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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글장이

세상을 파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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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머니나
작품등록일 :
2015.03.20 13:48
최근연재일 :
2018.05.20 14:26
연재수 :
165 회
조회수 :
43,029
추천수 :
935
글자수 :
1,193,004

작성
16.03.11 15:20
조회
168
추천
3
글자
10쪽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8: 꿈의 끝 (24)

DUMMY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프다. 머리가 아픈 소년 루프가 드디어 눈을 떴다.


"여긴...?"


하늘에 보이는 것은 별. 겨울 하늘의 별. 문득 몸을 감싸고 있는 겨울용 침낭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한심하다. 라키안하고 여행을 떠나고 나서 이런 식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숲 속에서 정신을 차린게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난다.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삭신이 그렇게까지 쑤시고 아프지는 않다. 블래냐가 뭐라도 해 준 것일까?


아니, 그 전에 라키안이랑 블래냐랑 와이트랑은 모두 괜찮은 걸까? 이사벨라를 쓰러뜨린 빌보아를 막으러 간다고 했는데? 게다가 거기엔 그 괴물 마법사 세듀서도 있을 거 아닌가? 셋 다 무사하긴 한걸까? 루프는 몸서리쳐오는 걱정에 몸을 일으키려고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무언가를 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신폭신하지만 베개는 아니다. 베개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편하지는 않다. 그런데 마음이 참으로 안정되는 무언가다... 이게 뭘까?


그러고 보니 시야에 겨울밤 별이 반짝이는 하늘 말고 무언가가 또 있다는 것에 눈치를 챘다. 약간 고개를 왼쪽으로 떨구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봉긋이 솟은 가슴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여성이다.


화끈. 얼굴이 달아오른다.


'주, 죽어도 여한이 없다.'


지금 죽으면 안되긴 하다. 이사벨라경의 유언도 있고 하니까... 하지만 말이다...


어떻게 이 각도에서 올려다 봐도 굴욕적이기는 커녕 이렇게까지 여전히 예쁠 수 있단 말인가? 신이시여... 아니, 그 '신'말고... 여튼간에 천지신명이시여 저 생물은 정말로 인간이 맞기는 하옵니까? 루프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펑펑 뛰고 콧김이 팡팡 뿜어져 나오는 경험을 했다.


루프가 움찔거리자 그녀가 문득 정신을 차린다. 실눈을 뜬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 저기... 무, 무릎 아프지? 지금 당장 일어날..."


이 상냥한 아가씨 같으니라고... 이 땅바닥에 앉아서 엉덩이 아플텐데 언제 일어날지 기약도 없는 나같은 정신 잃은 사람을 무릎베개까지 해줘 가면서 돌보고 있었단 말이냐! 루프는 자책감과 무한한 고마움이, 그리고 부끄러움이 용솟음치는 것을 생생히 체험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급히 뭐라도 말하려고 한건데, 그 말을 그녀가 딱 잘라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는 것을 느낀다.


"너 그거 무슨 뜻이었어?"


숙여서 자신의 눈에 맞춘 그녀의 눈동자가 물어온다. 한밤중인데도 달이 밝아서 그럴까? 투명하기까지 한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똑똑히 보인다. 착각같을 정도다.


"응? 뭐 말이야?"


그녀가 왼손을 들어서 루프의 이마를 살짝 쓰다듬었다.


"아까 거기서 했던 말. 듀라크를 쓰러뜨리기 전에."


'듀라크? 내가 뭐라고 했었나?'


루프가 그것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을리가 없었다! 초인적인, 초 현실적인 침착함으로, 그리고 냉정함으로 거의 기적같은 일을 벌였던 루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프가 그것을 맨정신으로 이루어 낸 것은 절대 아니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술을 한 잔 하고 다음날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서 내가 무슨 말을 했고, 그것이 이리나드를 자극했고, 때문에 지금 나한테 되물어 노는 것인지, 루프는 전혀 알지 못했다.


"에... 어... 저기..."


뭐라 말 못하고 이리저리 뜸을 들이자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그녀의 눈 위꺼풀과 아래꺼풀의 거리만큼이나 루프의 심장도 쪼그라든다. 입술이 저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여기서 그 말을 하면 안 돼, 루프! 이성이 울부짖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놈은 지금 너무나 약했다.


"내가 뭐라 그랬더라?"


딱!


아프다! 그녀가 이마를 쓰다듬던 손으로 거기를 딱 때렸다. 그것도 엄청 아프게! 손가락 네 개를 일렬로 세워서 야무지게 '딱!'하고 때렸다! 루프의 몸이 애벌레처럼 이리저리 구겨졌다.


"모르는 척 할거야?"


"아야야... 지, 진짜로 기억이 안납니다만..."


따악!


"악!"


"이 나쁜 놈!"


루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째서 이 로맨틱한 시간에, 이 시츄에이션에 이마를 얻어 맞으면서 나쁜놈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아아, 이럴 바에야 좀 부끄러울지라도, 아님 싹싹 빌게 될 지라도, 내가 했던 말이 기억 났으면 좋겠다고, 루프는 간절히 바랬다.


"계속 모르는 척 할거야?"


"으힝... 나 진짜로 기억이 안 나는..."


따아악!


소리도 더 크고 아프기도 더 아프다! 갈수록!


"이 나쁜 놈아! 니가 듀라크한테 '내 여자한테 무슨 짓이냐'라고 했잖아!"


뜨악! 고통이 느껴질 법도 하건만 그거랑은 별개로 루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저런 말을 했다고? 휴바스의 찌질이 대표 몸종 행상조수 루프가?!


잠시 생각을 해 봐야 했다. 루프는 심사숙고했다. 듀라크에게 자신이 저 소리를 내뱉었다면, 필시 옆에 '내 여자'가 될 만한 여성이 있었어야 한다. 정황상 그것은 이리나드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듀라크가 그 '무슨 짓'을 했는지도 기억해내야겠는데... 아, 그녀의 얼굴 한 켠에 반창고를 붙인게 보인다.


... 이제 대충 알 것 같다. 루프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내가 뭔 짓으으을!!!!'


그리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으아아!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도 부끄러운데, 그걸 좀 잊어줬으면 참으로 좋겠는데 눈 뜨자마자 그것부터 물어온다! 이 여자 정말 너무하다! 루프는 울상이 되었다. 동시에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고백...이라고 해야 하나, 여튼 뭐 그런 비슷한 것은 전에 핸빌에서 '대충', '비스무리하게' 한 걸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 제법 둘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놓고 '내 여자'라니! 루프 니가 미쳤구나 미쳤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루프의 숨만 자꾸 가빠진다.


저런 대사건을 저질러 놓고 잘도 그런 거창한 꿈까지 꾸고... 루프의 자괴감이 초마다 계속해서 커져갔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자괴감이 상황을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루프는 어떻게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 그게 말이지... 아마도 네가 잘 못 들은게 아닐까? 아마 '내려가서 뭑직어뿌라' 뭐 대충 이런..."


이건 어느 나라 말이냐...? 싸늘한 그녀의 눈동자가 말한다.


'그건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닌데?'


다행히도 한 마디 더 한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지.'


아아 고마워서 죽을 것 같다. 루프는 터질것 같은 심장을 쥐어짜는 심정으로 말을 고쳤다.


"듀라크가 이리나드에게 상처를 낸 것이 열받아서 외쳤습니다."


흐흥~? 간드러지는 콧소리가 그녀의 휘어지는 눈매와 너무나도 잘 어우러진다.


"그렇게 말 하면 이리나드가 감동이라도 받을 줄 알았습니까?"


으윽, 이 여자 또 시작이다. 루프는 입이 열댓자는 튀어 나와서 중얼거렸다.


"우으... 아님 아닌거지 왜 날 이렇게 못살게 구누..."


한 편 이리나드는 아랫배가 간질간질한게 정말로 재밌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소년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소년. 이 어디 내놔도 뭐 잘난 것 하나 없는 소년. 신분이라 해 봤자 일개 행상 조수에 불과한 소년. 이 소년이 마녀의 악명으로 물들은 자신의 마음에 이렇게 크게 자리 잡을 줄은 정말 상상조차도 못했다.


그래서 저렇게 뚱해서 웅얼거리는 소년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뛰는 것이다.


"딩동댕."


"댕?"


그녀가 활짝 웃었다. 반달 모양으로 벌어지는 입술이 눈동자에 똑똑히 맺힌다.


"정답이었습니다."


"으엥?"


그녀가 자신이 때렸던 소년의 이마를 정성스레 다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소년의 헝크러진 앞머리가 정갈하게 정돈되어져간다.


"앞으로 많이 많이 하십시오, 알겠죠?"


루프는 이제서야 오는 안도감에 눈을 살포시 감고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느껴지는 그녀의 손길이 너무나도 부드럽고 따스하다. 그녀와 함께 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한 과거조차도 자랑스럽다.


이 소녀와 함께하게 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왜 대답이 없어?"


이번엔 뾰로통한 목소리가 옆구리를 찌른다.


"예이, 예이. 기회가 될 때마다 외치겠습니다."


금새 표정이 또 변한다.


"대답이 너무 건성인데?"


루프는 번쩍 눈을 뜨고는 그녀의 것과 맞추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봐. 내가 그런 대사를 외치려면 너한테 일단 무슨 일이 생겨야 되잖아?"


"그렇지."


"근데 난 그런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어."


화끈. 이번엔 소녀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 소년은 너무 순진하고 순수해서 말이다, 팔색조같은 인격을 연기할 수 있는 소녀조차도 무방비하게 당하고는 하는 것이다. 저런 멍청한 표정으로 그런 기특한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소녀에게는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지는 것이다.


"바보..."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마음은 자꾸 부풀어 오른다.


잔뜩 커진 마음에 달빛이 내려앉아 시간이 자꾸만 흘러간다.


그렇게, 둘만의 밤이 흘러간다.


이 시점에서 확실하게 해 두는데, 그날 밤 이 두 연애치 사이에는 이 이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작가의말

 으으 오글오글 알콩달콩...


 좋으면서 싫은 이 기분은 대체 뭘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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