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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운 님의 서재입니다.

맹인검마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은깨비
작품등록일 :
2020.05.12 16:08
최근연재일 :
2020.05.26 13:17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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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5.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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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九. 신마교

DUMMY

九.


현고는 불에 덴 듯 화들짝 일어나 칼을 겨눴다. 식은땀이 흘러 이마를 축축하게 적셨다.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고수다!'


방금 상대한 자객은 흔해빠진 삼류 검사였으나 이 자는 달랐다. 낙엽 쌓인 산을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걸었다면 이자는 틀림없는 일류 고수였다.


"보아하니 맹인인 것 같은데, 이런 놈에게 당하다니 잠영비 수준도 가관이로군."

"다가오지마라!"


겁먹은 짐승이 크게 짖는다고, 현고가 딱 그 꼴이었다. 발작적으로 칼을 겨눴지만 상대는 이전과는 수준이 달랐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 꼴로 나를 상대할 셈이냐?"


상대가 장난치듯이 내지른 일수에 현고의 칼이 허공을 날았다. 현고는 손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피가 나오도록 부여잡았으나 일격에 칼이 날아가버렸다.


"내가 풍신보의 수급을 거두게 될 줄이야."


상대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걸어갔다. 현고는 맨몸으로라도 제지하려 했지만 검을 타고 전해진 상대의 경력이 내장을 진탕했다. 현고는 잠시 현기증이 나 움직이지 못했다.


"안돼!"

"넌 가만히 누워있거라. 당장 죽이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고."

"어딜 마교의 잡놈이!"


그 때 현고의 귀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홍이었다. 마교의 검사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으나 기습한 홍의 초수가 먼저였다.


"내가 풍신보의 수제자다 이 개자식아!"


바람처럼 다가온 홍의 다리가 강렬한 진각을 밟았다. 홍의 진기를 잔뜩 머금은 쌍장이 마교 검수의 가슴팍을 쳤다. 그는 기쾌하게 반응해 급소는 가렸지만 막지 못한 손 하나가 복부를 때렸다.


"큭, 두 명이었나!"


상대는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지만 그 와중에도 칼을 휘둘렀다. 검에서 강한 검기가 날아 홍의 이마 살갗을 베었다. 기습에 성공해 맹렬히 달려들던 홍은 그 살벌한 칼질에 발을 멈췄다.


'고수다! 범상한 검기가 아니다. 일류 중에서도 뛰어난 고수다!'


7년이나 천각 밑에서 수련했음에도 아직 이류 수준에 머무르는 홍이 상대할 자가 아니었다. 곧이어 몸을 추스린 상대의 칼이 기승을 부렸다. 칼날에 서릿발같은 검기가 넘실거리자 홍의 몸은 단숨에 상처로 난자되었다. 홍은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물러서기만 했다.


"이봐 현고! 좀 도와줘, 이 놈 보통이 아니야."

"자, 잠깐만."


현고는 떨어진 칼을 주워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칼을 휘두르려는데 심장이 쿵쿵거리며 미친듯이 뛰었다.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 이 불쌍한 놈을 어찌 두고...

"이봐 현고!"


똑같았다. 자신의 칼에 맞고 쓰러진 사부 영호성의 마지막과 너무도 똑같았다. 그 순간의 처참했던 기억이 현고의 머리와 기억을 좀먹었다. 그 사이 마교 검사는 무시무시한 검기를 휘몰아치며 홍을 몰아갔다.


"구혈회검."


칼 끝이 회오리치며 원을 그리자 경력이 한가운데로 몰렸고 직후에 터져나오며 회오리 문양으로 검기가 쏟아졌다. 절체절명의 위기, 홍은 죽음을 직감했다.

그 순간에 현고가 둘 사이로 뛰어들었다.


"현고!"


현고는 칼을 내지르지 않고 검기에 정통으로 맞섰다. 무정한 검기가 현고의 팔뚝과 상체를 쓸고 지나갔다. 막 펼쳐지려던 차에 현고가 끼어들어 위력이 십분의 일로 반감되었지만 그럼에도 현고를 난자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현고는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그자리에서 버텼다.


'사부....!'


회한과 원통함을 담아 현고를 칼을 내질렀다. 가슴 속에 겨우 묵혀둔 분노가 욱하고 치고 올라와 감정이 복받쳤다. 지금이라면 죽어도 좋다, 그런 마음 뿐이었다.


"내 앞으로 오지 마시오!"


눈도 보이지 않고 몸도 엉망진창이었지만 분노와 자책 원한이 현고를 지탱했다. 매 일초가 동귀어진의 수였다. 입으로 소리치진 않았지만 매 칼질마다 죽어, 같이 죽자 하는 울음소리가 홍에게는 들렸다.


"어린 놈이 칼질이 제법 독하구나. 너도 한 번 받아보거라."


검사는 한발 물러서서 다시 회오리치며 칼 끝으로 원을 그렸다. 칼 끝에 몰린 검기가 매섭게 회전했다. 또다시 죽음이 현고의 목덜미를 쓸었다.


'또, 또 보인다.'


보이는 것인지 느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새카만 어둠 속에서 기의 흐름, 움직이는 칼 끝이 희미하게 보였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아니면 눈을 잃어서 기감이 열린건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지금 해야할 것은 명확했다. 소용돌이치는 검기의 한가운데로 하얀 선이 이어져 있었다. 현고는 망설이지 않고 칼을 찔러넣었다.


"크윽!"


회오리치는 검기에 팔이 어지럽게 베였지만 비명은 오히려 검객에게서 나왔다. 지금까지 구혈회검을 이렇게 치고 들어온 자는 없었다. 너무 놀라 초식을 중간에 멈추다보니 내상으로 피를 토했다.


"구혈회검을, 이렇게...."


놀라서 말도 잇지 못했다. 게다가 현고의 칼이 그의 배에 떡하니 꽂혀있었다. 검사의 눈에 독기가 맺혔다.


"내가 너무 여유를 부렸구나, 다 죽어라!"


그는 뒤로 물러서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폭풍과도 같은 검기를 칼에 둘렀다. 휘몰아치는 검기에 베인 돌부리도 동굴벽도 두부처럼 베여나갔다.


'저게 날아오면 죽는다!'


그는 삼류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그 핏빛이 도는 검기가 완성되는 순간 무정하리만큼 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그 순간 죽은 듯이 운공하던 천각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쐐액


금빛이 번뜩였다.


한 칼이면 절명할 둘을 두고 마교 검사가 힘없이 쓰러졌다. 홍은 감았던 눈을 조금만 떴다. 검사의 왼쪽 가슴팍에서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 도와주신 겁니까?"


하지만 천각은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천각의 입에서 검은 핏물이 한 줄기 더 흘러내렸다. 홍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천각이 무리를 했음을 알았다.


"이봐 현고 괜찮나? 아니 눈도 안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검초를 펼쳤나?"


그건 동귀어진의 일수이자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일격이었다. 홍은 두 눈을 뜨고서도 현고의 일수를 똑같이 따라할 자신이 없었다.


"크으읍..."

"다행히 죽지는 않았군 그래."


긴장이 풀리자 이제야 통증이 몰려왔다. 현고의 상세는 좋지 않았다. 두 번이나 연이어 격전을 치루느라 몸이 만싱창이가 된 것이다.


"놈들이 알아차린 것 같아. 어서 빠져나가자."

"무리입니다, 풍신보께선 운기중이고 저는 이 모양 이 꼴입니다. 여기 숨어있는 것이..."

"어떤 선택을 해도 도박이겠지만, 동굴에 피 냄새가 너무 흥건해. 사냥개에게 제일 민감한 것이 피냄새야."


현고도 맹렬하게 갈등했다. 어찌해야 되는가, 풍신보와 함께 있는데 발이 묶이는 상황이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들고 옮기자. 도박수지만 당장 죽는 것 보단 다른 곳에 숨는 것이 사부님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둘은 천각을 붉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하늘 위로 신호탄이 날았다. 홍도 현고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솟아오른 신호탄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신호탄이 울리자마자였다.

새하얀 장포의 중년인이 그 곳으로 들어왔다. 홍은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긴장했다. 현고 역시도 그 발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통 고수가 아니다, 이번엔 진짜다!'


사내가 들어오자마자 들끓는 내력에 현고는 숨이 다 막혔다. 온 동굴이 저 사내의 힘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내딛는 걸음과 내쉬는 숨에서 흘러나온 내력만으로도 현고와 홍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웬 놈들이길래 사천에 와서 행패를 부리나 했는데..."


굵은 목소리에서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현고는 바싹 긴장했으나 중년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쓰러진 마교의 자객들을 살피더니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였다.


"너! 잠깐 이리 와보거라."

"뭐, 뭡니까! 내가 오라면 순순히..."


하지만 그의 기세와 압력은 내력을 잃은 현고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살벌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습격해온 자객들과는 달랐다. 현고는 혹시 정파의 인물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고 그에게 비척비척 걸어갔다.


"팔에 난 그 상처, 자세히 보여봐라."


현고가 팔을 들자 회오리치며 흘러간 검상이 보였다. 중년인의 기세가 다시 한 번 끓어올랐다.


"구혈비검! 저 놈들이 신마교의 종자들이 맞느냐?"

"예, 예."

"혹시 여기로 오면서 붉은 장포를 걸친 놈을 보았느냐. 나이는 내 또래정도 되고 벼슬하는 놈들처럼 머리엔 관을 쓰고 있다."


맹인에게 뭘 봤느냐가 가당키나 한 질문인가. 그도 아차 싶었는지 홍에게 재차 물었다. 홍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달아나는데 그딴 걸 살필 겨를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고수가 물으니 홍은 기억을 되살렸다. 덤벼든 자들은 평범한 행인으로 위장한 자객들 뿐이었다.


"없었습니다."

"없다고? 그럴리가... 분명 적사 그 놈의 독내가 났는데?"


그는 뭔가 보이기라도 한 듯이 주위를 살피다 동굴에서 운기하고 있는 천각을 발견했다. 그리곤 거침없이 천각에게 걸어갔다.


"어엇, 다가오지 마십시오!"


홍이 급하게 손을 내질렀지만 이미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천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대단한 경신술이었다. 그는 운기요상중인 천각에게 다가가 그가 토해 놓은 피냄새를 맡았다.


"이건... 틀림없다. 적주독에 금잠! 왔구나 적사독!"


그는 분노에 떠는 건지 희열에 찬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다만 눈 먼 현고에겐 그가 들썩일 때마다 장대한 내력이 숨 쉬듯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고수가 아니다. 풍도보다도 훨씬 위인 것 같다.'


화산 장문인 풍도보다도 위라면 정파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초절정 고수였다. 그리고 이 자는 마교의 인물 같지는 않았다.


"대협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마교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나는 당적이다."

"아니 이름만 말하면 내가 어찌 압니까."

"당적, 다, 당문백사 당적?!"


내몽고를 떠돌던 홍은 몰랐지만 현고는 대경하며 소리쳤다.


당적.

사천에서 가장 유명한 고수중의 하나였다.

누구도 다루지 못했던 백사의 독을 고작 약관의 나이로 완벽하게 다루어낸 천하의 기재. 정파 제일가는 독공의 고수가 바로 그였다.

그 본인도 위맹이 쟁쟁한 독공의 고수였는데 천하삼절독이라는 백사의 독까지 더해지자 당적은 당당히 정파 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렸다.

현고는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넙죽 엎드렸다.


"대협! 이분을 좀 구해주십시오. 이분은 바로 풍신보 천각이십니다."

"풍신보?"

"마교 놈들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놈들이 말하길, 적주와 금잠의 독에 중독되어 제아무리 풍신보라도 당해내지 못 할 것이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대협!"

"이 분이 풍신보라면 왜 북방에 있지 않고 사천에 계시단 말이냐? 아직 오 년이 남았지 않느냐?"

"그건 저도 잘... 하지만 상황이 급박해서 잠시 내려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독에 당하여..."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놈들의 신호탄이 올라왔는데!"


현고는 말할 기회나 주던가, 하며 속으로 당적을 욕했지만 그의 행동은 신속했다. 바로 천각의 등에 장심을 가져다 대었다.


"지독하군. 어지간한 고수라도 이미 피를 쏟고 죽었을 것이다. 내가 와서 다행이다. 적사 그 놈의 독과 내 백사독은 상극이지."


하지만 그는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라 풍신보 천각이었다. 당적도 그를 믿고 하얀 손에서 웅대한 진기를 쏟아냈다. 현고도 홍도 떨리는 심정으로 그를 보았다.


"쿨럭!"


그때 천각이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아까보다도 시커먼 것이었다. 이제는 피를 토한 건지 먹물을 토한 건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홍이 놀라 다가가려고 했지만 당적이 제지했다.

그 이후로 천각의 창백한 얼굴에 조금씩 혈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당적의 치료가 듣기 시작한 것이다. 정파 최고수와 정파 제일의 독공 고수가 만나자 그 지독한 적주의 독도 뙤약볕 아래의 얼음처럼 빠르게 녹아내렸다.

당적이 손을 뗀 건 반 각 정도가 지난 뒤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처치는 하였다."

"그럼 회복되시는 겁니까?"

"중독 당하고도 무리하게 움직여서 독이 몸 전체로 퍼졌다. 주요 경맥의 독만을 내가 해독해드렸다. 문제는 금잠이지. 이 것은 엄밀히 말하면 독이 아니라 산공분이기 때문에 나로써도 해독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금잠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공력이 돌아오기만 하면 남은 독 정도는 체외로 배출시킬 수 있는 분이니 이제 몸을 피하자."

"그럴 필요 없소!"


모두가 동시에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천각의 치료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쏘아올린 신호탄을 보고 마교의 정예가 그 곳에 집결해 있었다.




"이봐 현고. 아무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인 것 같은데."


홍의 체념한듯한 말이 동굴 속에 울렸다. 당적의 표정에서도 심각함이 느껴졌다. 동굴 밖에는 마흔 명의 흑의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홍은 저들의 이름도, 저들을 이끄는 자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혈검백랑..."


신마교가 자랑하는 세 자루의 칼이 있다. 신마단, 광풍비 그리고 혈검백랑. 각기 신마의 수족처럼 움직이며 25년 전 정파에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힌 이름들이었다. 천각이 위험을 무릅쓰고 내몽고에서 떠도는 이유이기도 했다.


"쳐라."


죽립에 복면까지 쓴 우두머리가 명하자 셋이 즉시 칼을 빼어들고 동굴 안으로 달려들었다. 차가운 검기가 회오리치듯이 동굴 안을 급습했다.


"흥!"


하지만 당문백사에게는 기도 차지 않았다. 그가 장포자락을 휘날리자 경력이 휘몰아쳤다. 날아오는 검기가 경력을 만나 산들바람처럼 사그라들었다.


"내 이름을 알고도 감히 덤비는가, 나는 당적이다!"


당문백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섬광같은 지풍이 칼과 함께 주인을 꿰뚫어버렸다. 당적의 지풍에 맞은 마교도는 가슴팍에 핏물을 쏟으며 뒤로 튕겨져나갔다.


쐐액!


손가락이 다시 한 번 튕기자 다른 검수 역시도 칼이 동강나며 가슴에서 피분수를 쏟았다.


"너는 어떻게 죽여주랴."


당적은 뒷짐을 진 채로 한 번의 발구름으로 검수의 앞에 다가가 일장을 쳐냈다. 장포만 펄럭 했을 뿐 출수는 보이지도 않았다. 검수는 배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을 남기며 피를 토하고 나가떨어졌다.


"크흐윽."

"잘 가시게."


검사는 가까스로 목숨줄은 부여잡고 있었지만 이내 하얗게 눈을 까뒤집고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정말 꿈에 볼까 두려운 모습으로 죽었다. 장력엔 손속을 두었지만 그 안의 독이 발작한 것이다.


"백사독! 과, 과연 정파 십대고수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적들이 꼼짝도 못한다. 대단해."


하지만 고수는 적진에도 있었다. 죽립에 복면까지 쓴 흑의인이 움직이자 분위기는 천천히 그를 중심으로 변해갔다. 그가 뽑은 칼에서 패도적인 검기가 휘몰아쳤다.


"잡졸은 아닌 것 같은데. 이름이 뭐냐."


대답은 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에 무성의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 검기의 돌풍이 칼 끝을 타고 땅을 갈랐다.


"대협 조심!"


처음엔 돌풍 같았으나 당적에게 다가왔을 즈음엔 폭풍 속의 칼바람이었다. 당적은 신중한 표정으로 수도를 들어 검객처럼 내려베었다. 두 검공이 맞닿자 폭발과도 같은 굉음이 주위를 쓸었다. 간신히 버티던 현고는 날아갔고 홍 역시도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제법이구나."


당적의 눈이 거센 안광을 토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내력을 끌어올리자 흉흉한 독기가 그를 휘감았다. 당적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 밑의 땅이 독기에 썩어들어갔다. 특히 두 손에는 선명한 백광이 또렷하게 맺혀있었다.


"너도 한 번 받아보거라!"


당적이 손가락을 튕기자 지법이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강맹한 백색 섬광이 날았다. 죽립인도 경시하지 못하고 기쾌한 비검기를 날려 맞받았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당적이 양 손에서 가공할 지풍을 뿜어내고 죽립인은 살벌한 검기로 일일히 맞닿았다.


"백사일진무류장."


당적은 친절하게 장법의 이름을 읊으며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부터 그의 기세가 급변했다. 눈에선 쏘는 듯한 안광이 번뜩이고 양 손의 백색 기공이 짙어지며 대기가 그 곳으로 몰려들었다.


"파(破)!"


쌍장에서 쳐낸 기가 죽립인을 꿰뚫었다. 죽립인은 칼에 검은 기를 끌어올려 방어했지만 당적이 쳐낸 장력은 칼과 맞닿는 순간 한 번 더 가속하며 죽립인을 강타했다. 이 기괴한 장법에 죽립인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뒤로 삼장이나 물러섰다.


"쿨럭!"


죽립인이 순간 휘청이며 피를 토했다. 당장 공격한다면 끝장을 낼 수 있었지만 당적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뒷짐을 진 채 그의 상세를 구경하기만 했다.


"백사...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아직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사천 땅에서 물러난다면 목숨까지는 보존해 주겠다."

"큭큭, 풍신보의 목을 코 앞에 두, 두고 그럴 수야 있겠소."


당적의 검미가 꿈틀했다. 이 놈이 뭘 믿고 버티는진 모르겠지만 백사독에 중독되고도 물러서지 않자 독공 고수의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오냐 남은 얘기는 저승에서 하거라!"


당적의 손가락이 튕기자 다시 순백색 지력이 질풍처럼 날았다. 뱀처럼 휘어지며 날아간 지풍이 죽립인의 미간을 노렸다. 이미 백사독이 오른 상대는 몸을 벌벌 떨며 반응하지 못했다.


그 순간이었다.

붉은 지풍이 다가와 백색 지풍을 집어삼켰다. 붉은 장포에 관을 쓴 중년의 남자가 빛살처럼 나타났다.


"오랜만일세 백사."


작가의말

앞으로는 평일 오후 7시로 연재주기를 맞춰볼까 합니다.

주말은 비축분을 써야해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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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十一. 신마교 +2 20.05.21 130 5 16쪽
11 十. 신마교 +4 20.05.20 152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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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六. 천각 20.05.15 158 8 16쪽
6 五. 천각 20.05.14 201 5 12쪽
5 四. 파국 그리고 파문 +2 20.05.13 209 5 8쪽
4 三. 파국 그리고 파문 +2 20.05.13 222 5 11쪽
3 二. 화산제일검 +2 20.05.12 245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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