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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샤 님의 서재입니다.

분홍거미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두샤
작품등록일 :
2008.10.09 02:41
최근연재일 :
2008.10.09 02:41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41,780
추천수 :
122
글자수 :
216,158

작성
08.09.23 17:55
조회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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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9쪽

2. 다치게 한 건 미워서가 아니야 (8)

DUMMY

8

어둠 속에서 그들이 나타났다. 분홍거미가 예고했던 절망의 밤은 비명과 살육,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참담한 총 소리, 그리고 절망과 좌절로 뒤덮인 채로 시작되었다.

분홍거미가 데려온 거미는 모두 11마리. 보통의 거미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 중에 6마리가 이성을 지니고 있는 영리한 녀석들이었고, 나머지 5마리는 얼마 전 소년이 싸웠던 유키의 아버지 코니치 미노루와 같은 수준이었다. 신체에 변형이 일어난 거미들. 모두 2m가 넘는 크기에 어깨가 발달하고 눈동자에 흰 자위가 없는, 소년의 말을 따르자면 날개를 얻었지만 제대로 달지 못한 녀석들이었다.

노보루의 작전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실패였다. 물론 총기가 효과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이성을 지닌 거미와 보통의 거미로 구성된 거미군단이었다면 노보루의 작전은 성공했을 것이다. 아니, 분홍거미만 없었다면 해 볼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홍거미의 거미줄의 범위는 도쿄 시내 전체를 감쌀 수 있을 만큼 거대했고, 그 안에서 총을 든 퇴마사들은 흐느적거렸다. 느릿느릿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퇴마사들의 총알을 그대로 맞아줄 거미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퇴마사들도 강단이 있었다. 대부분의 퇴마사들은 일부러 자신의 몸을 내주었다. 그리고 거미가 자신의 몸을 찢기 시작할 때,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총을 난사했다. 그렇게 5마리의 이성을 지닌 거미는 그럭저럭 해치울 수 있었다.

6마리의 중급 거미가 죽고, 스즈키 가의 퇴마사는 25명이 죽었다. 예상외의 피해였지만 노보루는 그들을 추모할 생각 같은 것을 할 여유는 없었다. 변형된 상급의 거미들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변형된 거미들은 퇴마사들이 방아쇠를 당길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분홍거미의 거미줄은 강력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상급 거미들이 움직임을 시작함과 동시에 분홍거미는 가끔씩 바늘 같은 것을 던져 대고 있었다. 그 바늘에 찔리는 퇴마사들은 즉시 정신을 잃었다.

순식간에 전방에 배치한 50여명의 퇴마사들이 전멸했다. 노보루는 이를 악물고 거미들을 노려본다. 이제 80명의 퇴마사가 배치된 본진에 거미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노보루가 구할 수 있었던 총기는 약 150명 분. 스즈키 가의 퇴마사들 중에서도 뛰어난 자들에게 쥐어 주었지만, 이제는 그 희망마저 무너지고 있었다.

총소리가 세상을 뒤흔들 듯 울려퍼지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와 화약냄새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세마리의 거미가 달려든다. 그리고 퇴마사들은 거미와 마주하는 족족 쓰러지고 있었다.노보루는 숨을 죽이며 거미들과 대치한다. 자신이 저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소년이 해낼 수 있었다면, 흉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노보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비록 흉내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라면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포를 지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검도의 정수는 검이 아닌 마음을 단련하는 것. 어쩌면 두려움을 엷게 하는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노보루는 조용히 검을 쥐고 자신에게로 몰두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손에 쥔 검 손잡이의 감촉이 생생하게 살아온다. 40년의 검도 외길 인생. 어마어마한 강자와도 싸워봤고 무수한 슬럼프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노보루는 자신의 회한어린 삶을 떠올렸다.

그리고 노보루는 자신의 검으로 베지 못했던 적수. 자신의 아내와 딸의 목숨을 앗아갔던 마물을 떠올렸다. 녀석은 흔하디 흔한 마귀였지만 스즈키 노보루는 그 마귀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아내와 딸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 노보루는 공포를 극복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검에서 일렁이는 검기를 보았다. 자신의 나이 28세. 퇴마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던 일이다.

회한과 상처와 고락으로 얼룩진 인생의 한 가운데에서 노보루는 검과 마주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검과 하나가 된 노보루에게 더 이상의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성공인가.'

노보루는 주위를 둘러본다. 반쯤은 성공이었다. 노보루의 본능적인 공포는 매우 희미해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까지 엷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보루는 그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한 마리다. 한 마리만 잡아둘 수 있다면 진의 부담을 덜 수 있다.'

노보루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거미 한 마리를 바라본다. 노보루의 검에 희미한 검기가 흐른다. 검으로 살아온 스즈키 노보루의 인생을 걸어 얻어낸 멸사의 힘. 스즈키 도장의 평범한 사범에 지나지 않았던 자신이 일본을 대표하는 퇴마사가 될 수 있게 해주었던 그 힘.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아이의 목숨과 바꾸어 얻어낸 그 힘이 노보루의 검신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거미와 눈을 마주한다.순간 거미의 팔이 휘둘러지고 노보루는 직감적으로 검을 회전시켜 거미의 팔뚝을 쳐낸다.

둔탁한 소리가 노보루의 몸을 흔들었다. 거미에게 타격을 당한 노보루는 옆으로 밀려난다. 타격은 크지 않았다. 소년과는 다르게 노보루는 온 몸에 강기를 두를 수 있었다. 그리고 싸움에 대한 경험만큼은 소년에 비해 노보루가 40년은 앞서고 있다.

거미는 자신의 팔을 바라본다. 눈앞의 중년 남자는 만만치 않다. 자신의 팔에서 가늘게 흐르는 피를 보며, 조심하지 않으면 저 남자에게 몸이 베일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그 거미는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노보루는 전황을 살핀다. 달려온 거미 중 한 마리는 자신에게 막혀 움직임이 멎었고, 나머지 둘은 다른 퇴마사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다. 노보루는 고개를 돌려 요코를 바라본다.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뜰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가장 최후방에 있었다. 애초에 총화기로 분홍거미를 제외한 나머지의 거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노보루의 대처이기도 했지만, 만약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소년은 그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래서 소년을 숨겨뒀던 것이다.

'지금이다. 지금 소년이 여기 세 마리의 거미를 격파한다면 나머지는 분홍거미를 포함해서 세 마리가 된다. 하나를 내가 잡고, 다른 하나를 나머지 인원이 잡아두면 진은 분홍거미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거미의 공격을 정신없이 피하고 막아내고 또 맞아가며 힘겹게 대항하는 노보루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거미의 발차기가 노보루의 몸을 세차게 가격한다. 노보루의 몸이 허공에 붕 뜨고 말았다. 그리고 거미의 주먹이 노보루의 얼굴을 정확히 가격했다. 강기를 몸에 두르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공격의 충격을 최소화한 노보루였지만 당장이라도 피를 쏟아낼 것 같은 충격에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노보루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여유롭게 일어난다. 이런 싸움은 처음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흔들릴 것 같은 정신을 보여잡고 노보루는 거미를 보며 오히려 웃어주었다.아마 거미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거미의 어깨에 깊게 파인 상처가 나 있었고, 목을 스쳐간 가느다란 검상도 있었다.

노보루는 자신했다. 앞으로 얼마간은 저 거미를 잡아둘 수 있다. 거미는 하마터면 목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의 검기와 기백을 보이면, 거미는 조심스러워진다.

그 때,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마치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주려는 듯 경쾌한 발소리. 모두의 눈에 희망이 스쳐간다. 노보루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소년이 어둠을 헤치고 달려온다. 검은 칼자루를 거머쥐고 무섭도록 차가운 눈을 한 채 거미의 앞을 막아서는 소년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의 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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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헥. 오늘도 세이프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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