까지! 우워어어어....”


“오호, 이 존자를 알다니 제법이군... 재밌는 놈이야.”

“나무아비타불. 간만에 소신의 별호를 다 들어보는군요.”

“아직 소녀의 명성이 죽지 않은가 보네요, 오호호.”


“그, 그야 알 수밖에 없잖습니까? 수백 년이 아니라 수천 년이 지나도 무림에서 잊히지 않을 존함들 아닙니까?”


누군가는 내가 너무 아부를 떠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평생 무공을 갈망했지만, 현실에 채여 얻지 못한 생전의 내가 손댈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무림의 역사와 정보.

무엇보다 영웅의 이름을 외우는 게 그나마 내 한을 채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수천의 무림의 역사 인물 중에 그들을 단연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이들이다.


뭐 확실히 알아보는 게 나쁘지 않은지 그들 각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음, 어쩌다 보니 제대로 점수를 땄군!


잘 됐다!

정말로 잘 됐다.


이러면 최대한 좋은 쪽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 그럼 위대한 존자들이시여. 먼저 저의 인생을 고하겠....”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이 존자들은 바쁘기에 네 인생을 들을 시간이 없거든. 조금만 기다려라, 범부여. 우리 본좌들이 명쾌히 판결을 내리겠노라.”


고금제일의 매화검존 이소가 손을 들어 내 입을 제지시켰다.

예전 그의 영웅담과 화산파 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했던 그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아, 알겠습니다. 위대한 매화검존이시여.”


그래,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그들의 영웅담이나, 그들을 보았다던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는 질리도록 찾아봤다.


분명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물며 나는 점소이!

까다로운 고객의 요구를 맞추는 것엔 이골이 나 있다!


자! 한 번 다음을 말해봐라!

거기에 맞는 응대법을 보여줘서, 그들을 감동 시켜보겠다!


난 기대를 하며, 그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들은 서로 눈을 한 번씩 맞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위쪽 상석에 앉아있던 음양검성 장룡훈이 엄숙히 선언했다.


“판결하겠도다. 그대는 중죄인이 가는 지옥인 하오(下五)계층으로 갈 것이네.”

“예...? 존자이시여, 일단 저의 말을 좀...”

“그대의 말은 중요치 않네.”


허나, 결과는 인정사정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재판이라면서 정작 내 의견을 놓은 자린 하나도 없었다.


내가 저 네 명에게 알은 척을 했을 때 살짝 당황했던 망할 저승사자 놈이 ‘녀석, 애쓴다.’라는 식으로 날 한심스럽게 쳐다본다.


확 그냥 눈 까뒤집고 수염 태워버릴까 보다.

어차피 죽은 인생이라 뒤 따윈 없는데 말이다.


아니, 그건 아니긴 하다.

죽어서도 이젠 주거지 걱정을 해야 하니...


자칫 이러다간 꼼짝없이 지옥에 가게 생겼다!

당장 뭐라도...!


“조, 존경하는 존자들이시여... 전 정말 억울합니다.”

“억울하다고? 정말 그리 생각하는 겐가? 그대는 우릴 존경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릴 존경한다면서 정작 우리의 판단을 의심하다니. 어불성설이로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지금 내 뒤는 그저 낭떠러지뿐!


“존경하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음양검성이시여. 물론 호신의 목적도 있었으나 다른 이유도...”

“거짓말 말게. 그대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처음으로 검을 꺼냈지. 우린 평생 협과 의를 위해 검을 들었고... 결국 본좌들은 이 자리에 있고, 자넨 그곳에 있지. 우린 모두 하나의 인생을 산다네. 그대는 그 인생에 무얼 담았는가.”

“물론 전 존자들에 비하면 그저 범인에 지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마디조차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질 만한 삶을 산 적은 없습니다!”


난 나에 대한 변론을 꺼내 들었다.


“전 언제나 여러분 같은 협을 동경했습니다. 제겐 무는 없었으나, 배고픈 자에겐 음식을 나눠주었고, 무를 함부로 다루는 이들에게 다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제겐 무가 없지만, 언제나 협과 의를 행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협의(俠義)였습니다. 존자들이 보시기에 전 보잘 것 없는 점소이일지언정 전 당당히 협의로 삶을 해쳐나갔습니다.”


내 말에 그들은 그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난 거기서 무언가 불안한 기운을 읽었다.

익숙했다.


예전 객잔에서 문파의 장로나 상단주 같은 인물이 내 말을 들을 때 보는 그 눈빛.

그저 벌레가 우는 듯한 소리로만 여기는 그 느낌.


결국 불안은 적중했다.


“그건 자네가 판단하는 게 아니네. 우리가 하는 게지. 노부는 이 이상의 반론을 받지 않겠네.”

“주제를 알라, 범부. 우리 본좌들은 그대 같은 이들을 위해 쓸 시간 따위 없다.”

“부디, 그 밑에서 극락왕생하길 빌겠소. 나무아비타불.”

“아, 끝났나요? 그럼 전 돌아가보죠. 오늘 곤륜파의 후배 하나가 우화등선했거든요.”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떴다.

그것으로 내 첫 재판은 끝나버렸다.


*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의미 없다고.”


전과 달리 이 저승사자 놈은 처음으로 위로하는 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다만, 내 눈앞의 끝없는 낭떠러지에 신경 쓰느라 뭐라 하기엔 여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는가?”

“있어.”

“뭔가? 헌데 왜 갑자기 반말을...?”


이때 난 정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랐다.

아마, 그때 워낙 분해서 눈이 돌아갔을 때였으니까.


“꼭 돌아오겠어. 돌아와서 무죄를 받아내겠다고!”

“그게 가능할 거라 보나?”


누가 들었다면 녀석이 내게 비웃듯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다.

의외로 녀석은 진중한 어투로 내게 물었다.

거기에 맞춰, 내 용기가 샘솟았다.


“그래... 전부 조져서라도... 켁! 케헥!”


눈 한번 깜박할 순간,

그는 그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지금 내 손도 벗어나지 못하는 녀석이. 그놈들을 조지겠다고?”

“크, 크흣! 어차피 이미 죽었는데... 무서울 줄 알아? 천년 산 거? 그게 뭐 별거냐? 무림인이 맨날 먹어대는 산삼이나 하수오 같은 영약 풀떼기랑 나이가 비슷한 게 그리 자랑이야?”

“허! 천년 신장에게 그리 말하는 건 네가 처음이군.”

“어, 어, 어쩌라고. 쿨럭.”

“저승에선 다시 죽을 일 없다고 생각하나? 안타깝지만, 아니야. 내가 이대로...”


그의 손이 오색으로 빛났다.

그러자 내 몸속의 무언가가 저승사자의 손과 공명했다.


“쿠흡! 쿨럭쿨럭! 우웨에에에.”


뭔가가 내 입을 타고 올라온다.

토사물?

난, 죽었는데?

거기다 내 내장도 죽을 때 사라졌는데?


그때 내 입에서 오색의 구름 비슷한 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천진기(先天眞氣)라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지. 이걸 빼앗긴다면 네 놈은 영원히 소멸한다. 그리고 지옥엔 이걸 빼앗아 먹어 치우는 마귀가 가득하지.”


점점 내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렇게 정신을 놓기 직전에 그 손의 오색 빛이 사라졌다.

그러자, 그 오색구름이 다시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어떠냐? 이래도 계속 그런 말을 지껄일 생각이 드나? 지금 넌 아무것도 아니야.”


순간 난 말을 잃었다.

그는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손에 힘이 풀렸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난 그저 한 마디만 내뱉었다.


“X까. 짝퉁 관우 놈아. 그럼 먹어봐.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없는 놈이 가장 무섭다는 거 몰라? 지금 날 안 죽이면, 너와 그 자식들 전부 박살낼 거야.”

“그래? 흥미롭군.”


그는 천천히 내 눈을 보았다.

그 그윽한 눈길 사이로 내 눈에 뭔가 괴상한 구절이 떠올랐다.


[원시(元始)는 태초에 천지인(天地人)을 창조했으되, 모두를 잇는 무아(無我)를 만들었으므로, 모두는 전체이자 하나이로다. 가장 나중 된 것이 처음 되고, 가장 낮게 된 것이 높게 되니, 이 모두는 천존(天尊)의 순리이니라.]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보이는 건가?”

“그래, 보인다, 왜?”


그 말과 함께 덩치가 갑자기 껄껄대며 웃었다.


“껄껄껄! 그래 그렇지. 살막의 암살자들도, 천하제일인도... 심지어 천마조차 선천진기를 잃는 것만큼은 두려워하지. 헌데... 정말로 뒤가 없는 이들만큼은 두려워하지 않더군. 너처럼.”


그는 여전히 내 멱살을 잡은 채 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대체 뭐하자는 건지...


“아까 말했던 건 사실이더군.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고, 다친 자는 치료했다는 말 말이지. 물론, 그놈들에겐 간에 기별도 안 갈 일이었겠지만. 그거 아나? 그들은 애초부터 할 수만 있다면 지금 현세 있는 이들을 전부 지옥에 떨어뜨리려고 할 걸세.”

“그게 무슨... 뜻이지?”

“그것이 그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말만 하고 싶군. 저승에 떨어지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들이 얻을 게 많을뿐더러 상위의 존재에게 잘 보일 수 있기 때문일세. 그래서 자네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던 걸세. 괜스레 사연을 들으면 귀찮아지니까.”


어이가 없었다.

생전엔 그토록 존경했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정작 저승에서 본 그들을 보아하니...

내가 평생 보아온 썩은 정파나 약탈자 사파, 미친놈들인 마교와 다를 게 없다.


분명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그들을 썩게 만든 거겠지.


“역시 영원히 영웅인 인간은 없는 거군.”

“영원히 영웅인 놈은 본 적 없지만. 적어도 협의를 위해 단검을 든 네가 보이는군.”

“그게 무슨... 소리지?”


그가 다른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사실, 알고 있다. 네 뒤에 아이가 있었단 거. 무슨 관계인지는 모른다만... 그리고 객잔의 다른 이들도 있었지. 만약 네가 그 미친놈을 죽이지 않았으면 그놈들도 다 같이 여기 있었겠지.”

“그건...”


사실 그것도 말하려 하긴 했었다.

물론 복수를 위한 동귀어진이기도 했지만, 바로 뒤에 있던 리윤을 비롯해 나와 함께 객잔에서 살아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지키고자 했었다.


“그리고 다 같이 지옥에 떨어졌을 터다. 뭐, 그래봤자. 그들도 결국 언젠가 죽을 테니 지옥으로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겠다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몸이 말했잖나? 그놈들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현세 인간을 지옥에 던질 거라고.”


내가 그 충격적인 언행에 뭐라 대답하기도 전,

그가 다시 내게 말했다.


“그들은 무시했지만. 이 몸은 안다. 자네에게 무(武)가 없을지언정 협(俠)은 있다는 걸.”


그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이미 멈췄을 내 아랫배를 꾹 눌렀다.

내가 알기에 분명 중단전이 있는 곳.


또한 그 선천진기란 게 느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 안에, 자네가 찾는 답이 있을 걸세. 다만, 그 답을 찾기 전에 무(武)부터 발견하길 권하지. 지옥에선 무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


그러자 그의 힘이 흘러들어왔다.

무언가, 빛알갱이가 내 몸에 퍼지다가 뭉치기를 반복했다.


“당신은...대체... 누구야?”


왠지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니 그에 대해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어. 분명 다른 이들에겐 저승사자 같은 건 없었어... 게다가 그런 화려한 차림인데도 그 개자식들을 비롯해 그 누구도 당신을 의식하지 않았어. 꼭 존재하지 않던 사람처럼... 당신은 대체...”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날 잡고 있던 손가락을 튕겨 날 던졌다.


그가 뭔가 전음처럼 입술이 움직였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애초에 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도중이라 그걸 제대로 생각해볼 시간은 없었지만.


그렇게, 나의 지옥 탑 등반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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