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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운 님의 서재입니다.

맹인검마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은깨비
작품등록일 :
2020.05.12 16:08
최근연재일 :
2020.05.26 13:17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2,698
추천수 :
80
글자수 :
90,944

작성
20.05.14 12:15
조회
199
추천
5
글자
12쪽

五. 천각

DUMMY

五.


현고가 깨어난 것은 무려 닷새 뒤였다.

가슴에 꽉 막힌 뭔가가 보이지 않는 망치로 가슴을 때려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술은 메말라 부르텄는데도 눈에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현고는 다 찢어져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살았습니까...?"


대답을 바란 말은 아니었지만 대답이 들렸다. 풍도의 손에서 현고를 구해준 그 노인이 답했다.


"그래 살아났다. 참으로 천운이로다 그렇지 않고서야 화타가 두 번 살아난들 너를 살릴 수 있었겠나."


현고는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지독히도 원망스러운 그 눈빛에 노인은 현고의 눈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어찌 살았습니까...."

"병신이 된 몸으로 태 백 대를 맞고 단전까지 내 손으로 찔렀는데 어찌 내가 살았단 말입니까."

"제 사부를 제 손으로 찔러죽인 놈이... 어찌 제만 살았단 말이오."


현고는 떨리는 손으로 두 눈을 틀어막었다. 하지만 눈 먼 자의 앞을 무엇으로 가릴 수 있을까. 머리 속에 가득찬 사부의 모습, 목소리 어느 하나 그 손으로 가리지 못하고 현고는 그저 목놓아 울었다.


"자네 사부의 시신은 화산장문인이 수습해갔네. 화산의 법도대로 장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리하였네."

"....고맙습니다. 대협의 이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

"지금은 많이 심란할 테지. 조금 쉬어두."


천각은 말을 잇지 못했다. 현고가 자는 내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영호성의 검으로 번개같이 목을 베어갔던 것이다. 천각은 창졸간에 뻗은 금나수법으로 현고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게 무슨 짓인고!"


현고는 대답하지 않고 피눈물만을 흘렸다. 천각은 잠시 한숨을 쉬고 현고의 혼혈을 짚었다. 현고는 침상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이거 괜한 녀석을 주워온 거 아닙니까? 남방에 있을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은데."

"흥미가 가는 걸 어떡하느냐. 듣도보도 못한 절정 검술을 사용하는 화산파의 고수. 그리고 그를 죽이고 화산파에서 스스로 파문한 제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역시 인연이 아니겠느냐."

"또 쓸데없는 인연 놀이가 시작됐군요."

"뭐 너도 그 덕에 날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무공을 좀 가르쳐 달라니깐요."

"넌 기본이 안됐다니까!"




천각과 홍은 투닥거리면서도 제법 성실하게 현고의 수발을 들었다. 천각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나서도 매일 내가요상법으로 현고의 상세를 안정시켰다. 현고가 자리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건 한 달이 지난 뒤였다.

현고는 천각의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 날의 일을 알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지. 홍아."

"제가요?"


홍이 전한 그 날의 전말은 이러했다.



풍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등 뒤의 천각을 돌아보았다.


"북방에 계셨던 것이 아닙니까?"

"있었지."

"삼십 년을 약조하셨습니다. 어찌 벌써 내려오셨습니까?"

"사태가 우리의 예상보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이. 나도 어쩔 수 없었네."

"그가 드디어 나선 겁니까?"

"아직은. 하지만 너무 급박하게 조여오는 바람에 잠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네. 아마 내 예상으로는 오 년이 고비일 듯 하이."


정파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화산의 장문인으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저자세였다. 풍도는 지나칠정도로 눈 앞의 노인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글쎄 한 몇 달 정도 이 곳에 머물다가 다시 북방으로 올라가 볼 셈이네. 간만에 남방으로 내려왔으니 여기 좋은 술이나 실컷 마시다가 갈 생각이야. 사천 요리도 좀 먹어보세 허허."

"그건 잘 가지고 계신 거지요?"

"물론일세. 나 천각이야. 약조한 기간은 지킴세."


풍도는 한 시름 놓았다는 듯이 깊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했다.


"저 아이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세, 어쩐지 마음이 가는 녀석인걸? 남방에 있는 동안 며칠 좀 데리고 다녀볼까하이."

"....대협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번 한 번만 넘어가지요."


풍도는 현고를 한 번 날카롭게 흘겨보더니 자리를 피했다. 아니, 물러서는 척 하며 우수에 모은 자색의 진기를 현고에게 날카롭게 쏘아냈다.


"허허 참 앙칼진 친구야."


천각은 자색의 장력을 맨손으로 잡아 터트려 버린 후에 사람좋게 웃었다. 풍도는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풍련과 영호성을 들쳐매고 자취를 감췄다.



현고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숙였다. 긴 한숨이 이어지고 현고는 쓰러지듯이 천각의 앞에 무릎 꿇었다.


"무엇이냐?"

"대협께서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뭐 그렇지."

"또한 화산 장문 풍도의 손에서도 구해주셨으니 은혜를 천 번 갚아도 모자랍니다. 헌데 이 놈이 면피하고 한 가지 청을 드려야겠습니다."

"허어, 이거 맹랑한 놈이로다. 어디 한 번 말이나 해보거라."


현고는 고개를 들었다. 초첨 없는 눈에 희미한 독기가 맺혀있었다.


"살아야겠습니다."


천각은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전을 찌르고도 화산 장문의 손아귀에 잡혀서도 스스로 목을 베려고 해도 살아남았으니 이제는 살아야겠습니다."

"살아서 어찌할 셈이냐."

"죽일 놈들이 있습니다. 내 사부를 십 년 동안 동굴에 묶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비열한 수로 사부를 죽인 풍련! 그와 작당해 우리 사제를 죽음으로 내몬 화산 장문 풍도! 이 두 놈을 죽이지 못하고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천각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다 잃어버려 더 태울 것도 없는 현고는 스스로를 장작 삼아 불사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할 저를 구해주셨으니 저를 살리는 것도 대협의 뜻입니다. 염치 없고 또 염치 없지만 절 받아주십시오.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화산의 것들은 다 버리고 나왔으니 제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협께서 이 못난 놈을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현고의 말은 절절하고 간곡했다. 천각은 굳은 얼굴로 현고를 일으켜세웠다. 마르고 초췌한 눈 속에 하늘 끝까지 타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천각은 굳게 결심한 뒤에 말했다.


"싫어."

"뭐, 뭐요?"

"싫다고."


불안하게 둘 사이를 바라보면 홍이 비로소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천각이 현고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까봐 설마 설마 하며 고개를 젓고 있었던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대협!"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너를 두 번이나 구해주었으니 이미 은혜는 충분히 베풀지 않았느냐? 게다가 나 같은 고수에게 무공을 배우려면 내 마음을 움직이거나 너의 싹수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걸 날로 먹으려고 하다니 고얀 놈이로고."

"보여드리면 되겠습니까."


현고는 사부의 검을 뽑았다. 설령 눈이 멀고 내공을 잃었다고는 하나 검에 있어서는 천하의 기재. 고작 약관의 나이에 절정고수 다섯을 꺾은 검괴 영호성조차 너는 검을 쥐기 위해 태어났다고 극찬했던 소검괴가 바로 현고였다.


"호오 그거 재밌겠구먼. 눈먼 소경과 대결이라니. 긴장이 되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군 그래."

"잠깐 무례하겠습니다, 용서를!"


현고는 치켜든 검을 겨누고 한칼 내지르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내려오던 검이 멈춰버렸다. 현고는 어두운 낯빛으로 치켜든 검을 내렸다. 그것은 천각이 그의 은인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천각은 그의 마음을 아는 듯 현고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리하지말고 쉬거라. 겨우 잡은 목숨줄이 아니냐."




현고는 침묵했다.

침묵한 채로 천각의 앞에 무릎 꿇을 뿐이었다.

천각과 홍이 하루다 멀다하고 흥청망청 주색잡기에 취해 있을 때도, 낮 부터 거나하게 취해 벌건 얼굴로 드러누웠을 때도.

현고는 조용히 칼을 쥐고 천각의 앞에 고개 숙인 채 침묵했다.


"어제 너무 많이 마셨나 속이 더부룩 하네."


고요한 아침이었다. 몽롱한 눈으로 홍은 물 한바가지 먹기 위해 마당으로 나섰다. 그 곳엔 칼을 쥐고 허공만 바라보는 현고가 있었다.


"사내가 칼을 쥐었으면 한칼 내려치지 않고."

"내려치지 못하겠습니다."

"자네 무사가 맞나? 칼질 한 번 시원하게 못하면서 어떻게 무사라고 할 수 있나?"

"이젠 무사가 아닌가 봅니다."


현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해서 홍도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으음 잘잤다. 왜 꼭두새벽부터 이리들 나와있는게냐."

"이리 나와 있으면 혹시 제자로 받아줄까 싶어서요."

"그 놈 참 꿈도 크구만."


천각은 으스러지게 기지개를 펴며 시원한 물을 두 바가지나 들이켰다. 행동거지는 시정잡배 같은 것이 고수의 품격은 어디에도 없지만 묘하게도 이목을 끌었다.


"이봐 헛 힘 빼지마. 그런다고 무공 한 자락 안가르쳐 줄 양반이야."

"어허 이놈이."

"말이야 맞는 말이죠. 어떻게 칠 년을 따라다녔는데 삼류 무공이나 하나 던져줄 수가 있습니까!"

"그거나 잘 배우거라. 넌 아직 준비가 안됐다니까 이놈아."

"그놈의 준비! 준비하다 늙어 죽겠소!"


홍은 노인에게 주려던 찻잔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저런 폭급한 놈을 보았나."


노인은 홍이 집어던진 찻잔을 그야말로 신묘한 발동작으로 쳐올렸다. 떨어지던 찻물이 스스로 찻잔에 담기며 다시 노인의 손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야말로 고수의 상수(上手)였다.


"괜찮은 분인 것 같습니다."

"누가말이냐. 저 성질머리가 말이냐?"

"칠 년이나 따라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홍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었지만 천각은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그래 화산에서 나왔으니 이제 검을 버릴 셈이냐?"

"......."

"너는 검을 쓰지 못하겠지. 무슨 검을 쓰더라도 화산의 내려치기이고 올려베기일 것이고 검에 어떤 변화를 섞어도 네가 생각하는 그건 네 사부의 칠절매화검이 아니냐."


천각의 말은 정확했다. 파문당한 현고가 천각에게 한 칼 내려치지 못한 것은 오직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 휘둘러도 스스로가 그 것이 화산의 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을 버리진 못 합니다."

"그 또한 그렇겠지."


천각은 찬물로 으레 남자들이 그렇듯 어푸어푸 거칠게 세수했다.


"생각을 좀 해 보았습니다."

"무슨 생각 말이냐."

"대협께서 날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난 대협을 따라 다녀야겠습니다."

"허허 거 목숨 구해줬더니 원치도 않는 짐덩이 하나 보태는게냐?"

"그 말대로, 구명지은을 입었으니 보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공을 배우는 건 나중의 일이지만 목숨 빚도 갚지 않고 이대로 보내드릴 순 없습니다."


천각은 잠시 알송달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곧 몇 달 이내에 내몽고로 올라갈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내가 상관있다 이놈아. 난 지금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다. 게다가 내몽고로 올라가면 나 하나 추스르기도 힘들지. 홍 저놈이야 경공을 제법 하니 불편하진 않지만 눈 먼 너까지 돌봐줄 수는 없다."

"이 곳에 계신 몇 달이라도 좋습니다."

"날 따라다니다 죽어도?"

"그래도 따라가겠습니다."

"흐, 흐하하하! 그래 죽어도 좋다는데 어디 한 번 따라다녀 보거라."


천각은 크게 웃으며 객잔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현고는 이 알 수 없는 고수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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