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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호의 서재입니다.

오피스 108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9.10.25 20:57
최근연재일 :
2020.06.06 00:19
연재수 :
109 회
조회수 :
38,854
추천수 :
1,022
글자수 :
254,932

작성
19.11.23 19:50
조회
513
추천
13
글자
9쪽

18. 초라한 퇴장

DUMMY

어찌 연휴는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그냥 늦잠 몇 번 잤을 뿐인데 눈을 뜨니 달력위 빨간 숫자들 뒤에 있던 검은 숫자가 성큼 다가와 있다. 연휴 후유증이 이런 것일까? 평소와 다르게 몸이 욱신거려 출근하기가 싫다.


“피곤하지?”

“네.”

“양쪽 집안 오가느라 쉬지도 못했겠다.”

“어제 하루 쉬었으면 됐죠. 뭐.”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큰집과 외가 모두 서울에 있고 연휴가 끝난 다음날인 어제가 일요일이라 남들은 고향에서 올라오는 날 집에서 쉴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피곤한데 지방에 다녀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잘 지냈어요?”


오늘도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선미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왠지 다른 느낌이 든다. 곧이어 하나 둘 비어있던 자리가 채워지고 각 과별로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주팀장이 나타나면서 찬물을 끼얹은 듯 사라졌다. 단 한사람 무용만이 그에게 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나오셨습니까?”

“음. 연휴 잘 보냈어?”

“예.”


정말 뜻밖이다. 그동안 무용을 사람취급도 안하던 주팀장이 그의 인사를 저렇게 받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주팀장은 연휴가 즐겁지 않았는지 얼굴엔 불편한 심기가 가득하다. 아무래도 매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들어오던 선물을 받지 못해서일까?


“과장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무용은 지난 두 달에 걸친 마음고생 끝에 가까스로 새 직장을 얻게 되었다. 비록 대기업은 아니지만 취업연령을 넘긴 무용은 그마저도 감지덕지라며 겸손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주팀장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알 것 같다.


“집에 있는데 다음 달부터 출근하라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어머나! 정말 잘 됐어요.”

“이게 다 과장님께서 배려해 주신 덕입니다.”

“제 능력이 부족해서 그것밖에 못해줬네요.”


무용은 전자제품 부속을 제조하는 친구의 회사에 자리를 얻었다고 한다. 전에 있던 창고 관리자가 물건을 몰래 빼돌려 팔다가 파면을 당했는데 마침 무용과 연락이 닿았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무용은 체계적인 재고관리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의욕도 나타냈다.


“정도씨. 그동안 제 얘기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사실 제 얘기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아닙니다. 오히려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자칫 권고사직으로 끝날 뻔했던 무용의 퇴사는 용퇴로 화려하게 장식됐다. 사직서를 제출한 무용은 며칠 후 주팀장의 결재가 나자마자 회사를 돌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인사를 마치고 사물 정리까지 끝낸 무용은 팀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겨울의 기운이 살살 코끝을 자극하는 10월의 마지막 날 정든 회사를 떠났다.


“과장님 무용선배 저대로 보내기 서운한데 송별회 안합니까?”

“안 그래도 얘기했는데 무용씨가 술 마시면 울음 터질 것 같다고 나중에 감정 추스르면 연락하겠대요.”


비록 무능력자로 취급 받았어도 그에겐 나름의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하긴, 5년이란 세월이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니 왜 정이 안 들었겠는가? 무용의 퇴사로 뜻하지 않게 여인천하의 청일점으로 남들의 무러움을 사는 운영과 2인자가 되었다.


“과장님 충원하실 거죠?”

“당연하죠. 잘하면 한명 더 충원될 거예요.”

“그 중 하나는 남자겠죠?”

“글쎄요. 전부 여자일 수도 있어요.”


고과장은 말을 끝내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지원과만 그런 게 아니다. 운영과도 이미 인력 충원을 위에 요청한 뒤였다. 만약 두 과장의 바람대로 2명씩 충원되면 팀원은 현재 8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난다. 유과장과 이중성 그리고 김무용의 줄지은 퇴사가 있었지만 갑자기 인력을 늘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앞으로 정도씨 할 일이 많을 거예요.”


그러나 기대했던 인력은 11월 한 달을 보내고도 충원되지 않았다. 어차피 내년 초에 공개채용이 계획돼 있고 회사에서 계획한 일도 내년에 시작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 대신 팀에선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12월에 접어들면서 주팀장은 거의 자리를 비우다시피 했고 자리로 돌아오면 혼자 수심에 찬 얼굴로 시간을 보내다 퇴근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손과장이 고과장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가면서 모두가 궁금해 하던 일의 내막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과장만 알고 있어. 주팀장. 이번에 잘릴 거야.”

“네?”

“어차피 직급 정년에 걸렸고 내년에 임원 발령은 이미 물 건너갔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그러면 지금쯤 사직서를 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야 하는데 이 사람이 계속 버티지 뭐야. 아무래도 모양새를 갖춰줘야 할 것 같아.”

“모양새라니요?”

“명예퇴직.”

“아.”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생각지 않았던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서로 바쁘다 보니 격조했다며 인사팀장 정선배가 저녁을 겸한 술을 사주겠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명절 인사도 못했다. 정선배는 곧 있을 부장승진 대상이다.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은 기정사실화되고 있어 미리 축하를 해야 했지만 인사라는 것은 발표되기 전까진 모르는 것이라며 입을 막았다.


“사실 너 말고도 회사에 대학 후배도 있어. 하지만 어떤 도움도 준 적이 없어. 대신 퇴근 시간 후엔 주로 내가 술을 사지. 직장이라는 데는 자기 혼자 이겨내야 할 전장이나 마찬가지야. 그동안 널 지켜봤는데 다행히 이중성하고는 전혀 다르더라. 사내에서 평도 좋고.”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평을 들었는지는 모르나 기분 좋게 정선배와 반주를 곁들인 저녁을 보냈다. 며칠 후, 이미 예상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연말을 보름 앞둔 어느 날,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정선배가 방문하면서 주팀장의 신변에 변화가 감지됐다.


“그렇게 공을 세웠는데 결국 이렇게 쫓아내는구나. 휴우!”

“팀장님 열심히 하셨습니다. 하지만 직장이란 데는 신뢰가 생명 아닙니까?”

“그래 좋아. 그런데 나만 먹었어? 다 같이 먹었으면서 의리 없이 말이야. 내가 더러워서 나간다. 지들은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자.”


그날 이후, 주팀장은 하루 종일 어딜 갔다 오는지 퇴근 시간이 임박해서야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고 가끔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혼자 씩씩대다가 퇴근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팀장이 할 얘기가 있다며 팀원들을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이번에 내가 회사를 그만두려고 해.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돼서 아쉽네. 하지만 어쩌겠어. 여기저기서 오라고 난리를 치니 말이야. 남의 호의를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못 이기는 체 받아들였어. 그렇지만 회사에서 연말까진 있어달라고 하니까 그렇게 해야지.”


그러나 그의 말과는 달리 그는 전에 장비를 팔아줬던 업체들을 돌면서 자리를 구걸하고 있었고 그의 갑질에 신물이 난 그들이 받아 줄 리 없었다. 결국 이러한 소문은 팀원들뿐만 아니라 사내 간부들 사이에 퍼졌고 그의 퇴임사는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꼴갑을 떤 거야. 영업팀 직원이 그러는데 어디선 문전박대도 당했대.”

“그러게 갑질 좀 적당히 하지.”

“어디 그 뿐이야? 중졸 주제에 그 자리도 과분하지. 꼴에 임원 자리까지 넘봤더라고.”

“꼴갑이 아니라 주접이네.”


그리고 며칠 후, 연말까진 아직 열흘이나 남았지만 애써 못 들은 척 버티던 주팀장은 팀원들과 작별을 고하고 아름답지 못한 뒷모습만 남긴 채 쓸쓸히 사라졌다. 어차피 갈 것을 왜 마지막까지 그런 추한 꼴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자처하던 그는 자신의 잘못된 처신으로 비굴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저 사람. 비록 중졸이지만 그런 짓 안했으면 내년에 임원 됐을 사람이에요.”

“결국 소탐대실(小貪大失)이 된 거네요.”

“어쨌거나 우린 저렇게 살지 맙시다.‘


마지막까지 주접을 떨던 주팀장이 사라지자 이제 모든 관심은 손과장에게 몰렸다. 당연히 2인자인 손과장이 팀장이 돼야 했지만 청육엔 절대 깨지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팀장은 반드시 차장이상 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손과장은 차장이 되려면 1년이나 남아있었다.


“고과장님. 팀제에서 과장도 팀장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옛날에 어떤 일이 있고 나서 회장님이 차장 이하는 절대 팀장 시키지 말라고 하셨대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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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9. 인연 19.11.24 504 13 5쪽
» 18. 초라한 퇴장 19.11.23 514 13 9쪽
17 17. 진상 19.11.21 504 12 7쪽
16 16. 갑질 19.11.18 506 11 6쪽
15 15. 배려와 동정 19.11.15 545 16 7쪽
14 14. 행복한 고민 19.11.13 533 13 5쪽
13 13. 몸통과 깃털 19.11.12 530 15 9쪽
12 12. 쓰레기 19.11.11 556 16 10쪽
11 11. 고래싸움. 19.11.10 566 12 7쪽
10 10. 수심가지(水深可知) 19.11.08 568 13 6쪽
9 9. 폭풍전야 19.11.08 572 13 5쪽
8 8. 입방정 19.11.07 609 13 6쪽
7 7. 싸가지 19.11.05 601 15 5쪽
6 6. 악연 19.11.04 633 17 6쪽
5 5. 갈등 19.11.03 670 14 8쪽
4 4. 신세계 19.11.03 698 14 3쪽
3 3. 처신 19.11.03 727 15 6쪽
2 2. 가시밭길 19.11.03 825 19 6쪽
1 1. 첫 출근 19.11.01 1,296 1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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