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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샤 님의 서재입니다.

분홍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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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두샤
작품등록일 :
2008.10.09 02:41
최근연재일 :
2008.10.09 02:41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41,932
추천수 :
122
글자수 :
216,158

작성
08.09.20 23:37
조회
697
추천
2
글자
10쪽

2. 다치게 한 건 미워서가 아니야 (5)

DUMMY

5

소녀는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소년은 그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따라붙는 요코라는 여자에게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요코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요코는 소년과 소녀가 밥을 먹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정한 오누이 같은 모습이다. 어찌 보면 연인 같기도 하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과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소녀이기 때문에 오누이가 더 정확하겠지.


소녀의 뒷조사를 해보았다. 코니치 유키.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서 버림받은 아이. 그리고 새로운 부모를 만났지만.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요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유키를 바라본다. 지능도 조금쯤 퇴행한 것 같다. 실어증에 걸린데다가 지능도 유아 수준으로 퇴행한 것 같았다. 그리고 자주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소녀.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그녀가 바라본 세상은 차갑다 못해 참혹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아주 여러 종류의 마(魔)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거미라는 녀석들은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 어쩌면 거미라는 녀석들은 모든 불행의 원천 같은 것은 아닐까?


요코는 자신의 궁금증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진이라는 소년은 유키를 만난 이후에는 아예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 스즈키 노보루를 만나게 될 거라고 말했지만 소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상처의 치료도 거부했다. 상당한 부상을 당한 모양인데, 소년은 멀쩡한 것처럼 생기 있게 움직였다. 가끔씩 버둥거리는 유키가 소년의 옆구리를 건드릴 때면 잠깐 표정이 굳어지고는 했지만 소년은 제법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유키를 방안에 두고 문을 나선다. 요코도 잠깐 유키를 보았다. 혼자 방 안에 남겨졌음에도 유키는 멍하게 있다가 가끔씩 실실거리고 웃었다. 정신적 충격이 강해서인지, 저런 행동도 종종 보인다.


요코는 다시 소년의 얼굴을 바라본다. 닮아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소년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을 가장한 공허함과 유키의 멍한 표정은 분명히 닮아 있었다.


도착한 스즈키 가의 저택에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인원만 해도 수백이 넘는 것 같다. 모두 스즈키 가의 직속 퇴마사들이다. 일본 전체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스즈키 노보루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모든 것이 거치적거리기라도 하다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노보루의 앞으로 다가선다. 저택의 가장 깊은 곳에, 좌우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늘어서 앉은 가장 높은 곳에 마치 잘 손질한 정갈한 칼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스즈키 노보루. 일본 최강이라는 칭호를 지닌 검의 달인.


“네가 진이라는 녀석이냐.”


노보루의 노기 어린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충분한 위압감과 존재감이 서려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미를 사냥했다고 들었다. 묻겠다. 너는 이 스즈키 노보루가 허리를 숙여 초대해야 할 정도의 실력자인가?”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노보루의 눈을 차갑게 노려볼 뿐이었다.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아무리 그래도 저 어린 한국 소년은 너무나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닌가, 까딱하면 목이 날아갈 지도 모를 상황인데…… 하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스즈키 노보루가 자신의 검을 뽑는다.


스릉-하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소리만으로도 가슴이 섬뜩해진다. 그가 뽑은 명검이 시퍼런 검광을 발하고 있었다. 노보루는 예를 갖춰 소년에게 한수를 요청한다.


“검을 뽑아라. 혹 맨손으로 싸우는 자라면 주먹을 들어라.”


노보루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소년은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스즈키 노보루의 명검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하고 조약한, 아무것도 아닌 나이프. 쉽게 구할 수 있는 종류의 나이프였다. 그리고 소년이 든 무기가 그런 조잡한 나이프라는 사실이 노보루의 심기를 건드린다.


“건방진…….”


둘은 대치를 시작했다. 나이프를 든 소년은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반면에 노보루는 빈틈없는 상단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상단 자세는 빈틈이 많아 보이지만 노보루의 자세는 바늘 하나가 들어갈 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노보루는 일본 최강의 실력자였다. 비록 현진이라는 한국의 퇴마사와 대결해서 진적은 있었지만, 그 퇴마사가 혀를 내두르며 칭찬한 검의 달인이 바로 노보루였다. 그의 일본도에서 은은한 검기가 흐른다.


창밖으로 나비가 날고 있었다. 은은한 꽃향기가 실내에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아주 작게, 콜록-하고, 기침을 했다.


그 순간에 노보루가 사라졌다.


카앙-


노보루의 검이 소년의 나이프를 세차게 때린다. 노보루는 조금의 인정도 두지 않고 정확히 소년을 두 동강낼 작정으로 검을 내리 그었다. 검의 달인이 휘두른 궤적은 깔끔한 잔영을 남긴다. 실로 공기조차 베어버릴 정도의 정순한 검격. 하지만 소년이 그걸 막아낸 것이다. 소년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나이프와 검 사이로 보이는 노보루의 눈을 바라본다. 소년의 눈을 바라본 순간, 노보루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소년이 손목에 힘을 주며 나이프를 비튼다. 그와 거의 동시에, 노보루의 검이 살짝 밀려나는가 싶더니 이내 무서운 속도로 소년의 머리를 날려버리기 위해 허공에서 미끄러진다.


소년은 몸을 휘둘러 그 검을 피해낸다. 하지만 다음 순간.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몸이 허공에 뜨고 만다. 노보루의 발차기가 소년의 옆구리에 적중한다. 소년은 힘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노보루의 승리였다. 주변에 늘어앉은 사람들의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둘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모두 일격필살. 모두 생명을 노린 공격이었고 살초였다. 순식간에 벌어지고 순식간에 마무리된 조용한 둘의 승부에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그리고 노보루의 목소리가 실내에 울린다.


“나의 패배요. 패배를 인정하겠소.”


주위는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노보루의 말은 의외였다. 어째서?


노보루는 하녀에게 손수건을 부탁한다. 그리고 가져온 손수건으로 노보루는 자신의 목을 닦아낸다. 놀랍게도 가늘게 피가 묻어 나왔다. 그 장면을 본 모두는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이 마음만 먹었다면 노보루의 목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노보루의 발차기는 거의 반사적이었겠지. 목의 서늘함을 느끼자 자신도 모르게 발이 나간 것이다.


소년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노보루는 멀리 떨어져 상황을 주시하던 요코를 바라본다. 의아하다는 노보루의 표정. 요코는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의 예감이 맞다는 의미였다.


“놀랍군.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그런 움직임이라니…….”


노보루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참 후에 몸을 일으킨 소년과 노보루의 공식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노보루는 소년에게 최대한 격의를 갖추고 있었다.


“실례를 용서하시오.”


그런 노보루를 바라보며 소년은 고개를 젓는다.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그대와 같은 실력자가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환영입니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이야기해 주시오.”


소년은 역시 대답이 없다. 노보루는 차가운 소년의 표정을 응시한다. 소년은 그 괴물들을 어째서 거미라고 부르는지, 그들의 능력과 목적에 대해 아는 만큼 설명했다. 무척 단조로운 말투였지만 불필요한 부분은 삭제하고 요점만 간단히 정리하고 있었다.


“일본 퇴마협회의 정보력은 한국과 비교할 것이 못 되오. 아, 하긴 퇴마협회 사람이 아니시니 관계는 없겠소만. 이제 거미들의 정보가 쏟아질 거요. 그건 그렇고 그 나이프에는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소이까?”


소년은 고개를 젓는다. 그저, 구할 무기가 나이프밖에 없었노라고, 소년은 담담히 말했다. 그런 소년을 바라보는 노보루의 눈이 커졌다. 그냥 집히는 무기가 나이프였다고? 전문적인 살인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고?


소년과 노보루의 대화는 조금 더 이어졌다. 노보루는 소년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어떠한 불편도 없을 것을 약속했고, 소년은 분홍거미에 대한 정보를 중점적으로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해관계는 명확했다. 실력도, 확인했다.


저택을 나서는 소년의 뒷모습을, 그리고 소년을 태우고 떠나는 요코의 차를 스즈키 노보루는 오랜 시간을 두고 바라봤다. 의아한지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수하들에게 노보루는 짧게 한 마디 한다.


“무서운 소년이다. 저 소년은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어.”


일동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노보루를 바라본다. 소년의 실력은 눈으로 확인했지만,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스즈키 가의 당주가 그렇게 말할 정도의 실력인가?


“그렇게 뛰어난 실력이었습니까?”


노보루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는 일동에게 그는 짤막한 말을 던졌다.


“텅 빈 눈동자.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어 보이는 눈동자. 그 눈을 본 순간에 나는 패배를 직감했다. 소년이 무서운 것은 바로 그 눈 때문이야. 그 눈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어.”


노보루는 돌아섰다. 노보루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 그 눈동자는.’


노보루는 다시 한 번 소년의 눈동자를 떠올려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시는,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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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을 수가 없어서 11000자를 훌쩍 넘겼네요.(아닌가) 재미있게 보셨나요? 진영이가 그리우신 건 아니시겠지요? 좋은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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