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행복한 고민
하얀의 교육까지 맡게 된 이후, 하루도 제 시간에 퇴근한 적이 없다. 일과 교육을 병행하다 보니 일과시간에 일을 끝내고 나면 남은 시간을 하얀의 교육에 할애했기 때문에 야근하는 날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저 때문에 퇴근이 늦으시네요.”
“하얀씨 때문이라니요. 이것도 업무의 연장인데.”
하얀은 머리회전이 빨라 교육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이제는 간단한 일은 혼자서 해낼 정도가 되면서 야근은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미숙한 점이 많아 수시로 방향을 잡아줘야 했고 남들 눈엔 둘이 사귀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요즘은 야근 안 하세요?”
“네. 이젠 하얀씨도 웬만한 건 혼자 하니까요. 머리가 좋더군요.”
“얼굴도 예뻐서 좋으시겠어요.”
“네?”
문득 선미의 말투가 낯설다는 느낌이 든다. 생각해 보니 하얀을 교육시키면서 선미와 거의 대화가 없었고 어제부터인가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까지 사라져 있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게 서툴렀던 하얀은 수시로 다가왔고 그럴 때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다 보니 마주하는 시간은 더욱 늘어갔다. 그런데 이 지경까지 오게 된 데는 하얀의 책임도 있었다.
“잘했어요. 그리고 일지에 기록하는 것 잊지 않았죠?”
“그럼요.”
이것으로 끝나면 선미가 오해할 일도 없었다. 원래 눈치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성격이 활달해서일까? 점심 먹으러 가면서 팔짱을 끼질 않나, 나른한 오후엔 피로 회복하라며 비타민을 내놓질 않나, 그렇다고 난처함 때문에 거절하자니 어린 마음에 상처라도 입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선미의 오해를 산 것 같다.
“아이고. 우리 정도씨 복도 많지. 지금 죽을 지경이죠?”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고 했던가? 고과장까지 정곡을 찔러대며 놀려댔다, 처음엔 얄미운 생각이 들렀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연애경험이 많은 그녀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과장은 조언 대신 회식을 제안했다. 고과장의 승진과 새 식구 하얀을 맞았지만 갑작스런 유과장의 퇴사로 미루어 왔던 것이다.
“안 좋은 일로 퇴사하는데 우리끼리 회식할 수가 없어서 미뤘어요.”
하얀의 입사 환영을 겸한 회식이었지만 비용은 모두 고과장이 부담하기로 했다. 그런데 1차 회식이 끝나고 2차 노래방에 갔을 때 고과장의 노련미가 빛을 발휘했다. 갑자기 젊은 사람들 노래 좀 들어보자며 선미와 같이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몇 곡 부르고 나자 한동안 뜸했던 선미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와! 두 사람 보통이 아니네요. 무용씨, 안 그래요?”
“그러게요. 전 명함도 못 내밀겠어요.”
직장인이든 뭐가 됐든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라는 것을 배웠다. 언젠가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IMF가 오기 전, 대다수 기업들은 젊은 피 수혈이라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 능력은 상관없이 나이 많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밀어 붙였고 명예퇴직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젊은 사원들보다 능력이 뛰어난 경력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만약 그 경험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 남아 있었다면 IMF때 충분히 대비했을 거야. 하지만 남은 사람들이 경험이 없다 보니 우왕좌왕하다 침몰할 수밖에. 대기업들은 자금력이 탄탄하니까 버텨냈지만 대다수가 을인 중소기업은 예상을 하고도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앉아서 당한 거야.”
사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이 많은 고령자들이 죽치고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젊은 인재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그랬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고과장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또 하나의 경험을 베우는 동안 선미와 하얀 사이에 존재했던 서먹함도 사라졌다.
“어제 잘 들어갔어요?”
“네. 속 괜찮아요? 어제 많이 드시던데.”
어제까지만 해도 아침인사를 사무적으로 받아들이던 선미의 얼굴에 웃음기가 되살아났다. 이래서 경험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했던가? 고과장의 노련함이 과 분위기를 한방에 바꿔놓았다. 선미는 그동안 업무에 적응한 하얀과 일을 같이 하며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모처럼 찾아온 여유에 멍을 때리던 중, 무용의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정도씨. 요즘 무슨 고민 있어요?”
“네? 고민이라니요?”
“최근 말수가 줄어든 것 같아서요.”
“아닙니다. 고민이라니요.”
그러나 무용은 틀리지 않았다. 어쩌면 가급적 자신과 말을 섞지 않으려는 속내를 눈치 챈 질문인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유일한 상대를 잃지 않으려는 속마음을 간접적으로 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표가 났었나? 그런데 선미는?’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왜 그렇게 민감했던 것일까? 혹시 동료가 아닌 남자로서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대놓고 뾰로통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여자들 사이에 흔히 일어나는 일시적 질투심이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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