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관
제랄의 성을 눈앞에 두고 테츠는 입에 욕을 한 사발이나 물었다.
디멘션 포탈을 지우지 않았다면 단번에 올 일을 말을 타고 노숙까지 하면서 사흘을 달렸기 때문이다.
몰레이그는 잡아야 하고 그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하는 것 같았다. 이제 내공도 있겠다. 마주치는 순간이면 모든 것이 끝일 텐데.
세상일은 그 누구도 모른다고 몰레이그의 꼬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조심해서 숨어들자. 놈들이 눈치채고 도망갈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화가 나는구나. 쥐새끼 한 마리 잡자고 이런 고생을 해야 하다니 정말 눈에 띄면 그냥 모가지를 부러뜨려 버려야겠다."
마테니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테츠가 저 정도로 화가 난 것을 보면 몰레이그란 자는 뼈도 못 추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두 사람을 어둠을 틈타 손쉽게 성벽을 넘었다. 그들에게 성벽의 높이는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호오, 저번에 블러드 나이트와 데스 나이트를 풀어 놓아 장난을 좀 쳤는데 다시 모여들었군."
테츠가 처음 제랄의 요새에 왔을 때 잠들어 있던 데스 나이트와 블러드 나이트를 깨워 제랄의 성을 초토화했다. 사람들은 감히 마물에 맞서지 못하고 모두 성 밖으로 도망 나가 버렸다.
그 이후 테츠는 데스 나이트와 블러드 나이트를 울드리히의 요새로 옮겨 놓았다.
마물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다시 요새로 되돌아와 있었다.
"여기 마법진이 지워졌다는 것은 몰레이그 놈이 여길 들렀다는 것이지."
테츠는 조심스럽게 저번에 왔던 성내 지하로 내려갔다. 저번보다 경비가 삼엄했다.
그는 지풍을 튕겨 경비를 기절시켰다. 아무리 그래도 힘없는 자의 목숨을 쉽게 취할 만큼은 아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테츠는 데오뜨랑으로 커다란 쇠 자물쇠를 잘라 냈다.
"이야 이건 완벽하게 정리해 놓았네."
저번에 왔을 때 디멘션 포탈이 그려진 곳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데스 나이트와 블러드 나이트가 제조된 곳도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이렇게 망가뜨려 놓았다는 것은 이곳을 포기한다는 말이군."
"마스터, 막다른 곳으로 가보았으나 그곳은 정말 막다른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이미 철수한 상태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런 모양이다. 놈은 모든 것을 따로 빼돌렸어."
"열흘 중에 삼일을 소비하고 칠 일이 남았군. 그럼 울드리히의 요새로 가보자."
"그 폐허의 요새 말입니까?"
"그래 그곳의 포탈도 망가진 것으로 봐서 놈이 그곳도 방문한 것이 확실해."
테츠는 성벽 위로 올라가 적당한 자리에 디멘션 포탈을 그려 놓았다. 혹시나 다시 제랄의 성에 돌아올 수도 있으니 미리 포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자."
테츠는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려 하다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을 유난히도 달이 밝았다.
"나, 조금 짜증이 나서 화가 났거든. 몰레이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야. 화풀이나 조금 해야겠다."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망자들을 이용해 인간을 해쳤으니까 자기들도 똑같이 당해 봐야지. 자연의 섭리란 것이다."
테츠는 그가 그려낼 수 있는 가장 큰 크기의 소환진을 만들었다. 그동안 단련 될 대로 단련된 라마단의 정수가 만들어 내는 마법진의 크기는 무려 제랄의 성을 뒤덮을 정도로 컸다.
마테니는 그 장관에 혀를 내둘렀다.
경비는 소환진의 불빛을 확인하고 기겁하여 종을 울려 댔다.
성내 기사들은 습격을 알리는 종소리에 갑옷도 입지 못하고 무기만 손에 쥐고 달려 나왔다.
소환진에서 온갖 망자들이 솟아올랐다. 그들의 두 눈은 어두운 곳에서 푸른 불빛을 뿜어냈고 괴성은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소환진이 워낙 크다 보다 망자들은 성내 구석구석 모든 곳에서 솟아났다.
금세 성내는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망자들은 모두 중무장한 전사 스켈레톤들이었다. 그들은 웬만한 검에는 상처하나 입지 않는 딴딴한 뼈를 지닌 마물이었다.
"음, 라마단의 정수가 갈수록 탄탄해지는구나. 밤새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릴 거야."
"마테니 가자."
"네, 넵."
성하나를 초토화하는데 소환진 하나로 끝이라니 말이 안 되는 인물이라고 마테니는 생각했다. 솔직히 정규군이 가득한 요새 하나를 공략하려면 얼마나 많은 피를 봐야 할까?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테츠는 간단히 소환진 하나 펼치는 것만으로 성하나를 궤멸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 분은 인간이 아니야. 이미 반신의 경지에 올랐어.'
마테니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테츠가 가진 능력은 감히 인간으로서는 넘보기 힘든 것이었다.
다만 그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랐다. 마테니가 보기에는 테츠는 선은 선인데 절대의 선도 아니고 중립의 선도 아닌 선과 악이 묘하게 공존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때는 무섭고 잔인하게 휘몰아치다가도 어떤 때는 인정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몰레이그를 잡지 못해 화가나 제랄의 성을 뒤엎는 것을 보면 약간의 장난스러운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는 장난이겠지만 누구에게는 지옥을 보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큰 대의를 거스를 만큼 악의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마교의 부흥에 매우 민감한 모습을 보였다. 항상 마교의 이익이 자신의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나흘을 달려 울드리히의 요새에 당도했다.
"음, 여기도 포탈을 완전히 묻어 버렸군."
더군다나 숨겨놓은 데스 나이트와 블러드 나이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내 생각이 짧았구나. 녀석들을 감춰 놓으면 나중에 도움이 될까 하였는데 오히려 해가 되겠어. 몰레이그 이놈 나를 정말 화나게 하는구나."
"마스터, 제 생각에 이놈은 이미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절대 자신의 거처를 여덟 개의 성 중 하나에 두지 않을 겁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마법진을 파괴하고 제랄의 성을 완전히 포기한 것을 보면 놈이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것 같구나. 내 실수다. 내공을 찾기 위해 몰레이그를 등한시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그럼 또 다른 성을 살펴보겠습니까?"
"아니다. 일단 엠버스피어로 돌아가자."
테츠는 주변을 살피다가 적당한 위치에 다시 디멘션 포탈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엠버스피어 늙은 요리사의 집 지붕으로 이동해 있었다.
테츠는 모험가들과 약속한 여관으로 돌아왔다.
열흘째가 되자 약속한 모험가들이 테드버드의 서신을 들고 돌아왔다.
테츠는 테드버드가 보낸 서신을 읽어 나갔다.
"음, 그들은 곧 롱홀드에 진입하려 하고 있구나. 역시 생각대로 두 왕자의 전령이 모두 찾아 왔군."
테드버드의 서신에 의하면 일왕자의 전령과 이왕자의 전령 모두가 마교에 찾아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로서는 북쪽에서 세력을 쌓고 갑자기 남하하는 마교의 세력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마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남하하는지 모르는 상태였고 더욱이 이들을 자신들의 휘하로 둘 수 있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두 세력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처음에는 일왕자군이 거세게 몰아붙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카오스의 마법사 때문에 수많은 망자군을 잃어버렸고 힘의 균형이 아슬아슬하게 맞춰지게 된 것이다.
이 상태에서 마교가 가장 큰 변수가 된다. 그들이 어떤 세력에 붙는지 그 여하에 따라 전투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기 때문이다.
일왕자군의 전령과 이왕자군의 전령은 테드버드와 만났고 그들은 마교를 잡기 위해 많은 선물 공세를 펼쳤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테츠다. 알야센에 있던 마교를 남하시킨 것도 테츠였다.
테츠는 다시 한 장의 서신을 써서 모함자를 통해 테드버드에게 올려보냈다.
몰레이그는 이미 새로운 거처로 옮겼을 확률이 높았고 다른 성을 뒤져 본다 한들 그를 찾아낼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엠버스피어 길거리 곳곳에는 전단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그것은 모두 카오스 마법사를 찾는 내용이었다.
엠버스피어는 중립이라 이곳에는 일왕자의 세력과 이왕자의 세력이 모두 있다. 한쪽은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고 한쪽은 그를 발견하고 데려오는데 현상금을 걸었다.
양쪽 다 평생 먹고 살 만큼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 소문에 한 가닥 이름을 떨친다는 용병과 모험가들이 엠버스피어로 몰려들었다. 양측 진영은 엠버스피어에서는 절대 다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쿠센의 영주의 실종은 엠버스피어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잠을 자다 다음 날 아침에 행방불명된 쿠센 영주는 보름째 그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로렌 일왕자의 장인이 되는 사람이다. 그 소식을 듣고 수도 아칸에서 조사를 목적으로 정규 기사인 엠버서드 나이트 한 부대가 도착해 있었다.
이들은 수도 아칸의 왕국 직속 기사들로 윌리엄 대공의 명을 받아 엠버스피어로 넘어왔다.
핀든 남작은 수도 아칸에서 온 이 은빛 기사들을 접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우리가 여기 놀러 온 것이 아니오. 그대가 임시 영주요?"
"그렇습니다. 쿠센 영주님이 실종되시고 제가 대신 영주 직에 올라 있습니다."
"그날의 일을 상세히 말해 보시오."
"분명히 그날 시종이 지침 드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종은 영주님의 잠자리 시종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그 시종이 일어나 보니 쿠센 영주님이 사라지고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쿠센 영주의 침소로 안내하시오."
엠버서드 기사 단장 메홀린은 냉철한 사람이다. 그는 솔라리스에서 굵직굵직한 사건을 해결해온 베테랑 기사였다. 치밀하고 세세하게 사건 현장을 분석하고 그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마법사 한 명이 더 대단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애시턴이라고 부르는 야센족 출신의 마법사였다.
"이곳이 쿠센 영주님의 침소입니다."
"영주가 사라진 이후 청소를 했었나?"
"아마도 시종은 그의 침실을 매일 청소합니다."
"증거가 많이 훼손되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군."
메홀린은 애시턴을 향해 말했다.
"마나의 기운이 남아 있는지 조사해봐."
애시턴은 침대 앞에 서서 짧은 주문을 외며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세워 침대 위로 엘로드처럼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그는 메홀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나를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마나의 흔적이 자연적으로 지워졌을 수도 있지."
"그전에 쿠센 성주를 찾아온 사람은 없었소? 새로운 인물이나?"
핀들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 정도 조사는 안 해본 것이 아닙니다. 성내 모든 사람을 한명 한명 일일이 조사했습니다."
"단장님 여길 보십시오."
메홀린은 에시턴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이동했다. 그곳은 목재로 이루어진 창문 아랫부분 지지대였다.
그곳에는 가는 홈이 파여 있었는데 상태로 봐서는 근래에 생긴 흔적이었다.
"뭐라고 생각하나?"
"밧줄 자국 같습니다. 매우 무거운 물건을 내리거나 끌어 올릴 때 때 나올법한 흔적입니다."
"내려가는 아래쪽이 더 깊게 팼지? 이건 끌어 올리는 게 아니라 내릴 때 나는 흔적이야."
"뭔가 무거운 물체를 밧줄에 묶어 내렸다는 것이다."
"무거운 물건이 사람일 수도 있겠군요."
"이건 정확히 납치 사건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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