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기 70 - 꿈의 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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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0
째깍째깍
벽걸이 시계에서 초침 돌아가는 그 작은 소리에 귀에 똑똑스레 들려왔다. 손으로 어딘갈 두드리고 두드렸지만 다급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스토커다?”
“그렇다니까요! 지금까지 저희 야구부 코치를 몇 번이나 스토킹하고 제 여기 팔을 쇠 파이프로 쳤다니까요.”
“…….”
경찰은 씨도 안 먹힌다는 표정으로 날 봤다. 억울해 죽겠네 정말!
하지만 정황 자체가 나에게 많이 불리했다. 한수연이나 야구부 부원들이 증인으로 서 준다면 몰라도 지금은 내가 가해자였다.
김재환의 빌라에 무단 침입해서 사정 없이 두드려 팬 결과 이빨 두 개가 나가고 입 안이 온통 다 찢어졌다. 거기다 이런 저런 명목들을 추가하면 난 유치장에 갇혀도 할 말이 없었다.
‘이런 젠장! 시간도 없는데 정말 미치겠네!’
어째 김재환이랑만 얽히면 경찰서에 오는지. 난 연락한 학교에서 제발 빨리 사람이 오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바로 그때 구원의 손길이 건내져 왔다.
“광진고에서 왔습니다.”
굵고 가라앉은 목소리, 큰 울림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였다. 부지불식간에 돌린 시야에 작은 키가 잡혔다. 대추빛의 붉은 얼굴, 그리고 동산처럼 나온 배.
“교, 교장선생님! 어떻게 여기에……?”
“네놈 이야말로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오늘이 그 중요한 날인 줄 모르는 거냐?”
“물론 알고 있죠. 아무튼 제가 좀 빨리 가 봐야 합니다. 지금 출발해도 늦을 거에요.”
그 말에 교장의 눈이 경찰을 향했다.
“무슨 일 입니까?”
“이 학생이 저 분의 집에 무단 침입해서 일방적으로 폭행 했습니다. 피해자의 이빨 두 개가 부러지고 심한 타박상을 입었습니다.”
그때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김재환이 소리쳤다.
“폭행이 아니라 죽이려고 했습니다. 경찰이 오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에요! 저놈은 얼마 전에도 절 폭행했습니다. 악질적인 놈이에요!”
“너 이 자식!”
어디서 저런 거짓말을!
하지만 김재환은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놓았다. 경찰도 얼마 전 김재환을 쳤던 기록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어쩌지? 김재환은 오늘이 결승전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고 할 텐데…….’
저 득의만만한 미소. 분명 알고 있었다. 여기서 버티면 내가 무엇을 잃게 될 지. 그래서 가슴이 더 탔다. 빨리, 나만을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이 있는데…….
‘지금 가 봐야 하는데!’
결승전까지 그토록 녀석들을 닦달하고 달래며 숨가쁘게 달려왔다. 여기서 내가 가지 않는다면 그 이상의 배신은 없다.
“난 절대 합의 못해. 죽어도 못해! 소년원에서 잘 썩어 봐라. 하하하하하!”
바로 그때 교장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내 어깨를 꾹 누른 교장이 김재환에게 말했다.
“자네는 입 닥치게.”
말 한 마디에 경찰서가 조용해졌다. 교장의 그 싸늘하게 가라앉은 한 마디에 김재환은 벙찐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내 딸의 일을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 물음에 교장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입을 연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조금 늦게 알았지만 말이지.”
그리고 난 교장의 세 번째 모습을 보게 되었다. 혈압을 올리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습, 착 가라앉아 싸늘하게 화를 죽이는 모습.
그리고 바로 지금. 교장의 눈에서 천불이 일었다. 그 눈빛이란, 정말 눈 앞의 사람 숨통을 끊어버릴 것처럼 무시무시해서 경찰들마저 침을 꿀꺽 삼키고 긴장했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김재환은 그저 벌벌 떨었다.
“저 잡종만도 못한 놈이 내 딸을 쫓아다녀 학교를 자퇴하게 만들었다지? 우울증에도 걸리게 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 마다 씹어 뱉듯이 말하는 강도가 세졌다. 뒤에 있는 나까지 소름이 오싹하며 돋았다.
“고소하려면 고소 해.”
김재환 바로 앞에 선 교장이 눈을 마주치자 김재환이 귀신이라도 본 듯 고개를 돌렸다. 그때 교장의 손이 날았다.
짜아아악!
채찍으로 후려친 듯한 소리. 교장의 손이, 정말 김재환을 죽일 듯 뺨을 후려쳤다. 겨우 아물어가던 입에서 다시 피가 터지고 이빨 하나가 더 날았다.
“넌 그때쯤 이미 깜빵에 가 있을 테니까.”
벌겋게 부어 오른 뺨을 쥐고 김재환이 눈물을 흘렸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통쾌했고, 그리고 그만큼 시퍼렇게 날이 선 교장의 모습은 살벌했다.
“오태오군?”
“예, 옙!”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가 보게.”
“하지만……!”
당황한 경찰이 급히 만류했지만 교장이 손을 내 저었다.
“내가 모조리 책임질 테니 가 보게.”
따로 입으로는 말 하지 않았지만, 김재환을 볼 때와는 달리 교장의 눈에선 어쩐지 따듯함이 엿보였다.
그 작은 감사의 표시에 난 씨익 미소 짓고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
이때만큼은 정말로 사심 없이 그가 고마웠다. 그리고 뒤 돌아본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커다란 스포츠 백을 들고, 돌려 받은 핸드폰에 루이의 번호를 띄운 채 앞으로 힘차게 달려나갔다.
“양 팀 경례!”
“잘 부탁 드립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패기 넘치는 광주제일고의 인사와 다 죽어가는 광진고의 경례. 모두들 눈 밑이 거뭇하게 죽어 있었다. 이제 뒤고 뭐고 없었다.
끝이었다.
선발 투수를 태오로 적어 낸 이상, 교체하려면 적어도 한 타자는 상대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그 태오가 없으니 다른 투수를 세울 수도 없다.
이제 끝. 정말 다 끝이었다.
“안 왔구나 결국…….”
“그러게.”
원망보다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왜? 그들이 지금까지 봐 온 태오는 절대 이런 기대를 저버릴 녀석도, 내 던질 녀석도 아니었다.
소심하고 겁 많지만 동시에 기회만 보면 흥분하고 무작정 몸을 날리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녀석이었다.
“나가자.”
“뭐?”
형진이의 말에 모두들 시선을 집중했다. 대호를 제외하고는 다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태오는 올 거야. 나가자!”
“하, 하지만…… 투수 없이 뭘 어떻게…….”
“올 거야. 분명 올 거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온다! 그러니까 나가자. 몰수패를 당하더라도 결승전의 그라운드 위에서 당하자.”
“……난 나가겠어. 태오를 믿고, 무엇보다 벤치 위에서 쫓겨나기는 싫다.”
“나도, 나도 나간다!”
성래가 가장 먼저 모자를 눌러 쓰고 글러브를 집었다. 명호가 그 뒤를 따랐고 진철과 대호 역시 비장한 심정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형진은 프로텍터를 걸치고 마스크를 옆구리에 낀 채 홈으로 향했고 김석곤 황기철 이석진 역시 글러브를 쥐고 뒤를 따랐다.
“자, 가자.”
광진고 여덟 맴버는 그렇게 선장 없는 배를 몰아 풍랑 이는 바다로 나섰다.
경기 시작 1분 전의 일이었다.
이제야 안 거지만 루이의 드라이빙 테크닉은 정말 최악이었다. 안정감 따위는 뒷전으로 버려둔 난폭한 코너링과 지칠 줄 모르고 밟아대는 엑셀레이터까지!
“속도 좀 줄여요! 가기 전에 죽겠다니까!!”
“NO, NO. This is American spirit.”
“뻑킹 크라이스트 양키!”
단 하나 위안이 되는 건 이 거침 없는 드라이빙이 정말 도로를 누비며 경기장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것 정도?
“휴우……. 집합 시간은 이미 지났고, 제발 제발 제발 시합 시간에만 맞춰서 도착하자 제발!”
그래도 루이의 호쾌한 드라이빙을 보고 있자니 지루해 할 틈은 없어서 좋았다. 생명이 담보로 걸려있긴 하지만.
루이는 그렇게 한참을 질주해대다, 사람 하나 없는 뻥 뚫린 도로에 진입하고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태오씨.”
전처럼 유쾌하지 않았다. 그 진지한 말투에 나는 답 없이 고개만 돌렸다.
“내 말 기억 나나요? 난 생각보다 태오씨의 일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예, 기억나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 사실은 태오씨의 아버지를 두고 한 말입니다. 아버지가 간암에 걸리신 것, 알고 있습니다.”
“…….”
어떻게, 라고 묻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태오씨에게 꼭 전해야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요.”
“난 사실 병원에, 태오 씨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루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창하게 말했다.
“태오씨의 아버지를 만나서 묻고 싶었습니다. 정말 우승한다면, 당신을 미국으로 스카우트 해도 될 지.”
“……그래서 뭐라시던가요.”
루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난 정말 놀랐습니다. 별 반응도 없이, 어떤 놀람도 없이 그저 절 비웃었습니다.
“비웃었다구요?”
“예. 그리곤 망설임 없이, 이만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쓸데 없는 이야기는 할 필요 없으니 데려가기나 하라고…….”
주먹이 꽉 쥐여졌다.
어머니가 병문안을 온 그 날, 내가 아버지에게 스카웃 받은 이야기를 한 날. 아버지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너도 같은 말을 하는 군.’
어머니가 자신의 미국행을 알린 날 나도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어떤 반응도 없이, 그때 이미 마음을 정해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노인네…….”
언제까지 혼자 떠안을 생각이었는지, 화가 다 났다. 미리 말 해 줬더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바꿀 수 있었을 우리의 관계도, 그리고 어머니의 일도.
혼자 끌어 안고 끙끙거리다 결국 이렇게, 미련 없이 놓아주고…….
왠지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눈물로 흐려진 저 앞에 수원 구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고 싶은 말은 많고 풀어야 할 이야기도 많지만, 루이. 다녀오겠습니다.”
루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요. 가서 당신이 누구인지 모두에게 보여주세요.”
처음으로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것들을 내려놓았다.
쭉 펴진 가슴, 당당한 걸음 걸이. 스파이크로 돌 바닥을 긁으며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 더 빠르게, 그리고 정신 없이 달렸다.
들려오는 함성 소리, 다가갈수록 달궈지는 열기.
‘저 앞에 있다.’
그토록 그려왔던 꿈의 무대가.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오랜 시간 지나왔던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 빛으로 물든 그 세계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눈 속으로 들어오는 거친 빛무리.
그리고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라운드에 서 날 바라보는 녀석들의 얼굴들.
씨익 웃었다. 완전할 리 없는 몸에서 이상한 열기가 피어났다.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조금 늦었다!”
- 작가의말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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