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세계
“그때 그 자식을 살려주는 게 아니었어.”
평생을 대기업에서 일하셨던 아버지는 일하던 팀이 계열사로 분리 됐을 때도 살아남았던 분이다. 그런데다 남들은 IMF 한파로 회사를 나설 때 승진하는 기록까지 세우며 오너의 신임까지 받았던 분이다. 그러나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아버지의 삶을 바꾸고 말았다.
“아버지 같은 실수는 절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리 친해도 공과 사가 걸린 문제는 냉정하게 판단해야돼. 아버지처럼 무작정 살려주지 말고.”
아버지에겐 제법 적지 않은 직장 후배들이 있었다. 그들 중엔 퇴직한지 20여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안부를 전하는 후배도 있다. 그런데 그 후배들 중 아버지의 신뢰에 비수로 보답한 사람이 있었다. IMF가 채 끝나지 않았던 시절, 이미 계열사 직원이었던 그 후배는 신임 사장이 부임할 때마다 도마에 오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도마에서 구해준 사람이 아버지였다. 그러나 아버지도 세월을 피하지 못했고 그 후배가 있던 계열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사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받고 말았다.
“죄송합니다만 이 건은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아녀요.”
어찌된 건지 그는 아버지가 추진하는 일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회피하기 일쑤였고 결국 후배의 배은망덕한 보답으로 실적 한번 올리지 못한 채 임기만 채우고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그런데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 회사 대표였다. 어떻게든 회사를 키우려고 노력했던 아버지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배은망덕한 후배였던 것이다.
“그 후배라는 사람하곤 연락 안하시죠?”
“꼴도 보기 싫은데 뭐 하러. 입에 이름 올리는 것조차 역겹다. 다시 말하지만 공과 사가 걸린 문제는 냉정하게 판단해.”
아버지는 지금도 가끔 옛날에 같이 일하던 분들과의 모임에 나가시곤 하는데 그 꼴 보기 싫은 인간도 뻔뻔스럽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고 한다. 이미 20년도 지난 일이지만 아버지가 그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그 꼴 보기 싫은 인간이 아버지에게 배은망덕한 것도 모자라 사원시절 한 지붕 아래서 고생했던 동료의 밥그릇까지 빼앗더라는 것이다.
“쓰레기가 따로 없네요.”
“옛날에 ‘순간이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 문구가 있었는데 딱 나를 두고 한 말 같더라.”
속에 있던 후회를 깊은 한숨으로 쏟아낸 아버지의 얼굴엔 그런 선택을 했던 자신에 대한 회한이 서려있었다. 직장 생활이라는 게 일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된 지금, 앞으로 어떤 마래가 나에게 펼쳐질지 기대 반 두려움 반이다. 어차피 다가올 시간들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정면으로 부딪히라는 아버지 말씀을 상기하며 프로야구 중계가 한창인 TV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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