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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tionist 님의 서재입니다.

나 혼자 힐링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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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Fictionist
작품등록일 :
2023.12.01 19:41
최근연재일 :
2024.04.11 16:52
연재수 :
9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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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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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787

작성
24.04.11 16:52
조회
163
추천
10
글자
12쪽

90화. 소원(2)

DUMMY

90화. 소원(2)



“능력에 당하기 전이라. 잠시 네 기억을 읽어도 되겠느냐.”


누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하마.”


누리가 아기아의 손을 내 머리 위에 올렸다.

누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됐다.”


누리가 내게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미안하다. 기화야. 나는 네게 착한 일을 한 보상을 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벌을 주고 말았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옥죄어왔다.

그랬다.

에아닐로 건너간 뒤 한동안은 정말로 행복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난 이후부터는 거의 모든 시간이 내게 형벌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녀가 가지고 있던, 다른 이를 향한 연심과 인생을 모두 빼앗았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건 오로지 내 착각이었다.

맛있어하는 게 좋아서 해주었던 음식들이, 그들을 위해서 했던 여러 일들이 나를 향한 호감을 만들었다.

그것이 일반적이고 당연한 호감과는 전혀 달랐다는 걸··· 저주였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진실을 알게 된 뒤 나는 정신번쩍약은 물론이고 내가 만들 수 있는 모든 포션을 이용해서 그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호감도를 낮춰보기도 했다.

그러나 NPC처럼 변한 그들은 호감도가 낮아졌음에도 NPC나 다름없게 행동했다.

말을 걸어도 비슷한 대답만 반복했으며 행동도 기계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내 거점에 모아두고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들에게 효과가 있는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내게 가능한 일은 내 일생을 바쳐 동료들을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언젠가.

그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희망을 안은 채.

다만 그들 가까이에 가지는 않았다.

기신에게 그들을 보호하도록 한 뒤 나는 떨어진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내 파장이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내가 없을 때는 서로 대화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배회하던 그들이 내가 다가가는 순간 마치 전원이 들어온 기계처럼 달려들어 말을 걸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공포와 죄책감으로 머리를 돌바닥에 부딪쳐 죽고 싶었다.


“가능한가요?”


나는 누리를 보며 물었다.

만약 신마저 내 바람을 이룰 수 없다면, 그들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누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가능하고말고.”


순간 전신에 힘이 빠져 버렸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리는 무릎을 꿇고 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네 동료들의 자아는 사라진 게 아니야. 네 힘에 가려져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거지.”

“저, 정말입니까···.”

“그래. 지금 가서 그 애들을 도와주마.”


누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 순간 주위의 모습이 바뀌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던 구름이 초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앞쪽에는 3층짜리 저택이 있었다.

이곳이 어딘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한때는 나도 같이 살았으나 지금은 자아를 잃은 동료들이 있는 곳.

즐거움의 집이라고 불렸던 나의 옛 거점이다.

저택 주위에 선 기신들이 이쪽을 쳐다보자 누리가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기신들이 일제히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네 동료들을 데리고 오너라.”


누리가 말했다.

나는 침을 삼킨 뒤 저택 현관으로 걸어갔다.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문을 열자마자 발소리가 여럿 났다.


“기화 씨!”

“뭐야.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달리, 로렌스, 알마.

세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보자 호흡이 힘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2층에서도 네 명이 내려왔다.


“드디어 돌아왔구만!”

“참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이라니까요.”

“뭐 맛있는 것 좀 가지고 왔나?”


헤레인, 돌, 소즈.

그들 역시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다녀오셨어요. 여보.”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이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에니아.

내가 사랑하는 바람에 자신의 사랑을 잃은 여성이 웃으며 다가와서는 나를 껴안았다.

그들의 인사말, 표정, 그리고 에니아의 포옹.

모든 것이 내가 저택을 찾아왔을 때마다 반복되었던 그대로였다.

순서조차 다르지 않았다.

만난 지 50년 가까이가 지났음에도 7명의 얼굴은 똑같았다.

나와 마찬가지였다.

플레이어인 나와 NPC가 되어 버린 이들에게는 노화라는 개념이 없었다.


“······다들 나를 따라와.”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 뒤로 돌며 말했다.


“어?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야?”

“밖에 맛있는 거 있나?”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알았어요, 여보.”


나는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발을 옮겼다.

내 동료들은 일렬로 나를 따라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누리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저 사람은 누구냐?”

“누구지?”

“모르는 사람이 있군.”

“손님인가요?”

“손님이 오셨네요.”

“손님입니다. 차를 가지고 올까요?”

“여보, 손님 오셨어요.”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누리를 바라보았다.

누리는 내 바로 옆까지 걸어오더니 손을 들었다.

그러자 뒤에 일렬로 서 있던 동료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놀라서 쳐다보자 누리가 미소를 지었다.


“안심하려무나. 잠시 재웠을 뿐이니까. 이 아이들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전에 네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다.”

“그게 뭐죠.”

“이 아이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다음에 기화, 넌 어떻게 할 거지?”

“제가 저지른 일을 설명하고 사죄할 겁니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만약 그들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몇천 번이고, 몇만 번이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료들이 원하는 대로 할 겁니다. 저를 벌하고 싶다면 벌을 받을 겁니다. 죽이고 싶다면 죽을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 이들에게 속죄할 수만 있다면··· 저는 그걸로 좋습니다···.”

“그건 어렵겠구나.”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누리를 쳐다보았다.


“만약 누군가는 네가 죽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네가 살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할 셈이냐. 상자 안에 들어가서 50% 확률로 죽는 독약이라도 마실 생각이냐?”

“······.”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자 누리가 웃었다.


“죽을 생각은 하지 말거라. 네 기억을 통해서 본 이 아이들은 누구도 그런 걸 바라지 않을 테니. 그리고 네가 이런 일을 겪은 데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까. 덤으로 조금 더 도와주마.”


누리는 그렇게 말하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내 안에서 무언가 붉은 기운이 빠져나가 그녀의 손으로 들어갔다.

나는 놀라서 내 몸을 더듬거렸다. 그러나 딱히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게 뭘 한 거죠?”

“네가 가진 힘을 조금 바꿨단다.”

“네??”

“앞으로는 누군가를 실망시키거나 만족시켜 주어도 상대의 자아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없을 거다.”

“!!!”


나는 입을 벌린 채 굳었다.


“그러면 이제 네 동료들 차례구나.”


누리가 다시 내 동료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환한 빛이 그들을 감쌌고 수초가 지나자 다 함께 눈을 떴다.


“어···라···? 어라??”

“몸이 말을 듣네?”

“오, 오오???”


놀란 얼굴로 서로를 보던 동료들의 시선이 점차 나를 향했다.

그들의 표정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각자만의 얼굴, 그리고 각자만의 눈빛.

진짜 내 동료들이었다.

눈과 목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으흑······.”


가장 먼저 사죄부터 할 생각이었는데 아무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릎과 손을 땅에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울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심하게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미안··· 내가··· 전부 내가···.”


어떻게든 입을 열어보았지만 말이 더 나오질 않았다.

결국 나는 그들 앞에서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그래서요?”


아기아는 하얀 의자에 앉아 있는 자기 주인을 보며 물었다.


“기화 씨는 동료들에게 사과했어요?”

“했지.”


환한 빛에 감싸인 누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옆에서는 수정구가 전후좌우로 마구 흔들리는 중이었다.

안에 갇힌 사느마츠시가 수정구의 벽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몸을 꿈틀거렸다.


“옆에서 듣던 내가 귀에서 피가 나는 것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계속 사과했단다.”

“동료들이 용서했나요?”

“그래. 그 애들은 기화가 자기들을 고치려고 애쓰는 모습을 다 보고 있었으니까. 수십 년 동안 말이야.”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고 조사는 끝났니.”

“앗, 네. 지금까지 새 삶을 얻은 선인 중 능력의 부작용으로 문제가 있었던 사람은 기화 씨 혼자였어요. 다들 주인님께 상을 받을 만큼 선한 사람들이었으니 능력을 악용한 경우도 없었고요.”

“내 불찰이야. 새로운 삶을 즐기도록 힘을 일깨워서 보내준 건데 그런 일이 생기다니. 앞으로는 보내놓고 만족하는 게 아니라 지켜보기도 해야겠어.”

“그 일을 하는 건 결국 저겠죠···.”


아기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니?”

“역시 주인님의 마음은 넓다고 했어요.”

“내가 귀가 먹은 줄 아니?”


누리가 아기아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악! 다 들어놓고 왜 물어보신 거예요!”


아기아가 팔을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조사는 끝냈다고 했으니 이제 가서 다음 일이나 하렴.”


누리는 아기아의 볼을 놓아주고 말했다. 그녀가 품에서 두 개의 편지를 꺼내 아기아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요?”


아기아가 편지를 받아 들며 물었다.


“기화가 지구에서 만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야.”


편지에는 각각 첸롄과 황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가서 전해주렴.”

“으···. 지구는 지겨운데···.”


아기아가 휴식이 없었던 9년의 근무를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



“후우.”


나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앞에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았다.

탐스럽게 맺힌 작물들이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황금빛 논에는 낱알이 가득 달린 벼가 고개를 숙이고 바람에 흔들렸고, 밭에는 커다란 호박과 매끈한 가지가 가득했다.


“뀨웅.”


어깨에 앉은 황도가 날개를 파닥이며 울었다.


“오늘 저녁은 호박전에 가지밥을 해 먹을까.”


나는 황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에이. 가지는 튀겨야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에니아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얼굴이 굳었다.

그러자 에니아가 코를 실룩거리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퍼억!


“컥!”


손바닥으로 등짝을 얻어맞은 나는 얼른 돌아서서 에니아에게서 등을 숨겼다.


“내가 말했지. 우리 보고 그런 표정 지으면 혼난다고.”

“······미안.”

“미안도 금지라고 했을 텐데.”

“······.”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저렇게 맛있어 보이는 가지를 왜 밥에 넣어. 그거 있잖아. 다진 고기를 가지 안에 넣고 튀기는 거. 전에 해줬던···.”

“알았어. 그러면 그것도 만들게.”

“아싸. 다른 애들한테도 그렇게 얘기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니아가 활짝 웃으며 저택 쪽으로 달려갔다.


“······가지밥도 맛있는데 말이지.”

“뀽···.”

“그래. 황도 너도 튀김 파다 이거지.”


나는 피식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어깨에서 떨어진 황도가 내 옆으로 떠올랐다.


“어쩔 수 없지. 가지부터 따고 옥수수기름을 짜러 가자.”

“뀽!”


황도가 날개를 크게 퍼덕이며 만족스럽게 울었다.

나는 황도와 함께 밭으로 걸어갔다.

그러던 도중 어쩐지 갑작스레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


나는 입을 가렸다.

행복해서 나오는 웃음을 참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바보처럼 웃는 걸 눈에 담는 이들이 돌아왔다.


“······히히.”


나는 입가를 가린 채로 소리를 죽여서 웃었다. 아무도 이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아.

행복한 가을이다.


작가의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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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76화. 천인구 방문(2) 24.03.19 214 11 20쪽
75 75화. 천인구 방문(1) 24.03.18 216 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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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72화. 기신(2) 24.03.12 237 7 13쪽
71 71화. 기신(1) 24.03.08 253 10 13쪽
70 70화. 직시(3) 24.03.07 245 8 14쪽
69 69화. 직시(2) 24.03.06 252 10 14쪽
68 68화. 직시(1) 24.03.05 264 9 17쪽
67 67화. 원수 24.03.04 281 9 13쪽
66 66화. 얼굴 한번 보자(6) +1 24.03.02 315 10 15쪽
65 65화. 얼굴 한번 보자(5) 24.02.28 302 11 15쪽
64 64화. 얼굴 한번 보자(4) 24.02.27 311 1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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