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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호의 서재입니다.

오피스 108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9.10.25 20:57
최근연재일 :
2020.06.06 00:19
연재수 :
109 회
조회수 :
38,844
추천수 :
1,022
글자수 :
254,932

작성
19.11.24 23:46
조회
503
추천
13
글자
5쪽

19. 인연

DUMMY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대학 졸업 후 수년 째 보냈던 나홀마스를 올해도 피하기 힘들 것 같다. 취직이 안 돼 집에서 빈둥댔던 백수 출신이다 보니 친구들도 하나 둘 연락이 끊겼고 하나 있던 여친마저 실리를 선택하면서 나홀마스 역사의 주인공이 됐던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약속 있는 사람은 일찍 퇴근해.”


손과장의 화통한 배려에 조대리와 오미호는 이미 자리를 비웠고 고과장 눈치만 보고 있던 하얀도 고과장이 일어서자 같이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일을 마무리한 손과장은 잘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선미는 무슨 일이 있는지 여전히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약속 없어요?”

“네. 정도씨는요?”

“저도 그렇죠 뭐. 선미씨.”

“네?”

“우리 어디 가서 저녁이나 같이 할래요?”


그냥 한번 던져봤다.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니터를 끄는 것이 아닌가? 뜻밖의 반응이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곧바로 회사를 나왔다. 이미 캐럴로 뒤섞인 거리엔 너나 할 것 없이 팔짱을 낀 쌍쌍이족들의 대이동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회사 주변을 꼼꼼히 돌았으나 이미 만원이고 우리가 들어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뭐 좋아해요?”

“전 가리는 것 없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이 근처엔 자리가 없겠어요.”

“그러네요.”

“그러면 좀 걸을까요?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좀 춥긴 해도 먹거리도 많고 자리도 구하기 쉬운 데가 있어요.”


첫 번째 데이트에 그런 곳을 간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선미도 이해할 거라 믿고 무조건 발길을 돌렸다. 선미를 데리고 간 곳은 얼마 전 무용과 같이 갔던 공원의 포장마차 촌이다. 실내가 아니라서 조금 춥긴 했지만 공원에 벤치도 있는 데다 때마침 날리는 눈발이 분위기까지 띠워주었다.


“어머나, 눈이 오네요.”

“그러게요. 분위기 죽이네요.”


역시나 오늘 같은 날은 포장마차도 자리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행히 공원엔 여기저기 앉을 자리가 충분하다. 포장마차 몇 군데를 돌며 이것저것 사들고 몇 걸음 걷다가 마침 비어있는 벤치를 발견했다.


“생각보다 춥지 않은데요?”

“그러게요.”

“이렇게 눈 맞으면서 뭐 먹는 건 처음이네요.”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거세진 눈발이 거세진다. 이렇게 되면 계속 벤치에 있을 수는 없다. 아직 음식이 남아 있었지만 공원 건너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다. 이럴 때 대학 때 소개팅하면서 배운 기술이 있다.


“혹시 형제 많아요? 저희 집은 저 뿐이라 형제 있는 분들 보면 부럽더라고요.”

“저희 집은 셋이나 돼요. 전 그중에 셋째고요.”

“모두 딸인가요?”

“아뇨. 제 위에 오빠 둘이 있어요.”


역시 단골 메뉴는 어김없이 통했다. 선미의 집에선 천안에서 한 시간 정도 들어가야 하는 동네에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다. 몇 년 전 과수원을 운영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오빠 둘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어머니와 가업을 잇고 있었다. 오빠들은 이미 결혼해 조카가 넷이나 있다고 한다.


“그렇군요. 부친께서 대단한 것을 남기셨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오빠들은 과수원이 싫어서 분가했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저한텐 여름휴가가 없어요.”

“과수원 일하느라고요?”

“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미가 몇 년을 회사에 다녔지만 누구도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누가 물어보지 않는 한 굳이 할 예기도 아니다. 겉으론 가까워 보여도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 직장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배웠다.


“정도씨는 아직 사회생활을 많이 안 해봐서 잘 모를 거예요. 대기업은 인간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속을 내놔선 안 돼요.”

“그렇긴 하겠어요. 직장이라는 데가 원래 서로 경쟁하는 곳이잖아요.”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손과장님은 믿어도 돼요.”


결국 선미의 집안 사정을 아는 사람은 나와 손과장 뿐이다. 그런데 선미가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할까? 한참을 이야기 하다 보니 어느새 10시가 넘었다. 선미를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고 집으로 오는데 기분이 묘하다. 매년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내야했던 나홀로족을 면한 것까진 좋은데 사적인 얘기를 털어놓은 의도가 궁금하다.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사실 나도 그런데.


“다녀왔습니다.”

“늦을 거면 전화 좀 하지.”

“미안. 엄마. 누구 좀 만나느라고 미쳐 전화할 틈이 없었어.”

“이런 날 누구? 혹시 여자 만났니?”

“아냐. 아버지는?”

“모임 있다고 나가셨는데 아직 안 오셨어. 얼른 씻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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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인연 19.11.24 504 13 5쪽
18 18. 초라한 퇴장 19.11.23 513 13 9쪽
17 17. 진상 19.11.21 504 12 7쪽
16 16. 갑질 19.11.18 505 11 6쪽
15 15. 배려와 동정 19.11.15 545 16 7쪽
14 14. 행복한 고민 19.11.13 532 13 5쪽
13 13. 몸통과 깃털 19.11.12 530 15 9쪽
12 12. 쓰레기 19.11.11 555 16 10쪽
11 11. 고래싸움. 19.11.10 566 12 7쪽
10 10. 수심가지(水深可知) 19.11.08 567 13 6쪽
9 9. 폭풍전야 19.11.08 572 13 5쪽
8 8. 입방정 19.11.07 608 13 6쪽
7 7. 싸가지 19.11.05 601 15 5쪽
6 6. 악연 19.11.04 633 17 6쪽
5 5. 갈등 19.11.03 670 14 8쪽
4 4. 신세계 19.11.03 697 14 3쪽
3 3. 처신 19.11.03 727 15 6쪽
2 2. 가시밭길 19.11.03 824 19 6쪽
1 1. 첫 출근 19.11.01 1,295 1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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